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ter Journal (Perfect Paperback)
폴 오스터 지음 / Macmillan USA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폴 오스터의 책을 언제 읽었나 블로그를 뒤져봤더니 십여 년 전 쯤에 몇 권 읽었다. 그 후 오스터의 책을 보지 않았는데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오스터의 거친 감성 때문일 거다. 초반에 막 호기심을 자극해서 끌어들이다가 중반쯤 가면 막다른 골목으로 데려가는 거 같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강력한 남성적 관점인 탓인 거 같기도 하고. 줄거리 중심의 소설을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어서 그렇기도 하다.  <겨울 일기> 소설도 아닌 에세이인데도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강력해서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 에세이여서 그게 어떤 부분에만 해당한다. 어떤 세부 사항을 묘사할 때 단순한 사실의 기나긴 나열은 좀 지루하기도 하다. 어쩔 때 좀 아줌마 수다같기도 하고ㅎ  가령, 아침 식사로 뭘 먹나 했을 때, 찬장을 열었을 때 있는 거를 먹는데, 씨리얼 종류 나열, 캠벨 수프를 몇 줄에 걸쳐 나열한다. 우리로 치면 어릴 때 간식으로 먹었던 과자, 짱구, 새우깡, 맛동산, 꿀꽈베기, 라면땅 등등을 나열하는 식이다. 나는 구체적 물건에 대한 향수가 없다. 그래서 응답하라 시리즈가 무척 지루해서 못 보겠다. 친구들은 소품을 보는 재미도 있다는데  그 시절에 대한 물건이 가져다주는 감수성에는 나는 아주 문맹자다.

뉴요커 아니 대도시가 고향이라면 오스터가 어떤 공감이 분명히 있을 거다. 특히 자신의 젊은 시절을 이사로 회상한 구절이 있다. 총 21번의 이사twenty-one permanent addresses 중 뉴욕을 그리워하는 구절이다.

 

"after a while you found yourself missing New York, the vastness and confusion of New York, for the better you came to know San Francisco, the smaller and duller it seemed to you, and while you had no problem living in remotest seclusion, you decided that if you were going to live in a city, it had to be a big city, the biggest city, meaning that you could embrace the extremes of far-flung rural places and massive urban places, both of which seemed inexhaustible to you, but small cities and towns used themselves up too quickly, and in the end they left you cold."(87)

 

내가 서울에 대해 갖는 감정도 비슷하다. 소음과 매연이 고향의 냄새다. 내게는. 미세먼지로 매케한 뿌연 하늘은 유독하지만 묘한 안정감을 준다. 다른 나라 도시에 갔다 돌아와서 소음과 매연으로 숨이 턱 막히는 공기를 폐가 빨아들일 때 안도감이 온몸 전체로 퍼진다. 맑고 깨끗한 공기를 공급하는 건 가끔으로 충분하다.

 

많은 부분이 개인적 이야기다. 결혼 생활, 어린 시절, 엄마 이야기, 친척들 이야기. 문득 읽다보면  개인적 이야기를 많이 하는 거 같으면서도 중요한 건 자체 검열하고 있다. 아버지 이야기, 두 아내, 자식들 이야기가 빠져있다. 엄마 이야기는 단편소설처럼 극적으로 , 그리고 연민의 시선으로 서술한다. 엄마의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란 인물을 유추할 수 있기는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최소한 자제한다. 아내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고. 두번 째 아내에 대한 찬사, "George Oppen's poems, some of the most beautiful places in the world are on your wife's body."(167)는 예외다. 두번 째 아내의 지적 판단력에 대한 존경도 있고 정신적으로 충족한 가정생활을 할 뿐 아니라 아내의 일가가 노르웨이 태생인데 그 태생이 주는 어떤 완고한 기질에 대해 깊은 호감을 묘사한다.

 

오스터가 이렇게 개인적 이야기를 <겨울 일기>를 통해 하는 이유는,

 

"You can't see yourself. (...) We are all aliens to ourselves, and if we have any sense of who we are, it is only because we live inside the eyes of others. (...) Since you couldn't see your own face, you saw yourself in the faces of the people around you, and bit by bit you stopped thinking of yourself as different. In effect, you stopped thinking about yourself at all."(164)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없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 자신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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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세 미키오 영화는 처음인데 <아내>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결혼생활에 관한 이야기다. 밥 먹고 나서 밥상 앞에서 트림하고 이를 쑤시는 아내. 살갑기는 커녕 쌀쌀맞은 아내가 있다. 남편이 다음에 취할 내용은 무엇이겠는가. 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된다는 것. 멜로 드라마의 서사란 매체가 뭐든 고전이든 현대극이든 대동소이한데 다른 점은 표현 방식이다.

