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즈 라캥
에밀 졸라 지음, 박이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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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상한 농담이 하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효자는 누구일까? 에밀 졸라ㅋ 뭐 이런 말에 낄낄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테레즈 라캥이 새삼 주목을 받은 건 박찬욱 감독의 <박쥐> 공이 크다. 초반부를 읽다보면 균신, 김옥빈, 김해숙이 머릿속에 출현해서 사라지질 않는다. 영화와 책의 공통점이 손톱만큼 밖에 안 되는데도 자꾸 세 사람의 이미지가 글을 읽는데 방해 요소로 등장한다. 줄거리는 일일연속극이나 아침드라마 처럼 자극적이다. 요즘 일일드라마나 아침드라마에 비하면 한편으로는 도덕적인 면도 있고.

 

자연주의 소설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라고 한다. 졸라가 쓴 이 책 서문에서 자연주의 소설의 정의를 보면 이렇다.

 

"<테레즈 라캥>에서, 나는 사람의 성격이 아니라 기질을 연구하기를 원했다. 이 책 전체는 바로 그것을 담고 있다. 나는 자유의지를 박탈당하고 육체의 필연에 의해 자신의 행위를 이끌어가는, 신경과 피에 극단적으로 지배받는 인물들을 선택했다. 테레즈와 로랑은 인간이라는 동물이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그들의 회한을 촉구해야 했던 부분은, 단순한 생체조직 내의 무질서, 파괴를 지향하는 신경체계의 반란이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영혼은 완변하게 부재한다.(...) 강한 남자 한 명과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인해 욕구불만 상태인 여자 한 명을 설정한다. 그드들 속에서 어리석음을 찾는다. 단지 어리석음만을, 그런 다음 그들을 난폭한 드라마 속으로 내던지고 그 두 존재들의 느낌과 행동을 면밀히 기록한다"(서문 11쪽)

 

이 소설의 요점을 작가가 명쾌하게 정리해 놓은 대목이기도 하다. 다만 성격과 기질의 정의가 명확하지 않아서 네이버 사전을 찾아봤다. 성격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특성이고 기질은 타고난 기본 본성이라고 적혀 있다. 글쎄, 비슷한 말 같기도 한데. 이 소설의 주인공인 테레즈와 로랑 뿐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한테 영혼이 없어 보인다. 병약한 카미유와 결혼한 테레즈, 그후 테레즈와 로랑은 눈이 맞아 카미유를 살해한다. 카미유가 죽은 후 로랑과 테레즈가 변하는 모습은 21세기에 보면 약간 권선징악의 암시처럼 보인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인을 저질렀지만 죽은 이의 그림자에 갇혀 새로운 인생 따위는 찾아오지 않는다.

 

21세기 드라마 속에서 악을 행하는 인물들이, 졸라의 말처럼 영혼이 없는 걸 많이 보여줘서 테레즈와 로랑은 오히려 졸라의 의도와는 반대로 읽히기도 한다. 등장인물들이 영혼이 없어 보이는 이유는, 오히려 졸라의 문체 탓이 크다.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단정적인 문장으로 묘사를 하고 있어서 인물이 살아서 움직인다기 보다는 졸라가 매단 끈 아래서 인형이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졸라가 스물여섯 살 때 쓴 소설이라는데 스물여섯은 세상과 맞짱을 뜰 수 있는 나이다. 졸라가 쓴 서문이 그걸 입증한다. 비평가들의 혹평에 맞서는 글로 지식인들한테 사과를 요구한다면서 글을 맺고 있다. 인물들은 내적 갈등이나 혼란보다는 거침없는 기괴함을 드러낸다. 졸라도 거침없고 인물들도 거침이 없다. 이 책을 읽고나서 잔상에 남는 건 졸라의 자신감이라니...나도 기괴한 독서를 한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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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실이 중요한가 국익이 중요한가 하는 물음에 "진실이 국익이다"란 대사가 반복적으로 나온다. 이런 신념을 가진 사람은 소수다. 다수한테 국익을 위해서라면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개인의 영역으로 치환하면 이런 생각은 더 그럴듯해진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진실은 저너머에 묻어둬도 괜찮다고들 한다. 그럼 진실은 뭘까? 진실의 실체는 신기루같다. 진실을 알고 싶은 사람한테만 진실은 가치가 있다. 우리는 진실을 신뢰한다고 말할 수 있나? 진실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믿고 싶은 걸 진실이라고 믿는 능력자들이다.

 

2. 황우석 박사가 전세계를 상대로 벌인 사기극이 가능한 이유 속에 우리의 공모가 있다. 영화 속에서 아무도 줄기세포를 못 보고 전해 듣기만했다. 의심은 있지만 거세게 몰아치는 거대한 믿음의 파도에 맞서기에 개인 혹은 집단은 너무 이기적이다. 논문에 이름 등재, 각 개인의 난치병 치료를 위한 모정이나 부정, 광고 수익을 위해 여론 몰이를 하는 언론, 그리고 국익이 자신의 이익이 될 거라는 기대감을 지닌 국민의 집단적 광기. 사기극에 필요한 요소다. 줄기세포가 없다는 게 밝혀지면서 받았던 충격이 영화를 보면서 되살아났다. 맞아 그랬었지.... 줄지어 자발적 난자 기증까지. 그리고는 수십억 년 전 과거처럼 잊고 있었다.

