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인 <진화의 시작>보다는 진부하지만 그래도 꽤 흥미롭게 봤다. 폭력의 탄생과 재순환, 정당화의 관점에서. 반격의 서막이란 말로 알 수 있듯이 다음 편은 유인원이 점령한 세계가 나올 것이다. 같은 감독이 만들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다음 편도 보지않을까.
진화의 시작에서 인간의 치매를 막는 약을 개발해서 유인원한테 실험 중이었다. 약의 부작용으로 유인원들이 지능을 얻게 되었고 유인원들이 실험실을 탈출하는 이야기였다. <반격의 서막>은 예상치 못한 부작용으로 유인원에게 있는 바이러스에 옮은 인간이 거의 죽고 바이러스에 면역이 있는 사람들만이 살아있다. 인간의 삶은, 요즘 기준으로 비참해졌다. 반면에 실험실에서 착취당했던 유인원들은 숲으로 돌아가서 사는 바람직한 삶을 살고 있다. 살아있는 인간이 있다는 걸 모른 채 유인원들이 태평성대 속에 살고 있던 어느 날, 사람들을 마주친다. 전기를 얻기 위해 발전소로 향했던 일행들이다. 언제나 문제의 발단은 발전 혹은 진보라는 테두리 내에서 일어난다.
본격적인 유인원과 인간의 대립이 시작된다. 유인원 내부와 인간 내부 각각에서 두 파가 대립을 한다. 유인원과 인간의 공존을 믿는 무리와 내가 속한 집단이 아니면 내 생존을 위협하는 적으로 간주하는 그룹이다. 다수 대 소수의 대립이 시작된다. 두 집단의 공존을 희망적으로 보는 이는 유인원 리더 시저와 인간 말콤이 있다. 두 이상주의자들(?)은 상대의 공격이 아니라 자기 편의 공격을 받는다. 시저는 전쟁을 해야한다는 드레퓌스의 습격을 받는다. 드레퓌스는 일종의 음모와 힘으로 유인원의 새 리더가 된다. 다수결 원칙은 합리적인 의견수렴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단점이 많다. 51% 대 49%여도 나머지가 51의 의견에 따라야하는 허점이 있다. 많은 평범한 유인원들이 전쟁에 반대하지만 드레퓌스를 따라 싸우러 나서야 한다. 즉 이 유인원들은 폭력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이중적 위치에 처하게 된다.
유인원의 이야기를 보면서 며칠 전 끝난 보궐선거를 연상할 수 밖에 없다. 세월호란 국란을 겪고도 절반은 신념을 바꾸지 않는다. 지젝에 따르면, 폭력에는 세가지가 있다. 눈에 가시적으로 보이는 주관적 폭력,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상징적 폭력, 그리고 우리의 경제체계와 정치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나타나는 파국적인 결과인 구조적 폭력. 유권자 대부분은 구조적 폭력의 힘 없는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새누리의 압승이란 선거 결과를 보면 구조적 폭력에 가담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구조적 폭력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폭력은 재생산되고 희생자는 계속 희생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리더나 영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평화주의자였던 시저는 마침내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전쟁을 선포한다. 유인원들은 물론 시저를 따를 것이다. 전쟁을 원하지 않던 이들이 전쟁이란 폭력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물론 이 영화 감독은 유인원 편이어서 아마도 유인원의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유인원이 약자라고 생각하기에 억압당하고 착취당했던 약자가 승리한다는 판타지를, 오락영화가 가져야할 미덕이니까. 그러나 현실은 판타지가 아니다. 유권자는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이면서 모르는 채 가해자가 되면서 영화 속 유인원보다 늘 더 고통스러운 위치에서 가끔 비명만 지를 뿐이다.
덧. 사실 이 영화는 몹시 인간 중심, 그러니까 지배자 중심의 영화다. 유인원이 유인원들끼리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게 말이 되나. 게다가 시저가 인간과의 공존을 믿는 이유는 개인적 경험에서 나온다. 어릴 때 자신을 돌봐줬던 과학자에 대한 좋은 기억이다. 과학자한테 말을 배우던 동영상을 보고 시저는 향수를 느낀다. 이런 개인 기억에 기반을 둔 가치관에 따라 표를 던지는 게 유권자의 속성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