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 감춰진 것들과 좌파의 상상력
최세진 지음 / 메이데이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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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한 여성의 홈페이지를 즐겨찾기 해 놓고 가끔씩 가보고 있다. 한 3년 되었으려나. 나보다 한참 아래인데 감수성과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나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음악 취향도 그렇고. 인터넷의 익명성을 고스란히 즐기는(?) 중에 그녀의 홈피에서 본 책이었다. 얼마나 매력적인 제목인가! 그들만의 혁명이 아니라 나의 혁명을 말하는 책이라니..하는 건 틀렸다는 걸 알았다.

서가 어딘가에 처박아놓은지 일 년도 넘은 것 같다. 이번에 책장을 장만한고 바닥에 널부러진 책들을 일으켜 세우고 줄을 맞추다 발견했다. 컨디션도 최악, 의욕도 최악인 상태인 요즘..여름에 침대쪽에 난 창을 여는 위치를 십 년 넘게 발쪽으로 두었었다. 올 여름 더위와 몸살로 비실거리다 머리쪽으로 창을 여는 위치를 바꾸었다. 내겐 작은 혁명이었고(왜 진작에 그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눈 감고 뜰 때 열린 창으로 하늘을 볼 수 있어 천창을 가진 기분이다. 베개 비스듬이 세워놓고 커피 한 잔과 함께 시원한 하늘 아래서였을까. 책갈피가 바람에 넘어가듯 술술 넘어갔다.

내용에서 좌파의 상상력을 찾기는 사실 좀 어렵고, 바그너, 쇼스타코비치, 피카소, 등 전쟁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액티비스트로 활동했는가가 신문 특집기사처럼 평이하고 간결하게 엮어져 있다.  조지 오웰의 <카탈로냐 찬가>를 읽고 피카소의 출생지 말라가를 갈 생각에 살짝 상기되는 것 정도가 이 책의 유용성이 되겠다.

올라 온 다른 리뷰를 보니 다들 좋게 평하는데 한편으로 난 너무 인색하게 뭐든 바라본다. 난 왜 이 모양인거야,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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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 가우디 살림지식총서 127
손세관 지음 / 살림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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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 다녀와서 이 책을 샀을 것이다. 그리고 스페인행을 준비하면서 이 책을 다시 읽는다. 부제, 아름다움을 건축한 수도자가 눈에 띈다. 평생을 건축에만 바치면서 수도자처럼 살았던 가우디. 가우디 시대에 가난했던 티는 흔적 없고 독립을 주장할 정도로 재정적 자립도가 높은 부유한 바르셀로나에 화려한 느낌을 더해주는 게 가우디의 자취이다. 눈에 보이는 알록달록한 타일과 곡선에 감탄사 한 마디 내뱉는 건 쉬운 일이지만 그 곳에 서린 가우디의 혼을 더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번에 가면 어떠려나..모르겠다. 햇빛의 각도에 따라 변하는 건물을 만드려는 집념을 찾을 수 있을까.

위인들의 공통점은 집중이다. 한 곳에 몰입하고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작업을 계속한다. 사소한 환경 속에서도 집중거리를 찾아내는 일이 바로 위인과 범인을 구별해주는 지점이다.

"창조는 인간을 통해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인간은 창조하지 않는다. 단지 발견만을 할 뿐이다. 새로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자연의 법칙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창조주와 함께 제작에 참여할 수 없다. 따라서 독창성이란 자연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자연은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책과 같다."

캬! 자연은 말을 걸어오는 책이라니!

"현명한 사고는 과학보다 우수하다. ..현명한 사고는 종합적인데 반해 과학은 분석적이다. 분석에 의한 종합은 현명한 사고의 종합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분석적인 것일 뿐 전체는 아니다. 현명한 사고는 종합적이며 생명력이 있다......종합은 공간이다. 인간의 지성은 오로지 평면만을 연구할 뿐이며, 분석적인 사람은 그저 점을 연구할 뿐이다. 과학은 분석인 동시에 종합이다. 분석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나 불완전하다."

