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소설은 두 번 잘 안 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번에 트뤼포 회고전을 보면서 생각을 달리하게 됐다. 책처럼 영화도 어느 시기에 보느냐에 따라 그 느낌이 다르게 다가오고 인물에 대한 감정 이입도 달라진다. 줄거리 지향적 감상이 아니라 좀 더 감성적 감상을 지향한다고, 해 두자. 몇 년 전에 봤을 때는 카트린느한테 감정이 이입됐었는데 이번에 보니까 쥴한테 감정이 기운다.
이 영화는 영화를 좀 본다하는 사람이면 다 아는 너무나 유명한 영화다. 철교 위를 세 사람이 달리는 짧은 장면은 수 없이 재생산되어 원본이 뭔지도 모를 정도로 익숙한 장면이지만 다시 봐도 새롭다. 가벼운 핸드헬드의 출현으로 스튜디오가 아닌 거리로 나온 감독들의 시기다. 카트린느가 달릴 때 촬영 감독 라울 쿠타르도 함께 달린다. 카트린느가 흔들리는 지 카메라가 흔들리지는 지, 그 경계가 모호하게 뒤섞이면서 카트린느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사실 잔느 모로가 우아하고 분위기는 있는지만 아주머니 포스가 좀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아주머니 포스가 거의 없다.ㅋ
전에는 삼각 관계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어 보니 삼각 관계 보다는 인물 중심 영화다. 카트린느를 알기 전에 쥴과 짐은 절친이었다. 두 사람은 취향을 공유하며 지적 유희를 나눌 수 있는 벗이었다. 비슷한 취향의 친구들은 여자를 보는 눈도 같을 수 있다. 카트린느의 등장으로 두 사람의 구도는 삼각형을 이루며 긴장감이 돌지만 오히려 안정감이 든다. 쥴과 카트린느의 결혼으로 무게 중심이 안 맞는 삼각형을 잠깐 이루지만 카트린느의 바람기로 다시 균형을 찾는다. 카트린느와 쥴이 결혼을 하게 된 계기는 전쟁이다. 전쟁은 불가항력이고 극복할 수 없는 장애는 평범한 것을 참신하 것으로 만들어 욕망의 대상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가 욕망을 극대화하고 사랑하는 이의 존재는 권태를 낳는데, 쥴과 카트린느의 관계는 이미 이 공식을 예견했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건, 이 때 쥴의 태도이다. 카트린느와의 관계가 무너지면서 쥴이 카트린느를 보는 시선은 변하지 않아 짐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짐의 아내로라도 카트린느를 눈 앞에서 보길 원한다. 이성 간의 사랑을 넘어 어떤 초월적 사랑의 경지에 도달한 것 같기도 한데 아님 소유욕이 없거나.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자기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고 스스로와 타협하는 아주 합리적 인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독점욕만을 버리면 절친 짐도 곁에 있고 짐의 마음을 얻지 못해 괴로워하는 카트린느의 마음과 얼굴도 어루만질 수 있으니 쥴 입장에서 크게 잃은 건 아닌 듯도 싶다. 내가 이렇게 변한 게 세상을 살아가다 보니 찌들어서 쥴의 타는 듯한 사랑을 보는 게 아니라 쥴의 합리성을 보는 거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 최악보다는 차악을, 뭐 이런 생활인의 시선. ㅡ.ㅡ아무튼 이런 생활인의 시선으로 보면 윈윈하는 선택처럼 보이기도 한다. 짐은 평소 흠모했던 여인을 얻고.
근데 짐은 복병이다. 그는 계몽주의 시대형 인간이다. 가정에 대한 일반적 개념을 지닌 인물이다. 즉 현모양처를 원하며 정조 관념까지는 아니어도 바람 피는 여자를 아내로 맞을 생각이 없이 질베르트란 여인과 파리에서 동거를 하는 양다리도 걸친다. 짐의 이런 태도는 카트린느의 욕망에 불을 지핀다. 카트린느의 욕망은 꼭지점을 향해 상승하기 시작한다. 내가 못 가질 바에는 차라리 너 죽고 나 죽자로, 막을 내리는데 욕망의 화신다운 결정이다. 카트린느가 짐의 마음을 얻지 못한 채 강물로 뛰어드는 행위는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끝까지 지켜 사랑을 완성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몇 년 전, 강물로 뛰어드는 장면을 보면서 가슴 아파했던 심장을 찾을 수 없어 당황스럽지만 쥴을 합리적 인간으로 보는 내 시선도 나쁘진 않다. " 두 사람의 죽음으로 쥴은 마침내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는 내레이션이 이해가는 나이가 되었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