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학교에 갔다. 

그 놈의 미국이라는 나라에 좋아라,하며 유학 가있는 후배 녀석이 영문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를 떼서 보내다라는 부탁 때문이었다.
좀처럼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택시를 기다렸다. 눈이 시리도록 하늘이 맑은데 봄바람이 살 속까지 매섭고 차게 때린다. 4월에 원래 추웠나,하면서 지금 그 사람도 밖에 있는데 춥겠다, 싶었다.

"○○대학 후문이요"
"..네" 

미터계를 흘깃 흘깃 보며 차창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세상에는 봄이 내려앉아 있다. 왜이리 낯선걸까.  

"요기쯤에서 세워드릴까요?"
"..네"
"감사해요, 수고하세요"
"..."

언제부턴가 택시에서 내릴 때면 꼭 인사를 하게 되었다. 감사하다고.
실은 거짓된 마음이다. 택시기사 열의 셋만이 대꾸를 한다. 단지 네...라고 '다 왔습니다. 안녕히 들어가세요' 라는 말을 들어보고 싶다. 그래서 무사히 데려다 주셔서 감사해요, 라는 인사를 건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그들은 인색하다. 아니면 익숙치 않은지도 ...

열 살 정도는 어리겠지, 하고 짐작되는 앳된 짐승들을 숨막히게 헤집고 학사관리 사무실 한켠의 제증명자판기 앞에 우두꺼니 잠시 섰다가 호주머니 속에서 동전을 꺼내 자판기 입에 먹여주었다.

"주민등록번호 또는 학번을 누르십시오"

기계는 여자다. 76...-...
쪼로록 너무 깔끔하다 싶은 증명서 한장, 영문 성적증명서는 학사관리팀에게 직접 신청하란다. 신청서를 작성해서 머리에 노란 물을 들인 직원에게 건넨다. 가만 보니 아르바이트생일거라는. 역시나 버벅대고 있다. 그 꼴을 보고 재학생 시절 10년 정도 봤다 싶은 여직원이 그 아르바이트 학생을 나무라며 일을 챙긴다. 영문증명서라 그런걸까, 꽤나 꼼꼼하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하고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있는 찰라에 그녀가 정중히 말을 건넨다.

"원래 사람 많으면 이렇게까지 안해주거든요"
"아...네..."

사무실 커튼 틈새로 인간들이 바글바글하다. 콘서트를 하나 했더니 모 TV에서 음악프로그램을 방송한다고 한다. 요즘 뜬다는 가수들이 대거 출연한다고, 그래서 리허설 중이란다.

여직원이 증명서를 건네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올해부터 조교질을 하고 있는 후배 녀석이 아는 척을 한다.

"어, 그래. 좀 있다 들를게"
'그냥 가려고 했더니, 발목 잡히게 생겼군' ...

과사무실에 들어서니 녀석은 반색을 한다.

"음, 할만 하니"
"학기초라서 좀 그렇죠. 뭐" ...

커피 한 잔 하겠냐고 하더니 자판기 앞으로 이끈다. '○○총학 ○○기념 몇 일까지 커피 10원', 10원이란다. 어이가 없다. 웃어야 하는 건지 ...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고 대학원 후배 실험실에 들렀다. 미안한 맘이 들만큼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한다. 석사 2년차의 그 녀석,

" 형, 미치겠어요"

를 시작으로 대학원 생활이 어쩌니 저쩌니 ...
속으론 '모르고 들어왔니'하며 비아냥 거렸지만

"있잖아 그럴때는 ...".

녀석과 수다를 떠는데 조교 녀석이 문을 빠곰히 열더니 교수님 오셔서 내가 왔다고 했단다.

"말을 했으니 뵈러 가야겠네".

1년만에 지도교수님을 뵈었다.

"그래, 손부터 잡아보자. 어떻게 하고 있니?, 어떤 구상을 하고 있고?"
"네... 그냥 ... 뭐 ...".

여전히 말씀이 많으시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논문 하나 쓰라는 명을 받았고, 조만간 전남대로의 동행을 약속했다.

'후.....'

교수님은 다른 사람에게도 이렇게 말을 많이 하시는 걸까. 신중히 듣는 척을 하며 그 사람을 떠올렸다. 물고기 마냥 뻐끔거리는 교수님 입술을 보며 살며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따라서 웃으신다. 당신때문에 미소 짓는다고 생각하시나 보다.
말은 많으시지만 늘 교수님의 충고는 힘이 된다. 당장이라도 일을 꾸며야지,하며 인사를 드리고 학교를 나섰다.

후문에서 친구를 기다리는데 총선 후보가 명함을 건네며 인사를 한다.

