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영화제란 게 있는 줄도 몰랐는데 올해 벌써 6회란다. 아트나인 오래오래 흥해서 나처럼 게으른 자도 계속 기쁨을 누렸으면 좋겠다.
레바논 영화라는데 궁금한 점이 많다. 감독을 구글링했는데 별 소득이 없고 위키에도 안 나와있다. 영화는 레바논 캐나다 (아마도) 이민 1세대의 싱글맘의 생활을 들여다본다. 하닌이란 주인공은 레바논식 식당의 사장이고 두 딸의 엄마이며 한 남자의 여자친구이다. 사람의 사회적 역할은 다중적이기 마련인데 뭐 하나 쉬운 게 없어 보인다. 카메라가 있는 곳은 주로 식당인데 공간 사용을 톻해 인물의 심리를 잡아내는 방법이 설득력있다. 지치고 답답한 하닌의 마음이 닫히고 좁은 공간을 클로즈업이나 미디엄 쇼트로 잡아내서 보는 이까지 답답한 마음을 고스란히 전달받을 수 있다. 주방, 간신히 몸을 눕힐 수 있는 휴식 공간 뿐 아니라 비교적 넓은 홀도 자꾸 구석에서 담는다. 벽으로 구분된 실은 하나의 공간을 왔다갔다하는 하닌은, 실험실 철창 안에 갇힌 쥐가 자신한테 주어진 작은 공간을 분주하게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이민자의 삶은 국적을 막론하고 녹록지 않는다. 그러나 공감의 잔물결을 일으키는데는 이민자의 모습보다는 한 개인이 마주하는 삶의 무게감이다. 사는 건 고향에서도 남의 나라에서도 녹록치 않으니.
영화 내용과는 별개로 밸리 댄스와 플라멩코공연 씬들을 꽤 공들여 카메라에 담아 눈과 귀가 즐겁다. 마치 다큐를 보는 느낌도 들고.
모로코에 각별한 애정이 있어서 모로코 영화라고 해서 기대 좀 했다. 근데 감독은 실은 프랑스 사람이다. 아버지가 모로코인, 어머니가 튀지지 태생이고 프랑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았다. 모로코 사람이라고 할 수있나? 미국 이민자 2세대나 3세대가 한국 사람인가 미국인인가의 문제로 넘어가는데 좀 머리 아프니 그냥 넘어가자.
2003년 5월16일에 카사블랑카에서 있었던 테러 사건을 소재로 만들었다고 한다. 카사블랑카 빈민가의 두 형제와 친구들이 이슬람 근본주의 집단에 들어가게 된다. 형은 감옥에서 나온 후, 동생은 우발적 살인에 연루된 후다. 사회적으로 약자로 태어나 사회에서 소외될 위기에 처했다. 이슬람 근본주의 집단은 이들을 받아들이고 테러리스트로 훈련시킨다. CIA처럼 신무기나 살인 기술을 가르치는 게 아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자살폭탄 테러의 고귀함과 사후에 존재하는 영광에 대해 끊임없이 세뇌한다. 영화는 이 중요한 부분을 생기 없게 전달하는데 그래도 사고의 전환을 할 만큼 전달한다.
우리는 평범한 이슬람교도와 이슬람 근본주의자를 구별하지 않는다. 매스컴의 영향이고 그 뒤에는 서구의 은밀한 의도 탓이기도 하다. 3년 전, 파리에서 유학을 한 선배한테 모로코 여행을 간다고 하자, 첫마디가 위험한 곳을 왜 가냐고 했다. 파리에서 사건 일어나면 다 아랍인인데. 몽마르트 주변에 유색인종이 많이 모여 사는데 한국인 유학생들한테는 위험 지구로 인식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곳은 집 값이 싸도 기피한다. 파리에서 꽤 오랜 시간을 체류한 선배한테 아랍인은 잠재적 범죄자들이다. 아랍인들과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랍어를 사용한다고 다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서양인들이 한자를 사용하는 아시아인을 중국인 취급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닌가.
이 영화를 보면, 근본주의자로 살게 되는 사회적 구조와 배경에 대한 숙고가 있어야한다. 아쉽게도 영화는 깊은 부분까지 파고들어가지 못했는데, 감독의 심장에는 모로칸의 피가 흐르지만 이성은 프랑스인이 갖는 한계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그러나 영화가 주는 의미는 충분하다. 테러리스트는 왜 테러리스트가 되었나? 순교자로 죽은 후 영광을 믿는 근본주의자들은 정말 자살폭탄 테러 앞에서 초연할까? 두 형제 중 형은 거사 앞에서 무너진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달아나고 싶어한다. 그와 달리 동생은 일종의 광기 지점까지 나아가 장렬하게 전사한다.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이용하는 근본주의자들은 독재자가 사용한 지배 원리를 사용하니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근본주의자들의 희생양이 된 선량한 이들을 적으로만 보는 시선도 비난받아야 한다. 테러리즘은 결국 계급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소비주의로 넘어 오면서 낡은 어휘가 돼 버린듯 싶지만 계급의 차이는 분명히, 교묘하게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