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볼 - Moneyball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를 보기 전에 스포츠 영화에 실화라니...게다가 할리우드에서 만들었으니 얼마쯤은 지레짐작했다. 결국 그저그런 휴먼 드라마겠거니하고. 그러나 야구는 소재일 뿐이고 자본주의에 대한 메타포를 뿜어내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야구사를 알면 좀 더 흥미롭겠지만 야구사는 물론 야구 룰을 몰라도 이 영화를 감상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이 영화는 흔한 감동의 스포츠 드라마가 아니다.  

1. 영화를 보면서 가장 놀랐던 점은 선수들을 트레이드하는 모습과 그 과정이었다. 어제까지 보스턴 레드 삭스에서 뛰던 선수가 다음 날엔 오클랜드 아틀랜틱스 유니폼을 입을 수 있다. 선수가 어떤 구단에 속할지 선수 스카우터한테 일방적 통보를 받는다. 구단의 단장general manager은 팀을 하나의 생산라인으로 보고 선수들은 주요 부속품으로 본다. 선수들이 연봉 만큼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면 부진한 기량을 감가삼각비처럼 팀을 운영하는 원가에 포함시켜 계산한다. 선수의 수명은, 경제학적 원리에 따라 신제품이 될 수도 있고 출시되자마자 중고시장으로 직행할 수도 있다. 일반적 노동시장 보다 더 가혹한 것처럼 느껴졌다.   

2. 이 영화는 야구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팀의 이야기가 아니라 빌리 빈이라는 한 개인한테 초점이 맞춰진다. 빌리 빈은, 유망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거액 연봉을 받고 프로팀에 스카우트 된다. 야구의 승리를 9회말까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듯이, 빌리 빈의 잠재력은 그야말로 잠재력으로 끝난다. 그의 잠재력의 가치를 기꺼이 사고자했던 구단들은 이제 그의 가치를 믿지않는다. 시장에서 상품의 잠재적 가치는 가시화될 때 그 상품성이 있다. 빌리 빈은 시장 경제의 논리에 상처를 입었지만 시장 경제의 논리를 직접 야구계에서 실험한다. 모두가 승률에 집착해 승률을 올리는데 필요한 비용을 간과하는 점을 꿰뚫는다. 선수의 장점을 정확한 수치로 기록해 모든 선수를 확률로 시뮬레이션한 후 포지션을 맡긴다. 확률의 정확성을 믿을지 말지는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의 몫이다. 영화 중간에 나온 해설자의 말처럼, "야구는 숫자로 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한다. 숫자가 할 수 없는 걸 해야한다." 이 말은 사실이기도 하고 사실이 아니기도 하다. 경제 이론이나 확률은 많은 데이터의 통계로 사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로 미래를 예측할 때 비논리적 주관성이 개입돼야한다. 그러므로 미래 승률 예측은 아무리 예일대 경제학 출신의 머리도 무기력해보일 수 있다.  

3. 이런 이론적 토대를 밀고 나가는데는 꿋꿋한 신념과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 빌리 빈이 자신의 과거 트라우마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불굴의 신념을 마주하게 된다. 과거 시장에서 개발비용을 아끼지 않았던 최상품이었다가 출시된 후 별 반응을 얻지 못한 그저그런 상품으로 바뀐 과정에서 자본의 상징적 가치를 깨닫는다. 가치는 함께 원하는 이가 있을 때 생긴다. 아마존 밀림에 사는 부족한테 5만원권 지폐 다발을 아무리 많이 가져다줘도 소용없듯이 가치는 관계에서 파생된다. 빌리 빈은, 야구 시장에서 무의 관계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무시를 받지만 신념으로 관계를 이루어낸다. 결국 그가 자신의 가치를 올리는 걸 목적으로 하지 않았더라도 경영비 절감을 위해, 시장은 그를  원한다.  

