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라리스 (반양장) 렘 걸작선 2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김상훈 옮김, 이부록 그림 / 오멜라스(웅진)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솔라리스>를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은 러시아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이다. 그는 1972년 동명의 영화를 만들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혁명이 영상에 자리를 내준 90년대를 거쳐온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지금보다 영화를 볼 수 있는 창구가 적었던 시절이다. 자고로 금지는 더 큰 열망을 낳는 법이다. 그 당시 타르코프스키는 매니아들 사이에서 올림포스에 사는 신족처럼 취급되었다. 그의 영화<희생>,<노스탤지아> 같은 작품들은 일종의 신탁이었던 셈이다. 실제 그의 영화는 중독성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강한 수면제가 발라져있다. 가끔 졸다가 눈을 떠보아도  상징적인 이미지가 언뜻 언뜻 지나간다. 뻑뻑한 눈을 비비며 보는 시적인 영상들은 '장자'와 '나비'를 서로 혼동케 하기도 한다. 내가 알던 한 지인은 타르코프스키의 기획은 그런 '몽매'의 상태를 영화적 장치로 이용하여 자신의 영화를 초현실적 단계로 이끌어가는 것은 아닐까라며 웃었다. 하여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명성은 어떤 의미로든 강력했다. 그 때문일까 <솔라리스>의 원작자도 그의 그림자에 가렸다.

옮긴이의 글에도 원작 <솔라리스>가 그 동안 SF팬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원작시나리오 정도로 취급받는 역전된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고 말한다. 나 역시  타르코프스키 때문에 <솔라리스>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영화 전체를 보진 못했다. 내게 직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따로 있다. 지젝의 <기묘한 영화강의>라는 영상물이다. 그 영상물에서 지젝은 직접 내레이터로 출현한다. 그는 그의 책에서 예로 들었던 영화물들을 직접 설명하면서 정신분석학적인 영화 비평을 시도한다. 영화<솔라리스> 역시 그렇게 소개된다. 지젝은 프로이드의 리비도에 대한 왜곡을 먼저 비판하면서-리비도 결정론적인 곡해-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로 들어간다. 닫힌 문을 뚫고 나오는 레야의 모습도 나오고 책과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결말도 나온다. 타르코프스키의 결말에서 지젝은 '아버지의 법'에 복종하는 프로이드적 결말을 읽어 낸다.  

스타니스와프 램의<솔라리스>는 일종의 정신분석학 텍스트이다. 나는 최근에 읽었던 지젝의 책들의 복습 문제처럼 이 텍스트를 읽었다. ( 편의적이고 작위적인 방식이어서 그다지 권할 만한 것은 아니다.) 대신 어떤 개념들을 자기화 해내는 방식- 학문적 엄밀함을 요구하기란 어렵다-으로, 소설을 즐기며 분석의 틀들을 대입해 본다는 것은 책을 읽는 또 다른 방식의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먼저 영화 예고식으로 줄거리를 그려보자.

지구로 부터 한참 떨어진 우주. 솔라리스라는 스테이션에 주인공 캘빈이 도착한다. 그렇지만 무언가 이상한 예감이 든다. 스테이션이 마치 유령의 집같다. 켈빈은 자기의 스승이자 동료였던 기바리안이 이상증상을 보이며 죽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리고 스테이션에 있는 나머지 두 동료들인 스노우와 사토리우스도 공통되었지만 각기 다른 이상 증상을 겪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그 증상은 캘빈에게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먼저 매혹적인 것은 '솔라리스 '라는 행성이다. 아니 생물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두 개의 태양이 떠있는 행성에 사는 '바다' 가 '솔라리스'다.  '생각하는 바다'는 밀물과 썰물을 바라보며 혀를 낼름거린다는 동화적 상상력을 극한으로 확정시킨다. 그 바다는 안개에 휩싸여 있고 끈적한 물질처럼 되어있다.그리고 가장중요한 것인데 인식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한계를 훨씬 넘는 형태의 고등진화된 생물이다. 렘은 솔라리스라는 행성이 발견되고 나서 지구에서 있었던 각종 연구들을 장황하게 설명해준다. '솔라리스학' 이 그것이다. 모두 각종 가설들이다. 하지만 어느 하나 명확하지 못하다. 모두 이런 생명 행성의 존재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언어로 담을 수 없는 것들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바다'를 둘러싼 다양한 과학적, 또는 철학적 주제들을 켈빈이 읽는 솔라리스 관련 저서들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조금 지루할 수도 있지만 상당히 흥미롭다. 마치 과학사 논쟁이나 철학사 논쟁을 보는 듯 하다. 