 

아내와 대비되는 회사 타이피스트 여직원. 미망인으로 고전음악을 듣고, 전시회를 보며 일상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사는 것같이 보인다. 이런 착각을 일으키는 주된 이유는 공간에 있다. 고상해보이는 여인이 집안에서 어땠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집이란 공간은 너무나 편안하고 친숙해서 막 트림하는 공간인데 문득 그 익숙한 공간이 남루해보이고 정없어지는 때에 다른 공간에서 사는 것 같은 사람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아마도 전시회에서 큰 소리로 편안하게 트림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트림이 나와도 숨기려하며 삭히지.

 

영화에서 흥미로운 건 사랑의 삼각형을 구성하고 있는 인물들의 특징이다. 남자는 참 우유부단하다. 다른 여자한테 구애까지는 아니어도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시한다. 아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아내의 집안에서도 다 알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아내의 가족은 남자가 어떤 결단을 내리기를 채근하는데 남자는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 않고 현재에 충실하다. 그 현재란 게 자신의 감정일 수 있는데 좀 마담 보바리가 갖는 열정을 위한 열정, 혹은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참을 수 없는 현재를 참을 수 있기 위한 열정에 몰입하는 것처럼 보인다.

 

남자의 외도 상대인 여자는, 1950년대라는 걸 고려하면, 상당히 진보적이고 주체적이다. 남자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도 않으며 결단력있는 선택(결국 남자를 떠나는)을 하는 건 바로 여자다. 남자가 가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유부단한 성격이라 박수쳐주고 싶은 결정이다. 말하자면 신식여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남자의 아내. 마음은 다른 데 가 있는데 껍데기하고 살 수 없다며 휑-친정으로 와 버린다. 주변에서 남편의 바람을 모른척 하지 그러냐며 부추긴다. 순종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아내. 자신의 감정을 고스란이 드러내는 아내의 고민은 현대극하고 비슷하다. 남자를 용서할 것인가 말것인가, 아내의 위치라는 게 이런 건가, 하는 고민을 한다. 아내한테 조언을 하는 건 의외로 비혼인 동생이다. 결혼이란 제도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입장이기도 해서 그런지 지혜로운 말을 한다. 결혼한 언니한테 오히려 부부가 사랑으로 사는 게 아니라며, 진리를 말하는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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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해 메가박스 VIP에서 탈락할 위기에 처할 정도로 영화를 못 봤다.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첫번째 이유는 노화다. 모친은 내가 애기일때만 해도 나를 업고 극장에 갈 정도로 영화를 좋아하셨단다. 지금은 자막이 나오는 영화는 정신 사납다고 하신다.-.-; 주로 단선적 드라마에 안착하셨다. 엄마의 취향이려니 했다. 내가 나이가 들고 생활인으로 밀착되어 가면서 그닥 안 좋았던 집중력은 더 산만해져 간다. 영화를 보면 별의별 잡생각을 다 한다.

 

토요일 영화를 보기 전에, 후배와 영화에 집중 못하는 산만함에 대해 한탄했다. 오랜 기간동안 영화보기에 단련된 터라 영화의 핵심을 보기는 하지만 영화의 질감이 감정세포에 가져다주는 정신적 풍요로움을 우리가 잃어가고 있다. 삶의 낙이 없어졌다고. 아트시네마에서 허우 샤우시엔 전작전을 하는 소식을 듣고 침을 흘렸지만 <남국재견> 딱 한 편 볼 시간이 났다. 십여 년 전쯤에 디비디로 봤던 영화고 꽤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영화다.

 

2.

1번에서 주저리주저리 쓴 이유가 역시나 영화보면서 딴 생각을 엄청했다.ㅡㅜ허우 샤우시엔을 롱테이크로 기억한다면 이 영화를 보라고 권하고 싶다. 오프닝에서 기차역이 나온다. 기차는 스크린 안쪽으로 달려가고 카메라는 기차가 달리는 반대방향, 즉 관객쪽으로 질주한다. 기차의 속도감만큼 카메라는 달린다. 기차와 카메라의 속도감이 기분을 들뜨게 하면서도 불안을 증폭시킨다. 기차나 철로 장면이 많이 등장하는데 카메라가 마치 기차처럼 휘어진 철로 위를 달리다 문득 어두운 터널로 들어가기도 하고 정지하기도 한다. 이번에 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게 바로 카메라가 철로를 달리는 장면들이다. 여기에는 우리의 감정선이 다 들어가 있다.

