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모메 식당 - Kamome D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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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없던 어린 시절에는 친구란 어때야 한다는 기준란게 있을 턱이 없다. 그래서 쉽게 친구가 된다. 집 방향이 같으면 집에 함께 오면서 친구가 되었고 영화를 좋아하면 함께 보러가서 친구가 되었다. 또 같은 라디오 채널을 들으면 친구가 되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서는 친구를 사귀는 게 쉽지 않다. 집 방향이 같거나 취향이 같다고 친구가 되지 않는다. 이따금씩 여행을 함께 하는 이도 있지만 친구라고 선뜻 안 부른다. 직장 동료라고 하거나 다른 좀 더 구체적인 호칭으로 말하게 된다.  

세상물정을 알면 알수록 사람에 대한 예의없는 사람이 싫다. 적어도 예의를 갖추려고 노력한다. 난 상대가 싫어하는 일은 되도록이면 묻지말자주의다. (이런 게 예의라면) 누구나 언급 안 하고 싶은 부분이 있기마련이다. 이런 적절한 거리는 둥글둥글한 인간관계를 만드는 데 참 편한 면이 있다. 그리고 서로의 이미지는 매우 긍정적이다. 잡다한 찌질한 이야기를 생략한 결과다.  

<카모메 식당>은 어른을 위한 동화이다. 어른이 어떻게 친구가 되는가를 보여준다. 사치에는 차려놓은 식당에 손님이 없어도 걱정하지 않는다. 미도리는 지도를 찍어 날아온 곳이 핀란드고, 짐을 잃어버린 여자는 집에 안 돌아갈 구실을 찾고 있다. 세 일본인이 핀란드에서 만나 친구가 된다. 그들은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즐거움과 고통을 고쳐 핀란드에 왔는지 묻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헬싱키에서 만났고 언어 장벽이 없는 같은 국적 사람이라는 것이다.  카모메 식당에 일손이 필요하고 이들은 시간이 있지만 딱히 할 일은 없으니 잘 됐다.  

미도리가 사치에한테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일본으로 돌아가면 혹시 섭섭해할 건가요? -글쎄요. 난 원래 혼자였어요. 사치에의 대답에 미도리는 살짝 살망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치에는 헬싱키에서 만난 친구들이 없어도 잘 살 것이다. 퓨전보다는 전통 오니기리가 더 승부수를 가진 메뉴라고 믿는 사람이니. 카모메 식당이 구질구질한 사연을 늘어놓지 않아서 좋기도 했지만 또 그래서 이프로 부족한 어른을 위한 동화로만 받아들여진다.  

어른-나-이란 참 상황을 복잡하게 생각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는 성찰한다고 착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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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부르는 파리 - Pari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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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토요일 서울신문사 앞. 버스는 길가에 종대로 서 있는 전경버스 틈사이에서 멈춰섰다. 전경버스 틈새를 비집고 인도로 나오자 거리에 깔린 전경들이 행인보다 더 많았다. 익숙하고 낯설었다. 이십대 초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과거에 내가 전경들 또래였다는 것.  횡단보도를 찾느라 이리저리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시야에는 온통 닭장차. 하늘도 길도 모두 닭장차가 조각내고 있었다. 코리아나 호텔 뒤에 있는 광화문 스폰지까지 걸어가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대로변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고요하고 평온했다. 내 마음 속 동요도 가라앉고 대로변의 풍경을 멀리 밀어낼 수 있었다.  

영화는 파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이방인에게는 파리는, 특별한 소풍지이지만 그 공간에서 일상에 부딪치는 사람한테는 서울과 다름없다.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이 있고 교통사고가 나서 죽는 사람도 있고 하룻밤 즐겨볼 생각으로 이성에게 추근대는 사람도 있다. 또 혼자 아이 셋을 키우며 직장생활하느라 건조해져버린 사람도 있고 구조조정에 일자리를 잃어서 고민하는 사람, 어린 제자를 사랑하게 된 나이 든 교수도 있다. 그 누구의 삶도 녹록해보이지 않는다.  

밤마다 에펠탑은 반짝이며 시선을 끌고 사크뢰 쾨르 성당 앞은 햇살로 넘쳐나고 곳곳에 있는 카페는 낭만적 삶까지는 아니어도 낭만적 이야기 정도는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같은 환상을 심어준다. 엽서나 사진에 담긴 사진이나 스크린을 통해 전달되는 이미지는 환상의 씨앗이다. 사진이나 이미지 속에 우리가 들어갈 수 없으니까. 서울이란 도시가 환상을 줄 수 없는 이유는 내가 들어와있어서다. 사진이 아니라 내 눈과 귀가 서울을 신문이나 잡지가 보여주지 않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다. 축복이면서도 악몽같다. 성공률이 사십 퍼센트, 즉 실패률이 육십 퍼센트인 심장수술을 받으러 가는 한 젊은 남자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어찌됐건 살아있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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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를 리뷰해주세요.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 - 한두 줄만 쓰다 지친 당신을 위한 필살기 이만교의 글쓰기 공작소
이만교 지음 / 그린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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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다보면 글을 쓰고 싶다는 겁 없는 생각이 든다. 밑줄을 긋는 독자에서 밑줄을 그을 만한 문장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다. 그러면 비극은 시작된다. 처음에 열독의 세계로 들어간다. 열독을 하면 할 수록 패기와 용기는 사라지지만 욕망은 부풀대로 부풀어서 줄어들지 않는다. 소비사회에서는 소비자가 왕인데 독서의 세계에서 소비자의 위치를 바꾸어 놓는다. 독서세계 소비자는 이게 마음에 안 든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글쓰기 작법서를 발견한다.

