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 스완네 집 쪽으로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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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뮈, 알랭 드 보통이 만다라라고 했던 프루스트의 소설. 새로운 판인데 여전히 읽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요즘 집중력이 극도로 저질이라 놓친 구절이 많이다. 나도 모르게 꼼꼼하게 안 읽고 책장을 넘기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오는 일을 반복ㅠ

 

기록을 뒤져보니 국일미디어판도 <스완의 사랑>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민음사판 역시 몹시 흥미롭다. 사랑의 본질에 대해 말하는 챕터다. 사랑은 부재로 완성되고 그 본질 역시 부재 혹은 콩깎지로 인한 사랑을 하는 이의 심리 변화가 사랑이다. 나는 이에 격하게 동의한다. 원래도 좀 감정적 쏠림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의식적으로 쏠림을 통제하는 경향도 있는데다 연애세포의 다량 파괴로 회복 불능의 상태이기도 해서 이런 이성적 담론에 종종 매혹된다. 밑줄을 수도 없이 쳐서 노트에 옮겨 적다 너무 많아 포기할 정도.

 

 

<스완의 사랑>은 오데트와의 상호적이라기 보다는 스완이 오데트를 사랑할 준비가 되면서 오데트를 사랑하게 되고 "사랑의 그림자인 질투"를 하게 되는 기나긴 과정과 사랑의 마법에서 풀려나면서 끝이난다. 바로 요 질투 과정이 사랑의 본질로 묘사되어 있고 질투란 게 비가시적이고 스완의 주관적 심리상태다. 두 연인이 꽁냥거리는 게 사랑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혹은 사랑 속으로 걸어들어가기도 결심한 이의 감정이 깊게 출렁거리는게,  프루스트가 말하는 사랑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상호적이 아닐 수 있기에 언제나 가능하다는 희망이 있기도 하다.ㅎ

 

"어떤 사실을 안다는 것이(...) 우리가 아는 것을 비록 손에 쥐고 있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우리 생각 속에 간직함으로써 우리가 원할 때는 언제라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으므로, 일종의 힘을 행사할 수 있다는 환상을 품게 되는 것이다."(221)

 

사랑을 일종의 질병으로 대입해 표현하는 구절이 많다.

"악습이나 병적인 상태는 사실상 그들이 절제나 치유에 대한 꿈을 꾸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그들의 치유 불능 상태로 짓눌렀다. 스완의 사랑은(...) 나쁜 습관을 급하거나 병을 치료하는 것이 타당한 일인지, 과연 가능한 일인지조차 묻는 그런 단계에 와 있었다."(209)

 

"그(스완)는 병 연구를 위해 스스로 균을 접종받은 사람만큼이나 명철하게 자신의 병을 관찰하면서, 자신이 치유되면 그때는 오데트가 하는 일에 무관심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그의 병적인 상태에서 그가 죽음만큼이나 두려워한 것은 그거 처한 모든 상황의 죽음이나 다름없는 바로 그 치유였다."(197)

 

스완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스완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사랑을 하고 질투를 고안해 냈다. 어찌보면 사랑의 본질은 질투인 거 같기도. "오데트에 대한 사랑이 약화되면서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은 욕망도 약해지는 것이었다.(...) 질투는 오히려 상쾌한 흥분감마저 불러일으켰다"(321)

 

 

이 책 역시 추운 날씨에 읽기에는 그닥 따뜻하진 않는 게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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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6-01-21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스완의 질투에 대하여 계속 묘사한 부분이 참 인상적이더라고요. 오데트 때문에 괴로워하는... 스완 시점에서 이렇게 내면을 상세히 기술하다 갑자기 제3자로 시선을 옮겨버리고 나면 좀 얼떨떨하기도 하고요. 국일판으로도 이미 읽으셨군요. 저는 지금 펭귄판 <소돔과 고모라>를 읽을까 갈등중입니다. 민음사로 읽어오고 있는데 중간에 다른 출판사 것으로 읽으면 연결이 될런지..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넙치 2016-01-23 10:09   좋아요 0 | URL
사랑은 사랑을 사랑하느니라,의 정본인 거 같아요, 스완의 사랑은.^^
정신줄 조금만 놓으면 글이 붕붕 뜨는, 읽기 쉽지 않은 책이에요.

