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삐딱하게 보기>를 읽고 있다. 그동안 지젝의 글을 몇 편 읽고, 그의 강의도 좀 보고, 좀 익숙해져서인지 낯익은 풍경을 보듯 읽힌다. 그렇다고 '케익크 한 조각'은 아니다.단지 훨씬 마음 가볍다는 뜻이다.  

로버트 하인리히의 <조나단 호그의 불쾌한 직업>이 거론된다. 외계인에 끌려갔다 생환하는 사람의 이이기이다.존재하지 않는 13층을 찾으러 보내졌던. 우주를 만든 우주인들은 주인공을 돌려보내 줄 때 가는 길 동안 절대 차창을 열지 말라고 말한다. 우주에 약간의 결함이 있어서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금지와 관련된 상징은 아주 태곳적 이야기부터 나온다. 성경도 창조 이후 나온 이야기가 금지의 이야기 아니던가, 오르페우스의 신화도 그렇고, 천년묵은 이무기 이야기도 그렇다. 꼭 하지 말라면 해야 되는게 인간인지라-그리고 그게 있어야 신화가 이루어진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도 뉴욕으로 돌아가는 길에 창문을 연다. 문 틈 사이로 무엇이 보일까? 

안개?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텅빈 상태. 어떤 움직임도 없는 '무' 이다.  주인공은 아주 조금만 문을 열고 창으로 보이는 일상적 풍경과 창이 열린 틈으로 보이는 '무'를 동시에 경험한다. 

지젝은 이 이야기에서 나오는 '무'를 라캉적 의미의 실재계라고 말한다. 그리고 '내부'와 '외부'사이의 불연속성의 문제로 넘어간다. 이 불연속성은 불편함으로 다가오는데 일종의 보호 스크린 구실을 하던 창문이 안전거리를 확보해주다가 그것이 너무 가까이 근접했을 때 느껴지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이 내부와 외부의 경계는 스필버그의 <태양의 제국>을 인용하면서 다시 언급된다. 영화의 첫 장면 아이가 비참한 중국인들의 거리를 바라보면서 지나가는 자동차씬 말이다.  

지젝은 이 경계선이 무너졌을 때, 즉 그 때까지 자신이 일정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외설적이고 잔인한 세게로 던져졌다고 깨달았을 때 생존의 문제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나는 늘상은 아니지만 아주 가끔씩 알라딘식 소통에 냉소가 느껴질 때가 있다. 빌게이츠의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윈도우'운영체계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젝도 그런다. '실재'에 접근하면 모두 미치광이가 된다고... 

** 나는 여기서 '상징계,실재계'를 정의대로 활용하지 않았고 중의적으로 콜라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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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을 해할 목적의 허위사실 유포죄다. 

어뗘?  

이걸로 구속할 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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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의 관심도서> 

솔직히 내 인생에 책이 이렇게 밀려 본 게 언제인가 싶을 만큼이다. 한 해 내가 물리적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은 그다지 많지 않다. 책만 읽을 수 도 없을 뿐만이 아니라 책 말고도 재미있는 것들이 많으니 어쩔 수 없다. 관심 도서는 정말 관심 있는 것들도 있고 그 때 그 순간에 눈에 드는 것도 있다. 그래도 전자가 많다. 결국 이런 책들이 쌓이는 거다. 거기에 가끔 서점가서 눈에 드는 것들을 보면 또 몇 권이 쌓이게 된다. 거기에 또 - 쓸모없을지도 모를- 여유만만이 있어서 더 쌓이고 있다. 

요즘 내가 자주 보는 책이 그리스 관련 책들이다. 그런데 사실 그리스 관련 책을 읽게 된 이유는 플라톤의 <국가> 를 제대로 읽어보기 위한 준비작업이다. 그냥 냅다 읽으면 어떨까 하다가..뭐 급할 것도 없는데 하면서 '그리스'를 읽다보니 이제 플라톤의 <국가>는 1년 쯤 뒤에야 아니 그 뒤가 될지도 모르겠다. 더디가지만 이게 꼭 나쁜 것 만은 아니다. 의외로 그 앞길을 다지면서 풍부한 것들을 알게된다. <정치와 비전>의 셀던 월린이나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의 피에르 아도같은 이들을 알게 된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브루노 스넬이나 베르낭 같은 이들은 이런 더딘 마음이 아니었다면 내 세계 속에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옛날에 교양삼아선 본 철학사 책들도 앞부분을 다시 뒤적여 보게 된다. 그리스를 보는 것 중에는 푸코의 <성의 역사1.2.3>도 염두에 두고 있다. 푸코의 말년 작업이 '위대한 그리스로의 회귀' 아니었던가. 조르주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대충 훑어봤는데 그 안에도 고대적 개념들의 해석들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듯 보였다.

