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광하는 스포츠 은폐된 이데올로기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7
정준영 지음 / 책세상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박찬호 경기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박세리 경기, 이제는 박지성 출장이 스포츠 면 탑 기사이다. 우리는 야구, 골프, 축구를 소비하도록 길들여져왔다. 이제 새로운 분야인 피겨 스케이팅에 눈을 돌리고 많은 사람들이 피겨 스케이팅 기술에 일가견이 있다. 그들이 우승할 때 많은 사람들이 함께 기뻐한다. 마치 내 가까운 사람이라도 되기라도 하는 것 같다.  

스포츠는 일종의 소비 상품이 되버린지 오래다. 운동선수들은 연예인과 마찬가지로 일반인의 쾌락을 위해 개인적 기호나 사생활을 노출한다. 그 댓가로 기업의 후원을 받는다. 김연아 립스틱, 김연아 에어컨이 판매된다. 김연아의 경기를 한 번도 제대로 본적 없지만 소비시장에서 김연아는 상품 제조사보다도 또는 상품 브랜드보다도 더 강력하게 소비자의 선택권을 좌우한다. 어차피 기능이 비슷하다면 김연아가 선전하는 상품을 고르는 게 소비자의 심리다.    

스포츠 소비자는 물리적으로는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다. 지불해야하는 건 많다. 적어도 관람을 위해서 취해야 하는 일련의 것들이 있고 무엇보다도 시간을 내야한다. 현대 시장경제에서 시간은 돈인데 스포츠 소비자는 얻는 것 없이 시간, 즉 돈을 지불하는 데 자발적이다. 일종의 공연을 보는 행동과 같다. 한 가수의 콘서트에서 기대하는 게 심리적 즐거움이듯이 스포츠 경기도 마찬가지다. 스포츠는 액션 영화가 주는 쾌감 지수와 맞먹는 스펙터클을 제공한다. 실시간에 벌어지는 예측불가능성에 대한 긴장과 박진감이 판에 박힌 일상을 잊게 한다.   

경기는 일시적이어서 시즌이 끝나면 소비자들은 아쉽지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스포츠는 일상적 규칙 밖에 있는 규칙으로 이루어진다. 일상적 규칙을 다른 규칙이 지배하도록 허락하는 또 다른 일상의 변주다. 자극적이지만 안전해서 일상을 파괴하지 않는 규칙의 합을 스포츠는 가지고 있다. 내년에 월드컵이 개최된다. 은근히 기다려진다. 월드컵에서 누가 이기건 일상에 아무런 변화가 없겠지만 실시간이라는 박진감과 흥분이 일상의 권태와 불안을 잠시 잊을 수 있게 해 줄 수 있을 테니.

새로운 이야기는 없지만 한 번 읽어볼 만한 가치는 있는 책이다. 스포츠가 아직도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이 큰 자극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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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아라베스크 - 한 점의 그림으로 시작된 영혼의 여행
퍼트리샤 햄플 지음, 정은지 옮김 / 아트북스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마티스의 그림 한 장으로 여행을 시작하게 되는 여행기다. 마티스나 들라크루아가 찾았던 오달리스크의 의미를 추적한다. 여행자만이 느끼는 흘끗봄glance(아마도)에 대한 긍정성을 이야기 한다. 흘끗보기를 통해 오달리스크가 일어난다. 화가들의 그림에 종종 등장하는 달리스크는 일상이 아닌 것에 대한 동경으로 해석한다. 미네소타 출신의 한 백인 여성이 지중해지방을 여행하면서 갖는 오달리스크를 궤적을 따랐다. 그림을 씨실로 삼아 여행 스케치를 짜낸다.  

벌써 10년 전이다. 로마에 갔을 때다. 9월 초였다. 햇볕은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뜨거웠고 인구밀도는 현재 서울같았다. 버스에서 원하는 정류장에서 내리는데 사람들 속에서 큰 소리로 세워달라고 외쳐야 했고 사람들을 비집고 나와야했다. 사소한 일에 온 힘을 쏟아야 하는 게 여행이 아니라 일상 공간에 있는 거 같아 로마는 정나미가 떨어지는 곳이 돼버렸다. 그러다 엽서 한 장에 마음을 빼았겼다. 엽서 속 풍경에는 사람도 없고 차도 없었다. 해질녁 볕이 고즈넉한 돌길을 비추고 있었다.  

엽서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엽서 뒷면에 Old Appica Way라고 각국 언어로 쓰여있었다. 가지고 있던 여행 책자를 뒤적여보았다. 안 나와있었다. 로마 교외선에서 이 역을 발견한 것 같다. 일단 교외선 열차에 올랐다. 국철처럼 낡았지만 로마 시내를 빠져나갔다. 짜증이 사라지고 설레임과 두려움이 찾아왔다. 물어물어 엽서 속 장소에 도착했다. 폼페이보다 보존이 잘 된 유적지였다. 난 유적지를 찾아온 게 아니라 고즈넉한 길을 찾아 헤맨 거였기에 엽서 속 사진이 주었던 오달리스크는 없었다. Old Appica Way를 걷고 있었는 데 말이다. 엽서 속 사진에서 흘끗보기가 실재로 들어오는 순간 오덜리스크는 환영이 되어 저 멀리 달아났다.  