펭귄판도 나왔는지 몰랐어요! 민음사에서 펭귄판으로 중간에 옮기는 건 주저될 거 같아요. 저 같으면 민음사판 완독하고 펭귄판으로 가겠어요.

찾아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

어린시절, <초원의 집>이란 시리즈물을 주말마다 재미있게 봤었다. 적당히 목가적이고 일요일이면 온 가족이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교회에 가고 아버지는 자상하면서도 권위있는...지금 생각해보면 미국이민사를 낭만적으로 그린 판타지에 불과하다. 판타지를 판타지로 못받아들이고 꼭 현실과의 괴리를  짚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니, 세상 참 재미없게 사는 중.

 

19세기 서부개척사 초창기에 마치 그 시절 현장에 가 있는 듯이 촬영한 이 영화가 마음에 들어야하는데 또 그렇진 않다. 광활한 자연 속에 내던져진 개인의 악덕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생존은 언제나  투쟁이라는 생각이. 누가 노마드를  정주인해 비해 경쾌하고 스트레스가 없다고 했는가. 이 영화를 보면 그런 소리 쏙 들어갈 거 같다.

 

2

이냐리투 감독의 영화는 보면서 오감이 불편하다. 어떤 지점을 어떻게 관객이 봤으면 좋겠는지 알고 관객을 철저하게 감독의 의도대로 끌고 다닌다. 찬란한 태양이 빛나는 아름다운 설원을 밑에서 올려다보게 하고 인물을 그 아래 배치한다. 그냥 자연 아래에 있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과 대비되어 육체적으로 굶주리고 정신적으로는 피폐하다. 이따금씩 몰아치는 눈보라에서 살아남으려고 고군분투하는 개인 혹은 소규모로 상징되는 집단을 처참하게 묘사한다. 생존 앞에서 인간의 존엄 따위는 없고 한 마리의 짐승과 같은 원시적 모습으로 묘사된다. 생고기를 먹고ㅠ 동물의 가죽을 가공하지 않은 채 뒤집어 쓴 인간은 직립보행을 하고 우리가 언어라고 부르는 형태의 의사소통 수단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언어란 게 불완전해서 원주민과 유럽백인 사이에도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질 않으니 곰과 말의 의사소통이랑 다를 게 뭐가 있나, 싶다.

 

3

인간의 하찮음은 계속 된다. 자신의 이익, 여기서는 목숨 부지가 중요한 관심사인데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한 때 동료였던 사람도 죽이고 약탈한다. 그러니 원주민 약탈과 살해는 일도 아니다. 흥미로운 건 서부로 가고 있는 백인 무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영어가 아니라 불어다. 대체로 영국이민자들로 과거 영화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영화 속에도 세계 패권 다툼의 기류를 감지하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연대의식은 최소한의 생존권이 보장될 때 생기는 게 아닌가, 싶기고 하다. 영화 에서처럼 일차원적 생존 위협을 받는다면 동족이나 타부족에 대한 개념보다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자신의 생존에 이익을 주는 종한테 연대하기 마련이다.

 

디카프리오와 톰 하디의 대결구도는 복수를 낳을 수 밖에 없지만 인디언의 지혜는 "복수는 신의 손에 달려있다." 게다가 미국영화는 언제나 가족중심주의로 뭉쳐져있다. 아들을 죽인 원수를 쫓아서 불사조처럼 살아나는 아버지. 기독교는 너그러운 종교가 아니며 신은 누구나 용서하는 게 아니고 징벌을 하는 존재다. 다만 그 징벌적 성격이 개인이 아니라 개인의 힘을 초월한, 어떤 우월한 존재의 손에 있다는 걸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최근 미국영화는 정말 이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지루하기까지 하다.

