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제 <일대종사> 보러 갔다가 표가 있길래 봤다. 개인적으로 아픔이 있는 영화라 보고 싶은 마음 반, 안 보고 싶은 마음 반이었다. 논문 쓰면서 보고 또 봐서 영화를 거의 외웠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보니 몇 장면만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결론은, 새로운 영화를 보듯이 봤다는 것.ㅎ
영화를 보면서 과거에 내가 쓰려했던 논문에 대해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ㅠ 미니멀한 연출에 독재시절도 아닌데 주변의 정황을 다 생략한 연출법이다. 그러니 나는 방향을 잘 못 잡았다. 사회컨텍스 속에서 이 영화를 읽어내는 건 당시 그 사회 속 일원이 아니면 힘들 수 있다.(미테랑 집권기고 야당 대통령에 우파의 정당의 집권으로 불안한 동거로 늘어난 청년실업이란 말을 주워듣고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니.) 그러니 내가 얼마나 무모한 짓을 했는지. 그 사회의 일원도 아니고 대가도 아닌 내가 내 능력 밖에 있는 걸 소재로 택할 수 있는 건 무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2. 어제 영화를 보고 알 수있는 건 베티와 조르그가 주변인이 확실하다는 것. 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보면 유목민같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비정규직이다. 집이란 개념은 우리처럼 정착하는 문화가 아니라 집세만 내면 언제든 옮길 수 있는 곳이니 특별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또 한편으로 이들처럼 해변의 방갈로, 파리의 낡은 친구집, 어느 작은 마을로 옮겨다니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유롭게 집을 옮길 수 있다. 이 자유는 진짜인가? 베티가 미쳐가는 과정을 지켜보면 이 자유는 또 다른 억압이다. 방갈로에 불을 지르고 달아나는 이유를 보자. 방갈로 주인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데 발끈한다. 고용인과 피고용인은 명령과 복종의 관계란 공식을 베티는 부정하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갑과 을의 관계를 부정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라 베티가 선택한 건 방화라는 일차원적 일탈에 머문다.
그리고 파리에 있는 조르그 친구 집에서, 베티는 조르그가 취미 삼아 쓴 소설을 타이핑해서 출판사에 보내는 일에 집착한다. 베티는 이미 조르그를 작가로 명명한다. 시시하게 잡일이나 하는 사람이 아닌 글을 쓰는 사람. 베티한테 작가란 자신이 처한 상황과는 멀리 있는 이상향같은 그룹에 속한다. 조르그의 소설 출판을 거절하는 편집자한테 보여주는 베티의 폭력성은 이미 조르그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조그르의 작가란 위치는 곧 베티 자신이 작가란 지적 근로자의 계급으로 상승을 함축한다고 할 수 있다. 파리란 공간은 계급 상승을 위한 공간이었으나 실패로 끝난다.
그리고 세번째 집으로 온다. 한적한 소도시도 소도시에 맞게 베티의 욕망도 이행한다. 이제 베티의 꿈은 엄마가 되는 것. 그러나 이것 역시 이룰 수 없다. 임신이 아닌 걸 알고는 베티의 광기는 극점을 향해 폭발한다. 결국 베티의 운명은 정해졌을 지도 모른다. 자신의 한쪽 눈을 도려내고 쇼크상태로 의식을 잃고 병원 침대에 묶여 누워있는다. 이때 조르그는 자신의 소설 출판을 희망하는 출판사한테 연락을 받는다. 드디어 작가가 되는 순간이지만 의식이 없는 베티는 기뻐할 수 없다.
조르그한테 소설 출판이란 뭘까. 조르그는 베티보다는 평면적으로 묘사되는 인물이다. 이성적이어서 그런걸까. 조르그는 참 평온해 보인다. 주어진 일에 성실하며, 그래서 다른 이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보인다. 그래, 사람이 성실해야해, 하는 교훈까지.ㅎ 그리고 베티를 사랑하는 일에도 성실하다. 소설출판도 하나의 일일 뿐처럼 좀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거 같다. 베티가 이룰 수 없는 일에 대한 갈망과 억압으로 결국 정신줄을 놓아버린 반면 조르그는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있는 꿈이라든가 희망이란 환상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베티에 비하면 열정도 없고 비겁해보이기도 하지만 살아가는데는 조르그같은 태도가 필요한 법이다. 그래서 조르그는 살아남고 작가도 된다.
3. 베티의 열정과 조르그의 평상심이 대립되는데 내가 동경하는 건 베티의 열정이지만 소유하고 싶은 건 조르그의 평상심이다. 결국 둘 다 갖고 싶단 말처럼 들리기도 하네.
덧. 어제 영화 보면서 한 가지 깜짝 놀란 건, 이 영화는 전라 씬이 엄청 자주 등장한다. 집안에서는 주로 조르그와 베티는 나체로 다니는데 보다보면 점점 익숙해지긴 하지만 원래 이런 장면들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