4. 그의 선택은? 여기서도 영화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야구단장으로서 몸 값이 야구사상 최대로 치솟았지만 그는 시장에 팔리는 상품이 되길 거부한다. 그의 마음은, 영화에서 표현되는데, 최상품 가치를 계속 유지해야하는 압력을 피하고 싶어한다. 그럼 그는 루저일까. 영화는 12살 난 빌리 빈의 딸이 수줍게 부르는 노래로 끝을 낸다. "아빠는 루저...그저 쇼를 즐겨요", 하고. 시장에는 최상품의 물건만 나와있다면 소비자의 선택 폭은 줄어들어 시장은 위축될 것이다. 허접한 물건들도 있고 중간인 물건도 있을 때 최상품은 그 가치가 올라갈 것이다. 소비는 활성화되고. 빌리 빈의 역할이란 바로 이런 야구 시장 활성화를 위한 것이자 세상에 많은 루저들이 꼭 필요한 이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머니볼 - Moneyball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자본주의의 한 희생양이, 자본주의 이론으로 그 트라우마를 극복해가는 과정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트리 오브 라이프 - The Tree Of Lif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어렸을 때, 과학관을 갔을 때 어떤 웅장함을 느꼈다. 사방은 하얀 벽이고 둥근 돔 천장을 올려다 보는 자세로 앉았다. 불은 꺼지고 둥근 돔 때문에 소리는 울렸다. 스피커에서는 에코 가득한 고요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곧 별자리들이 둥근 천장에 등장했고 슬라이드 필름이 바뀔 때마다 내가 돌고 있는 환각을 체험했는데 불이 켜지니 초라한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웅장함은 물리적 장치들과 분위기에 압도돼서 겪었던 것이지 진짜 웅장함이 아니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장엄함과 숭고함을 느꼈다. 그런데 이 장엄과 숭고함이 기분 좋은 느낌이 아니라 불쾌했다. 장엄하고 숭고한 영화를 보고 왜 불쾌했나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리고는 어릴 시절 기억 속에서 만들어진 장엄함을 찾아냈다. 

영화는 분명히 범작은 아니다. 시종일관 압도하는 아우라가 있는데 이 실체가, 나는 마뜩잖다. 그 이유는 많은 기술적 조작 탓이다. 

첫째, 이 영화의 웅장함을 만드는데 카메라 움직임의 힘이 크다. 사소한 장면도 카메라는 일반적 방법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가령, 손을 잡는 일상적 장면도 빠르게 카메라가 줌인으로 달려들어와서 클로즈업을 잠깐 해주고 바로 위로 트랙 아웃해버린다. 화면에서 눈이 포착하는 건 손을 잡는 행위나 손의 실체보다는 카메라가 훑고 지나가는 잔상이다. 거의 모든 피사체들을 줌인과 아웃을 빠르게 사용해서 왜곡으로 인한 착시를 만든다. 카메라의 렌즈는, 어떤 한 절대자의 시선처럼 느껴진다. 이 절대자같은 시선으로 카메라는 사람, 풍경을 바람처럼 스치며 아래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자유자재로 본다. 근데 이게 이상한 게 보통은, 내 시선이 카메라 렌즈와 일치해서 프레임을 지배하는 체험이 일어나야 하는데 이 영화는 카메라의 렌즈로 프레임이 관찰당하는 느낌이 묘하게 든다. 

