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의 생각 - 우리가 원하는 대한민국의 미래 지도
안철수 지음, 제정임 엮음 / 김영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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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출간하자마자 주문했고 배송이 늦어져 힐링 캠프를 먼저 봤다. 힐링 캠프를 보고 나니 더 책이 궁금했는데 세 번의 미배송을 신고한 후 결국 퀵으로, 책은 아주 어렵게, 화요일 저녁에야 내 손에 들어왔다. 이 책 탈고 후 힐링 차원에서 힐링 캠프에 나왔다고 했는데 이 책의 많은 요점들을 힐링 캠프에서 말했다. 책이 궁금하신 분들은 사서 읽으시고, 안철수 님은 출마를 선언하셔야한다. 이 책이 대선 출마 결정을 위한 출사표라고 했는데 대한민국에, 현재 이 만큼 존경할 수 있는 인물이 있나, 싶다. 그의 개인적 명예를 위해선 그는 출마를 하지 않는 게 옳다고 믿지만 안철수가 집권하는 대한민국에서 살아보고 싶다.

 

"안철수식 정치"란 말까지 등장할 정도로, 그가 원하든 원치않든, 정치권에 위협적 존재로 다가선다. 정치인의 자질을 두고 많은 전문가들이 설왕설래하는데 정치인의 자질에 대해 좀 끼적일테다.

 

먼저 정치란 뭔가. 우리말 사전에는 "정부를 운영하는 일"이라고 나와있지만 영영사전을 보면 "권력을 얻기 위해 음모를 포함한 모든 행위"라고 적혀있다. 정치인들이 말하는 정치 개념이란 영영 사전의 개념을 내포하는 거 같다. 나꼼수에 홍준표가 나왔을 때, "안철수와 악수하는 순간 이 사람의 손은 더러운 정치판에 있을 정치인의 손이 아니라 학자의 손"이라고 했다. 이 말은 정치권이 일삼는 음모를 견딜 수 없는 영혼이란 말로 나는 해석했다. 우리는 왜 정치, 정치인을 존경은 커녕 혐오하는가. 지능 높은 협잡꾼이란 생각이 뇌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탓이다. 이는 정치권이 오랜 기간 보여준 왜곡된 가치, 혹은 세계관 때문이다.

 

안철수의 출마를 반대하는 전문가들은 그의 검증되지 않은 정치력을 운운한다. 기업을 운영하는 일과 국가를 운영하는 일은 정말 많이 다르다. 현재 우리는 누구보다 그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국가는 곧 기업이라는 마인드의 소유자를 대통령으로 뽑아 놨더니 나라를 공사판으로 만들어 놨다. 우리는 모두 국가는 기업이 아니며 국민은 사원일 수 없다는 걸 배운 기간이었다. 한국처럼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에서 대통령의 모든 자질 중 철학이 가장 중요하다.

 

대통령은 모든 국정 전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아니다. 그 어느 누구도 그럴 수도 없다. 그래서 각계 전문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대통령은 최종 결정권을 가졌다.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자문위원이 구성될 거고 결정이 내려질 거고 세금의 사용처가 결정된다. 안철수는 소통과 공감을 강조하는데, 이는 정말이지 시의적절한 구제책이다. 그의 말대로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들의 급식예산을 삭감하고 외국인 영어강사 확충에 예산을 쏟을 수 있었다. 어떤 정책을 실행하기 전에 전문가들의 진단과 실행 후 예측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누구의 말이 더 좋을 지 판단하는 솔로몬의 지혜를 가져야한다. 사소한 판단의 실수도 커다란 재앙이 돼버리기 일쑤니까.

 

이런 일에 경험이 많다면 좋겠지만 대통령이 될 경험은 많을 수 없다. 그러니까 누가 대통령이 돼도 비슷하다. 실전 경험도 마찬가지다. 장관이나 정부 부처에서 일을 한 경험이 있다면 판을 읽는 눈이 생길 수 있을 것이지만 어느 한 분야에만 제한적일 것이다. 그렇담 안철수의 경험을 운운하는 건 정치권의 협잡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대통령 한 사람이 국정을 운영해야한다는 생각은 버려야한다. 그리고 누가 운영을 해도 만족한 결과가 당장 나오기엔 불가능하다. 안철수가 대통령이 혹시 된다하더라도 일 년만에 경기가 회복되고 서민 물가가 안정될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안철수가 대통령이 되면 십 년 후, 혹은 이십 년 후, 그의 말대로 생존권을 위협받는 일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방향으로 정책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울 수 있다.