흥미롭지만 또한 미지의 것이 가져다 주는 공포로 인해 '생각하는 바다'는 양가적 대상이다. 하지만 승무원들이 공통으로 겪는 증상이 확인되면서 '생각하는 바다'는 상상하기 힘든 공포가 된다. 이것은 우리의 트라우마, 음침함, 타나토노스적 욕망등을 물질화하기 시작한다.  

머릿속에만 있던 그것이 어느 순간 피와 살이 되어 현실로 나타나지. 문제는 그게 전부야...우리는 현실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곳에'도착하게 되고 곧 진실-우리가 가능한 언급하기를 꺼리는 진실-과 맞부딪치는 거야. 이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지.....우리 자신의 추악함을 마치 현미경으로 보듯 몇 백 배나 확대한 것과 말야        

나는 공포영화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또한 SF소설은 쥘 베른 이후에는 거의 본적도 없는 듯 하다. (물론 SF영화가 더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하지만 이런 설정은 정말 최악의 공포다. 소설이 안타까운 건 음악이 없다는 것이다.그렇지만 자기 트라우마의 물질화라는 설정은 가히 최고 공포를 연상시킨다.(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는 음악으로 이런 긴장상태를 잘 유지했던 것 같다.) 나는 사실 이 소설을 보다가 어둠 한 편에서 나의 어떤 트라우마들이 형상화되어서 나오면 어떨까 생각하고 소름이 돋기도 했다. (물론 '나는 트라우마같은 것이 없어요.'라고 하는 사람은 앞으로도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면서 잘 먹고 잘 살면 된다. 그러니까 나같은 이를 비롯해서 인간에 대해 뭘 해도 이해가 잘 안되는거다. 또한 심리학 실험에서 거짓말 반응에 걸려서 실험 비적격 대상자가 될것이기도 하다. 심리학 실험에는 실험자의 정직도를 알아보기 위한 문항들이 몇개씩 있다고 알고 있다.)  

주인공 캘빈은 그의 자살한 아내를 만난다. 캘빈이 그냥 홧김에 던진 말이었는데 그것때문에 그녀는 자살한 것이다. 그녀는 캘빈이 자고 있는 동안에 나타났다. 잠이라는 소재는 프로이트의 주전공 아닌가.(잠을 자야 꿈을 꾸지)그렇지만 이 존재는 꿈과는 다르다. 앞서 말했듯이 이미지가 아닌 물질화된 대상이다. 지젝은 '살아 있는 시체들의 귀환'이라는 말을 썻다. 그는 현대 대중문화의 근본적인 환상이라고 말한다. 즉 죽음에 머무르려 하지 않고 거듭거듭 산 자를 위협하기 위해 귀환하는 사람들에 대한 환상이다. 소설 속에서 귀환한 레야는 직접적으로 캘빈을 위협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무의식의 귀환은 자살만이 탈출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미치게 한다. 그렇다면 왜 죽은자들이 돌아오는가?  지젝은 라캉이 이에 대해 아주 쉽게 답변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이 제대로 매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죽은 자의 귀환은 상징화 과정(이게 제대로 이루어져야 맘고생 없지 뻔뻔하게 잘살 수 있다.)에 있어서의 교란을 나타내는 기호이다. 라캉은 <햄릿>의 햄릿왕과 <안티고네>의 안티고네가 이 상징적 채무를 물질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레야라는 존재를 일종의 '실재'의 침입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캘빈은 솔라리스 스테이션에서 일종의 사물의 영역으로 넘어간 것이다. 즉 존재가 고통 속에서 고집하는 금지된 경계 영역으로 말이다. 무의식은 어떤 비지식의 토대 위에서 그 일관성을 유지해야하는 것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우리의 상징화 작용 속에 비상징화되는 중핵들이 봉쇄되어야 한다. 지젝은 '징후'로 이를 설명한다. 즉 주체가 자신에 관한 어떤 근본적 진실을 무시해야만 존해하는 어떤 특정한 형성물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캘빈처럼 실재의 조각 정도가 아니라 실재가 전면적으로 침입할 때 그런 징후는 스스로 와해된다.  

