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가결 기념으로, 백만년 만에 극장에 갔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다. 벨기에에 다르덴 형제가 있다면 영국에는 켄 로치가 있다. 한국에는? 우린 미국식 영화를 만드는 거 같기도 하고. 리얼리즘에 기반한 영화를 주류 감독은 거의 안 만드는 거 같다. 젊은 독립영화 감독들이 주로 다루는 주제인데 독립영화로 넘어가면 어두운 톤으로 전달되는  경향이 있는 거 같기도. 아무튼.

켄 로치 감독의 초기작들은 지독한 사실적 묘사로 서늘하고 영국의 차가운 공기(실은 잘 모르지만)를 화면 속에서 그대로 전달되는 느낌이다. <빵과 장미>같은 판타지 보다는 이런 서늘한 시선이 켄 로치 감독의 장기이다. 남의 나라나 우리나라나 암울하기는 마찬가지-.-;

영화는 꽤 긴 암전으로 시작한다. 두 사람의 대화 소리만 들린다. 여자가 묻는다. 두 팔이 상의 주머니까지 올라가느냐. 짜증난 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난 심장에 문제가 있지 다른데는 문제가 없다고. 뭐지...하는데 영국의 각종 보조금을 지불하는 관료주의적 방식에 대한 비판적 시선으로 시작한다. 명목상 직장을 구할 동안 주는 구직보조금, 아파서 일을 할 수 없을 때질병보조금 등등의 제도를 가지고 있는 사회. 그 사회에서 보조금 수혜자에 대한 원칙만을 고수하는 기관 직원과 정말 보조금이 절실한 한 개인의 시선이 충돌한다. 제도는 허울 뿐이고 가스비와 전기료를 낼 돈이 없을 정도로 절박한 한 성실한 노인이 겪어야하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이 등장한다.

1시간 가량의 자동연결음을 듣다 어렵게 통화가 된 직원은 절차대로 해야한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약속 없이 왔으니 돌아라가...인터넷에 나와있다. 돋보기를 끼고 마우스 사용법과 인터넷 신청서를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배우는데 몇 일. 결국 옆집 청년의 도움으로 간신히 질병보조금 수당 탈락에 대한 항고서를 제출할 수 있다. 물리적으로 블레이크가 접할 수 있는 정보의 양도 한정되어 있고 무엇보다도 기계의 편리함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행정절차의 편리함을 내세워 절실한 사람들을 차단시키려는 목적은 아닌지. 이건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들 경험한 바가 있을 것이다.

블레이크는 보조금 신청 기관에 가서 무작정 기다리다 런던에서 두 아이를 데리고 이사 온 싱글맘을 만나게 된다. 블레이크보다도 보조금이 더 절실해보이는 가족. 쉼터에 좁은 방에서 어린 아들이 산만한 행동을 보여 큰 공간을 위해 월세가 싼 지방으로 이사했지만 당장 저녁거리도 없을 정도로 가난하다. 아날로그 세대인 블레이크는 어린 아이들을 손주처럼 대하고 독거 노인과 한부모 가정은 정서적 유대와 안정감을 주고 받는다. 하지만 아이들한테는 또래들한테 놀림받지 않으려면 밑창이 제대로 달린 신발도 필요하고 성장을 위해 신선한 과일도 필요하다. 전기도 연결 못하고 인스턴트 스파게티 소스도 아껴야하고 생리대 살 돈도 없는 싱글맘은 겉으로는 의연한 거 같지만 매일 반복되는 허기에 지쳐있다. 일자리 찾기도 쉽지 않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원시 시대 정글같은 곳에 두 사람은 떨어진 거 같다.

블레이크는 공공기관과 씨름하느라 매일 초긴장상태로 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인생을 좀 살아본 사람이다.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는 영혼의 급이 있는 사람이다. 평생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았는데 기관 직원들은 원칙을 들먹이며 증빙 지료가 불충분해서 제제를 받을 수 있고, 제제시 보조금이 없는 상황으로 협박을 한다. 블레이크의 인격은 심사대상이 아니라 블레이크가 낯선 디지털 시대의 자료를 보충할 것을 종용한다. 어찌어찌해서 블레이크는 결국 항고에서 승리할 직전에 왔다. 하지만 그 승리를 확보하기 위해 블레이크가 뛰어다닌 시간은 극도의 긴장 상태였다. 보조금 수령을 앞두고 그는 심장은 다시 한번 폭발한다. 영원히.

