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드라마 <내 연애의 모든 것>을 보고 뒤늦게 신하균한테 덕후심이 샘 솟았다. 워낙 다작 배우라  5월을 힘들게 보냈다. 덕후심 돋기 전에 영화도 여러 편 봤지만 신하균이란 배우의 가치를 전혀 못 알아봤는지 알 수 없는 일. (심지어 신하균을 직접 본적도 있는데!) 아무튼 <지구를 지켜라>는 개봉 당시 설왕설래 했던 말까지 기억하지만 정작 영화는 이제서야 보게 되었고 의미있는 영화를 이제라도 보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영화가 흥행에 참패한 이유를, 누군가 포스터 탓이라고 하는데 정말 포스터 후지다. -.-

 

2. 병구란 인물이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라 믿는 강사장(백윤식)을 납치하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피부를 벗겨낸 발등 위에 물파스를 바르며 교신을 방해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둥, 하니 코믹물인 줄 알았는데 점점 이야기가 심각해진다.

 

병구는 항우울제 복용자다. 그가 왜 항우울제를 복용하게 되었는지 지루하게 말하는 대신 몇 개의 플래쉬백을 통해 간결하게 요약한다. 탄광촌에서 살던 학창시절, 아빠는 갱에서 돌아가시고 엄마는 강사장의 화학공장에서 아마도 어떤 화학물질 때문에 식물인간이 되었다. 가난했던 고교시절 담임은 수업료를 내지 못한 병구한테 폭력을 휘두른다. 병구의 정신 착란의 원인은 푸코의 말대로 "문화적 억압"이다. 푸코는 병리학적인 것은 문화 유형의 한 요소라고 했다. 병구 개인의 역사는 병구가 속한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사회적 약자로 병구가 할 수 있는 건 망상과 착란으로의 도피다. 강사장을 잡긴 했지만 강사장이 외계인이라는 자백을 받기 위해 고문은 필요한 일. 그러나 병구한테는 고문할 초인적 힘이 필요하다. 먹으면 5초 만에 기분이 좋아지는 약을 먹을 수 밖에 없다.

 

병구는 왜 외계인이란 망상을 만들어내서 자신의 복수라고 생각하지 않고 지구를 구한다고 생각했을까? 병구는 지구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직접 체득했기 때문이다. 엔딩 시퀀스에서 강사장은 정당방위로 병구를 사랑하는 순이를 죽였다. 그리고 병구도 죽어가고 있었다. 강사장은 자본이라는 거대 조직의 대표자고 권력과 밀접하게 닿아있는 사람이다. (강사장은 경찰청장의 사위다) 죽어가는 중 병구는 온 힘을 다해 강사장한테 총을 겨누는데 병구를 쫓던 (서울대 출신인) 엘리트 신참 형사가 나타나 병구를 뒤에서 쏘고 강사장을 구한다. 병구 엄마를 식물인간으로 만든 자본가한테 법은 그 사람에 합당한 보상만 이루어지면 그만이라고 편들어준다. 자본 축적에 걸림돌을 공권력이 개입해 제거해주는데 신참 형사가 나아갈 길을 암묵적으로 표현한다. 병구는 처음부터 죽어야할 운명이었다. 사회 조직 폭력 속에서 단지 광기만이 병구의 생을 지탱해 줄 힘이었을 것이다. 병구는 억압을 당했던 이라 이런 구조적 모순에 대해 꿰둟고 있어서 지구를 지켜야한다고 한 게 아닐까. 병구는 결국 죽는다. 병구를 죽인 이들도 죽긴하지만 지구는 가망이 없다. 외계인도 지구를 바꿔보려고 하던 실험을 중단하고 지구에서 철수한다. 병구도 죽었는데 이제 지구는 누가 지키나. 엔딩이 아주 슬프다.

