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디 앨런 감독은 정말 소처럼 일하신다. 다작이면 퀄리티가 떨어지기 마련인데 일정한 퀄리티를 유지하는 비결이 뭘까. 아마도 다작?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서 두 여배우의 연기가 압권이다. 케이트 블란쳇이  조증과 울증을 왔다갔다 하는 연기는 샌프란시스코의 아름다운 빛도 압도한다. 조증일 때 보여주는 우아한 자태와 울증일 때 마스카라가 번져서 눈밑이 검게 변하며 초조하게 움직이는 안면근육. 우아하고 지적인 금발 백인 배우로, 나는 나오미 왓츠를 꼽는데 이 영화에서 케이트 블란쳇을 보면 나오미 왓츠를 위협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녀와 백팔십도 다른 삶을 사는 동생 역을 한 샐리 호킨스 역시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또박또박 발음하는 언니와는 대조적으로 말을 흘리면서 짧게 하는 그 목소리와 시종일관 약간 건들거리는 백치미. 뉴욕에 살았던 언니와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동생은 지리적 위치만큼이나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걸 두 배우가 온몸으로 보여준다.

 

2. 영화는 두 여자의 씨실과 날실처럼 엮어 짜낸다. 먼저,재스민 프렌치. 이름부터 뭔가 몽롱하다. 재스민이란 이름의 여자의 일생이 펼쳐진다. 재스민은 사기꾼 남편을 만나 첫눈에 반하고 결혼해서 호화롭게 산다. 여자는 남편의 사업이 뭔지 의식적으로 피하고 남자가 가져다 주는 수입으로 누릴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한다. 그녀가 관심있는 건 노블리스 오블리주. 남편이 사기 친 거액으로 뉴욕 사교계를 주름잡고 자선 파티를 주최하며 팁도 후하게 주는 우아한 삶을 산다. 뼛속까지 속물 근성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속물 근성에 당위성을 부여할 줄 아는 재능을 가진 여자다. 그러다 한순간 남편의 외도에 이성을 잃고 사기꾼 남편을 신고한다. 하루 아침에 동생한테 얹혀사는 신세가 된다. 

 

우디 앨런의 많은 영화들이 행복한 지점이 아니라 권태와 불행의 지점에서 시작한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동생 집으로 오면서 암담한 현실과 플래쉬백으로 화려한 뉴욕의 삶이 교차된다. 돈을 쓰는 일을 계획하는데 익숙한 여자가 돈을 벌면서 벌어지는 골치아픈, 그러나 누구나 겪는 일을 겪는다. 그러면서 재스민이 택한 건, 자신을 구원한 백마 탄 왕자다. 신데렐라의 변주이다. 훌쩍훌쩍 우는 신데랄라한테 갑자기 드레스와 마차가 생기지만 자정까지만이다. 재스민의 현실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고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분노할 때마다 숨이 가빠져서 신경안정제와 술을 상시 복용하는, 객관적으로 보면 그냥 미친년이 돼 간다. 아 이 아줌마를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 천성은 바꾸기 쉽지 않아서 공원 벤치에 함께 앉는 것조차 꺼릴 정도로 신경쇠약에 걸린 여자를 뒤로 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동생 진저의 삶을 보자. 한 번의 이혼 경력이 있고 두 아들이 있다. 그리고 또 결혼할 사람이 있고 그 와중에 유부남과 바람도 핀다. 언니 재스민은 진저의 남자들을 모두 같은 쓰레기 부류로 본다. 왜 그럼 진저는 루저만 만나나. 진저가 파티에서 만난 한 남자와 데이트를 하다가 유부남인 걸 알고는 다시 전 애인한테 돌아온다. 진저는 언니가 없는 타협이란 걸 인생의 동반자로 삼기 때문이다. 잠시 바람피운 상대는 진저가 지금껏 만난 사람들과는 다르다. 지금껏 만난 사람은 아마도 블루칼러 노동자들였다면 파티에서 만난 남자는 화이트 칼러는 아니어도 적어도 블루 칼라의 투박함이 없는, 그 이전에 본 적 없는 성향의 사람이어서 강하게 끌리고 자신한테 목매는 애인을 차버린다. 그러나 유부남인 걸 알고 자신이 가질 수 있는 파이만을 갖는 행복을 택한다. 행복은 심플하다. -취할 수 있는 걸 얻는 데 만족하라. 때론 애잔하기도 하지만 재스민이나 진저나 자신만의 삶의 방식으로 살기에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나는 어떤 부류에 속하나,를 고민하고 어디에 속할까,를 선택한다. 자신의 이름에 맞춰 꿈을 꾸며 불행 속에서 한방의 행복을 기다리는 재스민이 될 지, 한방의 행복보다는 소소한 행복을 택하는 진저가 될 지는 자신의 몫.