도처에 오달리스크를 남겨두려면, 알랭 드 보통이 말했듯이, 집이 최적의 장소이다. 일상적 공간에서 모든 것은 새롭고 신선한 오달리스크니까. 그런데 진리를 잊고 자꾸 일상을 벗어날 꿈만 꾼다. 꿈꾸는 시간만은 모든 게 신선한 오달리스크가 되고 위안이 된다. 비록 나중에 경험이란 게 오달리스크를 산산이 부숴도 힐끗보기를 계속한다.  

덧. 얇은 책인데 읽는 데 오래 걸렸다. 번역 때문이다. 번역이 힘든 것에 비해 가치없는 일인지 알기에 왠만하면 안 투덜거리려고 노력하는 데 이 책 번역은 불쉿이다. 역자는 이 책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단순히 사전적 단어 집합체로 문장을 만들었다. 나중에 좀 더 나은 번역이 나오면 좋겠다. 별 세 개는 순전히 번역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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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도 못하면서 - Like You Know It All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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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저녁 약속 시간 전에 시간이 남아 중앙극장으로 무작정 갔다. 홍상수 감독 영화는 다시는 안 볼 것을 결심한 적이 있다. 결심이란 얇은 유리 같아서 기회만 생기면 깨지기 마련이다. 시간에 맞는다는 이유로 가볍게 내 결심을 깼다.  

다시는 안 보겠다고 거품물게 했던 진부함은 조금 줄어들었고 더불어 낄낄거리게 하는 장면도 줄었다. 인물이 여전히 술을 마시지만 술마시는 장면보다는 술을 마신 후 인물의 숨겨진 본능에 초점을 맞춘다. 초기작들에서 느꼈던 예리한 시선은 아니어도 적어도 인물들이 질척거리지는 않는다. 

그리고 제일 흥미로운 부분은 홍감독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그간 스트레스를 나름 많이 받은건 아닐까. -감독님은 왜 이런 영화만 만들어요?  -감독님은 왜 자신의 이야기를 하세요? -나 자신도 모르는데 다른 이야기를 어떻게 해. 인터뷰에서나 만날 것 같은 대사들이다. 인터뷰 혹은 기자회견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극중 구 감독은 별 뜻 없이 한 행동에 주변 사람들은 그를 파렴치하다고 몰아붙인다. 영문도 모른 채 그는 당하는 순수한 예술가다. 이런 극중 구 감독의 심리가 감독의 고백처럼 들리는 건 왜일까.  

분명한 건 명민했던 그의 초기작들과 달리 이 영화는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감독이 길을 잃었기 때문일 거다. 다시 예리한 시선을 회복하기에는 술은 이제 자극제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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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팝니다 - "체 게바라는 왜 스타벅스 속으로 들어갔을까?"
조지프 히스.앤드류 포터 지음, 윤미경 옮김 / 마티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알라딘에서 절반 값 행사를 하길래 반신반의하고 샀다. 제목을 보고는 소비심리분석 쯤 되는 책인 줄 알았다. 별 흥미없지만 그래도 반 값이니까..하고 주문했다. 도입부를 읽다보면 이 뭥미? 하게 된다. 자본주의체제를 옹호하고 반문화counter-culture에 대한 반기를 들면서 반문화를 정의하는 데 많은 공을 들인다. 중반쯤 들어가면 반문화를 넘어서야 하는 이유가 선명해진다. (난 counter-culture에 대한 우리말이 반문화보다는 대항문화로 익숙해서 반문화가 와닿기까지가 꽤 걸렸다.) 이 책의 진가가 보이기 시작한다.  

반문화의 이면에는 개성이란 미명하에 차별화 욕구가 숨어있다고 한다. 이 말에 반박하기 어렵다. "지극히 방어적인 보헤미안 정신"을 정당화하는 게 반문화의 실체라고 집약할 수 있겠다. 저자들은 왜 동질화가 나쁜가? 환경생태적 생활방식이 타인의 노동을 더 필요로하지 않는가? 그 이유를 소비사회를 비판하는 게 지식인다워보이고 대중과 차별화된다고 보고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들과 같은 물건을 사는 게 순응주의자처럼 보인다고 비판 받아와서 개성있고 독창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차별화 전략이 필요했다. 광고는 소비자의 이런 내재된 욕망을 읽고 부추길 뿐이지 광고 자체가 힘이 있는 건 아니다. 반항적 문화 이면에는 또 다른 착취 사슬과 연결되어 있다. 웰빙이나 친환경적 생활방식을 택하면서 불러일으키는 구조적 모순에 대해서 생각해볼 것을 역설하다. 저항 문화가 아니러니하게도 시장경제를 오작동하게 하는 뿌리가 될 수 있다. 시장경제가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시장경제가 오작동된 결과 쏠림이 생기고 착취를 낳는 탓이라고 하면서. 

