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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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같은 주제에 대한 논문과 소설의 가장 큰 차이는? 논문이 한 명제에 대해 구체화하는 일이라면 소설은 일반화다. 2차 세계대전 중 드레스덴에 참전했던 기억을 논문이었다면 사건을 훨씬 더 구체화 했을 것이다. 그러나 커트 보네거트는 소설가다. 자신이 느꼈던 것을 다른 사람도 느끼게 하는 임무를 맡고있다. 공감..소설가의 의무이면서 특권인데 커트 보네거트는 공감을 끌어낼 줄 안다. 전쟁의 야만성을 표현하는데 읽고 나면 섬뜩하다. 전장에 나와있는 군인들의 지저분한 얼굴을 닦고 면도를 했더니 아이들이 있었다고. 소설이란 장르를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이유다.

프롤로그처럼 시작하는 첫부분을 읽으면서 사뭇 무거웠고 착각했다. 책장을 조금 더 넘기면서 헷갈리기 시작했다. 시간에서 해방되었다는 데 빌리 필그림은 정작 자신을 시간 발작환자로 여긴다. 빌리의 동선을 따라가기가 벅찼다. 몽타주 기법으로 이어지는 시간여행 때문에 나도 시간 발작증 환자가 되게 아닌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서 빌리가 이끄는대로 따라가니 느긋해지면서 빌리의 말이 귀에 들어온다. 별날 것 없는 일상어로 커트 보네거트는 관조적 색채를 빚어낸다.

"트랄팔마도어에는 전보가 없어요. 하지만 당신 말은 맞았소. 각각의 기호 모둠은 짧고 급한 전문이오. 상황과 장면을 묘사하고 있지. 우리 트랄파마도어 인들은 그것들을 하나씩 차례대로 읽지 않고 모두 동시에 읽어요. 그 모든 전문들은 아무런 관련이 없소. 저자가 모든 것을 동시에 보면 아름답고 놀랍고 깊은 생의 이미지가 드러나도록 신중하게 선택했다는 것만 빼면 말이오. 거기에는 시작도, 중간도, 끝도, 서스펜스도, 교훈도, 원인도, 결과도 없소. 우리 책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점은 수많은 경이로운 순간들의 깊은 속을 일시에 들여다볼 수 있다는 거지"(108)

이 소설의 구성을 낯설어 하는 사람에게 해 주는 말이다. 짧은 문장들을 들여다보면 삶의 진리와 깊은 진실이 드러나있다. 커트 보네트가 빌리 필그림을 통해 안내하는 길을 걸으며 공감이라는 작은 행복을 찾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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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중위의 여자 Mr. Know 세계문학 11
존 파울즈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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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금까지 이 책이 연애소설인줄로만 알아서 읽지 않았다. 마땅한 소설을 발견하지 못한 와중에 주문하고 배달받고 나서도 한참을 처박아두었다. 그러다 요즘 몸살 기운 때문에 빈둥거리다 집어들었는데..오, 고전의 명성이란 바로 이런 거지!!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다. 다 이 제목, 그리고 영화 때문이야, 탓하면서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에 읽는 즐거움을 누렸을텐데..변명도 늘어놓아본다.

제목이 프랑스 중위의 여자, 사라지만 사라는 다른 등장 인물들처럼 찰스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산파역할만을 할 뿐이다. 몰락해가는 귀족 신사인 찰스는 아무리 쇠락해가도 귀족은 귀족인 법. 빅토리아 시대의 관습하에서 무서운 속도로 부상하는 신흥부르주아마저도 선망하는 귀족인 것이다. 자본이 빠른 속도로 몰락한 귀족의 지위를 먹어치우고 있지만 관습법과 자본 사이에는 미묘한 알력이 존재한다. 찰스의 장인이 될 뻔한 프리먼과의 대화에서 서로의 입장에 대해 갖는 견제는 19세기 후반의 격동을 잘 알 수 있다.

