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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처럼
김경욱 지음 / 민음사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김경욱의 단편들은 밀도가 촘촘하며 냉철하다. 방금 산 머리끈처럼 짱짱해서 늘이면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게 냉정해보이면서도 깊은 통찰이 스며있다. 감상주의의 철저한 배제가 한 몫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단편들에 절대적 편애를 지니고 있다. 김영하에 뒤지지 않는 입담과 김연수에 뒤지지 않는 필력을 지니고 있는데도 독자층이 두껍지 않다는(나만의 생각인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에 마음 아파하고 있는 편이다.
그의 장편은, 처음 읽는 데 밀도감이 많이 떨어진다. 플롯의 평범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학 신입생 때 서로 데면데면했던 남녀가 졸업 후 만나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하고 또 결혼 할 거 같은 분위기로 끝난다. 어디서 많이 들어봤을 거 같은 이야기고, 일상적 술자리에서 추억을 회상할 때면 나올 법도 한 남녀의 감정변화들이다. 구성은 재밌다. 동화를 뒤집어 말하고 같은 시간을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의 관점에서 서술한다. 3인칭 시점을 유지하면서도 작가는 전지적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작가는, 남녀가 같은 별 출신일 수 없다고 쐐기라도 박는걸까? 알라디너들의 리뷰를 봤더니 나랑 달리 대체로들 만족한다는 분위기다. 음...난 왜 이 소설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걸까.
이 소설은 연애소설인 척하고 있는데 연애소설에 필수요소인 낭만이 없다. 연애소설이라면 남의 연애사를 읽고 헤벌쭉까지는 아니어도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그래, 사랑은 해 볼 만한거야라는 뿌듯함은 줘야하는 게 연애소설의 의무아닌가. 연애소설인척 하면서 실상은 무한반복되는 일상을 고스란히 활자로 옮겨놓으니 김빠진다.
우리는 무수한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가족, 사회, 친구등등..엄마와 나는 모녀지간이고 아빠와 나는 부녀지간, 어떤 동료와는 문자만을 주고 받는 사이, 어떤 동료와는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고, 어떤 친구랑은 이유 없이 만나며 어떤 친구랑은 이유가 있어야 만난다. 오늘은 이유가 있기도 하고 이유가 없기도 한 사람들과 만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늘어놨다. 문득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가 필요할진대 모든 관계가 의미있지는 않다.
책에서, 의미는 물론 내가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기분이 좋을 때는 나 역시 책에서 읽은 걸 읊어대지만 오늘처럼 삐딱할 때는 개뻥처럼 들린다.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반복하는 건 바로 의미에 대한 시각이 변하기 때문이다. 여자가 남자를 의미있는 존재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을 때 남자의 사소한 행동도 의미있게 다가온다. 사람의 마음은 변덕스러워서 발견했던 의미를 지속시키는 게 어렵다. 어느 순간 남자는 다른 행성에 살고 있고 여자와는 다른 언어체계를 사용하는 사람이 된다. 이건 남자와 여자만이 그런게 아니라 일상에서 종종 부딪치는 일이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같은 언어체계를 사용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이 이렇게 삐뚤어지기 시작하면 내가 사는 별에는 남아있는 유일한 생물은 나 혼자가 되버린다. 주변에 널린 활자는 일방향이어서 설득만했지 내게 맞장구를 쳐주지는 못한다. 맞장구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나와 같은 별에 사는 사람이다. 단 한 사람이어도 좋다. 오늘은 맞장구가 필요한 날이었다. 여자가 남자한테 원했던 단 한 가지였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