 

3. 영화는 실제 사건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사실적이고 어떤 영화적 기교를 뽐내지도 않는다. 자극적이지 않게 실제 사건을 재구성한다. 진실을 알리려는 한 피디를 비롯한 방송국 팀원들의 진실보도에 대한 절대적 확신을 우리는 목격한다. 진실을 규명하려는 측에서 보면 모든 게 의문투성이다. 황박사는 연구보다는 로비스트처럼 보이고 연구원들은 밥줄 잡고 있기에 바빠보인다. 영화가 말하고 싶은 건 황박사의 사기극 재구성을 통해 잊혀진 황박사를 다시 한 번 욕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의 속성을 들여다보라고 하는 거 같다. 영화를 본 후 비난의 화살은 우리 자신한테로 겨눠져야한다. 오늘 신문에 홍콩인들이 거리 시위를 하는데 뭐 그정도 가지고 시위를 하냐는 웃픈 글이 실렸다. 한국인은 다 참는데..하는 조롱조의 글이다.

 

4. 문득 그 시절이 그리웠다. 소수라도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을 지닌 사람들이 있었던 때도 있었다니, 안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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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구나 이중적 자아를 가지고 있다. 규범과 제도에 순응하는 모습이 일반적이라면 규범과 제도를 어기는 은밀한 모습도 역시 일반적이다. 두 자아는 충돌하곤 한다. 머릿속에서 실재, 그러니까 다른 이들한테 보여지는 나와는 다른 모습을 상상하곤한다. 정신분석에서는 이러한 "분열로 실재하는 자가 된다고 한다. 즉 분열로 주체가 되고 기표에 의해 잘려나가고 배제되면서 보다 못한 자less-than-one으로 구성되면서 누군가some one이 된다"고 한다. 뒤늦게 입사한 제임스는 사이먼 분신이다. 사이먼/제임스는 결국 동일 인물인데 제임스가 등장하기 전에 사이먼은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7년이나 다닌 회사에서 출입증이 말썽을 부리는 일이 발생하자 출입관리 직원은 사이먼을 못 알아본다. 사이먼의 존재감 부재를 드러내는 일은 오프닝에서도 묘사된다. 텅빈 지하철에서 누군가가 다가와서 사이먼이 앉아 있는 자리는 자신의 자리라며 비켜달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소심한 사이먼은 일어나서 빈자리로 가득한 의자를 바라본다. 사이먼은 전형적인 "보다 못한 자"로 등장을 한다.

 

사이먼의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계기는 사이먼의 또 다른 이름 제임스가 등장하면서다. 제임스는 마음에 안드는 일과 대면했을 때 거침없이 속마음을 말한다. 제임스는 사이먼의 무의식을 표현하는 인물이다. 사이먼과 제임스가 사이먼이 단골인 식당에 함께 가는 장면이 있다. 사이먼은 언제나 웨이트리스의 눈치를 보며 주문을 했는데 제임스는 저녁에 아침메뉴를 가져오라며 당당하게 논리적으로 우긴다. 사이먼이 늘 말하고 싶었던 것을 제임스의 입을 말하고 있는 것이란 확신이 드는 장면이다. 주변 사람들은 다소 거칠고 파괴적인 제임스에 대해 비난이 아니라 호감을 표시한다. 사이먼이 당황하는 지점인데 그로 인해 사이먼의 속성은 점점 웃음거리가 되면서 부각된다. 즉 사이먼은 존재 속의 결핍이라는 구조로 제임스와 질서 체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사이먼이 의미를 두지 않았던 부분은 사실은 사이먼이 의미를 두었던 부분이다. 식당이나 지하철에서도 자신의 당연한 요구를 당당히 할 것, 회사에서 인정받는 것, 그리고 혼자 짝사랑하면서 망원경으로만 훔쳐봤던 한나한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것 등.

 

사이먼이 자신의 분신 제임스를 소환하는 이유는, 제임스의 욕구를 재현하면서 겉으로는 고통을 받지만 실제로는 그 판타지를 통해 자신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다. 결핍은 분열의 원동력이고 많은 것을 시사한다. 사이먼은 그 누구도 아닌 사이먼이 되고 싶어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2.

