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의 역사 - 베드로부터 베네딕토 16세까지 역사도서관 교양 19
호르스트 푸어만 지음, 차용구 옮김 / 길(도서출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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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과 10월 독서 목록은 전부 한 달 후에 갈 여행에 맞춰져 있다. 역시 독서는 목적이 있어야 가속이 붙는 거 같다. 무목적의 독서가 진정한 즐거움이라고 하는데, 내 경우에 독서란 목적에 접근하기 위한 일종의 수단 같기도 하다. 아무튼 아비뇽에 갈건데 교황의 역사 정도는 읽어야하지 않나, 해서 주문했는데 책이 이렇게 영양가 없을 수가.ㅠ 내용도 허술한데 지면 구성까지 산만하다. 한 페이지에 본문보다 사진이나 삽화 설명이 더 많고 게다가 각주까지 끼어들어가 있다. 본문은 한 페이지에 정작 몇 줄 안들어간데다 앞페이지와 뒷페이지 사이 중간에 끼어있는 커다란 삽화들이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고 본문을 이어 읽는 데 가독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이 책 편집자는 반성하라.  책을 읽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편집한 거 같은 느낌이랄까. '길'이란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을 살 때는 신중을 기해야겠다.

 

그래도 내용을 좀 끄적여보면, 교황의 개념과 이천년 동안 이어져 왔던 인물 중심의 교황사를 다룬다. 서구문화는 사실 종교의 역사다. 기독교의 대략적 개관을 모르면 성당, 그림, 문학은 피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많은 유명한 성당에서 비신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잠시 벤치에 앉아 다리를 쉬며 서늘한 기운을 느껴보는 것이다. 각 성자들의 관과 기도문이 적혀 있는 벽은 나중에는 모두 기도할 수 있는 공간쯤으로 묶어 버리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교황이란 말은 우리 일상생활과 아무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비신자인 나한테 교황은 화면에서나 보는, 상징적 인물이다. 교황의 개념과 정의는, 당연하지만 왕권처럼 강할 때도 있고 약할 때도 있다. 교황법과 교리를 체계화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만든 교황이 있기도 했고 신의 대리인으로 신과 같은 위치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이도 있다. 교황이란 지위를 영웅화를 한 이도 있고. 아무튼 여러 교황의 이름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림에서 많이 등장하는 익숙한 교황도 있고 낯선 교황도 있다. 교황 역시 사람인지라 권력에 집착했던 교황일수록 초상화를 많이 남기고 건축물도 많이 남겼다. 그러고보면 역시 개인의 인성은 중요한 거 같다. 성스러운 악마라고 불렸던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 대해 토머스 칼라일이란 사람이 <영웅숭배론>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근본적인 것의 가치는 새로움에 있는 게 아니라, 올바름에 달려 있다, 신앙인은 근본적인 것을 믿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믿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위해 믿는 것이 아니다."(131쪽)

 

좀 극단적인 말이긴 해도 근본주의자가 바로 신자란 말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다른 이를 위한 교황도 있었겠지만 대체로 자신을 위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요즘 주변에서 보는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개인한테 쓸모가 있어 존재하는 게 확실히 사실이고.-그게 마음의 위안이든 뭐든.

 

이 책만으로 14세기 필리페 4세가 교황을 아비뇽으로 보낸 아비뇽 유수의 역사적 사건의 무게를 가늠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교황 궁전도 텅 비어 빈 공간을 상상력으로 채우며 어떤 공간인지, 학구파 순재처럼 브로셔에 적힌 읽을 수 있는 문자를 열심히 읽는 수고가 남아있다. 사실 그런 수고가 여행 중에 실제로 겪는 현재로 되면 무의미한 거 같고 심드렁할 게 분명하지만 앞으로 현재가 될 무의미할 시간을 미래라는 이름으로 기다리는 건 꽤 의미있다. 게다가 아비뇽에서 보낸 과거도 가지고 있으니!

 

아비뇽에 갔을 때가 9월이었는데도 몹시 더웠고 바람은 세차게 불었다. 교황청을 지나 다리 위를 걷는데 바람 때문에 제대로 걷기 힘들었다. 어제 본 부르노 뒤몽 감독 영화에서나 볼 법한 바람의 미친 존재감이었다. 이 바람은 대서양 바다에서 부는 차가움과는 또 다른 질감이었다. 바람이 목소리를 가진 것처럼 귀에 들어오는 바람 소리는 자꾸 이방인인 나를 압도하는 힘이 있다. 골목은 역사 도시답게 삐뚤빼둘하고 경사진 미로에 포석이 깔려있다. 구불구불 골목을 걷다보면 내가 어디있는지 좌표를 잃어버리고 도시 전체가 내뿜는 무채색의 황색에 압도당했다. 썩 좋은 기억이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모르겠다. 아비뇽이 주목적이 아니라 프로방스의 작은 마을 투어를 아비뇽에서 출발해서 아비뇽에 가는데....아비뇽에 대한 내 서늘한 기억은 어떻게 덧칠해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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