 

3. 영화를 어떤 하나의 장르로 자꾸 분류하려고 하는 짓은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한 영화를  명쾌한 장르적 특성에 가두기 어려울 때가 많다. 이 영화는 외계인이 등장하긴 하지만 SF 영화가 아니다. 복합적 특성을 보여준다. 스릴러와 호러, 드라마까지. 이 말은 영화가 많은 이야기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려다보면 영화가 산만해지기 쉬운데 이 영화는 산만하지가 않다. 미장센들도 너무 좋다! 가령 병구가 마네킹을 만드는 일을 하는 것. 병구는 지구인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 없는 아웃사이더다. 사람을 그대로 본 떴지만 사람이라고 부르는 정신적 특성, 특히 부패한 정신적 특성을 거세한 게 마네킹이다. 사물이지만 사람에 대한 병구의 깊은 향수를 엿보게 하는데 애잔하다. 입구에 설치한 CCTV 카메라도 마네킹이 달고 있다. 사람은 병구를 해치지만 마네킹은 병구를 구해준다. 뭐 이런 의미로 보인다.

 

병구의 이중적 정신 세계를 보여주는 집도 매력적이다. 지하와 지상 두 세계의 공존. 지상층은 아름다운 자연 속에 어울려있고 지하엔 마네킹 전신이 아니라 각 부위 별로, 도서관 책장에 책들처럼 가지런히 놓여있다. 병구는 자신만의 지하 연구실에서 외계인을 만들어냈다. 이전의 살인도 마케킹 속에 섞여 있는 신체 부위를 전시하면서 병구가 연쇄 살인을 했다는 걸 보여준다.

 

덧. 장준환 감독이 만들고 신하균이 출연한 단편 <털>을 봤는데 장준환 감독의 비급 정서, 급호감돋는다. 병구 캐릭터 변주곡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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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영화제란 게 있는 줄도 몰랐는데 올해 벌써 6회란다. 아트나인 오래오래 흥해서 나처럼 게으른 자도 계속 기쁨을 누렸으면 좋겠다.  

 

 

 

 

 

 

레바논 영화라는데 궁금한 점이 많다. 감독을 구글링했는데 별 소득이 없고 위키에도 안 나와있다. 영화는 레바논 캐나다 (아마도) 이민 1세대의 싱글맘의 생활을 들여다본다. 하닌이란 주인공은 레바논식 식당의 사장이고 두 딸의 엄마이며 한 남자의 여자친구이다. 사람의 사회적 역할은 다중적이기 마련인데 뭐 하나 쉬운 게 없어 보인다. 카메라가 있는 곳은 주로 식당인데 공간 사용을 톻해 인물의 심리를 잡아내는 방법이 설득력있다. 지치고 답답한 하닌의 마음이 닫히고 좁은 공간을 클로즈업이나 미디엄 쇼트로 잡아내서 보는 이까지 답답한 마음을 고스란히 전달받을 수 있다. 주방, 간신히 몸을 눕힐 수 있는 휴식 공간 뿐 아니라 비교적 넓은 홀도 자꾸 구석에서 담는다. 벽으로 구분된 실은 하나의 공간을 왔다갔다하는 하닌은, 실험실 철창 안에 갇힌 쥐가 자신한테 주어진 작은 공간을 분주하게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이민자의 삶은 국적을 막론하고 녹록지 않는다. 그러나 공감의 잔물결을 일으키는데는 이민자의 모습보다는 한 개인이 마주하는 삶의 무게감이다. 사는 건 고향에서도 남의 나라에서도 녹록치 않으니.

 

영화 내용과는 별개로 밸리 댄스와 플라멩코공연 씬들을 꽤 공들여 카메라에 담아 눈과 귀가 즐겁다. 마치 다큐를 보는 느낌도 들고.

 

 

 

 

 

 

 

 

 

 

모로코에 각별한 애정이 있어서 모로코 영화라고 해서 기대 좀 했다. 근데 감독은 실은 프랑스 사람이다. 아버지가 모로코인, 어머니가 튀지지 태생이고 프랑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았다. 모로코 사람이라고 할 수있나? 미국 이민자 2세대나 3세대가 한국 사람인가 미국인인가의 문제로 넘어가는데 좀 머리 아프니 그냥 넘어가자.

