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의 노래 - 칼의 노래 100만부 기념 사은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읽은 날 : 2004. 3. 3

칼의 노래를 처음 읽었던 날을 기억한다.

은빛 장정이 몹시 예뻐 그날 들어왔던 책을 정리하다 말고 책장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읽었던 책. 책을 다 읽고 고개를 들었을 때 산중의 짧은 겨울해는 이미 져 버린 뒤였다. 그 화려할만큼 아름다운 문체, 낯선 이름의 작가 김 훈.

그로부터 꼭 2년, 김훈은 더 이상 나에게 낯선 이름이 아니다.

이 책은 편집 순서상 전작 『칼의 노래』와 유사한 면이 많다.
칼의 노래 속표지 다음 장이 이순신의 한시 《한산도 야음》으로 시작되는 것처럼, 이 책의 속표지 다음 장은 삼국유사 중 우륵의 가야금 곡조에 관련된 기록을 옮겨 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작가는 『칼의 노래』에서 무인 이순신의 삶을 통한 조선 중기의 세상을 ‘노래’하였듯, 이 책에서는 예인(藝人) 우륵을 통해 진흥왕 무렵의 신라와 가야를 ‘노래’하였다. 김훈에게는 무인도 예인도 같은 사람일 뿐. (“칼을 들여다보는 일과 악기를 들여다보는 일이 나에게는 같았다.” 『현의 노래』, 김 훈, 생각의 나무, 2004, 서문 중에서)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에 보면 독립운동을 하는 사팔뜨기 강쇠의 이종사촌 짝쇠라는 인물이 나온다. 이 인물이 또 걸작인 게

「가령 너 지금 어디 갔다오느냐고 물을라치면,
“그놈의 버르지(벌레)를 씹었더마는,”
하는 식의 대답인데 배밭에 가서 배 한 개를 얻어먹었는데 배벌레 씹은 것이 기억에서 젤 뚜렷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어본 사람 편에서 보면 동문서답인 것이다.
『토지』, 박경리, 나남출판, 2002, 3부1권(9), p.105」


이런 식이다. 앞뒤, 양옆까지 다 잘라먹고 그 순간의 가장 강렬했던 어떤 것을 쑥 꺼내놓는 것이다. 타인에게는 동문서답일지라도 자기자신에게는 아니다. 자신의 머리 속에서는 앞뒤, 양 옆의 이야기가 완벽하게 남아있으므로.

때로, 김훈의 글을 읽다보면 토지의 짝쇠가 생각난다.

「눈이 녹은 뒤 충남 아산 현충사, 이순신 장군의 사당에 여러 번 갔었다. 거기에, 장군의 큰 칼이 걸려 있었다. 차가운 칼이었다. 혼자서 하루 종일 장군의 칼을 들여다보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칼의 노래 서문 중에서」
「2003년 1월부터 10월까지 나는 가끔씩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안의 악기박물관을 기웃거리면서 소일하였다. 관람객이 없어 늘 나 혼자였다.
별 할 일도 없는 나는 오랫동안 악기를 들여다보다가 혼자서 밥을 사먹곤 했다.
-현의 노래 서문 중에서」


창작의 모티프가 되어 준 칼과 악기를 하루 종일 혼자서 들여다보는 그의 머릿속에는 분명 앞뒤, 양 옆의 이야기가 모두 들어있는 완벽한 이야기가 하나 완성되었을 것이다. 그는 그 완벽한 이야기를 이리저리 굴리다 “기억에서 젤 뚜렷한” 부분만을 뚝 잘라 소설로 만들어 내었다. 그래서 그의 글은 뜬금없는 동문서답이 되는데, 뜬금없는 동문서답이어서 아름답다.

김훈의 글은 단촐하다.
인물에 대해서도 사건에 대해서도 그는 중언부언하지 않는다. 그 인물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요소 중에서 “젤 뚜렷한” 부분만 뚝 잘라 역시나 앞뒤, 양 옆이 뚝 잘린 사건 속에 던져 넣는다. 인물의 외면과 과거와 미래와 성격, 모든 것은 뚝 잘려 나가고 없고, 오직 그 상황에서 가장 중요할 고뇌, 감정 그런 것 들 만이 동문서답마냥 파닥파닥 살아 날뛴다. 결코 동문서답이 아닌 상태로.

#쓰다보니 늘, 김훈의 글에 대한 리뷰는 죄 문체론이다. ㅡㅡ;;;

2004. 4. 24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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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ek 2009-11-25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체가 성립되지 않으면 한 줄도 쓸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그 문체에 힘이 있지요. 김훈에게 있어서 문체란 "고통스런 글쓰기의 조건"이라 했으니... 잘 읽었습니다. ^.^

아시마 2009-11-25 15:03   좋아요 0 | URL
네. 굉장히 특이한 문체였어요, 처음 읽었을 땐. 김훈의 글로서는 처음읽었던 <칼의 노래>에서의 충격은 잊을수가 없죠. 그리고 읽은 사람들을 전염시키는 문체이기도 하구요. 헌데 요즘은 김훈의 글을 많이 읽어서 그 문체에 익숙해진 건지, 김훈류의 글줄이 많아진건지는 모르겠지만 예전만큼 충격적일만큼 아름답다고 느껴지진 않아요.
그대신 요즘은, 문체가 김훈의 걸림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끔은 들어요. 매너리즘이란 말이 아니라, 문체 외에도 인물이라든가 사건이라든가 구성들 역시 훌륭한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문체만을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김훈의 사유에서 나오는 사람들(특히 남자들)은 굉장히 독특하고 분명 생각거리를 던져주는데도, 문체의 화려함에 눌리죠.

마노아 2009-11-25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마님, 근데 ashima는 무슨 뜻일까요? '아시마'라고 읽는 게 맞나요? 소리내어 읽어보면 발음이 예뻐요!

아시마 2009-11-25 15:59   좋아요 0 | URL
중국 고산부족의 설화 <아시마>에서 따온 이름인데(아마 티벳쪽과 관련있는 것 같아요.) 인도쪽에서는 흔한 이름 같아요. 게다가 무려 성경에까지 나오는 이름이라는... ㅎㅎㅎ ashima로 검색해보면 인도의 디자이너가 나오죠. 성경구절과 함께. 뭔가 대단히 성스러우면서도 속스러운 이름 이잖아요? (막 혼자 자화자찬에 빠져있다. ㅎㅎ)
중국 고산부족의 설화에서 "아시마"는 향기로운 여자 라는 뜻이라고 하구요,
줌파 라히리의 <이름 뒤에 숨은 사랑>에서는 벵골이름 "아시마"는 경계를 모르는, 가능성이 무한한 여자라는 뜻이래요.

그나저나, 마노아는, 레 마누와 리할 사이에서 태어난 그 레 마노아(마누아?)와 연결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