애가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박경리 다시 읽기 첫 번째 장편소설애수by. 박경리

 

읽은 날 : 2024.10.20.

 

박경리 선생은 단편소설 계산으로 데뷔를 한다. 이 데뷔 이야기가 좀 웃긴(?), ‘박경리라는 필명(본명은 박금이)도 본인의 동의 없이 김동리 선생이 지어준 모양이고(근데 뭐 계속 쓰신걸 보면 마음에 드셨나 보다.), 현대문학에 추천하고 작품을 게재할 때도 김동리 선생 독단으로 한 모양이다. 심지어 제목도 불안지대에서 계산이라고 맘대로 바꿔버렸다. 그 덕에 박경리(당시엔 박금이 씨. 하하) 선생은 자신의 글이 잡지에 게재된 줄도 모르고 있다가 원고료 받아가란 연락을 받고야 알았다니 말 다했지 뭐. 1955년의 일이다.

 

그렇게 얼떨결에 작가가 되어버린 박금이씨는 박경리란 이름으로 작품 활동을 계속 이어나간다. 초기에는 단편을 쓰다 점점 장편으로 옮겨가 어느 시기가 지나면 장편을 주로 쓰셨다.

 

박경리 하면 토지(물론 나도 토지로 박경리 선생을 처음 뵈었지.)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박경리 선생은 토지 말고도 정말 많은 글을 썼다. 토지가 첫 출간 되던 1969년 이전에도 이미 선생은 김약국의 딸들이나 시장과 전장, 파시등의 작품으로 초 인기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특히 김약국의 딸들(1962)시장과 전장(1964)은 그때로서는 정말로 드물게 전작 장편으로 출간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박경리 선생의 문학계 내 지위(?) 인기도를 짐작하게 한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소설들이 문예지 또는 신문연재 소설로 먼저 발표가 되고 반응이 좋으면 단행본으로 묶어내는 방식이었기에 단번에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전작 장편은 그대로 광고 문구가 될 정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유명한 장편들은 물론 나도 읽었다. 읽을만큼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나. 고작 네 권이더라고, 내가 읽은 박경리 선생의 장편이.

 

그러니까 일은 그렇게 된 거였다. 나남판 토지는 내게 이런 저런 애틋함을 주는 책인데다, 1권에 무려 박경리 선생의 사인까지 받아 둔(자랑질 맞따!!!!!!! 직접 뵙고 받았다! 그날 무려 식사까지 함께 하였다!) 책이기에 차마 처분하지는 못하나 아, 정말 그 수많은 오타에 편집 오류,(이게 너무 심해서 11쇄를 산 사람들은 교환을 해 주고도 그꼴이었다. 교환 받은 사람 접니다, .) 내 진짜 나남판 토지 편집자를 정말이지. “심한 욕, 심한 욕.” (김형국 나남 사장님! 제가 그래서 사장님이 쓰신 박경리 이야기도 안 삽니다. 화나서. 그래서, 토지 편집자는 짜르셨나요?)

 

하여간, 이미 있는 토지 전권을 두고 고작 오타 때문에 신간 다른 출판사판을 살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박경리 선생은 돌아가시고 무려 20년의 세월이 지나가 버린 거다. 나남판 토지 전권을 교정본 수준으로 만들면 뭐하나, 판권은 이미 마로니에로, 다시 다산북스로 넘어가 버렸는데. 그냥 새로 책을 사고 말자, 다산북스니까 이번엔 교정 예쁘게 잘 봤겠지, 싶어 살까말까 하던 차에, 봐 버린 거다. 다산북스의 토지 반 고흐 에디션을. 아 정말 다산북스 사장님, 이러깁니까, 진짜. 고흐도 정말 좋아하는 화가고 박경리 토지는 언제나 나의 일순위지만 아, 정말 왜 이러세요 사장님. , 제가, 명확히 눈에 보이는 오타는 욕할 수 있지만 음, 이처럼 감각과 센스에 관한 부분은 욕은 못하겠고, 그저 아. . . ... 그게 이뻐보이셨다니. 슬퍼요, 저는.

 

그래서 다시 급 선회해서 중고 책방을 들어갔다. 마로니에 북스 판이 그나마 좀 나아 보이니 그걸로 사자. 근데, , 나남판 꼴이면 어떡하지? 오타나 편집 부분에 있어선 그나마 솔출판사 판이 거의 완벽에 가까웠는데. 오래된 거지만 솔출판사판으로 사? 마로니에는 너무 낯선 출판사라 말이지. 하긴 뭐 오래된 출판사 나남이라고 별 수 있었니. 출판사 이름 믿고 사는 건 이제 안할래. 혼자 중얼중얼중얼중얼. 옆에서 남편은 사준대도 왜 못사냐고 다그치고.

 

실험 삼아 다른 책 몇 권을 사 보자 하고, 마로니에북스 판 박경리 장편 소설을 샀는데,



 

우와, 오와 마로니에 사장님, 박경리 팬 중의 팬을 자처하신다는 말씀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책을 어쩜 이렇게 이쁘게 뽑으셨나요. 책을 이렇게 이쁘게 뽑았는데, 판권은 또 왜 넘기셔가지고. 사장님이 판권 넘기니까 토지 고흐 혼종이 나오잖아요, 세상에 제가 본 중 제일 끔찍한 혼종의 하나였어요. 엉엉. (그나저나, 마로니에판 박경리 장편 시리즈, 책 너무 이쁘지 않습니까? 네, 이 사진은 자랑의 의도가 매우 다분합니다!!!)

 

그렇게 사 모으기 시작했다, 마로니에북스 판 박경리 장편소설. 눈에 보이는 족족 사서 모았더니 무려 열아홉권이나 된다. 그 중 내가 읽은 건 고작 네 권. 아니, 고작? 내가? 박경리 쌤 책을? 내가? 열 아홉 권 중 네 권이라고?