 

4

그동안 따뜻한 겨울을 보내면서 횡재한 기분이었다. 그러다 초속 7-9미터의 바람이 부는 겨울을 지내려니까 모든 일 중단하고 겨울잠을 자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생존을 위해 바람도 맞아야하고 눈보라도 피해야한다. 영화 보고 밤 늦게 집에 돌아오는 간단한 일조차도 몹시 큰 일인 것처럽 여겨졌다.@@ 따뜻하고 훈훈한 이야기를 읽고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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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국의 역사도 잉글랜드 왕과 스코틀랜드 왕의 땅따먹기 역사다.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의 역사적 사건이란 소소한 일상이 아니라 욕망으로 수렴되는 경쟁의 이야기이다. 스코틀랜드의 넒은 평원, 그 뒤로 솟아있는 산봉우리들, 그리고 자욱한 안개가 중요한 미장센이다. 평원을 차지하고 싶은 인간은 산봉우리들을 넘어야하고 그 과정은 두터운 안개 속을 걷고 달리는 거 같다. 맥베스의 불안을 담는 방식은 아주 고혹적이다. 인물들이 욕망으로 갈등하며 대화할 때 클로즈업으로, 게다가 핸드핼드로 담고 욕망으로 가득 차 고뇌할 때는 실내등 실외든 덩그러니 인물을 혼자 배치하고 카메라는 위에서 내려다보거나 멀리서 인물을 담는다. 잦은 클로즈업과 롱쇼트의 변주는 그 자체만으로 역동적이다.

 

2

영화를 보다 보면 구로사와 아키라의 <란>이 계속 연상된다. <란>이 성 쟁탈전을 화려한 스펙터클로 규모에 방점을 두고 좀 거칠게 담았다면 <맥베스>는 왕위 쟁탈전을 소규모로 묘사하는 대신 디테일을 좀 더 자극적으로 담는다. 나는 이런식(칼로 사람을 베고 피가 솟구치는)의 표현법에 거부감이 있지만 시적이고 추상적인 대사들 사이에 고강도 액션이라니, 아무도 지루하다고 하진 않을 거 같다. 게다가 후반부에서 붉은 빛을 사용해서 전투씬이 실루엣으로 드러날 때 너무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 없다. 영국 영화들은 어쩌면 이렇게 액션씬을 고급지게 만드는지.

 

3

맥베스의 불안에 대한 고찰을 좀 해 보면, 맥베스는 왕이 될 거라는 말은 믿는다. 말은 특징이 있다. 한번 내뱉고 믿기 시작하면 거짓과 사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거짓도 참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맥베스는 이걸 증명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들은 말을 믿게 되면서 신념이 생기고 행동을 하는 강한 추진력을 얻는다. 그리하여 그는 왕을 죽이고 왕이 된다. 피로 자리를 쟁취한다.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피는 피를 부른다는 만고진리를 무시할 수 없기에 불안은 맥베스의 영혼을 잠식한다. 불안은 맥베스란 인물의 주요한 특징인데 이 역시 거스를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을 묘사하기에, 세익스피어가 수 세기가 흘러도 그 힘을 여전히 발휘하고 있는 것일터.

 

맥베스가 자신의 성취에 만족한 인물이었다면 잠시나마 즐거움을 누렸을지도 모른다. 결과는 또 다른 왕위 찬탈을 노리는 이한테 피죽음을 당하는 것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자신이 갖지 못한 힘 또는 권력에 대한 의지다. 욕망의 문제이기도 한데 욕망하는 자한테는 반드시 불안이 따르니 욕망하지 않는다면 불안도 없을까. 갑자기 맥베스는 아주 도덕적 인간인간이란 생각이 든다. 욕망만 가득하고 불안이란 감정이 뭔지 모르는 정치인들로 가득찬 나라에 살고 있다보니, 맥베스는 적어도 선과 악에 대한 기준에 대해 고민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4