 

3. 바르셀로나를 무대로 했던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같은 느낌이 나는 영화다. 제목은 후지지만 관계에 대한 두 친구의 다른 시선을 보여 준 영화였다. 우디 앨런이 언제나 청년인 이유는,  관계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는데 있다. 삶에 대한 기본적 태도인데, 살아가는데 천성과 함께 태도는 생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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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벨 아자니의 <까미유 끌로델>이 로댕과의 사랑에 초점을 맞춘 반면 브루노 뒤몽 감독의 <까미유 끌로델>은 로댕과 헤어진 후 작업실에만 틀어박혀 안 나오자 가족들이 끌로델을 정신병원에 보낸다. 아마도 수녀원이 운영하는 이 병원에서 지내는 생기 잃은 까미유 끌로델의 내면을 묘사한 영화다. 로댕과 끌로델의 결별 이유를 회자되는 것만 알고 있어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뒷 이야기가 궁금한데 누구 아시는 분! 브루노 뒤몽 감독은 실험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편인데 이 영화는 비교적 차분하다. 끌로델은 동료(?)들 속에서 태연히 행동하다가도 터질 거 같은 감정 기복으로 울음을 터트리곤 한다. 줄리에뜨 비노슈의 곱게 나이 들어가는 클로즈업이 종종 등장한다. 어제 영화 보면서 딴 생각 많이 해서(근데 무슨 생각했는 지, 지금은 기억나질 않는다) 공감하는데 실패했다. 아니 어쩌면 딴 생각 안 했어도 뒤몽 감독의 영화를 보고 공감 같은 걸 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까미유 동생인 폴 끌로델은 까미유의 창의적 기질, 혹은 자유분방한 기질과 대립된다. 신의 절대성을 신봉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등장과 사라짐 모두 갑작스럽고 감독이 불친절하게 배치해서 당혹스럽다. 남매 간 혹은 가족사의 배경을 몰라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보인다.

 

뒤몽 감독 영화를 볼 때마다 이 양반이 워낙 독특하셔서 정서적인 부분보다 영화의 형식적 면에 더 무게 중심을 두며 보게 된다. 끌로델의 내적 감정의 소용돌이에는 공감 가지 않지만 끌로델의 감정의 파도를 묘사하는 미장센 사용 방식에는 격하게 공감 간다. 수도원으로 쓰였을 돌로 된 육중한 건물. 남부 지방인데도 자연광을 거의 배제해서 영화 전체는 회색의 무채색 톤으로 진행된다. 등장 인물들의 옷 역시 검은 색이나 무채색 계열로 지치고 지친 까미유의 마음 한자락 같다. 까미유가 이따금씩 숨통을 트러 건물 밖에 나와 벤치에 앉아 광합성을 하는 장면이 몇 번 나온다. 그때마다 회색 벽은 배경일 뿐인데도 까미유를 감시하는 것처럼 뒤에 떡 버티고 있다. 돌로 만들어진 빛이 들면 멋스러울 건물을, 아주 차갑고 스산하게 담는다.

 

또 하나 뒤몽 감독한테 강하게 끌리는 점은, 바람을 잡는 기술이다. 이 영화는 남부여서 미스트랄이라고 하지만 그 이전 영화, <휴머니티>에서도 끊임없이 바람이 인물들의 대사 사이에 끼어 있어서 성가시게 굴었다. 바람은 격정적이면서도 난폭해서 화면 속 비물질적 요소한테 폭력성을 느끼고 있는 게 신기하기도 했었다. 이 영화에서도 까미유가 낙담할 때, 뒷모습을 비추며 바람이 까미유의 걸음과 친구 삼아 같이 간다. 날씨를 이루는 요소 중, 바람이 제일 싫은데 뒤몽 감독의 영화를 보노라면 바람도 표정과 목소리가 있어 저런 바람은 어디서 찾나, 궁금하게 느끼곤 한다. 많은 감독이 빛을 담는데 고심하는데 뒤몽 감독은 바람을 담는데 고심하는 사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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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역사 - 베드로부터 베네딕토 16세까지 역사도서관 교양 19
호르스트 푸어만 지음, 차용구 옮김 / 길(도서출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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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과 10월 독서 목록은 전부 한 달 후에 갈 여행에 맞춰져 있다. 역시 독서는 목적이 있어야 가속이 붙는 거 같다. 무목적의 독서가 진정한 즐거움이라고 하는데, 내 경우에 독서란 목적에 접근하기 위한 일종의 수단 같기도 하다. 아무튼 아비뇽에 갈건데 교황의 역사 정도는 읽어야하지 않나, 해서 주문했는데 책이 이렇게 영양가 없을 수가.ㅠ 내용도 허술한데 지면 구성까지 산만하다. 한 페이지에 본문보다 사진이나 삽화 설명이 더 많고 게다가 각주까지 끼어들어가 있다. 본문은 한 페이지에 정작 몇 줄 안들어간데다 앞페이지와 뒷페이지 사이 중간에 끼어있는 커다란 삽화들이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고 본문을 이어 읽는 데 가독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이 책 편집자는 반성하라.  책을 읽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편집한 거 같은 느낌이랄까. '길'이란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을 살 때는 신중을 기해야겠다.