제시 아이젠버그는 아주 묘한 매력이 있다. <소셜 네트워크>에서 한겨울에도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외부에 무관심한 채 무표정한 얼굴을 보여준다. 내면의 갈등으로 표정에서 황망함이 절절하게 드러나지만 묘하게 차가운 기운이 감돈다. 마지막 장면에서 클로즈업으로 잡힌 얼굴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이 영화에서도 비슷한 표정을 볼 수 있다.  사람이 슈트를 입었다기 보다는 슈트 안으로 사람이 들어갔다는 말이 어울리게, 사이먼은 헐렁한 슈트를 입고 멍하면서도 강렬한 눈빛을 발사한다. 멍한 시선인데 무언가 응시하고 있는 강한 시선이라니 참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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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타의로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뭘까. 안쓰러움을 표현하기는 하지만 선뜻 적극적으로 나서서 부정의에 맞서지는 않는다. 내 일이 아니니까. 애도나 안쓰러움을 표현하긴하지만 삶 속으로 그 애도를 끌어들이지는 않는다. 우리는 얄팍한 애도나 정의에 익숙하다. 영화는 공주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사람들을 다룬다.

 

묵직해서 개봉당시 일부러 안 봤던 영화인데 결국 봤다. 영상자료원에서. 폭력의 공모에 관한 이야기라 지나치게 사실적이다. 폭력에는 가시적 폭력과 비가시적 폭력이 있다. 공주의 이야기는 가시적 폭력에서 출발한다. 영화는 절제된 영상으로 가시적이고 직접적인 폭력을 처리한다. 직접적 폭력을 겪은 한 여고생을 통해 간접적, 비가시적 폭력의 잔인함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비가시적 폭력의 주체는 윤리적으로 선하다고 믿는 우리 모두일 수 있다. 우리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잔혹한 위치에 있다.

 

공주를 둘러싼 사람들, 새로 전학 간 학교 학생들, 전 학교 선생님과 그 어머니, 공주의 엄마와 아빠가 공주를 대하는 태도를 직접적으로 본다. 선생님은 최소한의, 그래서 어쩐지 소극적인 배려만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주의 엄마는 재혼해서 공주의 존재가 알려지는 걸 두려워하고 아빠는 아마도 알콜 중독자로 공주의 보호자라기 보다는 공주의 비극을 이용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공주가 새로 전학간 학교에서 만난 천진한 친구들은 잠시 공주의 아픔을 품어줄 수 있는 희망처럼 보인다. 그러나 공주가 겪은 일이 알려지면서 친구들은 충격을 받는다. 공주와 친구들 사이에 깊은 심연이 튀어나온다.

 

공주는 혼자 길이 20미터 풀을 가고 싶어서 수영을 배운다. 공주는 안다. 인생은 풀장과 같아서 누구도 같이 반대편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 어떤 일이든 개인의 몫으로 남겨진다는 걸 열일곱 소녀는 알고 있었다. 잊혀질 것 같았던 과거의 악몽이 다시 한번 재현되면서 공주의 트라우마는 치유될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공주는 넓은 풀에 혼자 떠 있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이 난다. 영화가 끝나면 아, 저 아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어쩌나, 하는 마음은 그저 마음일 뿐이다. 공주 주변의 어른들이 철저하게 공주를 버렸듯이, 어쩌나, 하는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공주는 집단 폭행을 당해서 한번 상처를 당했고 그 트라우마에서 아무도 공주를 꺼내려고 하지 않기에 더 큰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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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문장 한국어 글쓰기 강좌 1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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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랜만에 글쓰기 책. 한국어 글쓰기 강좌라고 해서 내심 기대했는데 내가 완전 싫어하는 구성이다. 글쓰기 강연했던 걸 엮어서 그런지 책 두께에 비해 내용이 별로 없다. 근본적으로는 내가 고종석 씨의 글쓰기 스타일을 별로 안 좋아하기 때문에 모든 게 불만스러운지 모르겠다. 글을 왜 쓰는가 챕터는 요점과 관련없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한국어 답다는 것의 의미1,2' 정도만 이 책의 제목에 맞고 유용하다. 특이한 건 자신이 쓴 글을 예문으로 들어 다시 한국어답게 고친다.

 

2.

내가 사용하는 문장은 한국어 답지 않고 번역투인데 이 책을 읽다보면  한국어 문장을 구사하는데 심하게 장애가 있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사실 글은 퇴고가 중요한데 퇴고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글을 포스팅해서 그렇다고 일단 변명을 해보자.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려면 내가 쓴 글을  들여다보고 읽고 또 읽는 습관을 들여야하거늘. 알았으니 실천해보도록 하자.

 

3.

글쓰기에는 두 개의 영역이 있는 거 같다. 하나는 내용적인 면이고 또 하나는 형식적인 면, 즉 문체다. 내용과 문체를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의 거리는 있는 게 분명하다. 문장을 명징하고 아름답게 쓰는 것과 내용을 아름답게 쓰는 건 좀 괴리가 있지 않나. 그러나 문장을 다듬다보면 내용도 다듬어질 게 분명하다. 글쓰기 재능을 타고나지는 못했어도 훈련할 수 있다는 말이, 아마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창의력을 필요로하는 내용보다 문체를 다듬는 일에 우선순위를 둔다면 글쓰기의 돌파구가 생길 수도 있을 거 같다는 막연한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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