남의 일 같지도 않고 영화같지도 않다. 내 일이고 현실일 수 있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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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에 관한 담론은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허구적이다. 연애나 사랑을 다루는 영화들은 거의 대부분 판타지에 기반한다. 사랑의 기쁨만을 주로 부각시켜서 사랑을 못하거나 안하는 걸 좌절스럽게 만를 뿐만 아니라 사랑하면 즐거움만을 기대하게 한다. <연애담>은 판타지적 요소가 하나도 없고 정말 현실적이다. 동성애를 다루지만 연애할 때의 보편적 감정을 잘 포착해내고 있다. 

사랑을 하면 즐겁고 예뻐지는 건 맞다. 상대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외모에도 신경쓰고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면 혼자 있어도 배실배실 웃음이 새어나오고. 이런 시간이 지속된다면 예술 영역에서 사랑을 다룰 이유도 없을 것이다. 이런 즐거운 시간은 짧고 많은 시간이 우왕좌왕하고 고통스럽다. 일상에 균열을 가져올 정도로 극도의 우울에 종종 사로잡힌다. 상대에 대한 마음의 크기가 일치 않는데서 비극이 비롯된다. 너에 대한 내 마음이 이렇게나 커, 하고 외쳐도 어느 순간 그 외침은 자신의 메아리로 남아있을 때가 많다. 상대가 귀를 기울이지 않고 마음을 닫아버리면 상황은 더 암담해진다. 

윤주는 지수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윤주는 소심하고 지수는 적극적이다. 윤주는 지수한테 끌리고 오밤중에 지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지수가 나타나자 가슴 속에 식지 말라고 품고있던 (아마도) 군고구마 봉지를 내밀며 "너 한테 잘보이고 싶어서"하고 베시시 웃는다. 이런 사소한 일상적 행위에서 연인은 사랑의 밀도를 감지한다. 하지만 서로를 좀 알아가면서 어떤 반찬을 좋아하고 무슨 일을 하는지, 자신의 기준에 안 맞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초반에는 상대의 그 모든 것이 호기심이었다가 자잘한 일상, 하지만 하루의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그 일상에 개입하고 싶어진다. "다른 일을 하면 안돼? 나랑 살 생각같은 건 안 해봤어?" 등등. 걱정과 불안이 사랑의 기쁨과 바톤터치를 한다. 미대 대학원생인 윤주는 교수의 총애를 받는 예비 유망작가다. 지수를 만나고 감정의 파도타기로 미래도 엉망이 돼버린다. 

여기에는 지수의 변심(?)도 있는데 그 변심이란 게 성정체성에 대한 서로 다른 방식의 고민이다. 지수는 혼자 살다 집으로 들어가서 아버지랑 함께 살면서 자신의 욕망을 억압한다. 월미도까지 찾아오곤 하는 윤주에게 냉랭하게 대하고 아버지가 주선한 남자와 선을 본다. 윤주 역시 룸메이트한테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말하자 싸늘한 태도와 맞닥뜨려 정신적 갈등은 배가 된다. 가장 친한 남자사람 친구마저도 겉으로는 윤주의 성정체성을 이해하는 것 같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성애를 기준으로 삼은 공고한 가치관을 내비친다. 애인한테도 이해 못 받고 주변 친한 친구들한테도 이해 못 받는 사랑을 하고 있다. 