 

그래도 내용을 좀 끄적여보면, 교황의 개념과 이천년 동안 이어져 왔던 인물 중심의 교황사를 다룬다. 서구문화는 사실 종교의 역사다. 기독교의 대략적 개관을 모르면 성당, 그림, 문학은 피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많은 유명한 성당에서 비신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잠시 벤치에 앉아 다리를 쉬며 서늘한 기운을 느껴보는 것이다. 각 성자들의 관과 기도문이 적혀 있는 벽은 나중에는 모두 기도할 수 있는 공간쯤으로 묶어 버리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교황이란 말은 우리 일상생활과 아무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비신자인 나한테 교황은 화면에서나 보는, 상징적 인물이다. 교황의 개념과 정의는, 당연하지만 왕권처럼 강할 때도 있고 약할 때도 있다. 교황법과 교리를 체계화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만든 교황이 있기도 했고 신의 대리인으로 신과 같은 위치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이도 있다. 교황이란 지위를 영웅화를 한 이도 있고. 아무튼 여러 교황의 이름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림에서 많이 등장하는 익숙한 교황도 있고 낯선 교황도 있다. 교황 역시 사람인지라 권력에 집착했던 교황일수록 초상화를 많이 남기고 건축물도 많이 남겼다. 그러고보면 역시 개인의 인성은 중요한 거 같다. 성스러운 악마라고 불렸던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 대해 토머스 칼라일이란 사람이 <영웅숭배론>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근본적인 것의 가치는 새로움에 있는 게 아니라, 올바름에 달려 있다, 신앙인은 근본적인 것을 믿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믿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위해 믿는 것이 아니다."(131쪽)

 

좀 극단적인 말이긴 해도 근본주의자가 바로 신자란 말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다른 이를 위한 교황도 있었겠지만 대체로 자신을 위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요즘 주변에서 보는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개인한테 쓸모가 있어 존재하는 게 확실히 사실이고.-그게 마음의 위안이든 뭐든.

 

이 책만으로 14세기 필리페 4세가 교황을 아비뇽으로 보낸 아비뇽 유수의 역사적 사건의 무게를 가늠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교황 궁전도 텅 비어 빈 공간을 상상력으로 채우며 어떤 공간인지, 학구파 순재처럼 브로셔에 적힌 읽을 수 있는 문자를 열심히 읽는 수고가 남아있다. 사실 그런 수고가 여행 중에 실제로 겪는 현재로 되면 무의미한 거 같고 심드렁할 게 분명하지만 앞으로 현재가 될 무의미할 시간을 미래라는 이름으로 기다리는 건 꽤 의미있다. 게다가 아비뇽에서 보낸 과거도 가지고 있으니!

 

아비뇽에 갔을 때가 9월이었는데도 몹시 더웠고 바람은 세차게 불었다. 교황청을 지나 다리 위를 걷는데 바람 때문에 제대로 걷기 힘들었다. 어제 본 부르노 뒤몽 감독 영화에서나 볼 법한 바람의 미친 존재감이었다. 이 바람은 대서양 바다에서 부는 차가움과는 또 다른 질감이었다. 바람이 목소리를 가진 것처럼 귀에 들어오는 바람 소리는 자꾸 이방인인 나를 압도하는 힘이 있다. 골목은 역사 도시답게 삐뚤빼둘하고 경사진 미로에 포석이 깔려있다. 구불구불 골목을 걷다보면 내가 어디있는지 좌표를 잃어버리고 도시 전체가 내뿜는 무채색의 황색에 압도당했다. 썩 좋은 기억이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모르겠다. 아비뇽이 주목적이 아니라 프로방스의 작은 마을 투어를 아비뇽에서 출발해서 아비뇽에 가는데....아비뇽에 대한 내 서늘한 기억은 어떻게 덧칠해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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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제 <일대종사> 보러 갔다가 표가 있길래 봤다. 개인적으로 아픔이 있는 영화라 보고 싶은 마음 반, 안 보고 싶은 마음 반이었다. 논문 쓰면서 보고 또 봐서 영화를 거의 외웠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보니 몇 장면만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결론은, 새로운 영화를 보듯이 봤다는 것.ㅎ