 

인물들을 담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대체로 뒤에서 정지해 있고 다수의 인물들이 왔다가 갔다한다. 우리는 인물의 얼굴보다는 뒷모습, 아니면 여러 사람들 동시에 본다. 카메라는 대사를 하는 인물을 담는 관습을 버린다. 인물들이 줄거리를 알려주는 정보성 대사를 하고 있을 때, 카메라는 우리의 시선을 하나로 고정시키는 게 아니라 여러 인물을 선별하지 않은 채 한 프레임에 그대로 담으면서 우리의 시선을 분산시킨다. 한 프레임에서 두 가지 일이 동시에 발생한다. 밥을 먹으면서 개에게 자신이 먹던 젓가락으로 밥을 주는 장면이 전경에 있고, 뒤에서는 욕망을 논의하는 몇 사람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고. 우리가 들어야 하는 건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이들의 대화지만 실제 시선을 그 모든 일에 무심한듯, 개들과 사이좋게 자신의 젓가락을 나눠쓰는 이의 심성이다.

 

내 정신세계 같기도 하고 실제 생활의 단면같기도 하다. 그래서, 실은 영화가 굉장히 극적이고 역동적인 줄거리인데도 축소되어서 적극적으로 보려고 하는 이의 눈에만 극적으로 보일 수 있겠다, 싶었다. 타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그렇듯이. 내가 관심을 가지면 큰 사건이고 관심을 버리면 별 일 아니듯이. 그리하여 나는 영화의 줄거리를 파악하지 않기로 했다.ㅎ

 

3.

이 영화는 감독의 다른 영화들에 비해 굉장히 감각적이다. 속도감도 중요한 몫을 하지만 음악 역시 비트가 강한 락이 사이사이에 치고 들어온다. 하지만 인물들의 욕망이 충돌해서 폭력이 이루어지는 장면은 상대적으로 정적이다. 멀리서 인물들의 동작을 잡으면 코믹해보이기까지 한다. 폭력까지 사용할 정도의 절박함은 한 걸음 뒤에서 보면 우스워보일 수도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건, 아닐까.

 

 

2006. 8. 11

끈끈한 여름을 더 끈끈하게 해주는 영화. 덜컹거리는 기차 안. 기차의 소음이 주가 되고 전화하는 카오의 목소리가 사이사이 들린다. 그의 동생 아비와 아비의 여자 친구를 내려준 기차는 화면 속에서 멀어지고 빈 철로가 끝없이 펼쳐진다. 세 사람의 낯선, 그러나 일상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면서 카오는 꿈을 꾼다. 상하이에 식당을 열겠다고. 타이페이라는 공간은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다른 곳을 꿈꾸게 한다. 카오는 상하이를, 그의 여자친구는 그를 떠나 미국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녹녹하지 않다. 조금씩 해왔던 투자는 어긋나고, 돈을 좇아 남쪽으로 오지만 돈은 가문이란 테두리로 숨어버린다. 남겨진 건 형제애. 아니 그의 어깨에 실린 짐으로 다가오는 가족이다. 아픈 아버지, 철없는 건달인 동생과 그의 여자친구.

 

 

몹시 무거운 주제인데도 불구하고 경쾌한 면이 있다. 강렬한 음악과 카메라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덕분이다. 대만 남부의 울창한 산길을 달리는 차 앞에서 카메라는 함께 달려가거나 혹은 달리는 오토바이를 마주하며 달리다 어느새 정지해 있다. 카메라 앞을 인물들이 왔다갔다한다. 앞 쪽에 있는 인물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뒤에 포커스 아웃되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주변의 소음이 인물들의 대화소리를 먹을 때도 있다. 그 때문에 열심히 귀를 기울여야 했다. 귀를 기울여도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지만 자막만으로는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조급함에 자꾸 볼륨을 높이게 된다.

 

 

영화 속의 카오는 무더운 기후를, 똑같은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사는 것에 지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삶의 터전으로 돌아오는 데 충실하다. 마지막 장면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차 사고가 나고 그의 생존 여부는 관객의 몫으로 남겨진다. 똑같은 내일을 그에게 살게 할 것인가, 오늘로 똑같은 날을 마감하도록 할 것인가. 살리든 죽이든, 둘다 잔인하다.