'생각의 바다'가 끌어낸 레야라는 대상-나중에 이런 대상들을 '파이-생물'이라고 부른다.재미있는 것은 실재계에서 상상계로 향하는 관계를 지젝이 파이라고 부르고 있다. - 은 정확히 말하자면 캘빈의 증상으로서의 레야이다. '여자는 남자의 증상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여성이 남성에게 일관성을 부여하는 한에서만 남성이 존재함을 가리킨다. 남성의 존재는 사실 그 자신에 대해 외부적이며 여성은 무이다. 이 '무' 를 통해서 실재적인 주체성의 창출이 가능한 것이다. 지젝은 1930년대 필름 느와르의 팜므 파탈이라는 여성 존재를 통해 이 과정을 설명한다.('여자는 없다.'라는 말을 페미니스트적 오해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솔라리스>속에서 캘빈의 죄책감에 의해 만들어진 레야는 여기서 특이한 행동을 통해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레야는 캘빈의 머릿 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캘빈의 의식 밖의 영역에 대해서는 '무'에 가깝다. 아무런 코딩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것은 레야가 스스로 '비존재'라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생각의 바다'가 주체의 트라우마를 통해 구축해낸 물질화된 '시뮬라르크'가 특별한 매게 없이 자기 인식을 시작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유령이 유령인지 스스로 아는 것이다.' 이거야 말로 '죽은 신도 못하는 일'을 스스로 해내고 있는 것 아닌가? 레야는 몇 몇 특정한 동물과 인간만이 한다는 '자살'을 시도한다. 그렇지만 그녀의 육체화,정신은 금새 다시 복원된다. 자해와 복원의 고통스러움을 복기해야하는 캘빈은 이제 돌아온 그녀가 '비존재'임을 알면서도 혼동을 겪게 된다. 여기서 스타니스와프 렘의 매력이 나온다. 만약 레야라는 존재를 단지 캘빈의 무의식정도로만 취급했다면 이 책 <솔라리스>의 매력은 절반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생각의 바다'는 원래 상호주관성이 결여된 영역이다. 즉 '레야'라는 존재가 대상/응시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단순한 '시뮬라르크'만은 아니란 것이다. 이것은 상호주관성이라는 인식영역에서는 논리적으로 타당하고 쉬운일이다. 하지만 '생각의 바다'는 완전히 '비인격적' 존재이다. 그렇기때문에 '존재론적' 고민을 하는 레야의 탄생은 마치 진화론의 지적 설계론을 풀어낸 것 같다. 실제로 책 후반부에서 스노우와 캘빈은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 

그 신은 무한을 창조했지만 자신의 능력의 척도여야할 무한이 결국은 그 자신의 끊없는 패배를 가능하게 하는 척도가 되버렸던 거지....불와전한 신 ..이거야말로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 속죄나 구원이 목적이 아닌,아무 목표도 없이 다만 그곳에 존재할 뿐인 신이기 때문이지

스타니스와프 렘을 비롯해서 외계인 또는 미지의 세상과 조우하는 인류를 다룬 영화들은 일련의 공통된 주제들이 있다. 조금씩 다른 변주를 취하고 있지만 결국 '인간'에 대해 어떤 종류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지? 우리는 과연 진리와 독대할 수 있는지? 의식의 한계는 어디까지 인지? 그 영역 밖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또한 우리는 어떤 형식으로 타자에 접근해왔는지? 어떤 접촉 양식을 취해왔으며 어떤 소통의 방법들을 이룩해왔는지?  이 과정에서 우리의 이성과 이로부터 추출되기도 하는 폭력은 어떤 패턴을 밟아왔는지? 소설<솔라리스>에서 우리는 수시로 이런 질문들을 추출해낼 수 있다.