하지만 또 사랑이란 게 뭔가...서로 연락을 없이 이렇게 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다가 지수가 어느 날 불쑥 찾아온다. 윤주는 지수한테 화가나서 뻣뻣하게 대한다. 지수가 아무리 애교를 부려도 윤주의 마음은 녹질않는다. 윤주의 집에서 지수가 윤주를 안고 낮게 속삭인다. "보고싶었어". 연인한테 필요한 말은 이 단 한마디인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나 설명이 아니라 "보고싶었어." 윤주의 마음이 흔들린다. 윤주와 지수는 다시 원점에 있을 거라는 걸 암시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현실 속 많은 연인들이 그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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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hell or high water>.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란 말이 되겠다. 영화를 보고 나면 원제가 로스트 인 더스트보다 훨씬 적절하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나라꼴이 비슷하게 돌아간다. 박근혜를 끌어내릴 방법과 그 후의 개각에 대한 전문가들의 논의를 보면 법이 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분통이 터진다. 데리다는 법은 그 자체로 전능하고 권위적이라고 지적했다. 법치주의란 결국 국민을 대표한다는 소수가 만든 법이 통치하는 나라다. 법은 성문화되면 그 자체로 신성한 영역으로 들어가버려서 법 아래있는 국민은 법 해석을 통해 합법인지를 따지는 코믹한 상황이 벌어진다. 그렇다고 무법의 시대로 돌아갈 수도 없고...

 

<로스트 인 더스트>는 어떤 면에서는 성문법의 틈을 이용한 한탕이 되겠다. 나는 심정적으로 영화 속 은행털이 형제를 지지한다. 대대로 가난한 형제가 있다. 어머니는 대출받아 땅을 샀으나 은행에서 역대출을 해서 삶의 터전인 땅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해있다. 핵심은 역대출이다. 은행은 대출을 받아 땅을 사라고 부추겼고 땅을 산 사람은 대출금을 갚지 못해 땅을 담보로 또 대출을 받는다. 그 대출이자를 은행이 내주고 땅 주인한테서 담보물을 빼앗는 구조다. 자, 대출받은 사람의 손에는 결국 뭐가 남나? 빚 과 피폐한 마음만 남는다. 은행은 법의 보호하에서 한 가족의 삶을 몰수 할 수 있다. 형제는 대출 만기에 대출금을 갚기 위해 은행을 털기로 한다. 작은 마을에 있는 작은 은행에서 현금만 적당히 챙겨서 여러 은행을 턴다. 대출금을 맞추기위해.

 

영화는 버디무비처럼 진행된다. 은행털이 형제의 이야기와 은행털이범을 뒤쫓는 보안관들의 이야기. 보안관은 궁금하다. 마약을 사지도 않고 흥청거리며 유흥비에 쓰지도 않고 아침부터 성실하게 일정한 액수만 가지고 은행을 떠나는 이유가 뭘까. 이런 서사 속에 경험많은 은퇴한 보안관과의 추격전이 벌어지고 기시감이 드는 서부영화의 총잡이들의 대결도 찌릿찌릿하다.

 

은행은 총 안든 합법적 강도다. 돈 빌려주고 담보 빼앗고 개인한테 빚만 떠넘긴다. 은행을 털어 마치 카지노에서 딴 돈처럼 세탁을 해서 은행에 신탁을 하면 은행털이범도 주요 고객이 된다. 은행은 돈의 출처 따위는 궁금해하지도 않다. 즉 은행은 정당한 돈과 부정한 돈의 구별을 하지 않은 곳이다. 은행입장에서 돈은 다 하나의 돈일 뿐이다. 대출 만기일 직전에 대출금을 갚고 대출 말소를 시키는데 돈은 꼭 총같은 역할을 한다. 총구를 들이대면 생명의 위협을 느끼듯이 돈을 들이대니까 은행지점장도 위협을 느끼면서 고객의 요구에 충실히 행동한다. 요 장면에서 엄청난 긴장감이 파생되고 총없는 총싸움을 빗대어 잘 담았다.

 

노보안관의 선택도 흥미롭다. 보안관은 동료를 잃고 은행털이범 형제 중 배짱 좋은 형을 사살한다. 하지만 의문이 남는다. 왜 이들이 은행을 '성실히' 털었는가. 결국 동생한테 찾아가 인간대 인간으로 이유를 듣는다. 가난 탈출이고 자신의 자식들한테는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듣고 노보안관은 그를 잡지 않기로 한다.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사회적 질서를 혼란시켰지만 그 혼란의 근원은 선한 사람이 아니라는데 동의를 하는 시선이다.

