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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그의 빛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9월
평점 :
‘표적을 빗나간 화살들이 끝내 명중한 자리들’ 『위대한 그의 빛』 by. 심윤경
읽은 날 : 2024. 10. 17
책의 띠지 문구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장편소설을 이렇게 정신없이 빠져들어 읽은 게 얼마 만인가.” 소설가 정이현의 말이다. 심윤경은 서사와 문장이 고루 빼어난 작가여서 이 문장 자체는 소설을 읽기도 전에 납득이 되었다. 그래, 심윤경의 소설이라면 그럴만하다.
소설의 서사는 한방에 휘몰아친다. ‘정신없이’ 빠져 읽을만한 소설이었다. 그리고 이 소설을 다 읽고 내려놓는 동시에 김영하가 번역한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도 연속해서 읽었다.
소설가는 각자의 강점을 가지게 마련인데, 심윤경은 “연애소설을 잘 쓴다는 말을 독자들에게도 심심찮게 듣는 입장”(김연수, 『소설가의 일』, 문학동네, 2014, p.143)이라는 김연수 만큼이나 연애담을 잘 쓴다. 물론 연애담만 잘 쓰는 작가는 아니고, 연애담‘도’ 잘 쓴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 소설은 누가봐도 어떻게 봐도, 인물의 관점에서든 사건의 관점에서든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의 오마주이지만 또한 심윤경의 소설로서 차별화 되어 있다. 남성 작가와 여성 작가의 차이가 소설 속 화자를 남성과 여성으로 바꾸어 놓았고, 거기에 작가의 특성이 추가 되어 닮은 듯 다른, 아니 오히려 닮은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차이점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소설은 동일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시작한다. 소설의 화자 닉 캐러웨이의 아버지가 그에게 남긴 경구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있지는 않다는 것을.”(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김영하 역, 문학동네, 2009, p.11) 는 너무도 유명해 식상하다 할 정도지만 심윤경은 이 장치를 고스란히 따라간다. “너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사람이 하는 일에는 다 제 나름 이유가 있는 거다.” (p.7) 물론 심윤경의 주인공(인가?) 이규아에게는 어머니가 남겨준 경구다. 개츠비와 데이지, 강재웅과 유연지의 관찰자로서 닉과 규아가 각자 아버지와 어머니가 남겨준 경구에 기대어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까지의 결말조차 심윤경은 섬세하게 피츠제럴드의 발자국을 따라 디딘다.
그러니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작가 심윤경은 아예 ‘대놓고’ 『위대한 개츠비』를 가져다 쓰기에 무엇이 어떻게 닮았는지를 말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이 부분은 그냥 즐기면 된다. 닮은 그림 찾기를 할 필요도, 그 닮은 그림 안에서 다른 그림 찾기를 할 필요도 없이 오홍, 같은 이야기가 1920년대의 미국과 2020년대의 한국이라는 배경에서는 이렇게 작동하게 되는구나, 라고. 다만 화자가 바뀌면서 개츠비와 닉의 관계와 재웅과 규아의 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오는 긴장, 거기에서 심윤경의 장점은 빛을 발한다. ‘연애소설’ 잘 쓰는 작가라니까.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면서 데이지에게 분노하지 않기란 어렵다. 사실은 개츠비를 사랑하기도 어렵다. 데이지에 대한 분노가 커져 갈수록 개츠비에 대한 동정도 커진다. 피츠제럴드의 소설에서 사랑이 끝난 폐허에 남겨진 것은 매번 개츠비였고, 거기서 독자의 개츠비에 대한 동정은 극에 달한다. 속물을 사랑하는 것은 괜찮다. 속물을 사랑하면 왜 안되는데? 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속물이 충분히 사랑스럽다면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제가 깔린다. 속물의 사랑도 진짜일 것이라는. 독자들이 데이지에게 가장 분노하는 지점은 여기다. 당신, 개츠비를 사랑하긴 했니?
심윤경은 그것을 과감하게 뒤집는다. 21세기 한강변에서, 사랑의 폐허에 남겨지는 건 매번 연지다. 개츠비는 5년이지만 강재웅은 무려 25년이다. 그야말로 전 생애를 다 바쳐 연지의 곁에 서기 위해 노력했다(고 주장한다). 사랑의 폐허에 남겨졌던 연지는 오히려 훌훌 털고 일어나 재웅이를 잊고(속물답게 말이다) 자신의 인생을 살아나간 것과는 달리 재웅은 25년의 단 한순간 조차 연지의 곁에 서기 위한 시간으로 보낸(것처럼 보인)다. 연지는 변명하지 않았고 핑계대지 않았다. 재웅의 삶이 온통 변명과 핑계로 점철되어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했던 것처럼, 재웅의 사랑도 그랬다. 무슨 말을 해도 결국 그의 사랑은 목표가 아니라 도구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번엔 재웅에게 묻게 되는 것이다. 너 정말 연지를 사랑하긴 했니?
세 번째로 말하거니와, 작가 심윤경은 대놓고 『위대한 개츠비』를 가지고 와서 쓴다. 그리고 전혀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 데이지에게 묻던 그 질문을 개츠비에게(강재웅 말고, 개츠비에게) 묻게 만든다. 당신, 정말 데이지를 사랑한 건 맞아? 강재웅이 그랬듯 ‘데이지를 사랑하는 나’에 도취되어 있었던 건 아니야?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아슬아슬 넘나들며 돈을 긁어모을 때, 그 불법의 핑계로 데이지를 쓴 건 아니고? 데이지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건 정말로 그녀가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속물이어서일까? 당신이 진짜로는 데이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데이지가 알았기 때문에 그랬던 거 아니야?
글의 제목 ‘표적을 빗나간 화살들이 끝내 명중한 자리들’ 이라는 표현은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한 소설가 김영하가 그 소설을 단 한 줄로 요약한 표현이다. 똘똘한 작가 김영하의 이 한 줄 요약은 이 소설에도 역시나 딱 맞아 떨어지기에 빌려서 쓴다.
이야기가 돌고 돌아 이쯤되면, 자, 진짜 속물은 누구지? 누가 누구를 사랑했고, 누가 누구를 이용한 거지? 개츠비와 강재웅은 뭐가 같고 뭐가 달라? 데이지는 속물이고 연지는 순정파고 진짜 그래? 라고 묻게 된다. 사고가 없었다면 연지는 강재웅의 손을 잡고 떠날 수 있었을까. 여기서 강재웅 앞에는 ‘쫄딱 망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하는데, 쫄딱 망한 강재웅과 연지 둘 중 누가 먼저 손을 놓을까.
읽은 직후에는 심윤경이 비틀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비트는 것에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느라 다시 이책 저책 뒤적이면서 느낀다. 진짜로 비틀지 않았고, 그래서 진짜로 안 비틀렸다고 볼 수도 있겠다고. 결국 김영하의 말대로 “난데없는 곳으로 날아가 비로소 제대로 꽂히는 것, 그것이 바로 문학이다.”(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김영하 역, 문학동네, 2009, p.242 역자후기)
정말 재미있게 읽은 소설. 참고로 말하건대, 위대한 개츠비를 읽지 않았어도, 전혀 상관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니까, 괜히 개츠비에 발목 잡히지 마시길.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볼 생각을 하는 건 그럴 수 있지만.
2024. 10. 18. by ashi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