핀란드에서 상상력 기르기 교육으로 스토리 텔링을 가르친다는 기사를 얼마 전에 읽은 적이 있다. 앞서가는 이들은 종합적 사고의 중요성을 이미 알고 있단 말이겠다. 난 참 분석적 인간인지라 그저 점만 연구할 뿐이라는 말이 가슴을 적시는구나. 핀란드에 가서 청강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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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 동물기 1 시튼 동물기 1
어니스트 톰슨 시튼 글, 그림 / 논장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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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리뷰보다는 책에 대한 추억담을 쓰려고 한다. 열 한 두 살 무렵일게다. 40권짜리 소년소녀 문학전집을 독파하고 있었던 시기기도 했다. 그 전까지 그림이 있던 큼지막한 글씨가 담을 수 있던 책들과는 다른, 훨씬 더 굵고 깊은 세계가, 작은 글자들로 이루어진 책에는, 있었다. 이 새로운 세계에 매혹되어 사십 권을 줄기차게 읽어댔다.

그 중 한 권이 시튼의 동물기였다. 파브르의 곤충기가 기억 속에 미미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반면에 시튼의 동물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문득문득 어렴풋하게 떠오르곤 했다. 동물의 구슬픈 삶이 우리의 삶하고 닮아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십 여년 전쯤에 시튼 동물기를 몇 군데 서점에 문의해봤지만 아동용으로 출판된 큼지막한 글씨로 된 책 밖에 없었다. (소년소녀 문학전집은 몇 번의 이사로 버려야할 것으로 분류되어 재활용지로 다시 탄생하지 않았을까) 내가 찾는 건 기억이었는데 눈 앞에 있는 건 기억을 돕기는 커녕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책을 찾았을까, 하는 의문을 던져주었다. 그리하여 읽는 걸 보류해두었다.

십 여년이 흐른 지난 달, 검색해보니 시튼 동물기가 4권으로 나와있었다. 늑대 왕 로보와 회색곰 왑이 분리된 권에 속해 있지만 십 여년 전에 실망한 책보다는 내가 책을 찾는 목적에 조금 더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로보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문해본다. 나는 이런 류의 책을 읽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은 게 아닐까, 나이와 함께 이루어 온 경험들로 추한 세계를 알아버린 건 아닐까, 하고 절망과 어깨동무를 했다.

꿋꿋하게 버티는 로보와 왑의 생에서 투지와 의지를 발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 삶에 없는. 그래서 로보와 왑이 수 십년을 살아있었는지도 모른다. 로보는 죽는다. 왑도 죽었던 것 같다. 로보도 왑도 인간과 싸울 수 없고,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 인간이 위대한 게 아니라 먹이사슬에서 한없이 작아보이는 롭과 왑은 나이 든 내게는 애처롭지만 당연한 귀결로 다가온다. 디지털 시대에 실사보다 더 실사같은 복제 동물을 접할 수 있는 요즘 아이들에게 로보와 왑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여러모로 유쾌하지 않은 감정 찌꺼기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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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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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주제에 대한 논문과 소설의 가장 큰 차이는? 논문이 한 명제에 대해 구체화하는 일이라면 소설은 일반화다. 2차 세계대전 중 드레스덴에 참전했던 기억을 논문이었다면 사건을 훨씬 더 구체화 했을 것이다. 그러나 커트 보네거트는 소설가다. 자신이 느꼈던 것을 다른 사람도 느끼게 하는 임무를 맡고있다. 공감..소설가의 의무이면서 특권인데 커트 보네거트는 공감을 끌어낼 줄 안다. 전쟁의 야만성을 표현하는데 읽고 나면 섬뜩하다. 전장에 나와있는 군인들의 지저분한 얼굴을 닦고 면도를 했더니 아이들이 있었다고. 소설이란 장르를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이유다.

프롤로그처럼 시작하는 첫부분을 읽으면서 사뭇 무거웠고 착각했다. 책장을 조금 더 넘기면서 헷갈리기 시작했다. 시간에서 해방되었다는 데 빌리 필그림은 정작 자신을 시간 발작환자로 여긴다. 빌리의 동선을 따라가기가 벅찼다. 몽타주 기법으로 이어지는 시간여행 때문에 나도 시간 발작증 환자가 되게 아닌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서 빌리가 이끄는대로 따라가니 느긋해지면서 빌리의 말이 귀에 들어온다. 별날 것 없는 일상어로 커트 보네거트는 관조적 색채를 빚어낸다.