 

영화를 보면서 과거에 내가 쓰려했던 논문에 대해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ㅠ 미니멀한 연출에 독재시절도 아닌데 주변의 정황을 다 생략한 연출법이다. 그러니 나는 방향을 잘 못 잡았다. 사회컨텍스 속에서 이 영화를 읽어내는 건 당시 그 사회 속 일원이 아니면 힘들 수 있다.(미테랑 집권기고 야당 대통령에 우파의 정당의 집권으로 불안한 동거로 늘어난 청년실업이란 말을 주워듣고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니.)  그러니 내가 얼마나 무모한 짓을 했는지. 그 사회의 일원도 아니고 대가도 아닌 내가 내 능력 밖에 있는 걸 소재로 택할 수 있는 건 무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2. 어제 영화를 보고 알 수있는 건 베티와 조르그가 주변인이 확실하다는 것. 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보면 유목민같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비정규직이다. 집이란 개념은 우리처럼 정착하는 문화가 아니라 집세만 내면 언제든 옮길 수 있는 곳이니 특별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또 한편으로 이들처럼 해변의 방갈로, 파리의 낡은 친구집, 어느 작은 마을로 옮겨다니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유롭게 집을 옮길 수 있다. 이 자유는 진짜인가? 베티가 미쳐가는 과정을 지켜보면 이 자유는 또 다른 억압이다. 방갈로에 불을 지르고 달아나는 이유를 보자. 방갈로 주인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데 발끈한다. 고용인과 피고용인은 명령과 복종의 관계란 공식을 베티는 부정하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갑과 을의 관계를 부정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라 베티가 선택한 건 방화라는 일차원적 일탈에 머문다.

 

그리고 파리에 있는 조르그 친구 집에서, 베티는 조르그가 취미 삼아 쓴 소설을 타이핑해서 출판사에 보내는 일에 집착한다. 베티는 이미 조르그를 작가로 명명한다. 시시하게 잡일이나 하는 사람이 아닌 글을 쓰는 사람. 베티한테 작가란 자신이 처한 상황과는 멀리 있는 이상향같은 그룹에 속한다. 조르그의 소설 출판을 거절하는 편집자한테 보여주는 베티의 폭력성은 이미 조르그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조그르의 작가란 위치는 곧 베티 자신이 작가란 지적 근로자의 계급으로 상승을 함축한다고 할 수 있다. 파리란 공간은 계급 상승을 위한 공간이었으나 실패로 끝난다.

 

그리고 세번째 집으로 온다. 한적한 소도시도 소도시에 맞게 베티의 욕망도 이행한다. 이제 베티의 꿈은 엄마가 되는 것. 그러나 이것 역시 이룰 수 없다. 임신이 아닌 걸 알고는 베티의 광기는 극점을 향해 폭발한다. 결국 베티의 운명은 정해졌을 지도 모른다. 자신의 한쪽 눈을 도려내고 쇼크상태로 의식을 잃고 병원 침대에 묶여 누워있는다. 이때 조르그는 자신의 소설 출판을 희망하는 출판사한테 연락을 받는다. 드디어 작가가 되는 순간이지만 의식이 없는 베티는 기뻐할 수 없다.

 

조르그한테 소설 출판이란 뭘까. 조르그는 베티보다는 평면적으로 묘사되는 인물이다. 이성적이어서 그런걸까. 조르그는 참 평온해 보인다. 주어진 일에 성실하며, 그래서 다른 이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보인다. 그래, 사람이 성실해야해, 하는 교훈까지.ㅎ 그리고 베티를 사랑하는 일에도 성실하다. 소설출판도 하나의 일일 뿐처럼 좀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거 같다. 베티가 이룰 수 없는 일에 대한 갈망과 억압으로 결국 정신줄을 놓아버린 반면 조르그는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있는 꿈이라든가 희망이란 환상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베티에 비하면 열정도 없고 비겁해보이기도 하지만 살아가는데는 조르그같은 태도가 필요한 법이다. 그래서 조르그는 살아남고 작가도 된다.  