글쓰기 작법에 관한 책을 찾아 읽는 심리는 점쟁이를 찾아가는 심리와 같다. 내 단점과 장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제 삼자의 입을 통해 확인받고 싶은 심리다. 덕담은 힘이 될 수 있고 악담은 조심할 수 있어서 긍정적으로 이용하면 좋을 그런 팁. 글쓰기 작법책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훌륭한 작법서를 열독해도 훌륭한 글을 쓸 수는 없다. 나도 훌륭한 글을 쓸 수 있으며 아직 늦지 않았다는 용기를 얻을 뿐이다. 이 책의 부제-한두 줄만 쓰다 지친 당신을 위한 필살기-가 적나라하게 알려주듯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용기를 주는 책이 어디 흔한가. 대부분의 훌륭한 작품들은 용기를 꺾기만 하니까.  

저자는 글쓰기의 자세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한다. 글을 쓰려는 목적과 동기를 돌아보도록 권한다. 글쓰기 행위에 대해 "자발적이고 잉여 에너지고 즐거운 질주"라고 한다. 자발적이고 잉여 에너지는 맞지만 즐거운 질주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잉여 에너지가 과도해서 일종의 고상한 허영vanity으로 응집되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내 경우다. 얼마 전에 누군가의 리뷰를 읽었다. 더 이상 리뷰를 쓰지 않는 이유에 관한 짧막한 글이었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독서라는 게 세상을 바꿀 수는 물론 없고 그렇다고 자신의 생각과 생활방식을 바꿀 수도 없다고 했다. 독서하라고 권할 수도 없다고 했다. 책을 읽는 건 일종의 취향으로 전락했다. 돈이 생기면 명품 가방이나 차를 사는 대신 책을 사고 스스로 형이상학적이라 여기는 또 다른 쾌락 행위 밖에 될 수 없는 거 같아 리뷰를 더 이상 쓰지 못하겠다고 했다. 이 자조적 글에 깊은 공감을 느끼고 어쩌면요...하고 낯선 사람의 글이 반가웠다. 독서든 글쓰기든 업이 아닌 이상 이런 잉여 에너지가 필요조건이면서도 자괴감에 빠뜨리는 근원이기도 하다. 혼자만의 즐거움에 몰입한다는 계몽주의적 죄책감이라는 늪에 빠지곤 한다.

책 얘기를 조금 하면, 대개의 글쓰기에 관한 책 속에는 도움이 안 되는 부분도 많지만 긍정적 시선으로 보면 도움이 되는 부분을 반드시 담고 있다. 이 책은 소설 습작 과정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소설 쓰기가 목적이 아니라면 지루할 수 있지만 조금만 인내심을 발휘하면 비타민 같은 방법을 제시한다. 독서 방법 부터 시작해서 실제로 글을 쓸 때 주의해야 하는 표현 방법에 대해 눈을 뜰 것을 알려준다. 같은 경험이나 사건을 전달할 때 읽는 사람의 공감을 깨우는 전달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예시한다.  지금은 독서 직후라서 내 머리속에 선명히 남아있지만 내일이나 모레가 되면 밑줄 그은 문장들은 희미해지고 곧 사라질 것이다. 나는 또 다른 작법서를 발견하고 똑같은 생각을 할 테지. 나 같은 독자가 있어 여러 가지 작법서가 빛을 볼 수 있으니까 책 탄생에 조금은 기여를 한다고도 할 수 있겠지.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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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디 - Can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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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케이블 채널 번호는 어떤 예고도 없이 바뀌기 일쑤다. 오락 채널 찾느라 한참 버튼을 누르고 즐겨 찾는 채널 번호를 암기할 만하면 또 번호가 홀딱 바뀐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참 공급자 중심적 발상이다. 이번에 화면 상단에 뜬 안내 문구에는 디지털 작업 어쩌구 저쩌구 적혀 있었는데 용서가 되는 게 안 나오던 채널이 몇 개 더 나온다.ㅋ 그 중 하나가 screen이란 채널이다. CGV나 OCN 같은 영화 전문 채널이라고 선전하는데 자정만 넘으면 영화라고 볼 수 없는 19세용 성인 영화를 줄기차게 내보낸다. 주로 자정 이후에 TV를 보는 내게는 CGV나 OCN은 쓰레기 채널이다. 새로 추가 된 SCREEN 채널은 그 보다는 조금 낫길 바라며 실제로 그런 거 같다.-광고도 딱 한 번만 했다-어제 <캔디>를 틀어줬다.  