 

아주 재밌는. 그러나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는 장면이 있다. 노보안관과 보안관이 추격전을 벌이며 어느 작은 마을 식당에 들어간다. 입이 걸은 할머니가 주인이고 대뜸, 묻는다. 뭘 먹고 싶은지 말하는 게 아니라 뭘 안 먹고 싶은지 말하라고. 스테이크, 감자, 강남콩 중 뭘 안 먹겠냐고. 자기 기억에 딱 한 사람만이 먹고 싶은 걸 시켰다고. 송어. 산동네 와서 송어를 시키다니 미쳤다고. 두 보안관은 얼떨결에 안 먹고 싶은 건 강남콩이라며 주문을 마쳤다. 식당에서 손님이 왕이란 생각을 버리고 식당 주인이 주는 걸 먹어야하는 룰을 따르는 것. 현대 사회는 법이며 룰이 족쇄가 되어서 선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복장터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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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시 아이젠버그가 나온다. 제시 아이젠버그는 표정이 독특하다. 공허한게 한 곳을 응시해도 아무것도 응시하고 있는 거 같지 않은 표정이다. 말투는 몹시 빠른 편이라 뭔가 허둥대는 느낌, 그래서 그 공허한 표정과 빠른 말투는 불안을 참 잘 표현한다.

 

2.

주말에 어쩌다보니 가족 해체에 관한 영화를 보고 가족 해체에 관한 소설을 읽었다. 이 영화 역시 가족 해체에 관한 영화다. 종군 기자인 엄마의 죽음으로 아들을 출산한 아들이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는 아버지와 십대 아들은 소통 단절로 고군분투 중이었다. 아버지는 십대 아들을 스토킹하고,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젊은 여선생과 사귀게 된다. 십대 아들은 가슴이 빵빵한 같은 반 여학생을 스토킹하고, 글을 쓴다.  두 사람의 고군분투는 형의 귀향으로 형의 시점에서 교통정리가 된다. 십대는 잠시 대화 상대를 만났고 아버지 역시 대화 상대를 만났다. 하지만사회학  PH.D 학위를 받은 아들은? 도피중이다. 자신이 만난 여자친구와 갓 태어난 아기. 여자친구가 자신을 떠날거란 두려움이 있고, 아마도 집을 떠나기 전 사랑했던 여자를 다시 만나 속 이야기를 한다. 종군 기자인 엄마는 회상장면으로 등장하는데 전쟁터에 있을 때, 다른 남자가 있었고. 아마도 남편의 친구 혹은 부부의 친구.

 

뭐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고 이런 개인의 내적 갈등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관건인데 영화는 내밀하지도 섬세하지도 않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얽히게 늘어놓다보니 감정을 다루는 중요한 일에는 막상 실패하게 된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면, 인물들이 힘들게 사네, 하는 거리두기가 저절로.

 

3.

재밌는 영화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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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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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에 읽은 책 중 가장 감명깊은 책을 꼽으라면 앤드루 포터의 단편집 <물질과 빛에 관한>이론이다. 담담한 문체지만 행간에 많은 섬세한 감정들을 찾을 수 있다. 단편마다 눈에 띄는 사건이 없이 일상의 미세한 균열을 담아낸다. 사람은 사랑하는 이(가족이든 애인든)와 헤어졌어도 일상은 똑같이 살아지고 살아간다. 밥을 먹고 일을 하고 개인적 활동동을 하고. 행위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가만이 들여다보면 행위를 하는 주체의 마음은 변한다. 사건(?)이 있기 전에 못 느꼈던 부재감, 상실감, 혹은 기득감을 인지한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인식하지 못했던 미세한 떨림의 결을 포착하는 일이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파장이다.

 

2.

