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된 장난 마음이 자라는 나무 22
브리기테 블로벨 지음, 전은경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다 이해할 수 있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아니 오히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의 사람이란 극히 제한적인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내가 도저히 이해 못할 범주의 사람은 특정인에 대한 안티들이다. 그들은 주로 인터넷의 닉네임과 유동 아이피 뒤에 서식하고 있다.

물론 나도 푸른지붕 쥐색을 싫어하고, 수첩공주는 지나가다 뉴스에서만 봐도 밥맛이 뚝 떨어지며, 아무 이유없이 주는 거 없이 싫은 연예인이 있다. (하긴, 나는 언젠가 "주는 거 없이 싫은" 감정은 질투의 다른 표현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렇다고 내가 노홍철을 질투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흠.) 정치인은 차치해두고, 정치인을 싫어한다는 감정은 우리의 현실 생활에 너무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기 때문에 넣어둬 넣어둬 라고 대충 무시해서는 안된다. 싫다면 싫다는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해야한다고 본다. 더 좋은 방법은 정치인 누군가에 대한 지지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겠지만. 어떤 의미에서도 안티로 뜻을 이루기보다는 지지로 뜻을 이루는 편이 좋다. 

차설, 연예인의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면, 나는 몇몇 연예인이 고정으로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지 않는다. 버라이어티 쇼에 그 연예인이 나온다면 채널을 돌린다. 신문 기사에 그들의 기사가 나와도 보지 않고, 정확히는 그들이 뭔 짓을 하고 사는지 관심을 안둔다. 두기가 싫다. 나쁜짓을 했다는 신문기사에 그래 넌 내가 상상한 딱 그만큼이구나, 라고 고개를 끄덕일 정도의 열정도 없다.싫어하니까, 그에 관한 기사를 읽거나 소식을 듣는 것도 고역이다. 착한 일을 했다는 소식에도 별반 관심을 두지 않지만, 그래도 걔 의외로 괜찮은 놈이더라?(이게 언론플레이일지라도 말이다.)라는 말에는 흠, 그래? 라고 마음을 돌려 싫어했던 마음을 지울 정도의 아량도 있다. 오오오. 나 너무 착한거 있지. 

그래서 나는 잘 이해가 안되는 것이다. 싫다, 싫다 외치면서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추적하여 하나하나 꼬투리 잡아 욕을 하고 그걸 글로 써서 인터넷에 올리기까지 하는 그 정열을. 이건 마치... 얼핏봐서는 초등학교 남자아이들이 관심을 괴롭힘으로 표현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구. 물론, 초등학교 남자아이들의 괴롭힘은 애교스러운데가 있고, 인터넷 안티의 행위는 애교라고는 조금도 없다.  

부처님이 그랬다는데. 사랑하지 말아라. 보지 못해 괴롭다. 미워하지 말아라, 봐서 괴롭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는 괴로움은 그리움이라는 감미가 섞인다. 하지만 미워하는 사람을 봐서 괴로운 감정은, 이건. 그야말로 순수한 괴로움이잖아.

그렇게 싫으면 보지 않아야 정상아닌가.  

한때 내가 열심히 들락였던 여성 커뮤니티의 익명게시판에는 몇몇 연예인에 대한 끈질기고 지치지도 않는 안티가 있었다. 그들의 레파토리는 변하지도 않아서, 닉네임조차 보이지 않는 익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 그때 그 사람이구나,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정도의 정열적인 미움은, 사적인 원한관계가 있어야만 생길수 있지 않을까 싶을만큼 질기고 집요한 욕질이었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도 보통의 에너지로는 감당이 안되는 일인데.  

이 이야기를 돌려서, 안티질을 하는 사람을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안티의 대상이 되는 누군가를 중심에 두고, 관점을 바꾸어보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제3자의 입장에서 흠, 이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군, 하고 power off 하고 끝낼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안티를 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라고 넘어가야 할 것이 아니라 안티를 당하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책은 그 안티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이야기다.