찰스는 독특한 인물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이중성을 온전히 담아내는 전형적 인물이다. 관습, 즉 익숙한 길을 권태스럽게 걸어가고자 하는 속성과 사라, 즉 일탈을 통해 다른 세계로 닿는 접점을 찾으려는 성향. 이런 양면성은 찰스만의 본성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이다.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도 있었다. 그러니까 영국의 미스터 보바리인 셈이다. 미스터 보바리는 열정에 희생당하지는 않는다. 그는 신사니까. 또 파울즈는 프랑스인이 아니라 영국인이니까. (음..찰스는 내 말에 분노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파혼을 하고 무엇보다 명예를 잃었는데 내가 희생자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찰스의 전부일 수도 있는 명예에 대한 개념이 21세기 소시민인 독자에게는 희미하다. 원본과 가짜를 구별할 수 없는 현대에 19세기적 잣대로 원본의 고결함을 보존하지 못한 수치를 이해하는 건 사실 좀 힘들다. 그러니 난 찰스가 모든 것을 잃었다고 말하는데 대목에서 동의하지 못한 채 멀찌감치 떨어져 그를 19세기 속에 나오는 인물로 보았다.)

이 책이 역사 메타픽션으로 풍부한 텍스트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지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은 역시 사라와 찰스가 만나는 장면이다.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들은 마치 어린날 가슴을 콩닥이며 읽었던 하이틴 로맨스같다. 사라의 심리보다는 찰스의 심리에 무게중심을 두고 추처럼 왔다갔다하는 묘사. 게다가 기차 안에서 찰스와 만나는 파울즈라니! 오늘날 볼 수 있는 내레이터들의 많은 시점의 원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런 독특한 명작을 이제야 읽다니...

또 하나. 두 사람의 사랑. 과연 그들은 사랑했을까. 그들은 사랑을 사랑한 건 아닐까, 특히 히 사라는. 찰스의 입장에서 사라는 자신과 동등한 피조물이라는 데 놀라고 걷잡을 수 없이 끌리지만 사라는 찰스는 관습을 거슬러 살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 타진이었을 수도 있다. 물론 그녀는 그런 의도를 의식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사랑은 결혼이나 결합으로 깨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걸 보면 사랑을 지키려고 했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찰스가 기꺼운 마음으로 사라의 선택을 수긍하진 않더라도 존중은 해주었으니 말이다. 난 사랑 예찬론자인가, 비관론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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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노동의 이유를 묻다 주니어 클래식 6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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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니어 클래식이란 타이틀을 달고 나왔는데 주니어 뿐 아니라 성인에게도 아주 훌륭한 입문서다. 자본주의의 탄생과 변화를 쫒으면서 심리적 동기를 찾으려는 베버를 쉽게 풀어썼다. 뒤늦게 베버를 읽으려고 마음 먹고 있던 차에 저자 덕분에 한결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2. 자본주의 생성을 종교라는 문화적 맥락에서 본다. 종교개혁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이 등장하면서 성서 해석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등장했다. 종교개혁 이후의 신교의 분열을 간략하게 정리했는데 읽으면서 저자가 그랬듯이, 나도 내 이십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종교에 관한 책들로 씨름했 지만 아무 것도 몰랐던 그 때로. 지금도 역시 아무 것도 모르겠지만 맞아 그랬었지..하는 반가운 끄덕임 속에 다시 한번 간략한 계보를 홅을 수 있어 즐겁다.

21세기에 종교는 지름신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노동은 프로테스탄트들에게는 구원의 수단이었다면 소비사회에서 노동은 지름신을 받들기 위한 행위로 전락한다. 시간은 돈이라는 등식은 현대인에게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당연한 명제다. 3부의 현대 사회에 관한 글은 사실 조금 약하지만 주니어 클래식이란 점을 생각하면 태클걸고 싶지 않다.