 

그래서 열심히 반성하고 박경리 다시 읽기 프로젝트를 계획한 지는 좀 됐다. 박경리의 장편을 출간 순서대로 읽어야지 하는. 그리고 이제야 그 1.

 

이 작품을 읽으려면 출간 시기와 저술 시기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이 작품은 1958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그리고 연애소설이다.

 

박경리의 인물은 의사(또는 한의사)가 자주 등장한다.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주인공 주변의 주요인물이거나 주인공의 친인척이거나 하는 식으로. 이 소설 애가의 주인공도 의사다. ‘의사라는 직업은 일정 수준 이상의 사회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고, 경제적 안정을 가질 수 있으며 독립적인 직업이다. 존엄을 다칠 일이 없다는 점에서 안전한 직업이다. 토지에서 서희가(박경리가) 기생의 딸이자 사생아라는 엄청난 핸디캡을 가진 봉순의 딸 양현에게 마련해주는 뒷배이자 보호막 역시 의사라는 직업이고 보면 박경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직업이 그것이었지 않을까 싶다. ‘의사그 자체가 아니라 존엄을 다치지 않을 수 있는 직업말이다. 존엄을, 자존을 다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하여서도 지식의 힘으로, 사회적 지위의 힘으로, 금전적으로 타인에 기대지 않고 최소한의 바닥은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인물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그 직업선택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박경리의 인물 중 의사(또는 한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다른 측면으로는 그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도 갖춰줘야할 만큼의 핸디캡을 지닌 존재라는 말도 되겠다. 토지의 양현(사생아, 기생딸)이나 박의사(바람난 아내를 둔 이혼남)가 그렇고, 김약국의 딸들에서 김약국(비상먹은 자의 자손)이 그렇듯 이소설의 등장인물들도 그렇다.

 

이 소설에는 온통 엇갈린 사랑을 하는 젊은 남녀가 등장한다. 민호를 사랑하는 진수, 진수를 사랑하는 민호, 민호를 사랑하는 설희, 설희를 사랑하는 상화, 상화를 사랑하는 영옥, 영옥의 친구 현회와 설희의 오빠 정규의 사랑은 쌍방이지만 현회는 유부녀에 무려 은사님의 아내요, 진수와 민호의 사랑 역시 쌍방이지만 진수는 천한 여자니까 선한 사람들 속에 낄 수 없는’(p.184) 양공주였다는 전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민호는 설희와 결혼을 한 유부남이 된다. 쌍방을 향하는 두 사랑이 당시의 시대적 기준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을 앞에 세우게 되는 것이다.

 

믿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박경리 선생은 연애담을 진짜로 잘 쓴다. 나는 토지를 20살부터 3-4년의 간격을 두고 재독하는 편인데 읽을 때마다 새삼 어라, 서희가 이때부터 길상이를 사랑했구나.’ 라고 깨닫거나 , 길상이가 서희를 진짜로 사랑했던 거네.’ 라고 믿게 되는 구절들을 발견하게 된다. 작가가 섬세하게 깔아놓은 복선과 서사를 허겁지겁 따라가느라 놓치게 된 구절을 다시 읽으며 건져올릴 땐 마치 길에 떨어진 내 금반지를 주워든 느낌이다. 자칫하면 잃어버릴 뻔 했던, 만약 잃어버렸으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싶은. 남의 것을 주운 것은 횡재지만 잃어버릴 뻔 한 내 것을 주워든 것은 안도다. 진짜, 이분 끝내준다, 싶은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이 때문이다.

 

박경리 선생의 첫 소설 애가에서 이미 그런 연애소설의 달인스런 풍모가 보인다. 1958년대의 고리타분한 상황, 억지스럽다 할만큼 복잡하게 꼬아놓은 등장인물들의 관계, 지금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하지 못할 남자의 정절과 여자의 정절에 대한 차이라든가 외도의 당당함, 남자가 바람 한번쯤 피울 수도 있으니, 라는 말이 위로가 되는 그 세상. 그 와중에도 인물들의 연애는 나름대로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박완서는 박경리 선생의 영결식장에서 장례위원장으로서 추도사를 읽으며 이런 말을 하였다. “선생님은 후배들이 평생, 그리고 대를 이어 자자손손 파 먹어도 파 먹어도 바닥나지 않을 거대하고 장엄한 문화유산을 남기셨다고. 맞다. 1880년대에 시작해 1945년에 끝나는 토지는 지금 읽어도 30년 전에 읽을 때도, 어느 구절하나 어느 인물하나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를 이어 자자손손 버려지지 않을 소설이다. 사실 얼마나 많은 소설들이 당대가 지나면 잊혀지거나 시대에 맞지 않아 버려지거나 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토지의 성취는 놀랍다. 그리고, 그런 토지의 성취를 기대하고 본다면, 아 박경리도 처음부터 달인은 아니었구나, 싶다. (박완서의 소설도 연대순으로 읽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난 아마도 이런 느낌이 좋아서 연대순으로 도장깨기 취미를 가지게 되었는지도.)

 

그런 한계와 인물의 평면성, 누구라도 충분히 짐작할만한 통속적인 결말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의 문장은 박경리스러운 섬세함이 이글이글 태동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박경리 장편 도장깨기를 하기 참 잘했다, 생각하는 하루.

 

ps. 이 책에서 이미 오타를 하나 발견해 버렸다. 마로니에북스 판 토지를 굳이 구할 필요는 없겠다고 혼자 씩씩대는 중이다. 아아아, 왜들 이러세요, 진짜.

 

2024.10.22.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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