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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중위의 여자 ㅣ Mr. Know 세계문학 11
존 파울즈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지금까지 이 책이 연애소설인줄로만 알아서 읽지 않았다. 마땅한 소설을 발견하지 못한 와중에 주문하고 배달받고 나서도 한참을 처박아두었다. 그러다 요즘 몸살 기운 때문에 빈둥거리다 집어들었는데..오, 고전의 명성이란 바로 이런 거지!!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다. 다 이 제목, 그리고 영화 때문이야, 탓하면서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에 읽는 즐거움을 누렸을텐데..변명도 늘어놓아본다.
제목이 프랑스 중위의 여자, 사라지만 사라는 다른 등장 인물들처럼 찰스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산파역할만을 할 뿐이다. 몰락해가는 귀족 신사인 찰스는 아무리 쇠락해가도 귀족은 귀족인 법. 빅토리아 시대의 관습하에서 무서운 속도로 부상하는 신흥부르주아마저도 선망하는 귀족인 것이다. 자본이 빠른 속도로 몰락한 귀족의 지위를 먹어치우고 있지만 관습법과 자본 사이에는 미묘한 알력이 존재한다. 찰스의 장인이 될 뻔한 프리먼과의 대화에서 서로의 입장에 대해 갖는 견제는 19세기 후반의 격동을 잘 알 수 있다.
찰스는 독특한 인물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이중성을 온전히 담아내는 전형적 인물이다. 관습, 즉 익숙한 길을 권태스럽게 걸어가고자 하는 속성과 사라, 즉 일탈을 통해 다른 세계로 닿는 접점을 찾으려는 성향. 이런 양면성은 찰스만의 본성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이다.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도 있었다. 그러니까 영국의 미스터 보바리인 셈이다. 미스터 보바리는 열정에 희생당하지는 않는다. 그는 신사니까. 또 파울즈는 프랑스인이 아니라 영국인이니까. (음..찰스는 내 말에 분노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파혼을 하고 무엇보다 명예를 잃었는데 내가 희생자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찰스의 전부일 수도 있는 명예에 대한 개념이 21세기 소시민인 독자에게는 희미하다. 원본과 가짜를 구별할 수 없는 현대에 19세기적 잣대로 원본의 고결함을 보존하지 못한 수치를 이해하는 건 사실 좀 힘들다. 그러니 난 찰스가 모든 것을 잃었다고 말하는데 대목에서 동의하지 못한 채 멀찌감치 떨어져 그를 19세기 속에 나오는 인물로 보았다.)
이 책이 역사 메타픽션으로 풍부한 텍스트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지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은 역시 사라와 찰스가 만나는 장면이다.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들은 마치 어린날 가슴을 콩닥이며 읽었던 하이틴 로맨스같다. 사라의 심리보다는 찰스의 심리에 무게중심을 두고 추처럼 왔다갔다하는 묘사. 게다가 기차 안에서 찰스와 만나는 파울즈라니! 오늘날 볼 수 있는 내레이터들의 많은 시점의 원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런 독특한 명작을 이제야 읽다니...
또 하나. 두 사람의 사랑. 과연 그들은 사랑했을까. 그들은 사랑을 사랑한 건 아닐까, 특히 히 사라는. 찰스의 입장에서 사라는 자신과 동등한 피조물이라는 데 놀라고 걷잡을 수 없이 끌리지만 사라는 찰스는 관습을 거슬러 살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 타진이었을 수도 있다. 물론 그녀는 그런 의도를 의식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사랑은 결혼이나 결합으로 깨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걸 보면 사랑을 지키려고 했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찰스가 기꺼운 마음으로 사라의 선택을 수긍하진 않더라도 존중은 해주었으니 말이다. 난 사랑 예찬론자인가, 비관론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