3. 난 참 이율배반적 인간이다.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형 인간이다. 내 생업도 자본주의형 인간들의 심리를 이용해서 시간과 지식을 파는 거다. 그들의 심리를 부추기기도 한다. 때로는 내 노동력에 감사하지만 때로는 내 노동력에 혐오를 느끼기도 하는 싸이클을 반복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그렇듯, 노동에 대해 현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전근대적(저자의 말에 따르면, 살만큼만 일하면 된다는)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 내 분열적 삶은 바로 노동에 대한 서로 상반되는 이중적 가치 때문에 생긴다. 한편으로는 노동에 매진해서 지름신의 신도가 되고 싶기도 하지만 한쪽에서는 지름신에 대한 저항이 존재한다. 남들과 같고 싶지 않은 자의식이 저항의 양분이다. 부를 위해 일하는 이들은 자본주의 하급 개념에 영혼을 갉아먹히고 있다. 그들을 보면서 내가 하는 일은 영혼을 파는 이들을 피하는 수동적 자세를 취한다. 나 역시 자본주의에 순응하고 이용하는 인간이면서 말이다. 그래서 때때로 괴테의 말에서 위안을 삼는다.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적어도 나는 노력은 하고 있잖아,하고 비겁하고 게으르게 자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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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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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소설을 읽으며 늘 궁금한 게 있다. 왜 그의 소설들은 이기호나 김경욱의 소설보다도 더 인기를 얻는 것일까. 김영하의 소설은 물론 재미있다. 이기호와 김경욱의 소설의 재미에 관해 말하자면 김영하에 비할 바가 아니다. 게다가 삶에 대한 통찰력도 있는데 말이다. 사람들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읽은지 두 주가 돼가는데 흔적을 남기지 않아 서가로 가지 못한 채 책상 위에 누워 뒹구는 책을 오늘은 집어넣으련다. 퀴즈쇼는 유감이 많다. 소녀 취향적이라고나 할까. 화자인 이민수는 엄마 얼굴도 모르고 할머니 손에서 자라 자기 밖에 모르는 여친과 헤어진 후 인터넷 퀴즈방에서 만난 서지원과 만난다. 서지원은 이민수의 모성 결핍을 돌봐준다. 이 무슨 시츄에이션이냐.

작가의 말에서 이십대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면서 썼다고 했다. 이십대일 때는 그 아름다움에 대해 모르지만 지나고 나면 가장 아름다워서 평생 그리운 때일게다. 젊음이라고 총칭하기에는 특별한 무엇이 있다. 가능성이 충만하고 열정으로 가득 차 자칫 오만으로까지 보일 수 있는, 미래를 걱정하지만 실제로는 질주하지 못하는 그런 연령층. 내 이십대를 돌아보면 불안했지만 불안의 실체를 몰랐고 꿈을 꿀 수 있었고 사랑도 했었다. 당시에는 풍요롭다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두고두고 꺼내보게 되는 그런 시절.

민수는 자발적 백수로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어른 아이다. 시간이 흐르는대로 살아왔다 더 이상 시간의 흐름대로 살 수 없는 계기를 맞이한다. 유감스럽게도 할머니의 죽음과 함께 그의 손에 떨어진 경제적 압박이다. 세상으로 나와 몸을 움직여서 밥값을 벌어야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준비되어 있지않고 경제적 시각에서 보면 잉여 인간에 편입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불안의 정체 중 한 요인일 수 있지만 민수는 그런 걸 고민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고시원 옆방에 살면서 9급 공무원 준비를 하는 옆방녀를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으니까. 그가 유일하게 관심있고 자신있는 게 퀴즈인데 퀴즈란 인간의 다른 많은 일들처럼 상당히 정치성을 필요로 한다. 답을 안다고 다 맞출 수 있는 게 아니다. 타이밍과 상대의 심리를 읽는 등, 변수를 활용할 줄 알아하는 게 퀴즈다. 어떤 면에서 다른 모든 인간사보다 잔인할 수 있다. 진심이 통하지 않는 게임일 수 있으니까. 민수는 빨리 퀴즈의 원리를 알아차리지만 상황은 달라진 게 없다. 민수는 달리지 못하고 계속 제자리를 걷고 있다.