 

사실 많은 일이 자신의 생존과 가족의 생존 문제로 귀결 되기 때문에 벌어진다. 얼마 전 막을 내린 <추적자>란 드라마는 (아마도)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경유착의 밀도를 꽤나 사실성있게 그렸다. 강동윤이란 대선 후보자의 철학은 모두의 우두머리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강동윤의 적은 실제로는 재벌 회장 장인이었다. 두 사람이 적이자 한 카테고리에 속하고 이들과는 다른 카테고리에 속하는 이들이 백홍석과 그의 동료들(황반장, 조형사, 용식이)다. 백홍석이 법과 맞서기로 한데는 가족이 있고 혈육같은 황반장이 잠시라도 백홍석을 배반한 이유도 가족 때문이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가장은 뭐든 하고 우리 사회는 가족을 위해서 한 일이라면, 도의적으로 공감한다. 그래서 황반장의 배신을 꽤 낭만적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재벌 회장도 아들과 딸을 보호하기 위해 검찰을 산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두 같은 마음이다. 차이는 네 가족이 내 가족이 아니라는 타자화에 있다. 내 자식을 위해서라면 다른 가족의 자식은 죽어도 된다. 그래서 현재 정치권은 드라마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게 다 타자화, 즉 공감 결핍에서 생긴다. 공감이 일어난다면 재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돈을 쓰는 게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남아도는 돈을 기부할 수도 있고 돈이 없는 사람은 돈 때문에 친구를 등쳐 먹지 않아도 될 수 있다. 생존이 보장되고, 아파도 치료비 걱정이 없고 , 어디서 살지 막막하지 않다면 노동을 팔며 영혼을 잠식당하기 보다는 노동을 놀이로 전환하는 날이 올지 모른다. 이런 꿈을 꾸게 해 줄 사람은, 안철수. 그리고 그가 보여준 그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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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소설은 두 번 잘 안 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번에 트뤼포 회고전을 보면서 생각을 달리하게 됐다. 책처럼 영화도 어느 시기에 보느냐에 따라 그 느낌이 다르게 다가오고 인물에 대한 감정 이입도 달라진다. 줄거리 지향적 감상이 아니라 좀 더 감성적 감상을 지향한다고, 해 두자. 몇 년 전에 봤을 때는 카트린느한테 감정이 이입됐었는데 이번에 보니까 쥴한테 감정이 기운다.

 

이 영화는 영화를 좀 본다하는 사람이면 다 아는 너무나 유명한 영화다. 철교 위를 세 사람이 달리는 짧은 장면은 수 없이 재생산되어 원본이 뭔지도 모를 정도로 익숙한 장면이지만 다시 봐도 새롭다. 가벼운 핸드헬드의 출현으로 스튜디오가 아닌 거리로 나온 감독들의 시기다. 카트린느가 달릴 때 촬영 감독 라울 쿠타르도 함께 달린다. 카트린느가 흔들리는 지 카메라가 흔들리지는 지, 그 경계가 모호하게 뒤섞이면서 카트린느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사실 잔느 모로가 우아하고 분위기는 있는지만 아주머니 포스가 좀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아주머니 포스가 거의 없다.ㅋ

 

