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프닝을 보는 순간 왕가위표 영화라고 외치게 된다. 왕가위표란 딱지는 감독한테 찬사일 수도 있지만 진부하다는 의미도 들어있을 수 있다. 그의 영화들을 보고 한 때 설레고 열광했기에 이미지를 다루는 익숙한 방법을 보면서 즐겁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무언가에 열광 후에는 그 무언가에 익숙해질 수 밖에 없는데 열광 후의 일련의 과정들은 열정을 식게도 만든다. 사람관계만이 아니라 열광하는 모든 대상은 이런 비운을 감내해야하는 듯. 게다가 나도 나이가 들지만 감독이 나이가 드는 게 더 문제인 듯. 이십대를 자극했던 감수성이 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얕은 세계관을 드러낼 때는 참을 수가 없어진다. 이 영화는 간신히 참을 수 있다. 왕가위 감독이 '한 때' 잘 다루었던 살짝 미끄러지는 미묘한 감정들을 부활시킨다. 근데 깊이가 없네...ㅠ 감독이 너무 해피하게 지내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추측을.

 

2.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무술 씬들이다. 감독의 장기인 느린 이미지들로 구성되고 전체 동작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손이나 발이 움직인 후에 남는 잔상을 길게 크게 카메라에 담는다. 보통 무술씬이나 액션 씬들이 속도감을 사용한다. 왕감독은 느린 호흡으로 이미지를 잡아내면서 싸움이 아니라 예술의 영역으로 무술 후의 잔영들을 끌어올린다. 가격을 받을 때 인물의 표정이나 눈빛을,  왕감독이 아니면 누가 이렇게 설레고 슬프게 잡아낼 수 있을까.

 

왕조위는 꽃중년으로 여전히 살아있다. 왕조위가 송혜교를 바라보는 눈빛은 정말이지 최고..ㅠㅠ

그런데 진부한 내레이션과 인물들에 대한 설명은 대서사시를 표방하는 시나리오인데도 스케일이 작아보인다. 이런 점이 매우 아쉬운 점이다.

 

3.

중국무림사에서 감동을 발견했다. 아무리 무술로 상대와 겨뤄서 승리를 목표로하지만 무림계에서도 법이 있다. 지면 깨끗하게 항복하는 것. 이런 미덕을 이제야 발견하다니. 패배를 인정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는 일은 정말 신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무협영화에서 옹호하는 폭력의 정당성에 대해 언제나 반대해왔다. 하지만 가시적, 비가시적 폭력을 보는 게 일상적으로 보다 보니 폭력에는 어떤 규칙도 법도 없고 개인의 이익만이 존재하는 걸 봐 왔다. 폭력에 비폭력으로 저항했던 간디가 왜 위인 반열에 올르게 되었는지 차츰 알아가고 있는 중이고. 어제 영화를 보니 무림계는 패배에 대한 규율이 엄격하다. 무림은 힘의 논리지만 무술에서 이기려면 힘과 기술만이 아닌 성찰적 사고까지 요구하는 통합적 세계를 추구한다. 무협 세계의 매력을 이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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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8 21: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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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0 10: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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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2 14: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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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9 13: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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