결국 그리스를 읽다보니 어렸을 때 본 <일리아드>와 <오뒷세이>,그리고 아직 읽지 않은 <아이네이스> 도 염두에 두게 된다. 3대 비극의 작가들은 전작을 모두 보고 싶어진다. 최근에 묵직하게 제법 잘 나왔다. <플라타크 영웅전>은 다시는 보지 않을 생각이다.  

올해도 지젝의 책을 몇 권 쯤 더 볼 생각이고...고진의 책도 몇 권이 밀려 있고... 최근에 방한한 랑시에르도 관심이 간다. 연타로 나온 아리기의 책도 그냥 넘어가진 못할 것 같고...또 세익스피어도 꼼꼼히 볼 생각이다. 김정환 역을 한 번 씩 넘겨보면서 이런 문장들이 있었나 하면서 새삼 감동,감탄을 하고 있다. 왜 그 때 이런 말들이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 하면서 말이다.  

회사에서 외딴 고도- 실제 외딴 고도는 아니다-로 강제 발령을 내려는 데 거기 자원할까 싶을때도 있다. 가족들에겐 엄청난 피해이고 또 가서 하는 업무가 좀 다른 거라서 거부하지만...가면 혼자 있는 시간은 늘어날 것 같다. 그건 밀린 책 처분하는데는 도움이 된다.  

이소선 어머니는 대학 다닐때 집회 현장에서 몇 번 뵌 적이 있다. 때론 연단 위에 앉아 계시는 모습으로 때로는 우리들의 손을 잡으며 도닥여 주시는 모습으로 말이다. 

한국방송이 <인물현대사>를 할 때 이소선 어머니의 삶을 다룬 적이 있다. 이소선은 전태일을 낳았지만 전태일은 또 다른 이소선을 낳았다. 그녀는 전태일을 열사라고 부르지 말고 '동지'라고 불러달라고 말한다.  

노래가 생각이 난다. "머물수 없는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동지여"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다. 

<놀라운 아버지>. 아들이 기획하고 아버지가 그런 그림으로 한 가족의 개인사가 유치찬란한 그림속에 그려진다. 아들은 전업 미술가이고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다.^^ 

만화로 그려진 구술사이고, 미시사이자  우리시대 어떤 아버지의 개인사이다. 나는 이런 소통방식을 통한 작업에 눈길이 간다. 나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았지만 또 내가 모르는 그가 있다. 그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세대 유전된다 나의 아들 역시 그럴것이다. 이런 소통은 서로를 핥아주는 치유가 될 것이다.그리고 이 치유는 어떤 보편성을 갖게 될 지도 모른다.  

 

 올해 다윈은 한 두권쯤 읽어두어야 되지 않을까? 나는 가끔 회사 자료실에서 <과학동아>를 본다. 재미있는 것들이 많지만 내가 다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이번 달 <과학 동아>에서도 다윈 특집을 다루었다. 다윈의 진화론 뿐 만이 아니라 진화론이 어떤 논쟁들 속에서 진화되어 왔는지를 다루고 있다. 당연히 읽을 만한 진화론 관련 서적들도 추천되었다. 내 기억에 대여섯 권 쯤 되었다. 모두 보관함에 있지만 그 중에서 <다윈의 식탁>이 가장 눈에 먼저 들어왔다. 

사실 헌책방에서 <진화>라는 두껍고 사진 많은 책-갑자기 누가 저자인지 생각이 안난다-도 좀 봤는데 들고 다니기 남사스러워서...  

 

  

<교양>이라는 두꺼운 책을 쓴 슈바니츠의 <햄릿>이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읽으면서 함께 읽을까 하다가 여석기까지만 읽기로 했었다. 하지만 슈바니츠의 <햄릿>과 케네스 브레너의 <햄릿>은 잠시 뒤에 읽고 보기로 했다. 

여석기의 책에도 인용되는 폴란드의 얀 코트가 있다.그는 '우리시대의 햄릿'이라는 개념을 말하면서 햄릿이 읽고 다녔던 책이 당시에는 아마 몽테뉴쯤이었겠지만 지금이라면 사르트르 였을것이다 라고 말했다.  

햄릿이 뭔 책을 읽고 다녔는지 뭐가 중요하냐구?  맞다. 중요한 것은 그게 '햄릿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의 문제라면 좀 달라질 것이다.   

 

   

요즘 정치사상사는 스피노자에서 건져올린 것들이 많다. 모두가 스피노자를 사랑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스피노자를 건드리고 넘어가는 것이 맞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뭐든 다 단계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 책이 유명하고 중요하다고 덜컥 읽을 수는 없다. 그냥 언젠가 읽겠지 하고 생각만 해 놓는것이다.책도 얇고 포함된 함의는 커도 무지막지한 책은 아니다.  