전에는 삼각 관계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어 보니 삼각 관계 보다는 인물 중심 영화다. 카트린느를 알기 전에 쥴과 짐은 절친이었다. 두 사람은 취향을 공유하며 지적 유희를 나눌 수 있는 벗이었다. 비슷한 취향의 친구들은 여자를 보는 눈도 같을 수 있다. 카트린느의 등장으로 두 사람의 구도는 삼각형을 이루며 긴장감이 돌지만 오히려 안정감이 든다. 쥴과 카트린느의 결혼으로 무게 중심이 안 맞는 삼각형을 잠깐 이루지만 카트린느의 바람기로 다시 균형을 찾는다. 카트린느와 쥴이 결혼을 하게 된 계기는 전쟁이다. 전쟁은 불가항력이고 극복할 수 없는 장애는 평범한 것을 참신하 것으로 만들어 욕망의 대상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가 욕망을 극대화하고 사랑하는 이의 존재는 권태를 낳는데, 쥴과 카트린느의 관계는 이미 이 공식을 예견했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건, 이 때 쥴의 태도이다. 카트린느와의 관계가 무너지면서 쥴이 카트린느를 보는 시선은 변하지 않아 짐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짐의 아내로라도 카트린느를 눈 앞에서 보길 원한다. 이성 간의 사랑을 넘어 어떤 초월적 사랑의 경지에 도달한 것 같기도 한데 아님 소유욕이 없거나.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자기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고 스스로와 타협하는 아주 합리적 인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독점욕만을 버리면 절친 짐도 곁에 있고 짐의 마음을 얻지 못해 괴로워하는 카트린느의 마음과 얼굴도 어루만질 수 있으니 쥴 입장에서 크게 잃은 건 아닌 듯도 싶다. 내가 이렇게 변한 게 세상을 살아가다 보니 찌들어서 쥴의 타는 듯한 사랑을 보는 게 아니라 쥴의 합리성을 보는 거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 최악보다는 차악을, 뭐 이런 생활인의 시선. ㅡ.ㅡ아무튼 이런 생활인의 시선으로 보면 윈윈하는 선택처럼 보이기도 한다. 짐은 평소 흠모했던 여인을 얻고.

 

근데 짐은 복병이다. 그는 계몽주의 시대형 인간이다. 가정에 대한 일반적 개념을 지닌 인물이다. 즉 현모양처를 원하며 정조 관념까지는 아니어도 바람 피는 여자를 아내로 맞을 생각이 없이 질베르트란 여인과 파리에서 동거를 하는 양다리도 걸친다. 짐의 이런 태도는 카트린느의 욕망에 불을 지핀다. 카트린느의 욕망은 꼭지점을 향해 상승하기 시작한다. 내가 못 가질 바에는 차라리 너 죽고 나 죽자로, 막을 내리는데 욕망의 화신다운 결정이다. 카트린느가 짐의 마음을 얻지 못한 채 강물로 뛰어드는 행위는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끝까지 지켜 사랑을 완성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몇 년 전, 강물로 뛰어드는 장면을 보면서 가슴 아파했던 심장을 찾을 수 없어 당황스럽지만 쥴을 합리적 인간으로 보는 내 시선도 나쁘진 않다. " 두 사람의 죽음으로 쥴은 마침내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는 내레이션이 이해가는 나이가 되었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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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꾼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재필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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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은 솔직히 재밌지는 않다. 재미가 뭐냐고 묻는다면, 책장이 술술 넘어가고 가끔 웃기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고, 이런 감정이 한 번이라고 들어야한다고 하겠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각오'가 필요하다. 책장을 중간에 덮지 않겠다는-.-; 취미삼아 읽는 글에 왜 각오까지 하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이따금씩 들추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자신도 불평했듯이 퇴고할 시간이 없어서 소설이 지녀야할 구성이나 줄거리의 아귀가 잘 맞질 않지만 글 줄에는 삶에 대한 철학이 담겨있다. 때론 시론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러시아 분위기만이 아니라 인간이 무리를 이루고 살아가는 세계라면 있을 법한 사건과 그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이 있다. 이 시선은 보편적인데 글의 어조는 상당히 격앙되어 있다. 나는 이 격앙된 어조에 관심이 많다. 천칭자리답지 않게 글의 템포가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 내리락한다. 이 소설 역시 예외가 아니다. 