 

 

덧. 하나. 미국에서 출시된 디비디여서 영어자막만있어 이름의 아우라에 대한 불만. 아비는  flat head  그의 여자친구는 pretzel이다. 영어이름에서 오는 경박함이란..쯥.

    

둘. 아비로 나온 임강은 실제 대만의 뮤지션이고 이 영화의 음악감독을 했단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음악 제목을 뒤졌으나 못찾았다. 주제곡을 구하고 싶다. 중국어로 된 락이란 상상도 못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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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를 보는 순간 이 영화는 무조건 봐야지, 했다. 영화 장면들은 포스터만큼 아름답진 않고 대신 음악이 심장을 후빈다. 특히 현악기의 활약이 두드러지는데 투박하면서도 차갑다가 때로는 격정적이고 때로는 툭, 내려앉게 만든다.

 

짝을 못 찾아 사람이 아닌 동물이 된다면 랍스터가 되고 싶은 남자의 이야기다. 남자는 아마도 아내의 외도 때문에 새로운 짝을 찾아 나선 거 같다. 오프닝에서 카메라가 위에서 남자를 비스듬하게 비추자 남자가 말한다. 그 자식은 안경을 써, 렌즈를 써? 여자가 답을 한다. 당신처럼 안경을 써요. 하고. 그리고 남자는 짝을 찾는데 실패하면 동물이 되는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남자가 랍스터가 되고 싶은 이유는 바다에서 살고, 장수, 죽을 때까지 번식한다. 랍스터를 욕망하는 요소를 나열하면 지극히 동물적이다. 남자가 겪은 인간 세계 역시 동물적이라는 걸 암시한다.

 

오로지 짝을 찾는데만 집중하는 공간의 규율은 커플은 비슷한 사람만이 될 수 있다는 것. 처음에는 그럴듯하게 들린다. 비슷한 사람들이 아니면 사랑할 수 없다는 공식. 이 공간에서 사랑은 겉으로는 비슷한 취향에 방점을 찍은 거 같지만 실은, 사랑이란 감정은 무의미하며 동물계에서처럼 일차원적 성적 욕구만을 돌볼 뿐이다. 누군가를 짝으로 택하기 위해서 개인의 고유 취향은 일정 정도 무시되거나 숨길 수 밖에 없다. 피도 눈물도 없는 여자를 짝으로 택한 남자는 자신이 기르던 개의 죽음 앞에서도 잔인함을 연기하다 속내를 들키고 이 커플은 깨진다. 과연 사랑이 교집합만으로 유지될 수 있나, 하는 질문을 던진 채 챕터 원이 끝나고 챕터 투가 시작된다.

 

이번에는 그 이상한 호텔을 나와서 반란군을 만난다. 이 조직의 규율은 사랑하면 안 되는 것. 남자는 "감정을 생기게 하는 건 감정을 숨기는 것 보다 더 어렵다"고 여겼던 터라 이 반란군의 규율은 따르기 쉬워보인다. 처음에는. 하지만 곧 근시인 여자를 알게 되면서 진짜 사랑이 싹튼다. 이 조직에서는 어떤 육체적 행위도 금지되고 걸리면 처벌을 받는다. 이번에는 육욕을 억압한 정신적 사랑이 가능할까, 로 영화는 진행된다. 억압된 육욕은 정신적 사랑을 더욱 고조시키고 결국 두 사람은 도시로 탈출하기로 결심하지만 대장이 알아차리고 여자를 장님으로 만든다. 눈이 먼 여자와 남자는 탈출을 한다. 마지막 장면이 의미심장하다. 여자를 닮으려 남자는 자신의 눈을 멀게 하려는 행동을 취하면서 영화가 불쑥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간다. 바닷소리가 계속 들리면서 무언가 남아있는 장면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하면서 영화가 끝이 난다. 남자는 결국 여자와 같은 장님이 되어서 랍스터처럼 장수하며 번식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취향의 문제도 아니고 육욕만의 문제도 아니다. 사랑은 상대의 아픔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다. 사랑이 탄생하고 지속되려면 장애물은 필수인 것처럼 보인다. 사랑을 다루는 희비극의 오랜 공식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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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를 좋아하냐고 질문 받는다면 말하기 힘들다. 세상에 좋은 영화는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럼 좋은 영화는 왜 많은가. 지극히 내 취향 때문이데, 피상적으로 행복을 다루면서 강요하는 영화(주로 헐리우드 주류영화) 빼고는 모든 영화에는 미덕이 숨어있다. 자끄 오디아르 감독 영화를 격하게 애정하는데 미덕이 너무너무 많고 매혹적이다.