물론 그들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반문화를 넘어서기 위해 제시하는 예들이 극우처럼 여겨질 때도 있고 지나치게 낙천적으로 보일 때도 있다. 모든 게 그렇게 단순히 도식화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러나  내 소비 행태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게 하는 것 만으로도 그들의 주장은 의미있다. 이런 주장을 읽으면서 내가 마음 한쪽에 늘 죄책감을 갖고 있는 근원을 들여다보았다. 3초백인 루이 비통 가방을 사는 대신에 그보다 두 배는 비싸지만 로고는 안 새겨져있는 다른 브랜드를 산다. 여행지에 가서도 관광객이 적은 현지인 식당을 기웃거리며 같은 관광소비를 하면서도 그들의 문화를 더 이해하기 위해서라는 자부심마저도 갖는다. 커피 맛과 세계 맥주 맛을 구별하는 걸 취미로 삼는다. 무의식속에  '동질화'에 대한 학습된 부정적 이미지가 가득 쌓여있다. 고로 나는 차별화 욕구를 꺼내 은연중에 실현 중이다.

내 개인주의가 타인의 개인주의에 정말 해를 끼치지 않는지.. 그러나 이점이 내 우울의 샘이다. 내 생계 자체가 타인의 물질욕망을 자극해서 지식을 팔아먹는 행위다. 내가 진정으로 깨닫고 용기있는 인간이라면 난 내 안락한 일을 그만두고 편의점 시급 알바라도 해야한다. 편의점 시급 알바로는 내 삶에 대한 만족도는 급격히 줄어들 것이다. 독서가 무익하다고 여기면서도 차별화를 위해서 의식은 적어도 깨어있게(?)하려고 문화와 지적 소비에 많은 시간과 번 돈을 투자하고 있다. 그리고 가끔 이렇게 자책하는 반성문을 올리고 면죄부를 발행한다. 최소한 경쟁사회에서 흔히들 올라가고 싶어하는 사다리를 걷어찼다고 자위하면서. 체제 내에서 허점을 보완하는 대안을 제시하는 저자들의 관점을 나는 또 역이용할 수 있다.  

어떻게 사느냐,를 결정하는 건 참 어려운 과제다. 책을 읽는다고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그래도 한 가지, 내가 선택한 게 타인의 노동을 더 필요한 거라면 포기하려고 노력하련다. 모두가 소비행위를 하기 전에 이 사소한 질문만 떠올린다면 체제의 허점, 시장의 오점을 조금은, 조금은 바로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덧. 원제가 rebel sell 이다. revolution이 아니다. 미묘한 차이지만 혁명보다는 반반항counter-rebel에 관한 글이다. 혁명은 반항을 통해 이루어지질 수 있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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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 Moth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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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며칠 전 케이블에서 때 맞춰 봉준호 감독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를 틀어줬다. 몇 번 볼 기회가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비슷한 부분만 반복해서 보게 된다. 사소한 에피소드로 긴장감을 만는 방법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유머까지. <플란다스의 개>를 보면 코엔 형제가 떠올라 기분이 좋아진다. 우리도 이런 감독이 있다구..하고 으스대고 싶은 영화다. <괴물>같은 블록 버스터 말고 봉 감독이 <플란다스의 개>같은 작품을 만들기를 개인적으로 바란다. (뭐 내 바람을 알 턱 없겠지만-.-) 

 
<마더>는 전작들에 비해 유머가 많이 사라졌다. 게다가 세계관은 비관적이기까지 하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계속 보는 건 그의 유머 때문인 것도 같은 데...유머가 없으니 재미는 사실 없다. 영화 속 공간이 주는 비일상적 풍경과 비가 오는 골목길 같은 미장센은 익숙하다. 일상적 풍경을 공포 분위기로 낯설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   

 <괴물>이 집단 폭력을 희화화 했다면 <마더>는 집단 폭력이 생기는 과정 쯤 되겠다. <괴물>은 정의를 구현하는 법 집행 집단이 허점과 모순 투성이라는 걸 봤다. 진실을 말하자 격리되고 처음부터 진실에 대한 관심조차 없었다. <마더>의 전반부는 다시 한번 이런 집단 폭력을 환기시키다. 중반이 되면서 반전된다. 집단 폭력에 대한 불신과 개인의 확신이 자리를 바꾼다. 

 이제 엄마는 집단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투사처럼 보인다. 투사가 된 엄마는 자신의 경험과 직감만을 신뢰한다. 경험과 직감의 지지를 받는 믿음은 폭력의 변주다. 다른 사람이 보고 들은 게 순수하다고 믿는 자신의 신념을 훼손한다면 제거할 수도 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가치판단 기준은 오로지 자신으로 회귀한다. 타인의 진정성은 의심스럽다. 불신은 폭력을 낳고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폭력은 모든 걸 제자리로 잡아주는 것 같지만 결국 무능력한 금치산자로 이를 뿐이다. 진실을 보고도 알 수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갈대밭에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춤을 추는 엄마로 영화는 시작을 한다. 엄마는 지독히 현실적인 폭력의 순환과정을 겪고 사람들 틈에 끼에 다시 춤을 추면서 영화가 끝난다. 엄마는 처음처럼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같다. 집단 폭력은 개인 폭력의 집합이다. 엄마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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