 <솔라리스>의 원작자 스타니스와프 렘은 타르코프스키와 2002년에 있었던 소더버그의 리메이크 작업에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논쟁의 핵심은 두 영화가 공히 '소통과 인간 인식의 한계' 문제보다는 '로맨스'쪽으로 방향을 잡았기 때문이라고 알려져있다. 두 영화 모두를 보지 않은 입장이라 무어라 말하기 어렵지만 내가 영화 감독이었어도 그런 방향으로 따라가기 쉬울 성 싶다. 원작 <솔라리스>의 후반부는 다분히 설명적이고 철학적이다. '솔라리스학'이라는 것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과 서술들은 드라마적 진행에 있어서는 방해가 된다. 물론 이런 논쟁의 함의를 읽고 지적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 역시 많을 것이다. 요는 렘의 <솔라리스> 후반부는 드라마라는 측면에서 취약하다는 것이다.  2% '행동'이 부재하거나 이펙트가 약하다. 이미지의 결합과 분배를 통해 초현실주의적인 영화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면 감독들은 이런 드라마 구조에 대해 고민하기 마련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는 '예술은 모방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 미학을 한 줄로 요약한 이런 말이 나온다.

비극은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과 삶, 행복과 불행을 모방한다....우리가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은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 

영화<솔라리스>의 감독들이 '생각하는 바다'인 솔라리스보다 주인공인 캘빈과 레야의 문제로 자꾸 시선을 옮겨가려는 것도 어느정도 이해해 줄 수는 있다. 영화<솔라리스>를 최근에 구하고 있는데 영화를 보고 나면 또 다른 방식의 리뷰도 가능해지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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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의 관심도서....  

(이하 독백) ' 지금 내가 관심도서를 찾고 있을 때인가? 차라리 관심 요식업을 찾고, 주방장에 울며 불며 가르쳐 달라고 졸라야 하는 때가 아닐까? 먹고 살기 힘들어지면 책 읽기도 요원해지는 거다. 

어쩌겠는가? 어떤 순간 최종심급을 맞아야 될 때 오면 물적 토태를 확충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아들 밥은 먹여야지. 뭘 해서든..(-사실은 여기에 약간의 탈출구가 있다.)  

결국 대부분-빈자의 철학에 확고하게 뿌리 박지 못한-사람들은 결국 적당히 배를 붙일 수 있기 때문에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말과 머리로 '가난의 철학'에 동의하는 것 말고 몸과 마음으로 믿는 사람들은 예외다. 그런 사람은 거의 없다.  알라딘의 교류가 넓은 편은 아니지만 '파란여우'나 '된장'같은 분들은 '자발적 가난'을 -그리고 그를 통한 풍요의 철학을 받아들이신 거다. 나머지는 실제로 별로 원하지도 않으면서 이웃집 아이가 먹고 있는 쭈쭈바를 흘깃거리면서, 침넘기면서 감동,감화하는 거다. 이런 변형판들은 '인도,네팔' '방랑 여행객',또 각종 쓰레기같은 '여행기' '뉴에이지' 뭐 이런 것들이다. 그런 환상은 결코 자기 삶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단촐한 삶'의 욕망 또한 눈감기 전까지 유령처럼 따라다니는 거다. 그 모든 것을 자기가 기획하고 자기가 속고,자기가 속고 있다는 것 자체도 잊는다. 그러니 정신병에 걸리지 않는 당신, '당신의 징후'를 즐기고, 가끔 정신병원에 병문안을 쌕쌕주스를 사들고와다오.