 

게다가 노름꾼이다. 노름꾼은 현대 사회에서 사회악으로 정의된다. 도스토예프스키 시절, 노름은 꽤 일반적인 유흥처럼 보인다. 주로 룰렛이 등장하는데 이 돌아가는 바퀴에 미치면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어난다. 그 이유를 현대 의학은, 화학물질이 뇌에서 분비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화학물질 분비 이전에 인간의 심리에서 일어나는 아주 충동적이고 급격한 변덕이 많은 예술가들을 괴롭혔다. 도스토예프스키도 노름꾼이었다. 아내한테 안 가기로 하루는 약속해 놓고 아내가 못 가게하면 심하게 욕하면서 다시 가고, 돈을 잃고 돌아와 무릅 꿇고 앉아 자신의 잘못을 빌고 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아마도 이런 자신의 감정적 경험에서 쓴 소설인 듯한데 내가 찾아 헤매는 광적 몰입의 근원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런데 나는 빨간색이 연이어 일곱 번씩이나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상한 오기가 생겨서 일부러 빨간색을 물고 늘어졌다. 내가 그렇게 한 데에는 자존심도 절반쯤 작용했다고 보는데, 정말이지 나는 앞뒤 가리지 않는 모험으로 구경꾼들을 놀라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아, 이상한 느낌이다-내가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전혀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는데도 별안간 모험에 대한 강한 열망이 나를 사로 잡아 버렸다는 것이다. 어쩌면 내 영혼은 수많은 느낌들을 거쳐 왔으면서도 그것들에 의해 충만되는 것이 아니라 자극만을 받은 채 완전히 진이 빠질 때까지 더 많은 느낌들, 더욱더 강렬한 느낌을 요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206-207)

 

노름꾼한테 중요한 건 게임에서 이겨서 돈을 따는 게 아니다. 초반에 그런 사람이 나온다. 배팅한 돈의 몇 배를 따면 그만하고 일어서는 사람을 묘사하는데 도박장에서는 신기한 인물로 비춰진다. 진정한 노름꾼은 배팅을 하고 배팅한 돈의 수 십배를 따도 계속 배팅하는 거다. 물론 한 번에 딴 돈을 다 날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노름꾼의 숙명은 끝장을 보는 거다. 끝 혹은 절대 닿을 수 없는 무한으로 향해 가는 동안 일어나는 극도의 긴장감이 노름꾼이 원하는 대상이다.

 

이야기 중에 노름꾼이 아닌 부자 할머니가 나온다. 사람들은 위풍당당한 할머니한테 굽실거린다. 할머니눈 재미삼아 룰렛을 하다가 만 하루 만에 상당한 재산을 탕진한다. 만 하루 만에 할머니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바뀐다. 그러나 할머니는 후회하지 않는다. 평생 살아왔던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 다녀온 댓가이므로. 화자 역시 거액을 따서 파리로 가지만 도박에서 얻은 거액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역시나 거액을 탕진하고 다시 한 번 거액을 따도 의미없이 탕진할 거라고 확신한다.

현대인의 덕목으로 내세우는 재테크나 은퇴 설계는 노름꾼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니다. 노름꾼은 현실에서 멀리 달아나는 지독한 낭만주의자다. 지독한 현실주의자인 나는, 가끔, 현대인의 덕목을 무시하고 노름꾼이 되고 싶은 마음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불안정한 문체들을 계속 찾아 읽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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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 관광청 홍보 동영상처럼 파리의 대표 명소를 쭈욱 비춰주며 영화는 시작한다. 우디 앨런 감독처럼 도시를 사랑하는 감독을 나는 아직 모른다. 그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도시가 조연으로 등장한다. 런던, 바르셀로나, 파리, 로마(to Rome with love-기대 중이다!) 서울에도 좀 오셔서 서울을 무대로 하는 영화를 만들었음 좋겠다. 그가 렌즈를 통해 보는 서울은 어떨지 궁금하다.

 

2.

그는 사랑, 특히 이성 간에 있을 수 사랑에 대한 전문 탐구가다. 수 없이 사랑 이야기를 해 왔지만 진부하지 않다. 그는 언제나 청년 같은 감수성을 지니셨다. 관계에 있어서 늘 초보자의 모습이고 심드렁하거나 다 아는 척하지 않는다. 관계에서 실패하는 걸 전전긍긍하면서도 전면적으로 실패를 내세우고 그 실패를 축으로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 단세포 생물의 무성 생식의 신비처럼 보이기도 한다.