이건 다른이야기다  회사에서 제일 웃겼던게 뭔고 하니...영상미학 대학원에 다닌 친구가 있었다. 내 장담컨데 사회학적 기본 지식은 거의 전무하다. 마르크스의 '마'자도 모른다.프로이드의 '프'자는 들어봤을 정도다. 그런데 언젠가 회사 책상 위에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이 놓여 있었다. 내가 그래서 장담했다..'니가 그 책 읽으면 내 손에 장을 지져주마' 기분 나빠했지만...1년이 지난 시점에도 그냥 놓여 있기만 하다. 이제는 놓여있기만 한 것이 그것의 목적인 양. 안됐다. 들뢰즈.(았따..당신 이야기 아니니까..우씨우씨 하지마시길..실제로 있는 인물 바로 그 특정인이야기다. 이제 글 쓸때 이런 내용도 올려줘야한다.어찌나들 오해작렬,지레짐작,의심만발,자책낙심,댓글폭발하시는지)

  

 진중권은 MB의 '그린 뉴딜'을 보고 '군복이 녹색이니 군대도 녹색 사업이냐?' 라고 했다. 하여간,,^^ 어찌나 웃었던지. 

 이 글들 중 일부는 <씨네21>에서 본 것들이 있을게다. 회사에서 <씨네21>을 정기구독하고 있기때문에 나오면 살펴본다. 물론 매번 읽는 것은 아니기때문에 책을 사도 별로 아깝지는 않을 듯 하다.  

영화와 미학은 많은 이들의 관심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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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 회사에 나왔다.  일하러 나온 건 아니다. 

추락하는 두레박을 끌어 당기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런 일은 역사에 기록되지도 않는다. 그게 역사이고 그래서 이름없는 작업들이 중요하다. 나는 아이디어만 빌려주고 사라져야 하는 위치다. 부디 소기의 목적들이 잘 이루어졌으면 바랄 뿐이다.       

그런데 만나야 하는 양반은 왜 이렇게 더디 오나?  하긴 내가 불러 낸 거니 기다릴 수 밖에..그래도 약속했으면 시간 좀 지키지...이럴 줄 알았으면 책이라도 들고 올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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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여전히 거리에서는 해직 교사들이 생이별한 아이들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고 해직 기자들은 찬바람 속에 '낙하산 반대'를 외치고 있다. 또 정부의 대운하 음모를 폭로한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원은 징계를 받았다.  

이명박 정부는 경제를 살린다며 한 손으로는 비정규직 확대와 최저임금 삭감안을 만지작거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1% 강부자를 위해 종합부동산세를 비롯한 대규모 감세 선물을 안겨줬다. 마스크를 쓰고는 시위를 할 수 없고 국가 권력이 개인의 휴대전화와 인터넷 사용 내역을 맘대로 들여다 볼 수 있는 '황당 시추에이션'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여론의 독과점을 불러올 특정 신문과 재벌의 방송 진출도 머지않아 보이는 긴박한 상황이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건 뭐냐고 묻는다면? '싸움'이라는 답이 나오기 쉽다. 때문에 요 며칠 민주주의와 인권을 후퇴시키고 민생을 파탄 낼 정부의 '삽질'을 막아내기 위한 싸움이 치열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같은 물음에 다른 답을 내놨다. 지난 8일 저녁 7시 희망제작소에서 마련한 신년 특별 강연에서 그는 '싸움의 시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시나 '성찰'이라고 했다. 
 

구체적인 사안을 놓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마당 한가운데 앉아 자신을 부단히 바꾸기 위한 '성찰'을 하라니, 현실에 바로 적용할 날 선 비판과 현실적 대안을 기대했다면 한숨이 터져 나올 수도 있겠다.

'싸움의 시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찰'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
ⓒ 희망제작소 제공
신영복
신영복 교수는 정말 현실엔 무관심한 '성찰의 전도사'인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신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현재 우리 사회의 진보의 실패 원인과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직접적이고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지는 않았지만 행간의 함의는 그렇게 읽혔다. 민주화 세력이 2번 집권했지만 대중들은 먹고살기 힘들다며 독재정권의 향수에 빠지는 등 역풍이 부는 상황에서 기존의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직접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대신 현실에 맞는 해법을 찾는 것을 각자의 몫으로 남겼다. 무엇보다 사회를 개혁하는 일, 그리고 그 전제가 되는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바꾸고 나아가 우리 사회를 바꾸어 가는 것은 대단히 긴 여정입니다. 예전에 정치권력을 획득하면 단기간에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던 후배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보면 모두 실패하지 않았나요.