내가 진짜 알라딘에서 지겨운 것은 결코 자기에게 다가오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자기연출하는,또는 자기상정하는 '가난의 철학'에 대한 눈물 겨운 동의들이다. (남편 보고 다음 달에 사표 쓰고 가족 모두 함께 세계 여행 가자고 권해보자.!!...아이가 조금만 크면,아이가 고등학교 졸업하구나서...함께 관뚜껑 쓰기 전까지 '다음'은 늘 불가능할껄...)     

 이것 저것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니...내가 '가난의 철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내겐 어떤 종류의 '시골'생활도 불가능하다. 가난하지 않으며 시골에 사는 '전원'생활을 받아들이려면 지금 열나게 미친듯 돈을 벌든가 열나게 연금이라도 퍼부어야한다.  

 지금 상황에서는 가족부양하고 뭐 하려면 나이 70까지는 돈을 벌어야될 것같다. 때돈이 아니라 구명을 위해서. 나이가 더 들면 써주는데도 없을테니 아파트 경비원 자리를 찾으러 다녀야겠지.  

'가난'을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돈'을 버는게 쉬우니까 다들 '돈'으로 욕망을 '물질화'하는구나 싶다. 실재의 수동성으로 물러난다는 것은 허구적 능동성으로의 지향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독백 끝) 

이런 책들이 나와서 관심을 끈다. 밀린 책들도 많은데...  

1.왈쩌의 책을 예전에 본 적은 없다. 그런데 이런 저런 유사한 책을 읽다보면 그의 이름을 만나곤 한다. 정치학 책들 몇 권 본 사람들은 그를 기억할 것이다. 이름이 특이하니까...  

2. 올해가 다윈탄생 200주년이다. 그래서 몇 권 상식선에서 읽어볼까 한다. 고등학교때 생물선택도 아니었고 해서 쉬운 것부터 시작했다. 이어서 몇 권의 유명한 도킨스,굴드 책들도 포함하겠지.. 

3.모리스 블랑쇼의 전집 출간이 시작된다고 한다. 블랑쇼에 대해 조금 알아보고 읽기로하자. 

4. 올해도 지젝을 몇 권 읽을터이다. 약간의 탄성을 정리해줄 만하지 않을까 싶다. 국내연구자가 개론으로 정리한 지젝의 책이 몇 권 있었나? 하여간 지젝 입문서로 나쁘진 않을 듯 보인다. 

5. 관심가는 소설들이 몇 권 있다. 올 해는 너무 애먹이지만 않는다면 영어로도 몇 권은 볼 생각이다. 지난 번에 서점에 가서 <The reader>,<No country for oldman>을 샀다.나는 매스마켓판 페이퍼백은 마음에 안든다. 좀 눈이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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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현재 구속 중인 박 씨가 진짜이든, <신동아>에 기고한 미네르바 K씨가 말하는 7인이 진짜이든, '미네르바 사건'의 핵심은 검찰이 미네르바를 허위사실 유포로 구속한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일이라는 점이다.

'진짜' 미네르바는 금융계 종사자 7인 한 팀이며 현재 검찰에 구속된 박모(31) 씨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라는 <신동아> 2월호 보도로 본격화된 미네르바 진위 논란도 이 맥락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지난해 12월 <신동아>에 실린 미네르바 기고문은 현재 검찰에 구속된 박 씨가 '가짜'라는 의혹의 핵심이었다. 박 씨가 변호인단과 접견 과정에서 자신은 <신동아>에 기고하지 않았다고 밝힘에 따라, 그러면 <신동아>에 기고한 그 미네르바는 누구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신동아>가 '언론'으로써 인터뷰를 '통으로' 조작했을 가능성은 희박했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그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던 <신동아> 보도로도 의혹은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 미네르바가 누구인지 입증할 일차적 책임은 <신동아>가 아니라 '검찰'에 있다.