 

2003년 5월16일에 카사블랑카에서 있었던 테러 사건을 소재로 만들었다고 한다. 카사블랑카 빈민가의 두 형제와 친구들이 이슬람  근본주의 집단에 들어가게 된다. 형은 감옥에서 나온 후, 동생은 우발적 살인에 연루된 후다. 사회적으로 약자로 태어나 사회에서 소외될 위기에 처했다. 이슬람 근본주의 집단은 이들을 받아들이고 테러리스트로 훈련시킨다. CIA처럼 신무기나 살인 기술을 가르치는 게 아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자살폭탄 테러의 고귀함과 사후에 존재하는 영광에 대해 끊임없이 세뇌한다. 영화는 이 중요한 부분을 생기 없게 전달하는데 그래도 사고의 전환을 할 만큼 전달한다.

 

우리는 평범한 이슬람교도와 이슬람 근본주의자를 구별하지 않는다. 매스컴의 영향이고 그 뒤에는 서구의 은밀한 의도 탓이기도 하다. 3년 전, 파리에서 유학을 한 선배한테 모로코 여행을 간다고 하자, 첫마디가 위험한 곳을 왜 가냐고 했다. 파리에서 사건 일어나면 다 아랍인인데. 몽마르트 주변에 유색인종이 많이 모여 사는데 한국인 유학생들한테는 위험 지구로 인식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곳은 집 값이 싸도 기피한다. 파리에서 꽤 오랜 시간을 체류한 선배한테 아랍인은 잠재적 범죄자들이다. 아랍인들과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랍어를 사용한다고 다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서양인들이 한자를 사용하는 아시아인을 중국인 취급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닌가.

 

이 영화를 보면, 근본주의자로 살게 되는 사회적 구조와 배경에 대한 숙고가 있어야한다. 아쉽게도 영화는 깊은 부분까지 파고들어가지 못했는데, 감독의 심장에는 모로칸의 피가 흐르지만 이성은 프랑스인이 갖는 한계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그러나 영화가 주는 의미는 충분하다. 테러리스트는 왜 테러리스트가 되었나? 순교자로 죽은 후 영광을 믿는 근본주의자들은 정말 자살폭탄 테러 앞에서 초연할까? 두 형제 중 형은 거사 앞에서 무너진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달아나고 싶어한다. 그와 달리 동생은 일종의 광기 지점까지 나아가 장렬하게 전사한다.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이용하는 근본주의자들은 독재자가 사용한 지배 원리를 사용하니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근본주의자들의 희생양이 된 선량한 이들을 적으로만 보는 시선도 비난받아야 한다. 테러리즘은 결국 계급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소비주의로 넘어 오면서 낡은 어휘가 돼 버린듯 싶지만 계급의 차이는 분명히, 교묘하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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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무런 정보 없이, 기대 없이 봤는데 전반부의 긴장감이나 영화를 풀어가는 방식이 좋다. 한국영화도 스토리텔링을 이끌어 가는 방식이 꽤 세련되게 진화하고 있다. 사건이 끝나는 날에 사건을 시작해서 15년 전의 플래시백과 현실이 교차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스릴러가 관객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인데 심봤다, 까진 아니지만 설득력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천국과 지옥>에서 많은 걸 가져와서 저절로 연상할 수 밖에 없었다. 소재도 유괴고 수사를 진행 방식은 완전 똑같고. 그럼에도 영화 내용상 꽤 적절하게 잘 사용해서 긴장감도 있고 다음 장면에 대한 기대감도 돋게 한다.