둘째, 음악의 과다 사용이다. 이 영화에 사용된 음악은, 아주 아주 좋다. 눈을 감고 음악만 들어도 경건하고 무언가 마음이 일렁일 정도로 흡입력이 있다. 조용하고 묵상적이며 그래서 종교음악 같기도 하다. 엄청난 파워를 가진 이미지들 뒤로 흘러나오는 음악의 힘은 폭발적이고 내내 집중하게 하는 힘을 지녔다. 영화에서 음악은 양날의 검이다. 음악으로 감정을 움직이는 영화는 비겁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셋째, 메시지가 너무 설득적이다.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가정에 한 아이의 죽음이 닥친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고통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아이 어머니는 "당신은 어디계시나요? 대답해주세요"하면서 20여분 동안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볼 수 있는 황홀한 이미지들이 군무를 춘다. 빅뱅부터 공룡 시대를 거쳐 바다와 지상의 만물들이 생명을 얻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대체 저런 이미지에 대한 상상력의 원천은 어디일까, 궁금할 정도다. 죽음과 탄생을 동일시하고 원죄 혹은 속세의 삶에 대한 구원을 지향하는 쪽으로 영화는 결론을 내버린다. 마지막 장면은 환상적이며 이런 메시지를 응축하고 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합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불멸로 이르는 낙원처럼 빛으로 넘쳐나고 땅도 하얗다. 사람들은 웃으며 바람결에 따라 발걸음을 옮겨 마치 기쁨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모든 장치들이 내겐 너무 설득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아주 엄청난 영화지만 감동보다는 조작된 감동을 강요하는 것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게다가 난 내세에 대한 열망이나 환상이 없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 사과 나무를 심겠다는 말처럼 자신의 일을 하는 게 죽음을 대하는 자세라고 믿는 편이다. 우주의 전체적 흐름이나 알수 없는 초자연적 힘은 분명히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많은 부분이 절대적 힘이 아니라 개척 가능하며, 인생에서 마주치게 되는 시련이나 크고 작은 선택들도 자신한테서 비롯된다고 여기는 편이다.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힘은 있지만 화해나 용서같은 정서적 문제는 모두 각자의 그릇이 있고 그 그릇에 뭘 담을지는 자신이 결정한다고 믿는다. 이런 내게, 이 영화는 지나치게 숭고해서 반감이 들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트리 오브 라이프 - The Tree Of Lif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목사님 설교처럼 설득하려 하는 영화, 그래서 반감이 드는 영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스트리스 - Restles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거스 반 산트 님의 영화다. 거스 반 산트 감독은 잡히지 않은 심리를 포착해서 구체화하는데 능하다. 구글 검색으로 몇 건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즉흥적이다. 코엔 형제가 쓴 시나리오를 보면 빛의 각도까지 이미 설정한 채 촬영하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게리>를 제작한 동기를 보면, 옆 집에 벤 애플렉이 살고 맷 데이먼은 자주 자기 집에 놀러왔다고 한다. 그래서 함께 영화를 찍게 됐다고. 거스 반 산트 감독한테 나름의 경애심을 지니고 있던 터라 영화 제작 동기를 읽고 나니 살짝 허무해지기도 했다. 비장한 일상이나 감정보다는 세 사람이 수다 떨다가 시나리오 쓰고 촬영한 영화라니!

사실, 모든 결과가 구체적이어서 그렇지 모든 일은 시작 단계에서는 즉흥적이고 추상적일 수도 있다. 우리가 결과 지향적이라 과정도 계획적일거라고 단정해버려서 오해를 하는 것일 뿐.. 이 영화도 NYU 학생 시나리오로 작업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 뭐랄까..영화를 보면서 내가 기대하고 갔던 산트 님의 감수성이 아주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어쩐지 산트 님이 잘 다루는 근원적 고통보다는 순정만화처럼 고통이며 행복이 추상이 아닌 피상적으로 표현된다. 그렇다고 영화가 형편 없는 건 결코 아니다. 신파로 흐를 수 있는 서사를 어떤 영화적 장치들로 극복해 내는지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결론은 거스 반 산트 감독은 어떤 이야기도 영화로 만들 수 있는 초능력자시다. ㅎ 

영화 이야기를 하면,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소년이 있다. 소년은 학교도 그만두고 트라우마를 간직한 채 유령과 소통하며 지내다 어느 날 한 소녀를 만난다.  소녀는 뇌 종양이 재발해 살 날이 3개월 밖에 안 남았다. 소년 소녀는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자체 발광하는 나이인데 각자의 아픔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조금 다르다. 소년이 칩거한다면 소녀는 밖으로 적극적으로 나선다. 아주 강렬하고 애틋한 사랑으로 서로는 조금씩 변한다.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잊고 상처에 딱지가 생겨 단단한 새살이 돋아난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어도 추억만은 마음 속에 남아 미소짓는다는....이런 이야기인데 두 배우가 정말 만화 속 주인공들처럼 늘씬하고 아름답다. 아쉬운 건 느낌은 없고 아름다움만 남는 영화라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