누군가가 나를 미워한다. 그런데 나를 미워하는 그 사람은 허상이다. MR. blog씨 같은 완전한 제로는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한 실체도 아닌, 일종의 그림자나 입김같은 실체다. 있기는 있으나 맞붙어 싸울수가 없다. 형체를 가진 나는 상처를 입지만 그림자는 상처입지 않는다. 상처입힐 수 없다. 미움을 받는 나는 온전한 실체인데, 나를 미워하는 너는 그림자인 것이다. 물론 캐고들어가면 본체를 찾을 수 있겠지. 하지만 찾기까지란 너무 지난한 일이고, 너를 찾기 전에 나는 이미 상처입고 있다.  

 수순은 똑같다. 처음에는 분노하고, 그 그림자를 만든 몸뚱아리를 찾으려 한다.  

   
 

이들 중에 누가 '강철 심장 왕자' 일까? 흰 셔츠에 빨간 나비넥타이를 매고 뛰어다니는 레나르트인가? '섹스 피스톨'은 또 누굴까? 남자아이일까, 아니면 여자아이일까?
- p. 192 

 
   

그림자의 실체찾기는 당연히 실패로 끝나고, 다음 수순은 미움의 원인 찾기와 제거로 들어간다. 이쯤되면 이미 집요한 공격으로 자아는 파괴되어 판단이 흐려졌다고 보아야 한다. 안티의 원인은 언제나 안티쪽에 있다. 그 원인을 이쪽에서 찾으려고 노력하니 매번 틀린 답만 내놓게 되는 것이다.  

   
 

혹시 좋은 옷을 입으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 
오로지 비싸고 멋진 옷을 입어야만 사람 취급을 받는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 p. 218 

 
   

그 불가능한 노력은 얼마나 눈물겨운가. 하지만 밟아도 밟아도 밟히지 않는 존재에 대한 증오는 점점더 커져가게 마련이다. 인간이란, 집단의 가면 뒤에서는 얼마나 어리석고 잔인한 존재인가.  

   
 

이런식의 정신적인 폭력은 소량의 독이 담긴 음식을 매일 먹는 것과 같다. 한두 번은 몸이 정화해 낼 수 있다. 그러나 독이 오랫동안 몸속에 쌓이면 나중에는 쓰러질 수밖에 없다.
- p. 242 

 
   

이런식의 집단의 괴롭힘은 한도가 없다. 마치 컴퓨터 슈팅게임 처럼, 한단계를 지나면 또 한단계가 나오고, 괴롭힘의 대상이 강해질수록 강도도 점점 세어진다. 그 게임의 끝을 보려면 대상이 끝장이 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공격에 대한 죄책감은 모두가 함께 나누어 가진다. 마치, 군대 총살형에서 실탄은 단 한방이지만 아홉명의 사수가 총을 들고 누구의 총에 실탄이 들어있는지는 누구도 모르는 것처럼. 아홉명 모두가 내 총은 공포탄이었을거라고 굳게 믿는다. 처음엔 그저 험담이었고, 그 다음엔 가짜 합성사진이었으며, 마지막은 실제의 사진이었다. 누구나, 나는 그저 한줄 답글을 달았을 뿐이고, 나는 그저 침묵했을 뿐이며, 나는 약간 웃을 뿐이었다. 나의 책임은 딱 거기까지라고 믿는다.   

그리고 주인공 스베트라나는 정말로 끝장이 난다. 그리고, 아마도. 스베트라나가 끝장이 난 것에 대한 책임은 누구도 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저 사진을 올렸고, 나는 그저 웃었고, 나는 그저 답글 한줄, 나는 그저 외면했을 뿐. 그 이상의 책임을 묻는 것은 나도 억울하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가슴이 답답해온다. 물론 이 책은, 청소년 소설답게 해피엔딩을 보여준다. 우리의 똑똑한 스베트라나는 건강하게 다시 일어섰고, 다시는 누구도 그녀를 괴롭힐 수 없겠지만, 제2 제3의 스베트라나는 어디에나 존재할 것이고 그 중 누군가는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데 성공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진실 언니처럼.  

난 정말. 궁금한 게. 그들의 심리다. 누군가를 그렇게 집요하게까지 따라와 괴롭힐 수 있는. 하지만 책은 언제나 피해자의 시선에서만 쓰인다. 왤까. 누군가 가해자의 입장에서 글을 한번 써 봐 줬으면 좋겠다. 읽고 좀 이해라도 해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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