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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26살부터 29살까지, 꼬박 4년간, 나는 대여섯명의 소년들의 국어 선생님이었다. 우연히 시작된 중3, 16살 남자 아이 대여섯명의 그룹과외는 꾸준히 이어져 대학 입시를 마치고나서야 끝이났다. 열여섯살부터 열아홉살까지, 그 나이대의 소년들은 청년과 소년이 혼재된 상태로 한없는 예민함과 지독한 둔감함이 엉망으로 뒤엉켜 있었다.
소년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은 흥미로웠다. 여자형제밖에 없는데다 여중 여고 출신인 나에게 그 전까지 소년이란, 내가 알지못하는사이 환상만을 잔뜩 가지게 된 괴 생명체와 비슷했다. 익스트림한 스포츠를 즐기고, 냄새를 잔뜩 풍기며, 말은 할 줄 아나 싶게 말을 안하고,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화를 내는 단순하기 그지 없는, 뭔가 인간 같기는 한데 동물 쪽에 더 가까워 보이는 뭐, 그런 존재였다. 나에게 그런 환상(?)을 가지게 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남자 형제를 가진 여중 여고 친구들의 하소연이었고.
그러다 내가 만난 16살 소년 여섯은, 16살 나의 여중 3학년 시기와 별 다를 것 없는 아이들이었다. 상냥해 보이는 눈을 가진 아이도 있었고, 음침한 표정의 아이도 있었지만, 스물 여섯이 봐도 열여섯의 아이들은 그냥 아이였다, 사실은, 성별이 거세된 '아기'라는 느낌이 훨씬 강했다. (음, 동네 분위기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얌전한 아이들이기는 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열일곱살이 되면서 아이들은 혼란스러워했다. 자신이 남자라는 것, 그것도 여자와 대비되는 남자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은 자신에게 무엇이 씌워지는지를 느끼는 듯 했다. 여자보다 용감해야 하고, 나중에 아내와 자식들을 부양해야 하니까 여자보다 공부도 잘 해야 했다. 혹시나 여자친구가 생기면 남자니까 당연히 돈도 많이 부담해야 하고, 혼자 돌아오는 밤길도 무섭지 않은 척 해야 했다. 무엇보다, 위로 따위는 필요없는, 씩씩하고 용감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은 그것자체로 짐이었다.
한때 아기 같았던 그 아이들은 어느새 '가오'를 잡으면서 소년이 되어갔다. 공부를 잘하거나 못하거나 착하거나 아니거나 순진하거나 발랑까졌거나 다 상관없이 그 아이들을 설명할 수 있는 단 한단어가 '가오' 였다. 그놈의 '가오'는 Y유전자에 별책부록도 아닌 합본부록으로 딸려오는 모양이었다. 열일곱살인 그 애들은 스물일곱살인 내 앞에서도 가오를 잡고 싶어했다. 가오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그애들은 남자고 나는 여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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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 스미스라는 여자가 쓴 시에 이런 대목이 있어.
재욱 형이 시를 읊기 시작했다.
-스스로는 강한데도 약한 척해야 하는 게 지겨운 여자가 한 명 있는 곳마다, 상처받기 쉽지만 강하게 보여야만 하는 게 피곤한 남자가 하나 있다. 항상 모든 걸 다 알아야 한다는 기대에 부담을 느끼는 소년 한 명이 있는 곳에, 자신의 지성을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지쳐버린 소녀가 하나 있다. 그리고.......
시는 술 한모금을 마신 뒤에 다시 이어졌다.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는 소리를 듣는게 지겨운 소녀 한 명마다, 자신의 연약하고 흐느끼는 듯한 감성을 숨겨야 하는 소년이 한 명 있다.
-p.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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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들부들, 열일곱 소년이 잡는 가오는 뭔가 애처로운데가 있었다. 한순간에 무너져 버릴 게 뻔해서도 그랬고, 스스로가 자신의 가오에 확신을 갖지 못해서도 그랬고, 자신이 왜 가오를 잡아야 하는지를 확신하지 못해서도 그랬다. 그 가오에 속아주면 끝까지 가오를 잡아야 할 그애들의 어깨가 안타까웠고, 가오 그만 잡지, 좀? 이라고 그 어깨를 두드려 주려 하면 자존심을 송두리째 침해받은 듯 펄펄 뛰어 어려웠다. 가오를 건드리지 않으며 위로를 해 준다는 건 고난이도의 기술이 필요한 분야였다.
그놈의 '가오'가 '갑빠'로 옮겨가면 그나마 다루기가 좀 낫더라는 게, 열여섯부터 열아홉까지, 그리고 다시, 그 아이들이 대학생과 군바리, 복학생이 되는 것을 간간히 지켜본 나의 경험담이고. 그리고, 올해 마흔을 찍으신 분을 데리고 살면서 보니 그놈의 '가오'는 평생을 잡고 사는, 몸 속에 y 유전자가 존재하는 한 계속 되는 것이더라는 거, 그리고, 가오를 잡는 한, 소년들은 죄다 위로가 필요하더라는 거. 그게 나의 결론이기도 하고.
다시, 소년의 이야기와 이 소설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청소년기의 우리가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가,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였다. 그리고 실제로 청소년기에 했던 대부분의 고민들을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정말 별 것도 아닌 것이었다. 그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아픔이었는데 어른이 된 지금 들여다보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는 그런 고민들이었다. 그런 일들 하나하나에 그리 울고 웃었다니 정말 대단한 열정이었다고밖에.
그런 대단한 열정에 감탄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대단한 열정으로 했던 그 많은 고민들, 그것들이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또한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아무리 하찮은 것들이었다고 해도, 당시의 나에게는 생사의 기로와 세상의 존폐위기와 맞먹는 것들이었던 것이지. 그것또한 진실.
이 책은 그 하찮은 것들에 대한 소년들의 고민을 보여준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한낱 '가오'로 보일 뿐인 그것이 소년에게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은희경은 놀랍도록 잘 그려낸다. 와. <새의 선물>에서의 진희와 이 소설 연우는 본질적으로 다른 인물로 느껴질 정도다. 은희경, 많이 컸구나!!!(이런 건방진 말이라니...;;;;)
보너스 트랙은 없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