"트랄팔마도어에는 전보가 없어요. 하지만 당신 말은 맞았소. 각각의 기호 모둠은 짧고 급한 전문이오. 상황과 장면을 묘사하고 있지. 우리 트랄파마도어 인들은 그것들을 하나씩 차례대로 읽지 않고 모두 동시에 읽어요. 그 모든 전문들은 아무런 관련이 없소. 저자가 모든 것을 동시에 보면 아름답고 놀랍고 깊은 생의 이미지가 드러나도록 신중하게 선택했다는 것만 빼면 말이오. 거기에는 시작도, 중간도, 끝도, 서스펜스도, 교훈도, 원인도, 결과도 없소. 우리 책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점은 수많은 경이로운 순간들의 깊은 속을 일시에 들여다볼 수 있다는 거지"(108)

이 소설의 구성을 낯설어 하는 사람에게 해 주는 말이다. 짧은 문장들을 들여다보면 삶의 진리와 깊은 진실이 드러나있다. 커트 보네트가 빌리 필그림을 통해 안내하는 길을 걸으며 공감이라는 작은 행복을 찾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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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중위의 여자 Mr. Know 세계문학 11
존 파울즈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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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 책이 연애소설인줄로만 알아서 읽지 않았다. 마땅한 소설을 발견하지 못한 와중에 주문하고 배달받고 나서도 한참을 처박아두었다. 그러다 요즘 몸살 기운 때문에 빈둥거리다 집어들었는데..오, 고전의 명성이란 바로 이런 거지!!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다. 다 이 제목, 그리고 영화 때문이야, 탓하면서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에 읽는 즐거움을 누렸을텐데..변명도 늘어놓아본다.

제목이 프랑스 중위의 여자, 사라지만 사라는 다른 등장 인물들처럼 찰스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산파역할만을 할 뿐이다. 몰락해가는 귀족 신사인 찰스는 아무리 쇠락해가도 귀족은 귀족인 법. 빅토리아 시대의 관습하에서 무서운 속도로 부상하는 신흥부르주아마저도 선망하는 귀족인 것이다. 자본이 빠른 속도로 몰락한 귀족의 지위를 먹어치우고 있지만 관습법과 자본 사이에는 미묘한 알력이 존재한다. 찰스의 장인이 될 뻔한 프리먼과의 대화에서 서로의 입장에 대해 갖는 견제는 19세기 후반의 격동을 잘 알 수 있다.

찰스는 독특한 인물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이중성을 온전히 담아내는 전형적 인물이다. 관습, 즉 익숙한 길을 권태스럽게 걸어가고자 하는 속성과 사라, 즉 일탈을 통해 다른 세계로 닿는 접점을 찾으려는 성향. 이런 양면성은 찰스만의 본성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이다.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도 있었다. 그러니까 영국의 미스터 보바리인 셈이다. 미스터 보바리는 열정에 희생당하지는 않는다. 그는 신사니까. 또 파울즈는 프랑스인이 아니라 영국인이니까. (음..찰스는 내 말에 분노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파혼을 하고 무엇보다 명예를 잃었는데 내가 희생자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찰스의 전부일 수도 있는 명예에 대한 개념이 21세기 소시민인 독자에게는 희미하다. 원본과 가짜를 구별할 수 없는 현대에 19세기적 잣대로 원본의 고결함을 보존하지 못한 수치를 이해하는 건 사실 좀 힘들다. 그러니 난 찰스가 모든 것을 잃었다고 말하는데 대목에서 동의하지 못한 채 멀찌감치 떨어져 그를 19세기 속에 나오는 인물로 보았다.)

이 책이 역사 메타픽션으로 풍부한 텍스트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지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은 역시 사라와 찰스가 만나는 장면이다.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들은 마치 어린날 가슴을 콩닥이며 읽었던 하이틴 로맨스같다. 사라의 심리보다는 찰스의 심리에 무게중심을 두고 추처럼 왔다갔다하는 묘사. 게다가 기차 안에서 찰스와 만나는 파울즈라니! 오늘날 볼 수 있는 내레이터들의 많은 시점의 원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런 독특한 명작을 이제야 읽다니...

또 하나. 두 사람의 사랑. 과연 그들은 사랑했을까. 그들은 사랑을 사랑한 건 아닐까, 특히 히 사라는. 찰스의 입장에서 사라는 자신과 동등한 피조물이라는 데 놀라고 걷잡을 수 없이 끌리지만 사라는 찰스는 관습을 거슬러 살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 타진이었을 수도 있다. 물론 그녀는 그런 의도를 의식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사랑은 결혼이나 결합으로 깨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걸 보면 사랑을 지키려고 했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찰스가 기꺼운 마음으로 사라의 선택을 수긍하진 않더라도 존중은 해주었으니 말이다. 난 사랑 예찬론자인가, 비관론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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