앤드루 포터의 영문판 소설을 검색하다가 <어떤 날들>이 번역된 걸 발견했다. 단편에 감동을 주는 작가의 장편은 힘이 좀 딸릴 때가 많아서 기대치를 좀 낮췄는데도 역시나 장편보다는 단편이 훨씬 좋다. <어떤 날들>도 장편이 아니라 중편쯤이었으면 아주 좋았을 거 같다. 플롯은 스릴러처럼 구성된다. 대학에 다니는 딸이 학우의 폭력 사건에 연류되면서 도망자 신세가 되고 그 딸의 행방불명으로 이혼한 부부, 그리고 게이인 아들이 각각 가족 구성원의 개체로서 어떤 입장으로 가족이란 테두리, 가족 내에서 역할을 더듬는다.

 

 

"엘슨은 이 모든 것이 현대인의 삶, 이 시대 가족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묘한 증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극적인 사건으로 갈가리 찢어진 가족이 있고 아버지를 경멸하는 아들이 있고 욕실에서 마리화나를 피우는 전처가 있으며 딸은 감옥에 갈 가능성이 아주 큰 상황인데, 그런데도 자신이 더 큰 무언가의 일부라는 사실에,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본인들은 깨닫지 못해도 그들이 자신을 의지한다는 사실에 단순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445)

 

소설을 읽으면서 가족이란 행복한 때를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불행을 마주할 때 그 존재감을 발휘하는 게 아닌가, 싶다. 행복의 영역은 각자의 영역이다. 사랑해서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운 부부의 관계가 이혼이란 결말을 맞지만 개인의 행복추구권은 일정 부분 존재한다. 각자 다른 파트너,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정서적 유대를 이루지만  과거의 가족은 흩어졌어도 위기는 다시 모이게 하는 구심점이다. 딸 클로이의 행방불명으로 부부,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은 아들은 클로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모인다. 아내 케이든스는 "평생 남편의 뒤를 따르느라 스스로를 잃어버린 사람들" 속에 속했다. 아들은 성인이 되었고, 다른 사람이 되었다.

 

"예전에 누렸던 아들과의 친밀함이, 긴 대화가 그리웠다. 엄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던 아들, 고등학교 때 함께 갔던 수영경기들, 경기 직전 항상 엄마에게 손을 흔들던 아들의 모습, 그리고 경기 후엔 항상 단둘이 저녁식사를 하러 가서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누곤 하던 그 시절이 그리웠다."(395)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도 빛이 바랬다. 한때는 좋은 동반자였고 친구며 동료였던 사이이다. 딸 클로이의 행방불명으로 잊고 있던 사실을 상기하면서 오랜 기간 의지했던 사이라는 걸 알게 되고 여전히 그렇다는 걸 깨닫는다. 하지만 상황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한번 균열된 마음은 다시 이어붙이기 어렵고 딸 클로이는 부모의 곁을 떠나 사랑하는 이의 곁에 남기로 결심한다. 딸은 자신만의 가족을 꾸릴 것이다. 여전히 이들은 가족이지만 현재 또 다른 가족을 가진 과거의 가족이다. 가족이란 단위는 피보나치 수열처럼 확장되면서 정서적 교집합을 만들어 이따금씩 모여 과거 유대를 환기할 것이다.

 

3.

2주 전  토요일에 이종 사촌 동생 결혼식에 다녀왔다. 코 찔찔 흘리던(?) 동생이 서른 중반이 되어 결혼식장에 서 있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가족 사진을 찍고 피로연장에서 친척들과 자리를 잡았다. 어릴 적에 보고 왕래가 없었던 손위 사촌들, 그리고 삼촌. 삼촌, 숙모의 주름에서 나이를 실감하고 사촌들이 다 큰 아이의 엄마, 아빠란 사실에 놀라고. 같이 사는 우리 부모님한테도 내가 무슨 생각하며 지내는지 말 안 하는데 가족이란 이름으로 한 자리에 앉고 보니 가족이란 또 다른 가족을 만들거나 잃으면 이렇게라도 한번씩 모이는구나...

 

4.

만추다. 아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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