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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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을 여행하는 동안 많은 동양인과 한국인을 봤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신세계에 발을 들여놨을 것이다. 신세계가 녹록치 않다는 걸, 그들의 얼굴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델리(우리나라 작은 수퍼 쯤)나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고 이민 2세대 역시 가게에서 일하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무표정했고 가끔 고단한 표정을 했다. 신세계는 아이들의 대학 입학을 보장해 주지 않을 뿐더러 생활비 역시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일상적 기능어 외에는 1세대는 언어에 거부감이 있었고 2세대는 1세대의 언어와 네이티브의 언어 중간 쯤에 있었다.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가게에서 일하는 삶은 한국에서의 삶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돌아가기보다는 그곳에서의 삶을 견디는 걸 택했다. 그들의 고단함을 완전히 헤아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들이 그런 지루한 삶을 살러 낯선 땅unaccustomed earth에 온 건 아닐거라는 건 안다. 이런 이야기라면 재미없을 텐데, 하며서 어떤 편견을 가지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편견은 빗나갔다. 고단함이나 정착기에 대한 약간 진부할 수 있는 고찰이 아니라 보다 더 보편적인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바로 가족 이야기다. 낯선 땅만이 아니라 익숙하다고 착각하는 모국에서도 가족 이야기는 즐겁지만은 않다. 부모와 형제란 매일 먹는 밥과 같아서 가끔 밥맛 없다고 투정부리는 대상이다. 가족이란 반찬처럼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가끔은 지겹고 끔찍하지만 정신차려보면 고마운 그런 집단이다. 늘 느끼는 고마움보다 지겨움을 더 자주 분출하는 대상이 가족이다. 줌파 라히리는 이런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들을 객관적으로 풀어낸다. 그녀의 문장들은 밑줄을 그을 게 거의 없다. 소설이란 장르에서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성찰적 문장이 들어있기 마련인데 그녀의 문장에는 주관을 섞는 일이 거의 없다. 대신 그녀는 돋보기를 들고 상황을 들여다보면서 묘사문장을 사용한다. 문장과 문장이 엮어지면서 만들어내는 분위기를 독자가 직접 느끼게 한다.  

이 단편 속 인물들은, 이민1세대가 겪었던 생존경쟁은 치루지 않아도 되는, 1세대가 보기에는 안정된 그룹에 속한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적 안정이란 게 무엇일까? 더 나은 교육과 더 많은 연봉도 이루지못하는 게 있다. 가족간의 유대, 나아가 개인과 개인간의 유대, 부부든 연인이든 친구든, 물리적 안정 속에 정신은 뿌리내리지 못한 채 부유한다. 줌파 라히리가 들여다 본 게, 근본적 존재에 대한 흔들림이다. 어디에 있든 우리는 가끔 고독하다. 자식도 부모도 배우자도 함께 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걸 인정한다. 그녀의 인물들의 삶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서 함께 한숨을 내쉰다. 그동안 깊숙이 숨겨놓고 짐짓 명랑한 척 살고 있는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맞아..어쩜..이란 맞장구를 치면서 눈을 책에서 떼고 먼산을 바라본다. 근원적이고 해결될 수 없는 고독이 이야기 속 인물들과 조우하면서 위안을 얻는다.

  

덧. 역자 박상미 씨가 <빈방의 빛>을 옮기고 난 후 후기를 책보다 더 인상적으로 기억한다. 글을 쓰는 사람이어서 그런 지 이 소설 역자 후기 역시 인상적이다. 뉴 잉글랜드 풍경이 이 소설집에서 기억에 남는다는 말이. 역자는 풍경으로 줌파 라히리의 소설들을 받아들였다. 삶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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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바 - Genova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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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윈터바텀의 영화라 meff때 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안 맞았는데 집근처 극장에서 개봉했다! 곧 상영관에서 내릴 영화라 부랴부랴 갔다. 토요일 오후,  유난히 커플들로 북적거리는 극장인데 <제노바> 상영관에는 몇 커플 없었다. 다른 영화란 시작하는 시간이 겹쳐 5분이나 늦게 들어가서 오프닝을 놓쳤다. ㅠ.ㅠ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오프닝 놓치는 건데..  

역시 마이클 윈터바텀답다. 글이나 그림이란 매체도 사람의 미묘한 감정을 표현하는 걸 볼 때 마음이 동하는데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란 매체가 아무리 기술적 발전을 뽐내는 매체라고 해도 내게 영화는 글이나 그림과 같다. 기술의 눈부신 발전이 그저 잘 만들었네, 란 감상에서 그친다면 감정을 전달하는 영화는 때깔 좋은 기술이 갖지 못한 숨결을 불어넣는다.  

