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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박경리 연구자, 정확히는 소설 『토지』연구자들이 세어본 바, 토지에는 약 600여명의 인물이 등장한다고 한다. 등장인물의 수가 워낙 많아 토지 전집엔 반드시 인물 사전이 딸려나온다. 2002년 나남판이 나올때부터 부록으로 인물 사전을 내더니 2012년 마로니에북스판에도 2023년 다산북스판에도 인물 사전이 부록으로 딸려 나온다. (사실 뭐 그럴거까지야, 싶기는 하다. 전질에 따라와 책장에 꽂혀있기는 하나 한 번도 펼쳐본 적이 없다. 생각난 김에 한번 볼까.)
워낙 소설의 길이가 길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박경리는 『토지』의 인물 하나하나에 섬세한 서사를 부여하고 성격과 특징을 주어 그 인물이 가진 개성이 사건을 풀어 나가는 데 영향을 주게 만든다. 이용은 이용이기 때문에 임이네를 버리지 못했고, 유인실은 유인실이기 때문에 오가다와 결합하지 못했다. 그 많은 사건이 일어나는 이유를 알려면 인물 사전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전형적이지 않은 인물들이 나오니까.
이 소설은 토지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아주 단출하다. 주인공 최인희와 인희의 친구 김은옥, 아버지 최진구와 서모 장연실, 남편 이성태와 인희의 연인이자 구세주가 될 강진호. 은옥의 연인 이정식과 이광민. 두 사람을 더 꼽자면 이성태의 딸 선자와 그녀의 과외선생 윤영철 정도. 아, 강진호의 약혼녀 이성자도 있다.(별로 힘도 못 쓰는 악역 둘의 이름이 이선자와 이성자라니 아이고 선생님 참 애정이 없으신만큼 성의도 없으셨군요.) 이렇게 꼽아보면 260페이지 남짓한 소설에 등장인물이 결코 적은 수가 아닌데 등장인물이 별로 없다고 느껴진다. 그건 각각의 등장인물이 자신의 자리에서 아주 충실하게 주어진 배역대로만 움직이는 사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서사도 없고 개성도 없다. 악역 이성태는 악역답게 충실하다 느껴질 정도로 악역이 해야 할 일들을 열심히 한다. 서모 장연실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최진구 역시 유약하고 어리석은 존재로서의 아버지로 존재할 뿐이고. 너무도 전형적이라 일어나는 사건들조차 인물만큼 클리셰cliché 범벅이다.
그러나. 식상하기는 해도 재미 자체는 보장되는 게 클리셰인 법. 당연한 거 아닌가? 맛있으니 자꾸 써먹는 거다. 그리고 이 클리셰를 박경리가 그 출중한 글솜씨로 버무리면 통속소설이라 던져버리기 미안해지는 이런 작품이 튀어나온다. 어머, 선생님, 선생님은 어쩜 통속소설도 잘 쓰세요!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최인희의 행보는 2024년의 시각으로 읽으면 속터져 죽을만큼 답답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경리의 다른 여주인공들처럼 박경리를 닮은 구석이 있다.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이다. 자신의 생활을 자신이 꾸려나가려는 경제적인 자립, 그것을 통한 자존의 성취에 대한 추구는 박경리의 여주인공들을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자세인 동시에 박경리가 평생 동안 추구해 온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박경리의 소설이 통속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를 뛰어넘는 원동력은 여기서 나온다. 속터져 죽을 만큼 답답한 인희를 끝까지 응원하고 아이고, 이 둘이 잘 되어야 할 텐데, 맺어져야 할텐데라 안달하며 다음장, 다음장을 넘기게 하는 힘은 인희가 끝까지 자신의 자립과 자존을 잃지 않으려 애쓰기 때문이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응원해야지. 싶은.
소설은 박경리의 소설치고는 드물게 꽉닫힌 해피엔딩으로 끝이 난다. 주인공 커플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을 열심히 도와준 조연 커플도 역시나 해피엔딩이다. 심지어 악역은 그에 걸맞는 응징까지 받으니 오, 이건 정말 박경리로서는 드물디 드문 결말이다.
주인공이 아무리 답답해도 사건의 전개가 빠르고 남자주인공이 박력있는 뜻밖의 행동파라,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재미있는 소설이다. 박경리 선생이 애가에서 토지로 넘어가는 길을 제대로 잘 찾아가고 있는 느낌. 아. 도장깨기는 이래서 재미지지. 다음 책으로 고고.
2024.11.13. by ashima
ps. 아참, 마로니에 사장님. 이 책에서도 오타 난무인거 아시나요? p.61 한 페이지 안에 두개예요. '부서러기->부스러기' '하던대요->하던데요' 책 진짜 이쁜데, 슬퍼요. 에혀. 다산사장님은 오타 안내셨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