 

2. 공소시효 만료를 소재로 한 영화인데 상업영화가 제기할 수 있는 범위에서 문제 제기를 한다. 피해자한테 증거 보존의 불확실성 같은 이유로 공기관이 범인 잡기를 공식적으로 포기한다는 말이니, 피해자는 억울하기만 할 수 있겠다. 기억에 남기로는, 대체로 영화가 공소시효 만료를 기다리는 가해자의 입장에서 시작한 거 같은데 이 영화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서술된다. 피해자의 감정과잉이 지나치게 신파로 흐른 감이 좀 아쉽다. 물론 현실에서 이런 일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내 이런 말에 내 목을 조르고 싶을 수도 있을 듯.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분명히 긋는 일이 터무니없이 보일 수도 있을텐데 나는 아직 영화로 본다. 영화는 영화다..뭐.

 

3. 시점에 따른-형사, 15년 전 피해자, 그리고 복수로 드러날 현재의 피해자-다층 플롯으로 진행된다. 여기까지도 참 좋다. 그런데 한국영화의 한계를 후반부에서 드러낸다. 내가 싫어하는 가족중심주의로 모든 걸 설명하려고 한다. 헐리우드 영화가 가족 중심주의가 제거되서 싸이코패스가 등장해 흥미없는데 한국영화는 너무 가족에 범행 동기를 맞춰 흥미를 반감시킨다. 그러니까 이런 류의 스릴러물이 앞으로 나아갈 길은 싸이코패스와 가족중심주의, 그 어디쯤 위치하는 알맞은 지점을 찾는 거라고 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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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CEO, 전두엽 - 인격, ADHD, 그리고 치매
엘코논 골드버그 지음, 김인명 옮김 / 시그마프레스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책 제목이 참 낚싯밥스러운데 원제는 <실행의 뇌: 전두엽과 문명화된 마음The executive brain: Frontal lobes and the civilized mind>이다. 이런 훌륭한 제목을 두고 ADHD, 치매를 부제로 달다니....물론 ADHD나 치매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이 책은 치매나 주의력결핍에 관한 책은 아니다. 한 권이라도 더 팔아보려는 출판사의 입장이 이해 안 가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좀 씁쓸하네.

 

고등 영장류한테만 있는 전두엽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가 주된 책의 내용이다. 인간의 뇌란 영역이 관찰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뇌 기능을 밝혀내는데는 역의 방법을 주로 사용한다. 뇌과학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점쟁이랑 비슷하단 생각이 든다. 한 개인의 사변을 통해 개인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다만 그 사변적 단서들이 과학적이냐 심증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아무튼  전두엽 손상이 있는 사람들한테서 나타난 증상을 추적해 생리학적으로 다가가는 방법을 통해 전두엽의 기능의 전모가 드러난다. 요약하면 전두엽은 미래를 위해 계획을 세우고 미래에 있을 보상을 위해 순간의 쾌락 추구를 억누를 수 있는 의식을 지배한다. 의사결정을 하는데 사람마다 다른 행동 패턴을 갖고 어떤 상황에 대해 다른 식의 접근법을 사용한다. 우리가 이런 일련의 행동 패턴을 보고 우리는 그 사람의 성격이라고 칭하고 이 성격을 관장하는 게 전두엽이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듯이 좌뇌와 우뇌의 기능이 분리되는 게 아니다. 유기체한테 기능의 분리는 있을 수 없다. 우반구에서 학습되지 않은 새로움을 인지하면 좌뇌에서 반복을 거쳐 패턴화를 하는 역할을 하는데 구조적, 생화학적 기능적 차이가 사람마도 다르고 남성과 여성이 다르기에 보편적 일반화는 당연히 별 의미가 없다. 사람은 왜 비이성적인가에 대한 답을 이 책에서 조금 찾을 수 있다. 어떤 문제점에 직면했을 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두 가지 방법으로 접근한다고 한다. 상황독립적 접근방식과 상황의존적 접근방식으로. 가령 수입이 늘면 지출도 늘이고 수입에 비례해서 저축도 하는 사람이 상황의존적이라면 수입의 규모가 어떻든 고정된 지출을 하는 사람은 상황독립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 방식을 모두 사용해 일상을 처리하는 편이지만 한 가지 성향에 더 큰 부등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평소엔 멀쩡하다가도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상황이 종종 벌어진다. 이게 다 전두엽의 기능차라고 한다.