"투표권 없다고 하실려구 그려죠"
"네 ...? ... 아...아뇨"

대학교에 있으니 새내기쯤으로 착각했나 보다. '이렇게 늙은 새내기도 있나요'

친구와 선배가 동업을 하는 사무실.
선배는 나만 보면 좋아라,한다. 신학 대학원을 중퇴했고 정치적인 야망도 있지만 순수한 그.
또 나를 붙잡고 정치 얘기며, 친구 얘기며, 사업 얘기들을 한다.

'흠...'

실은 학교에 들렀다가 책방에 들러 책이나 몇권 사서 해바라기하며 읽고 싶은 하루였는데, 사람들 때문에 몹시 지쳐버리고 말았다.

헝클어진 머리 속엔 그 사람만 들어 있었다.

보고 싶고, 듣고 싶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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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09 1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4-04-09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주 한 번은 가까운 곳에 있는 대학에 가는데, 자판기 앞에서 200원 꺼내들고 기다리고 있으면 앞뒤로 시끌벅적 서서 그 훅훅대는 젊음이 참 좋아요. 나도 그맘때 그랬던가싶게요.
근데 10원에 커피 한 잔. 재미있네요.

김여흔 2004-04-09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기죠. 10원이라니, 더 웃긴 건 자판기 옆에 아예 10원짜리 한 뭉치를 갖다놓았더라구요.
저희 학교에 유명한 자판기가 있죠. 바로 도서관 앞 자판기. 거기가 제일 맛 있거든요.
졸업한 사람들이 일부러 그 맛을 못 잊고 이따금 찾는다는 ...

2004-04-09 1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4-04-09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 정도로 내공이 깊은 자판기 커피맛이 있단 말입니까..
예전에 학교에서 사람들 만날 때마다 습관처럼 빼먹던 자판기 커피, 이제는 돈주고 하래도 못할 거 같아요. 에구, 망가진 속이야..
그나저나 주위 분들이 여흔님을 너무 좋아해서 가만 두지를 않네요..^^

김여흔 2004-04-09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공을 갖춘 자판기라 ... 재밌게도 말씀하시네요. ^^
가만 두질 않는다니요? ... 아 ... 산삼도시락 사건을 말씀하시는 거죠?
사는 게 뭐냐고 물으면 그냥 웃지요,랍니다. T.T

2004-04-09 1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김여흔 2004-04-09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제가 말귀가 어둡나 봐요. 선후배랑 교수님 말씀하시는 거죠?

superfrog 2004-04-09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예, 맞아요.. 학교분들..^^

2004-04-09 1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4-04-10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장구치는금붕어님과 여흔님의 코멘트를 읽고.....아~ 눈물 나요....^^
뜬금 없는 산삼 도시락은 뭐랍니까? 호호~

김여흔 2004-04-10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허~, 냉열사님 웃으시는 겐가요?
아직도 이 몸에는 산삼 도시락 파장이 채 가시질 않아서 벌써 님 방명록이랑 앤티크님 방명록을 살피고 왔지요.

stella.K 2004-04-10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흔님 글 참 맛깔스럽게 잘 쓰시네요. 부러라! 음식은 눈으로 먹어 볼 수 없으니 뭐라고 당장 평해드릴 수는 없고, 읽으면서 재밌고 즐거웠습니다. 다음에도 맛난 글, 부~탁해요!(이덕화 버전)

stella.K 2004-04-10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쿠폰 당첨됐네요. 괜찮은 토요일이네요. 여흔님도 좋은 주말 보네세요.^^

김여흔 2004-04-10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민망하여라. 써놓고 괜한 글이다 싶었는데 재밌게 읽어주시니 그저 감사할뿐이에요. ^^

이리스 2004-04-10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원래 커피, 특히 자판기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 글을 읽고 나니 그 10원 짜리 자판기 커피를 맛보고 싶어지네요.

김여흔 2004-04-10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낡은구두님, 반가워요.
10원 짜리라고 특별할게 있겠나요. 10원이니만큼 남들에게 부담없이 생색낼수 있으니 그 망이겠죠.^^

다연엉가 2004-04-10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여흔님 당신의 글을 보고 여자인줄 알았는데(아직까지도) 사진은 남자이기에 방명록을 뒤져봤네요,, 남자였네요... 그런데 글에선 여자냄새가....

김여흔 2004-04-11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책울타리님 반갑네요. ^^
남성형 문투를 잘 안쓰기 때문일거예요. <-습니다>, <-합니다> 같은 군대식 말투를 싫어해서 되도록 안쓰고 있거든요. 너무 딱딱하기도 하고 해서 구어체로 쓰다보니 많은 분들이 그렇게 느끼시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