세계적으로도 가장 강력했던 정치권력이 나치와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는데 모두 사회를 바꾸는 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단 한 번의 개혁으로는 되돌릴 수 없는 사회변화를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조금씩 조정하면서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신 교수는 조급증을 버릴 것을 주문했다. 그는 긴 여정을 나서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념'이 아니라 '양심'이 필요하다고 했다. 
 

"1960년대 학생 운동을 할 때 친구들과 함께 '좋은 실천가'의 덕목을 정해 봤습니다. 진보적 사상을 가질 것, 사명감을 가질 것, 조직력과 설득력이 있을 것 등이 꼽혔는데 이런 능력을 갖춘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이 친구들이 뭘 하고 있을까 많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출소 후 수소문해 봤는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친구들이 없었습니다. 다들 다른 분야에 가서 돈도 벌고 출세를 했더군요. 그 자리에 남아있는 친구들은 예전에는 별 볼일 없어 보였던 친구들, 이념적 결단이 아니라 고생하는 친구들 보기 미안해서, 돕지 않으면 양심에 거슬려서 함께 했던 친구들이었습니다."

이런 양심을 내면에 품기 위한 방법으로 신 교수가 제시한 것이 바로 '성찰'이다. 이를 통해 진보운동의 패러다임을 당장의 성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계속 갈 수 있는 끈기 있는 모습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기나 긴 변혁의 길, 이념 아니라 양심 있어야

신 교수는 특히 성찰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만남과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는 감옥에서 보낸 20년의 세월 동안 탈근대의 과정을 다 겪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동료 수감자들을 대상화, 타자화해서 관찰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의 이야기를 좀 듣고 나서는 '아, 나도 그런 부모를 만났으면 저렇게 범죄를 저질렀을 수도 있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공존과 이해의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목공장에서 나이 많은 목수가 집을 그리는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그 목수는 나와는 반대로 주춧돌부터, 그러니까 집을 짓는 순서대로 그리더군요. 집을 책에서만 본 나 같은 사람은 지붕부터 그리는데 직접 노동을 통해 집을 지어본 사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본 후 나를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는 통렬한 자기 반성을 하게 됐습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차이를 경험하고 나를 변화시키는 단계까지 나아간 것이죠."

신 교수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차이'를 인정하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반가운 기회로 맞이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들뢰즈를 인용하고 똘레랑스(관용)의 한계도 명확히 지적했다.

"똘레랑스에는 강자의 자기동일성 논리가 숨어 있습니다. 소수를 존중하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강자의 논리에 흡수될 것이라는 오만이 스며 있는 것입니다. 차이를 만나면 각자의 영역을 지키면서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단히 변화시키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들뢰즈는 '소수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자기 것을 영토화하고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과감히 자기 것을 버릴 수 있는 유목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런 반성과 변화가 없으면 세상을 바꾸어 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판을 잘 하지 않는 신영복 교수지만 진보진영에 대한 비판에도 날을 세웠다.

"운동단체들도 차이와 다양성을 승인하지 않고 흡수와 지배를 통해 자기 동일성을 관철하려고만 합니다. 촛불 집회 때도 그랬죠. 촛불을 든 많은 사람들은 하나하나가 자신의 다양한 목소리를 발하고 있는데 운동단체들은 촛불의 성과를 단체의 조직을 키우는 데 퍼담을 수 없을까를 고민했습니다.

저는 운동단체들을 만나면 하방연대(下方連帶)하라고 강조합니다. 정규직은 비정규직과, 남성은 여성과, 노동자는 농민과, 즉 자신보다 약한 상대와 연대하는 것이 힘을 키우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강자와는 연대가 아니라 추종이고 복속일 뿐이죠."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
ⓒ 희망제작소 제공
신영복

"누구는 이끌고 누구는 따라가는 방식은 옛날 방식"

신 교수는 소수의 차이를 변화의 기회로 삼기보다 차이를 흡수하고 지배하려는 세불리기는 낡은 '웹1.0 시대'의 방식이라며 새로운 행동론으로 '여럿이 함께'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누구는 기획하고 이끌고 누구는 뒤에 따라가는 방식은 옛날 방식입니다. 함께 가면 길은 나중에 뒤에 생기는 것입니다. 이게 웹 2.0시대에 맞는 사고입니다. 누가 지시해서가 아니라 같이 고민하면서 가는 것이죠.

그리고 먼 길 가는 사람은 목표의 정당성이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과정의 아름다움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동력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빛나는 성과를 기대하며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걷는 것 자체에서 기쁨을 느껴야 하는 것이죠. '길'은 무작정 속도를 내서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도로'가 아닙니다. 길에서는 사람을 만나고 자기의 흔적도 남겨야 하고 코스모스도 봐야죠."

출처 : "운동단체들, 촛불정국 때 조직키우기 고민
 지배하려는 오만 버리고 약자와 연대해야"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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