 

정신적 자아와 비자아를 구분하는 기준도 전두엽이 발달한 생물체만 할 수 있다. 가령 강아지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못 알아보고 짖는데 바로 전두엽이 없기 때문이다. 철학이 관심있어하는 부분이 이 지점인데 인간의 자아와 비자아의 경계에 숨겨진 정신계의 매커니즘을 별별 용어를 끌어다가 설명하려고 애쓰는데 과학에서는 좀 더 단순화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내가 흥미로운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좁은 틈이 발생한다. 이 틈을 메울 수 있는 기제는 과학만으로도 철학만으로도 안 된다. 과학과 철학 두 기제가 협동해야 심연의 틈을 들여다볼 수 있을 거 같다. 제럴드 에델만의 <신경과학과 마음의 세계>에서 기억이 뇌에 패턴화되는 과정 속에  무의식의 작용 설명했듯이 무의식은 종종 의식을 지배한다. 에델만이 말하는 무의식은 의식화를 위해서 그 존재를 증명하는 기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에서>처럼, 마르셀이 마들렌 과자를 커피에 담그는 순간 어린 시절 기억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무의식은 의식의 자극이 전제 조건이 된다. 그럼 무의식은, 프로이트가 설명했듯이, 의식이 만든 거 아닌가......?  헷갈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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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ampl 2020-05-12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혹시 제가 이책이 필요한데 혹시 저에게 팔수 있을까요?
 

 

 

 

 

 

 

 

 

 

사람은 사람한테 위안을 찾을 수 있을까? 가끔은. 그러나 대체로 사람은 사람한테 위안이 안 된다고 믿는 편이다. 순간순간 누군가한테서 위안을 받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관성의 법칙대로 인간은 잠시 떠났던 외로움이란 제자리로 돌아온다. 고독에 관한 고찰이 사랑에 관한 고찰만큼 많이 이루어지곤 하는 이유가 이런 인간의 변덕스런 속성 탓이 아닐까. 암묵적으로 인간이 나약하다는데 동의하지만 인간의 자유 의지를 부르짖는 현대에서 자신의 두 발로 버텨보려고 한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간신히 서있으려면 무언가 최면이 필요하다. 중독자는 알 것이다. 자신이 왜 어딘가에 중독되는지. 알코올, 마약, 섹스, 쇼핑, 게임, 도박 등등. 사실 누구나가 일정 정도 중독자다. 중독을 바라보는 자신과 타인의 시선이 일치할 때만 우리가 중독자라 부르기로 사회적 합의를 봐서 그렇지.

 

브랜든(마이클 패스빈더)은 겉보기에 멀쩡하다. 즉 사회적 합의로 중독자라 부르기에는 일상의 외줄타기에서 균형을 잘 유지한다. 그러나 그 자신은 안다. 일 하는 시간 이외의 모든 시간을 어떻게 소비하는지. 말초적 쾌락 중추를 만족시킨 후 찾아오는 커다란 블랙홀을, 그는 감당할 길이 없다. 쾌락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위는 높아지고 그 후에 찾아오는 블랙홀은 점점 더 커진다. 자신의 몸을 학대도 해 보고 밤거리를 달리며 울며 소리도 쳐보지만 무서운 블랙홀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찾을 수 없다. 아주 잠깐, 대화가 통하는 여인을 만나 정신적 교감에서 위안을 찾을 희망을 갖는다. 그러나 오랫동안 중독에 쩔어있는 육체는 정신을 지배한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오고 잠깐 희망이란 걸 맛 보았던 정신은 더 괴롭기만하다.

 

이 영화에서 브랜든의 고뇌의 뿌리는 정신적 외상에 있다. 아마도 친동생인 씨씨와의 어린 시절에 일어났던 일일 수 있다. 영화에서는 모호하게 처리되지만 아마도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금지된 사랑으로 괴로워하는 오빠와 여동생의 격렬한 육체적 학대. 육체를 학대해도 다친 영혼은 치유되지 않는다는 아주 우울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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