 

약혼을 한 커플이 파리로 간다. 객관적 섹시함과 교양을 두루 지닌 예비 신부 이네즈와 할리우드에서 잘 나가는 작가이지만 소설을 쓰는 게 꿈인 길. LA에서라면 두 사람은 계속 같은 공간과 시간대를 살아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파리라는 낯선 공간은 두 사람이 얼마나 다른 세계관을 지녔는지 증명해 주는 곳이 돼 버린다. 이네즈는 전형적 미국인으로 파리 관광에 열중하며 미국에서 구할 수 없는 물건들에 열광한다. 길은 불확실한 미래에 물건을 미리 사들이는 게 마뜩잖다. "움직이는 축제의 도시" 파리에서 그는 자신의 꿈에 대한 열정을 재발견한다.

 

3.

길은 자정만 되면 시간을 가로지른다. 미국 예술가들이 파리에 머물던 시절, 1920년 대로 간다. 헤밍웨이, 게르투르드 스타인, 피츠제랄드, 피카소, 달리, 루이스 브뉴엘, 만 레이를 만난다. 영화 속에서 우디 앨런이 해석한 예술가들을 만나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들이 모여 잡담을 하는 모습을 보면 낄낄낄, 웃음이. 길은 이들과 집필 중인 소설에 관해 흥겹게 이야기를 나눈다. 2010년 파리에서 어떤 가구를 미래의 말리부 집에 놓을 지 이야기 한다면 1920년 대 길은 소설과 예술 스타일을 이야기할 수 있다. 진정한 황금 시대로 보인다!

 

2010년의 사랑이 결혼식을 어떻게 치룰 거며 파리 어디 식당에서 밥을 먹어야하는 지로 분주한데 1920년 대 여인 아드리아나는, 마티스, 피카소, 헤밍웨이의 연인답게, 길의 소설에 관심이 있다. 길은 신이났다. 밤마다 20년 대로 갈 시간만 기다린다. 아드리아나는 벨 에포크를 동경한다. 로트렉, 고갱, 드가가 활동하던 시절을 황금 시대로 꿈꾸는데 정말 어느 날 밤, 벨 에포크로 간다. 벨 에포크 시대 사람들은 르네상스 시대를 그리워한다. 우리는 과거를 미화하고 그리워한다. 추억 때문인데 추억이란 이미 일어난 일을 기호에 따라 재구성해서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워 보인다. 현재는 이런 기호의 재구성이 일어나지 않은 채 무언가가 자꾸 결핍되었다고 무의식에서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다.

 

4.

해결책은 결핍을 채우는 길이다. 길이 20년 대에 머무는 건 불가능하지만 말리부가 아니라 파리에 머무는 것은 가능하다. 미국에서 파리로 공간을 이동하는 건 시간을 가로지르는 만큼의 효과가 있다. 다가올 다른 미래에 대한 설레는 기다림 때문이다. 약혼자와 결혼하는 대신 약혼자를 대신할 여인을 찾는 게 가능 할 수도 있다. 이는 전적으로 "사랑에 빠질" 준비도 돼 있기 때문이다.

 

5.

우디 앨런은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영화 속 주인공과 사랑해 보고 과거 예술가들과 친분도 쌓아보지만 고개를 돌리면 현재는 피할 수 없는 것. 파리도 있다보면 곧 현실이 되어 황금 시대가 될 수 없다는 게 두려운가 보다. 도시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사랑을 이야기하고 예술을 이야기하지만 곧 현재가 발목을 붙들고 늘어질까봐 다음에는 로마로 간다니. 우디 앨런의 두려움은 곧 관객으로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많은 곳을 돌아다니시길. 우리는 그의 발길이 닿은 곳을 담은 두 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만이라도 황금 시대를 꿈  꿀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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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앙투안 드와넬 시리즈 세 편.

<앙투안과 콜레트>

17세 앙투안이 독립해서 직장 생활하면서 콜레트를 만나 흠모하는 과정이다. 앙투안의 여성 편력이 시작되는 시점인데 집을 콜레트네 바로 앞으로 옮기는 적극적 행동을 하기도 한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소심하다. 그런데 사랑은 원래 혼자 있을 때는 대범하지만 막상 상대가 눈 앞에 있으면 한없이 작아져서 아닌 척 하는 게, 보는 이의 재미기도 하지만. 앙투안의 대범과 소심이 시소를 이루면서 사랑의 격정에 혼자 지옥에도 갔다가 천국에도 갔다가 하는 이야기다.