 

일단 오디아르 감독은 인물의 동요하는 심리를 영화 언어를 통해 관객한테 전달하는데 탁월하시다. 전작들 중 <내 심장을 건너 뛴 박동>에서 부동산 중개인이 피아노 연주에 대한 애착을 보이며 지역 오디션에 참가하기 위해 레슨을 받는 게 소재로 사용된다. 액션이나 그 어떤 흉기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름다움을 연상케 하는 피아노란 매체를 통해 주인공의 불안하고 초조한 심리를 담았다. 건반을 두드릴 때 레슨을 받을 때, 팽팽한 긴장감이 전해지고 영화를 보는 내내 주인공과 같이 긴장하게 된다. 아니 영화를 어떻게 이렇게 만들 수 있지 했었다.

 

<디판>도 상영시간 내내 심장이 쿵쿵 뛰게 긴장되는 영화다. 총격씬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무언가 일어날 거 같은 그 분위기다. 그렇다고 음악을 관습적으로 사용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가령, 디판이 살기 위해 함께 피난 온 가짜 아내가 샤워를 하는 소리를 듣는 장면이 있다. 카메라는 디판의 긴장된 눈동자 비춘 후 리판의 눈이 되어서 살짝 열린 욕실 문을 담는다. 그러니까 관객이 보는 건 여자가 샤워하는 장면이 아니라 살짝 열린 문과 물소리, 그리고 디판의 표정이다. 그런데 막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하고 조마조마하다. 물론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조마조마한 원인은 집 밖에서 찾을 수 있다. 디판이 관리하는 건물들에는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조폭 혹은 건달들이 하루 종일 진을 치고 떼지어 왔다가 갔다한다. 이런 장면을 본 뒤라서 그렇기도 하다. 그들이 정확히 뭘 하는지는 모르지만 뭔가 일어날 거라는 막연한 불안을 잉태한 후 그 느낌을 간직한 채 영화를 지켜보게 된다. 카메라를 사용하는 방식도 핸드핼드도 많이 쓰긴 하지만 정지된 중에도 앵글을 어찌나 현란하게 사용하시는지. 두 인 물의 뒤에서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고 한 인물은 다른 한 인물을 바라보는 장면, 아래서 위로 비스듬히 잡아서 인물의 초조함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데 극대화된 효과를 준다.  

 

영화 형식적으로만 좋은 게 아니라 오디아르 감독이 다루는 주제 역시 훌륭하다. 소외된 개인을 주로 다루는데 개인을 다루면서 직접적으로 다루진 않지만 기저에 사회 매커니즘의 문제점을 은밀하게 포석으로 깐다. <디판> 역시 스리랑카 내전으로 프랑스로 탈출한 세 사람을 다룬다. 가짜 가족을 이루며 유색이민자가 마주하게 되는 프랑스 사회의 어두운 면을 비춘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 우범지대에 놓여지고 범죄와 살인에 자연스럽게 노출된다. 자국에 겪은 내전의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다른 나라를 택했는데 총격전은 이주국에서도 여전히 일어난다. 아이와 여자는 절대적 희생자이다. 이주민의 삶을 말하고 있지만 역으로 객관적으로 패권을 주도하려는, 고도로 발전된 사회에서도 폭력과 살인의 정도는 내전과 마찬가지라고 역설하는 거 같다. 여자가 가정부로 일하는 집주인 역시 전자발찌를 차고 있는 전과자다. 여자는 전자발찌의 개념을 모르기에 그 사람과 잠시 교감도 나눈다. 두 사람 모두 사회적으로 소외된 인물이다. 두 사람 사이에서 언어소통 장애는 잠시 사람과 죄를 분리하는 힘이 있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여자는 모르는 사이에 어떤 폭력적 세상에 쉽게 노출되는 함정도 있다.

 

오디아르 감독 영화는 과정은 몹시 어둡고 비관적인데 결말은 희한하게 긍정적적이다. 감독은 비관적 낙천주의자다. <디판>이 내전으로 진짜 가족을 잃고 이주해서 맞주한 어려움 속에서 새로운 사랑도 싹트고 적응해가는 과정을 아주 폭력적으로 묘사했다. 실제로 폭력은 많이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영화가 끝나고 나면 폭력에 대한 잔상이 남는다. 그래도 엔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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