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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초원의 집>이란 시리즈물을 주말마다 재미있게 봤었다. 적당히 목가적이고 일요일이면 온 가족이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교회에 가고 아버지는 자상하면서도 권위있는...지금 생각해보면 미국이민사를 낭만적으로 그린 판타지에 불과하다. 판타지를 판타지로 못받아들이고 꼭 현실과의 괴리를 짚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니, 세상 참 재미없게 사는 중.
19세기 서부개척사 초창기에 마치 그 시절 현장에 가 있는 듯이 촬영한 이 영화가 마음에 들어야하는데 또 그렇진 않다. 광활한 자연 속에 내던져진 개인의 악덕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생존은 언제나 투쟁이라는 생각이. 누가 노마드를 정주인해 비해 경쾌하고 스트레스가 없다고 했는가. 이 영화를 보면 그런 소리 쏙 들어갈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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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리투 감독의 영화는 보면서 오감이 불편하다. 어떤 지점을 어떻게 관객이 봤으면 좋겠는지 알고 관객을 철저하게 감독의 의도대로 끌고 다닌다. 찬란한 태양이 빛나는 아름다운 설원을 밑에서 올려다보게 하고 인물을 그 아래 배치한다. 그냥 자연 아래에 있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과 대비되어 육체적으로 굶주리고 정신적으로는 피폐하다. 이따금씩 몰아치는 눈보라에서 살아남으려고 고군분투하는 개인 혹은 소규모로 상징되는 집단을 처참하게 묘사한다. 생존 앞에서 인간의 존엄 따위는 없고 한 마리의 짐승과 같은 원시적 모습으로 묘사된다. 생고기를 먹고ㅠ 동물의 가죽을 가공하지 않은 채 뒤집어 쓴 인간은 직립보행을 하고 우리가 언어라고 부르는 형태의 의사소통 수단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언어란 게 불완전해서 원주민과 유럽백인 사이에도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질 않으니 곰과 말의 의사소통이랑 다를 게 뭐가 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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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하찮음은 계속 된다. 자신의 이익, 여기서는 목숨 부지가 중요한 관심사인데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한 때 동료였던 사람도 죽이고 약탈한다. 그러니 원주민 약탈과 살해는 일도 아니다. 흥미로운 건 서부로 가고 있는 백인 무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영어가 아니라 불어다. 대체로 영국이민자들로 과거 영화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영화 속에도 세계 패권 다툼의 기류를 감지하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연대의식은 최소한의 생존권이 보장될 때 생기는 게 아닌가, 싶기고 하다. 영화 에서처럼 일차원적 생존 위협을 받는다면 동족이나 타부족에 대한 개념보다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자신의 생존에 이익을 주는 종한테 연대하기 마련이다.
디카프리오와 톰 하디의 대결구도는 복수를 낳을 수 밖에 없지만 인디언의 지혜는 "복수는 신의 손에 달려있다." 게다가 미국영화는 언제나 가족중심주의로 뭉쳐져있다. 아들을 죽인 원수를 쫓아서 불사조처럼 살아나는 아버지. 기독교는 너그러운 종교가 아니며 신은 누구나 용서하는 게 아니고 징벌을 하는 존재다. 다만 그 징벌적 성격이 개인이 아니라 개인의 힘을 초월한, 어떤 우월한 존재의 손에 있다는 걸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최근 미국영화는 정말 이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지루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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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따뜻한 겨울을 보내면서 횡재한 기분이었다. 그러다 초속 7-9미터의 바람이 부는 겨울을 지내려니까 모든 일 중단하고 겨울잠을 자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생존을 위해 바람도 맞아야하고 눈보라도 피해야한다. 영화 보고 밤 늦게 집에 돌아오는 간단한 일조차도 몹시 큰 일인 것처럽 여겨졌다.@@ 따뜻하고 훈훈한 이야기를 읽고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