<이민자>에 이어 마이클 패스빈더와 마리옹 꼬띠아르가 주인공인데 나는 안면인식 장애가 있어서 마이클 패스빈더가 아주 새로운 사람처럼 보였다. 마이클 패스빈더의 연기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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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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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식 나열. 챕터마다 얕으막하면서 광대한 서술. 산만해서 정신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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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ter Journal (Perfect Paperback)
폴 오스터 지음 / Macmillan USA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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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책을 언제 읽었나 블로그를 뒤져봤더니 십여 년 전 쯤에 몇 권 읽었다. 그 후 오스터의 책을 보지 않았는데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오스터의 거친 감성 때문일 거다. 초반에 막 호기심을 자극해서 끌어들이다가 중반쯤 가면 막다른 골목으로 데려가는 거 같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강력한 남성적 관점인 탓인 거 같기도 하고. 줄거리 중심의 소설을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어서 그렇기도 하다.  <겨울 일기> 소설도 아닌 에세이인데도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강력해서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 에세이여서 그게 어떤 부분에만 해당한다. 어떤 세부 사항을 묘사할 때 단순한 사실의 기나긴 나열은 좀 지루하기도 하다. 어쩔 때 좀 아줌마 수다같기도 하고ㅎ  가령, 아침 식사로 뭘 먹나 했을 때, 찬장을 열었을 때 있는 거를 먹는데, 씨리얼 종류 나열, 캠벨 수프를 몇 줄에 걸쳐 나열한다. 우리로 치면 어릴 때 간식으로 먹었던 과자, 짱구, 새우깡, 맛동산, 꿀꽈베기, 라면땅 등등을 나열하는 식이다. 나는 구체적 물건에 대한 향수가 없다. 그래서 응답하라 시리즈가 무척 지루해서 못 보겠다. 친구들은 소품을 보는 재미도 있다는데  그 시절에 대한 물건이 가져다주는 감수성에는 나는 아주 문맹자다.

뉴요커 아니 대도시가 고향이라면 오스터가 어떤 공감이 분명히 있을 거다. 특히 자신의 젊은 시절을 이사로 회상한 구절이 있다. 총 21번의 이사twenty-one permanent addresses 중 뉴욕을 그리워하는 구절이다.

 

"after a while you found yourself missing New York, the vastness and confusion of New York, for the better you came to know San Francisco, the smaller and duller it seemed to you, and while you had no problem living in remotest seclusion, you decided that if you were going to live in a city, it had to be a big city, the biggest city, meaning that you could embrace the extremes of far-flung rural places and massive urban places, both of which seemed inexhaustible to you, but small cities and towns used themselves up too quickly, and in the end they left you cold."(87)

 

내가 서울에 대해 갖는 감정도 비슷하다. 소음과 매연이 고향의 냄새다. 내게는. 미세먼지로 매케한 뿌연 하늘은 유독하지만 묘한 안정감을 준다. 다른 나라 도시에 갔다 돌아와서 소음과 매연으로 숨이 턱 막히는 공기를 폐가 빨아들일 때 안도감이 온몸 전체로 퍼진다. 맑고 깨끗한 공기를 공급하는 건 가끔으로 충분하다.

 

많은 부분이 개인적 이야기다. 결혼 생활, 어린 시절, 엄마 이야기, 친척들 이야기. 문득 읽다보면  개인적 이야기를 많이 하는 거 같으면서도 중요한 건 자체 검열하고 있다. 아버지 이야기, 두 아내, 자식들 이야기가 빠져있다. 엄마 이야기는 단편소설처럼 극적으로 , 그리고 연민의 시선으로 서술한다. 엄마의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란 인물을 유추할 수 있기는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최소한 자제한다. 아내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고. 두번 째 아내에 대한 찬사, "George Oppen's poems, some of the most beautiful places in the world are on your wife's body."(167)는 예외다. 두번 째 아내의 지적 판단력에 대한 존경도 있고 정신적으로 충족한 가정생활을 할 뿐 아니라 아내의 일가가 노르웨이 태생인데 그 태생이 주는 어떤 완고한 기질에 대해 깊은 호감을 묘사한다.

 

오스터가 이렇게 개인적 이야기를 <겨울 일기>를 통해 하는 이유는,

 

"You can't see yourself. (...) We are all aliens to ourselves, and if we have any sense of who we are, it is only because we live inside the eyes of others. (...) Since you couldn't see your own face, you saw yourself in the faces of the people around you, and bit by bit you stopped thinking of yourself as different. In effect, you stopped thinking about yourself at all."(164)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없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 자신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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