 

<부부의 거처>

난 왜 이 영화 제목이 부부의 거처인가 했는데 영화를 보니 답이 나온다. 크리스틴과 결혼한 앙투안이 세들어 사는 건물 안마당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일이 영화 절반을 차지 한다. 프랑스 가옥 구조상 건물 입구로 들어가면 안뜰이 나오는 건물인데 앙투안 부부의 이웃들이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다.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려면 안뜰을 통과해야 하는데 안뜰 입구에는 동네 사람들이 와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작은 바가 있다. 건물로 들어가기 위한 통과 의식인데 지나는 사람들을 평가하는 일은 동네 사람들의 소일거리다. 2년 동안 살면서 방문객도 없고 말도 없는 영국인이 지나갈 때마다 수상하다고 수군거리는 세입자들. 수 년간 집 밖으로 안 나오고 발코니로 밖을 내다보지만 건물에서 일어나는 일에 사사건건 참견하는 노인, 앙투안을 꼬득이려고 지나갈 때마다 귓속말을 해 대는 입구 바 안주인. 살집 좋은 러시아 성악가와 그녀의 매니저로 활동하는 남편. 이 부부는 시차를 두고 안뜰을 지나다니지만 늘 함께 외출한다.

 

안뜰을 지나면 계단을 오르내려야하는데 계단에서 서로 스치면서 묻는 안부는 깊숙한 이웃의 일상을 알 수 없지만 부부의 대체적 분위기가 드러난다. 각자 습관이 다르듯이 부부가 살아가는 모습도 다르다. 어떤 때는 모두가 모여 왁자지껄하고 앙투안의 득남같은 경사로 내 일인양 파티 분위기다. 닫혀있으면서도 열려 있는 이 공간은 배창호 감독의 <꼬방동네 사람들>같은 분위기를 만든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대동소이한 듯.

 

전반부였고 후반부에 아주 재밌는 곳은 엔딩 시퀀스다. 여자 좋아하는 앙투안은 쿄코라는 일본 여자한테 홀딱 빠져 결국 별거를 한다. 앙투안이 끌린 건 낯섬에 대한 일시적 호기심이었고 크리스틴에 대한 구애를 다시한다. 그게 마직막 시퀀스인데 찌질함 작렬이지만 아주 웃기다. 식당에서 지루하게 저녁을 먹고 있다며 앙투안은 대화 없는 쿄코에 대해 불평하며 15분 간격으로 크리스틴한테 전화질을 해 댄다. 밥은 쿄코와 먹고 대화는 크리스틴과 하는데 그 대화 내용이 아내한테 애인의 험담이라니, 앙투안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아이콘 되시겠다. 나중에 <사랑의 도피>에서 콜레트도 지적한다. 다른 사람한테는 관심 없는 사람이라고. 근데 나는 이렇게 자기 감정에 충실한 사람보면 신기하고 웃기기도 하고 그렇다.ㅋ

 

 

<사랑의 도피>

앙투안 시리즈 중 완결편. 앙투안이 크리스틴과 이혼하러 가면서 영화가 시작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사랑하고 막 결혼 했을 적 장면들이 플래시백으로 이어진다. 앙투안의 첫사랑 콜레트도 등장하고 앙투안의 현재 사랑 사빈도 등장한다. 그간 책도 냈는데 <사랑의 샐러드>란 책으로 자신의 여성 편력을 미화했다. 앙투안의 과거 여인들, 콜레트와 크리스틴이 만나기도 한다. 그간의 여성 편력으로 보자면 앙투안은 금새 사랑에 빠지고 금새 옛사랑은 잊고 아무일 없다는 듯 다른 사랑을 찾는 인물이다. 그 근원을 설명하려고 한 인상이 짙다. 어릴 적 엄마한테 사랑받지 못한 트라우마 탓에 만나는 여인들한테 애인과 엄마의 모습을 모두 달라고 칭얼거린다. 엄마와 바람 피웠던 아저씨를 만나서 엄마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말을 듣긴 하지만 이미 유년기는 지나버린 터라 앙투안의 모성 결핍을 채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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