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타의로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뭘까. 안쓰러움을 표현하기는 하지만 선뜻 적극적으로 나서서 부정의에 맞서지는 않는다. 내 일이 아니니까. 애도나 안쓰러움을 표현하긴하지만 삶 속으로 그 애도를 끌어들이지는 않는다. 우리는 얄팍한 애도나 정의에 익숙하다. 영화는 공주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사람들을 다룬다.
묵직해서 개봉당시 일부러 안 봤던 영화인데 결국 봤다. 영상자료원에서. 폭력의 공모에 관한 이야기라 지나치게 사실적이다. 폭력에는 가시적 폭력과 비가시적 폭력이 있다. 공주의 이야기는 가시적 폭력에서 출발한다. 영화는 절제된 영상으로 가시적이고 직접적인 폭력을 처리한다. 직접적 폭력을 겪은 한 여고생을 통해 간접적, 비가시적 폭력의 잔인함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비가시적 폭력의 주체는 윤리적으로 선하다고 믿는 우리 모두일 수 있다. 우리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잔혹한 위치에 있다.
공주를 둘러싼 사람들, 새로 전학 간 학교 학생들, 전 학교 선생님과 그 어머니, 공주의 엄마와 아빠가 공주를 대하는 태도를 직접적으로 본다. 선생님은 최소한의, 그래서 어쩐지 소극적인 배려만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주의 엄마는 재혼해서 공주의 존재가 알려지는 걸 두려워하고 아빠는 아마도 알콜 중독자로 공주의 보호자라기 보다는 공주의 비극을 이용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공주가 새로 전학간 학교에서 만난 천진한 친구들은 잠시 공주의 아픔을 품어줄 수 있는 희망처럼 보인다. 그러나 공주가 겪은 일이 알려지면서 친구들은 충격을 받는다. 공주와 친구들 사이에 깊은 심연이 튀어나온다.
공주는 혼자 길이 20미터 풀을 가고 싶어서 수영을 배운다. 공주는 안다. 인생은 풀장과 같아서 누구도 같이 반대편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 어떤 일이든 개인의 몫으로 남겨진다는 걸 열일곱 소녀는 알고 있었다. 잊혀질 것 같았던 과거의 악몽이 다시 한번 재현되면서 공주의 트라우마는 치유될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공주는 넓은 풀에 혼자 떠 있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이 난다. 영화가 끝나면 아, 저 아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어쩌나, 하는 마음은 그저 마음일 뿐이다. 공주 주변의 어른들이 철저하게 공주를 버렸듯이, 어쩌나, 하는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공주는 집단 폭행을 당해서 한번 상처를 당했고 그 트라우마에서 아무도 공주를 꺼내려고 하지 않기에 더 큰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