감독의 카메라로 본 이탈리아의 제노바란 도시는 내 상상 속에 그려져 있는 도시란 너무 달랐다. 좁은 골목길에 회벽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벽과 볼레가 있는 창문들이 있는 구시가는, 내게 이국적 낭만으로 고정된 이미지였다. 불편함이나 근심도 낡은 회벽처럼 희미해서 숨길 수 있을 거 같은 부러운 골목길이다.  

그런데 윈터바텀의 카메라는 이런 낭만을 산산이 부순다. 뜨거운 볕 아래서도 그늘진 그 골목길이 카메라의 높은 각도와 흔들림으로 낯설고 대상없는 공포로 표현된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 갔을 때 늘 갖게 되는 긴장감이 그대로 전해진다. 특히 엄마를 사고로 잃고 시카고에서 제노바에 살게 된 두 자매에게 제노바는 전혀 낭만의 도시가 아니다. 부모의 간섭을 귀찮아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기 시작하는 십대 후반의 소녀와 죽은 엄마를 골목에서 마주치고 잠자리에서 마주치는 열살쯤(정확히 나이는 모르겠다) 되는 소녀에게는 낯설고 적응해야하는 새로운 생활공간이다. 좁은 골목 모퉁이를 돌때마다 무슨 일이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불안한 공간이다.  

그에 반해 자매의 아빠는 새로운 공간에 잘 적응한다. 집에 돌아오면 두 딸의 보호자란 역할이 버겁게 보이긴 하지만 집 밖에서는 제노바란 도시를 즐거운 공간으로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하는 아빠와 위태로운 골목길을 돌아 집에 돌아가는 두 자매의 뒷모습은 이런 내 구구절절한 느낌을 적는 게 쓸모없이 여겨진다. 흔들리는 카메라와 골목길을 걸어가는 두 소녀의 뒷모습이 이 영화의 가치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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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가 되는 삶들 - 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 What's Up 4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새물결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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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서구에서 포스트모던 담론이 한창이었다. 우리는 80년대 포스트모던 담론을 받아들였다. 포스트모던 담론과 함께 우리는 서구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눈다는 착각을 했다. 그리고는 90년대가 막을 내릴 때쯤 IMF가 터졌다. 우리는 휘청거렸다. 포스트모던 담론을 함께 논하던 동지들은, 우리의 국제 신용도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IMF를 극복한 것처럼 보였고 참여정부에 이르러 정치 민주화는 가시적인 것처럼 보였고 우리는 우쭐했고 동시에 무질서했다. 우리는 다시 공안정국을 원했다. 포스트모던 담론을 논하다가 계몽주의로 다시 역행했다. 퇴행이 일어날 때까지 우리는 비극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이유를 나는, 부재한 근대에서 찾는다.  근대modernity는 계몽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몸부림이었다. 우리는 계몽주의 한계를 벗어나는 고통없이 바로 근대가 던져 준 풍요의 겉모습만을 사랑하는 탈근대로 직행했다. 우리는, 요즘 근대를 진정으로 겪고 있는 것 같다. 일괄적 계몽이란 억압을 직면하고 우리는 다시 근대적 자유를 그리워하고 있다. 풍요와 정체성 사이에 괴리를 직시하고 극복하고 나면 우리는 다른 범주로, 마법이 일어난 것처럼 이동할 수도 있지 않을까?

바우만은 근대를 '쓰레기'란 키워드로 풀어쓰고 있다. 쓰레기waste는 중의적이다. 더 이상 쓸모가 없는 폐기물, 존재하지만 가치가 없는 잉여outcast에 대한 신랄하고 통쾌한 고찰이다. 근대는 자본주의에 대한 예찬과 함께 자본주의/소비주의에 대한 회의가 있었다.  

"오늘은 유용하고 필수불가결한 물건들도 극히 일부의 예외를 빼면 내일은 쓰레기가 된다. 어떤 것도 진정으로 필요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대체 불가능하지 않다. 모든 것은 임박한 죽음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태어나고, '사용기한' 딱지가 붙어 생산 라인을 떠난다.....유동적 현대는 과잉, 잉여, 쓰레기, 그리고 쓰레기 처리의 문명이다."   

그러니까 풍요는 쓰레기를 낳는 운명이다. 작은 내용물의 물건도 포장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사회. 하나의 물건이 팔리기까지 생산자과 소비자의 관계 속에 운송과 유통, 마케팅이라는 여러가지 사다리를 거쳐야한다. 화려함에 유혹당하고 실속없는 알맹이에 실망하고 다시 유혹당하고 실망하는 주기가 점점 가속된다. 쇼핑을 하면할수록 공허해지는 이유다. 모든 계몽과 선전에는 이면이 있나니 이면을 보는 눈을 가진 자는 잉여라는 딱지와 함께 공허한 순환에서 이탈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으니, 바우만의 쓰레기론을 읽고 얻을 수 있는 위안이라 하겠다.