극장 상영할 때도 찾아가서 볼 만큼의 흥미는 아니지만 누워서 볼 정도의 관심은 지니고 있었다. 영화 내용은 간단하다. 마약에 빠진 커플의 마약과 같은 사랑이다. 사랑도 마약도 빠져나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사랑은 일단 빠져 나오면 추억으로 남지만 마약은 빠져 나와도 유혹으로 남는다.  마약이 철저히 규제되는 한국에서 마약에 관한 영화에 감정을 이입하는 건 쉽지 않다. 서구에서 마약은 더 보편적 사회문제이니 종종 마약의 험난함을 다룬 영화가 나온다.  

영화는 단촐하면서도 환각 상태에 빠질 때 삽입 된 몽타주는 강력하고 아름답다. 몸은 축 늘어져 침대에 있는 데 정신은 천국을 훨훨 날아다니는 표현 방법. 아마도 저런가보다, 하고 미루어 짐작한다. 마약에 빠지는 이들은 보통 사람보다 의지가 약하고 그 이유는 영혼이 더 가녀리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영화를 보면서 저자 미상인 <Go Ask Alice>란 책이 떠올랐다. 실제 있었던 열 다섯 살 소녀의 슬픈 일기다. 사춘기에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산층에 속하는 부모와도 소통하지 못해 우연히 마약에 손을 대고 가출을 하고 마약과 갱생을 반복한다. 소녀는 결국 중독이란 고리에 질식당한다. 이런 줄거리보다 소녀의 내면 고백을 통해 얼마나 겁을 먹는지 일반인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다. 늘 마약의 달콤함에 노출에 두려워하고 달콤함을 뿌리치지 못하는 데 절망하는 소녀의 일기는 어둡고 처절하다. 표지를 넘기면, 이 책이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지만 삶에 대한 통찰력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는 편집자의 말이 쓰여있다. <캔디>란 영화 역시 어떤 해결책이나 섬세한 내면을 보여주진 못하지만 적어도 이미지를 통해  지옥을 예측할 수 있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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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 Happ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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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 바르다 특별전이 열리는 아이공에 가야지 했지만 내 발목을 붙잡는 게으름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받아 논 파일로.-.-; 

1. 64년 작품인데 지금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는 프레임들로 가득하다. 아니 오히려 한 편의 아름다운 뮤직비디오 같기도 하다. 문득문득 정지하는 화면들은 멋진 스냅사진들이다. 풍경도 내러티브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가령, 프랑스와가 일하는 목공소는 아름다운 영상덕분에 오히려 굉장히 비현실적이다. 나무를 자르거나 마감하는 과정에서 소음과 톱밥으로 가득 차 있어야할 작업장은 음악이 깔리면서 프랑스와가 자신이 하는 일을 즐기는 걸 알 수 있다. 화면에서 보여 준 작업장이라면 누구라도 나무를 재단하는 고된 일을 재밌게 여길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와가 가족들과 함께 소풍을 나가는 장면 역시 후기 인상파의 그림처럼 빛이 넘친다. 아낌없이 베푸는 햇살을 받으며 두 어린 아기들이 낮잠을 자고 부부는 사랑을 나눈다. 친환경적 여가에 웰빙이란 말이 저절로 떠오른다.  

또 우체국 직원의 집은 갇힌 공간인데 감독은 역시나 환상적으로 만든다. 집은 조그맣지만 생활 공간 보다는 마치 한 폭의 정물화처럼 표현한다. 탁자는 식사를 위해 존재하기 보다는 꽃으로 그득한 꽃병을 돋보이기 위한 도구이다.  

2. 영화 중반부터 드러나는 독특한 세계관에 미소가 퍼지고 자세를 고쳐앉았다. 영화 전반부는 별 다른 사건 없이 프랑스와와 테레즈 부부의 행복한 삶을 묘사한다. 프랑스와는 더할나위 없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 우체국 직원을 만나 바람을 피우면서도 죄책감 따위는 없다. 우체국 직원 역시 도덕적 의무감이나 죄책감 따위는 없다. 그들이 동의하고 알고 있는 건 서로를 사랑하는 것. 프랑스와는 아내인 테레즈에게 거짓말 하고 싶지 않다며 이렇게 말한다. "꽃이 가득한 아름다운 과수원 밖에 또 아름답게 핀 꽃이 있어."라고! 과수원 안에서도 행복하지만 밖에 있는 행복을 받아들이는 게 당연하다는 말씀되시겠다.  

명쾌한 논리지만 받아들이기에는 낯설다. 그렇다고 일부다처제를 주장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일부일처에 길들여진 사회에서 프랑스와와 그의 연인은 혁명가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아내 떼레즈는 과수원 안의 사회에 익숙했고 결국 일부일처제를 혼자라도 따르기로 한다. 그녀가 가버린 후 남은 남자와 여자는 다시 과수원 안에서 행복을 이어간다. 극심한 주관적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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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7 0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넙치 2009-05-17 23:47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현대인들님 서재명이 '행복'이더군요.^^
아이공에서 구할 수 없는 영화들을 하더군요.
군침을 꿀꺽 삼키고 있지만 홍대 앞까지는 너무 먼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