 

3. 베티의 열정과 조르그의 평상심이 대립되는데 내가 동경하는 건 베티의 열정이지만 소유하고 싶은 건 조르그의 평상심이다. 결국 둘 다 갖고 싶단 말처럼 들리기도 하네.

 

덧. 어제 영화 보면서 한 가지 깜짝 놀란 건, 이 영화는 전라 씬이 엄청 자주 등장한다. 집안에서는 주로 조르그와 베티는 나체로 다니는데 보다보면 점점 익숙해지긴 하지만 원래 이런 장면들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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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느리게 걷기 두 도시 이야기 1
최병서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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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랜만에 파리에 간다. 한때 체류했던 곳이라 지리적 면에서는 익숙하지만 이번에 몇 일만 머물거여서 파리에서 가서 뭘 해야하나 막연했다. 관광지는 모두 빼고 익숙했던 라탱지역을 그냥 걸어봐야지 했다가, 또 언제 파리에 갈 지 모르니까 아무리 짧아도 무언가 목적이 좀 있어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이 책 저 책 뒤적였다. 몇 달을 체류할 당시 권태 속에서 아침을 맞이하곤했는데 막상 가기 힘든 곳이 되니 모든 게 흥미로워보인다. 과거는 다 아름답다고 했던가. 집 구하느라 고생했던 기억까지도 다 축복이었던 것처럼 아련하다. 부재하는 것에 대해 솟아나는 주체할 수 없는 애정은 진리.

 

2. 서점 여행 코너에 보면 요즘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여행지는 물론이고 여행패턴까지 파악할 수 있다. 열이면 아홉은 여행을 좋아한다고 한다. 여행 기회가 많아지면서 굵직한 관광지 외에 다른 무언가를 원하는 심리가 생긴다. 더구나 우리 현실상 휴가가 짧고 제한적이어서 욕심은 더 늘어난다고나 할까. 심심찮게 보이는 게, 느리게 걷기, 도시의 속살 체험해보기, 등등이다. 나도 이런 책들을 펼쳐보면서 관광청에서 하는 안내가 아니라 개인이 자신만의 눈으로 보는 도시는 어떤가, 이 사람은 어떤 관점으로 봤나 내 생각과 대조해 보곤 한다. 

 

3. 이 책은 좀 산만하게 쓰여있긴 하지만 미덕이 더 많다. 지중해와 이슬람 문화 책을 주로 쓰는 이희수 교수랑 비교하게 되는데 이희수 교수는 감성이 빠진 기본 안내서 밖에는 못 쓴다. 이 책 저자는 파리라는 도시에 맞춰 기본적으로 풍부한 감성을 소유한 거 같다. 물론 이따금씩 등장하는 꼰대같은 기질이 보이긴 하지만 최대한 자제하려는 모습도 행간에서 읽을 수 있다. 파리, 아니 프랑스 전체가 카페 문화가 발달해서 아무래도 카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부럽게도, 저자는 이 책을 파리 카페들에서 썼다고 한다. 인문학적 소양으로 파리의 골목들에서 숨겨진 이야기를 읽어내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저자가 말했듯이 파리지앵이 있어 파리가 파리스럽다. 골목들 이름이 작가들, 사상가들로 채워져있어서 골목과 작가, 사상가를 저절로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이걸 저자는, 문화국가 엘리트주의란 말을 표현했다. 실제로 파리의 문화는 대체적인 규격이 있는 거 같은데 이런 식으로 엘리트화를 했다고. 맞는 말이기도한 거 같고. 몽마르트를 찾는 사람들의 수가 일 년 내내 끊이지 않는 이유가 가난한 예술가들의 흔적을 더듬고싶기 때문일 거다. 지금은 번잡한 관광지일 뿐이고 이 번잡함만 보고 몽마르트에 대한 기대에 실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뒷길로 돌아가면 관광지와는 별세계처럼 한적하고 '사색'이란 걸 하며 잠시 예술가 흉내를 내볼 수도 있다. 그 길이 어딘지를 알려면 작가들이나 화가에 대해 알아야하겠지만 현대인이 어디 그럴 시간이 있나. 다행히도 이런 걸 백과사전식으로 알려주는 책들이 많진 않지만 조금 있다. 이 책은 관광 일반 정보와는 조금 다른 정보를 찾는 이한테 좋은 가이드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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