덧. 바우만의 시각이 새롭기 보다는 바우만의 글쓰기 스타일이 흥미롭다. 에세이 형식인데 표현력이 죽인다. ㅋ 글감이 없다고 찡찡대는 건, 관찰력과 통찰력이 부족하다는 걸 드러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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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스 앤 젠틀맨 - And Now... Ladies and Gentle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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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텍 나다에서 끌루드 를루슈 특별전을 한다. 끌로드 를수슈를 검색해보니 꽤 많은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끌로드 를루슈하면 역시 <남과 여>다. 다음주에 필름으로 볼 수 있다. 두근두근ㅋ 머리속은 온통 <남과 여>의 아우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에서 <레이디스 앤 젠틀맨>을 봤다. 역시 끌로드 를루슈! 사랑이란 주제로 영화기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해주신다. 파트리샤 까스의 노래가 영화 전체를 지배하면서 한 편의 뮤직비디오같다. 음악과 대사의 절묘한 조화, 교차편집이 주는 몽롱한 스피드. 모로코 페즈의 뜨거워서 모든 색이 바랠 것같은 강렬함.

두 사람이 사랑하는 내용이면 진부했을텐데, <남과 여>를 만든 감독답게 그런 진부함은 쳐다도 안 봤다. 각기 다른 이유로 모로코의 페즈-풍광 역시 가슴을 설레게한다-에 온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다. 기억상실증. 호텔바에서 노래를 하는 여가수와 보석전문털이범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이루는 기억에 만족하지 못한다. 자신을 배반한 남자를 여전히 잊지 못하고 대신 다른 기억들을 잊는 여자, 보석강도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기억을 잊은 남자. 페즈란 공간은 자신의 과거와 단절할 좋은 기회를 부여한다. 낯선 곳에서의 짧은 체류는 현실적 공간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 효험을 발휘한다. 남자는 자신이 훔쳤던 보석들을 돌려주고 빚을 갚고, 여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의지를 갖는다. 영화 속 해피엔딩이 가끔은 꿈을 준다. 영화가 끝나고 바람이 꽤 부는 어둠속을 걸어 환한 지하철을 타고 집에 와서 잠들때까지 영화 속 꿈이 나에게도 일어날 것 같았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뜨면 상황은 전혀 다르다. 영화처럼 나는 다른 삶을 살 준비가 돼있지 않다. 대신 현실은 꿈같은 여행지와 대비되어 더 암울하고 그 암울함에 적응해야하는 게 여행 후 치뤄야하는 댓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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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 - Flandre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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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 감독이 <호우시절>을 착상한 계기가 쓰촨성의 폐허를 보고 이야기를 만들어갔다고 한다. 브뤼노 뒤몽 감독 역시 이 영화를 찍기 전에 플랑드르 지방을 먼저 결정했단다. 감독들은 대단하다. 뭘 말해야할지를 어디서든 떠올리니...그의 말대로 전쟁이란 주제를 익숙하게 다뤘다면 이 영화가 눈에 띌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전쟁의 피폐함을 다루는 방식 때문에 이 영화가 기억되고 있다.  

아마도 프랑스의 이라크전 파병시점으로 영화 속에서 짐작할 수 있다. 눈 쌓인 겨울에도 플랑드의 목초지는 푸르다. 고요하고 풍요로운 마을 출신의 남자들이 이라크 전에 참전한다. 사막지형이고 폐허고 사람들은 마르고 앙상하다. 군복이 아닌 민방위대쯤 돼보이는 사람들을 만나고 민가를 덮치고 닥치는대로 총을 쏜다. 풍요롭고 평화로운 마을 출신의 젊은이들은 피에 굶주린 듯이, 성찰이나 자기반성을 금기시한다. 대열에서 낙오된 그들에게 삶을 위한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그들이 죽인 사람이 고향에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 걸 아는 순간, 그들은 죽을 수 밖에 없다. 할리우드라면 이런 지옥을 난무하는 총질과 미장센으로 승부를 봤겠지만 브뤼노 뒤몽 감독은 개인의 행위를 부각시킨다. 그리고 평화로운 그들의 고향에 남겨진 젊은 여자들이 겪는 내적 변화에 주목한다. 전쟁은 참전한 사람이나 남겨진 사람 모두의 정신을 흔든다.  

유일하게 살아돌아온 앙드레는 건조한 시선을 유지했다. 마지막에 친구의 죽음을 담담하게 말하고 자신이 부정했던 가치를 인정하면서 목소리가 떨린다. 그는 확실히 변했다. 영화는 전쟁이 플랑드르 사람들의 변화만을 담지만 영화 밖 이라크 사람들 역시 변했을거다.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한 채 그들은 그 변화를 지금도 이겨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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