이십대의 특권 중 하나는 빈둥거리며 제자리 걸음을 해도 이해받을 수 있다는 거다. 잉여 인간으로 마무리하지 않을 거란 기대가 이십대에는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민수가 사랑을 받는 이유도 이러할 수 있지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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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 모티브북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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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class이란 말은 맑스주의의 죽음과 함께 모호해졌다. 오늘날 계급 담론을 이야기하면 구시대의 유물처럼 보인다. 물론 한 개체군을 계급이란 말로 묶기에 사회가 다양해지고 무한 증식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계급이란 말 자체가 모호한 거 같다. 벨 훅스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광고나 대중문화는 가난한 사람도 부유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물건을 사용하면 그들과 같아질 수 있다고 부추기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지금 계급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헛된 인식을 강화하고 있다."

벨 훅스에 따르면 계급은 여전히 존재하며 은폐될 뿐이지만 벨 훅스가 계급에 관한 정의는 아쉽게도 명확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급은 성gender과 인종을 포함하는 가장 포괄적 의미를 지닌 말로 사용되고 있다. 성 담론과 인종 담론이 맑스주의가 죽은 후에 등장한 걸 보면 계급 담론은 성과 인종의 담론의 뿌리일 수 있다.

벨 훅스의 개인적 경험은 이 모든 담론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흑인 여성이고 빈민층이었던 저자는 여성주의 내에서 권력의 역학을 비판하고 수적으로 미국 대부분의 빈곤층을 차지하는 백인들은 간과된 채 흑인=빈곤층이라는 인식을 퍼트린건 언론이라고 한다. 미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백인 빈민은 투명인간으로 여겨진다. 즉 흑인 빈민층과 백인 빈민층은 동급으로 보기보다는 흑인 문제로 귀결짓는 논리가 미국사회에 퍼진다. 즉 인종 담론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성과 인종 뒤에 숨어있는 계급 담론을 끄집어내는 것은 벨 훅스에게는 당연할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 계급 담론을 적용할 때 더 애매해진다. 우리 사회에서 특권층의 개념은 무엇인가? 상류층의 개념은 무엇인가? 부의 크기? 권력의 크기? 부와 권력은 함께 오지 않나? 뭐 이런 공식을 끄적거리다 보면 계급란 말은 뿌옇게 흐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계급 의식이 들어있다. 계급 사다리를 올라가려는 욕망이 사회 전반에 퍼져있다. 부동산 과열, 사교육 팽창이 사다리를 올라가기 위한 대표적인 티켓이다.

영어회화 학원을 다닐 때였다. 강사가 뉴욕커였는데 한국인들이 수십만원 짜리 핸드폰을 사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오십만원 짜리를 살거면 이십 오만원 짜리를 사고 이십 오만원을 다른 사람을 위해 쓰면 되지 않는가라고. 백만 번 옳은 말이다. 오십만원 짜리 핸드폰이 뭐가 필요한가.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란 말이다. 나를 위해 백만원이 넘는 가방은 쉽게 사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 십만원 기부하는 일은 좀처럼 내리기 어려운 결정이다. 이런 일이 사회적 약자들과의 연대를 위한 첫걸음이라는 걸 알지만 말이다. 그럼 왜 이런 부조리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가. 벨 훅스는 이렇게 말한다. "부가 위험한 것은 사람을 나쁘게 만들어서가 아니라 자기 밖에 모르는 병적인 자기도취 상태에 빠트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

부동산을 탐욕과 부의 축적 수단이 아니라 더불어 살 수 있는 곳으로  바라보고, 교육을 계급상승을 위한 문으로 보는 게 아니라 권력을 가진 타인에게 조종 당하지 않고 비판적 시각을 갖고 주체적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란 의식이 자리잡을 때 계급이란 말은 진짜로 죽은 말이 되겠지.

곧 서울시 교육감 선거가 있다. 교육감 후보들의 주장은 사교육을 줄이면서 공교육의 기능을 강화하는 데 만장일치한다. 입시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공교육의 강화는 입시기능의 강화라는 건 뻔한 일이다. 고로 사다리적 기능에는 모두 의견이 일치한다고 하겠다. 계급 사다리를 걷어차는 건 요원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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