의문 1 : 미네르바가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된 팀?

<신동아>는 19일 발매된 2월호를 통해 '미네르바 집단설'을 보도했다. 미네르바는 한 사람이 아니라 7명이며, 각자 분야를 나눠 글을 나눠썼다는 것. 미네르바라는 닉네임 뿐 아니라 IP주소도 조작을 통해 공유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수긍하기 힘들다. 미네르바가 누리꾼들 사이에 크게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9월 리먼 브라더스 파산을 예측한 이후다. 다음 아고라를 넘어서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0월 이후다. 정부 차원에서 미네르바에 대한 수사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11월 들어서다. 하지만 미네르바라는 닉네임을 통해 다음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것은 2007년 12월이다.

미네르바가 이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신동아>와 인터뷰한 K씨도 "이런 상황을 초래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해서 IP주소를 똑같게 하기 위해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등 번거로운 일을 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아고라에는 누구나 글을 올릴 수 있고, 익명성도 충분히 보장된다.

또 인터넷 상의 글쓰기는 인쇄 매체와 달리 자유로운 글쓰기를 기본으로 한다. 오ㆍ탈자, 비문, 속어, 팩트의 오류 등에 대해 너그러운 동시에 신뢰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다. 하지만 이런 글쓰기의 재기발랄함과 직설법은 강점이다. 이런 공간에 글을 올리면서 대표필진의 데스킹을 거치는 '신문식 글쓰기'를 했다는 것도 일반적이지는 않다.

이명박 정부의 '뻘짓'이 없었다면 '한 명의 네티즌'이었을 미네르바가 마치 사전에 기획된 작전세력처럼 움직였다? 믿기 어렵다.

의문 2 : 박 씨와 '미네르바팀'과의 관계는?

현재 검찰이 박 씨를 미네르바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두 가지다. IP주소와 박 씨의 자백이다. 미네르바를 잡는 처음부터 코미디였던 이 사건에서 물증이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게 IP 주소였다.

<신동아>의 미네르바는 이 IP주소를 충분히 조작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는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7명과 검찰에 구속된 박 씨가 동일한 IP로 글을 올리는 것은 기술적으로는 가능한 일이다.

7명의 'IP 주소 공유'는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박 씨의 'IP 공유'는 설명이 안 되는 대목이다. <신동아> 인터뷰에서 K씨는 '의견 충돌로 이탈한 1명과 박 씨의 연관성'을 언급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대목이다.

박 씨는 이들과 전혀 무관한 인물인가?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연관된 인물인가? 만약 박 씨가 이들과 전혀 무관한 인물이라면, 그는 왜 IP주소를 조작해 지난해 12월29일 미네르바라는 닉네임으로 글을 올렸을까? 이전에 올린 모든 글을 자신이 썼다면서 모든 '죄(?)'를 뒤집어쓰려고 하는가? 검찰에 구속된 박 씨가 '소영웅주의'에 빠진 청년, 내지는 검찰이 박 씨에게 자백을 강요했을 것이라는 억측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아, 그 뒤에 또 의문이 남는다. 그가 진짜 '가짜'라면 <신동아> 기고문에 대해서는 왜 부인했을까? 진위 논란이 불거질 게 뻔한데 말이다.



▲ 박 씨에 검찰에 구속되는 장면. ⓒ뉴시스

의문 3: '미네르바팀'이 글을 올린 목적은?

<신동아> 보도처럼 미네르바가 잘 조직된 '팀'이라면 왜 아고라에 글을 올렸는지에 대한 의문은 더 커진다.

미네르바가 전문적인 경제지식과 탁월한 정보력 뿐 아니라 정의감과 서민들에 대한 애정을 가진 1명이었다면 "힘없고 배고픈 서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글을 올렸다"는 말로 어느 정도 글을 올린 의도에 대한 궁금함이 충족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7명이 자체 데스킹 과정 뿐 아니라 IP주소를 조작하는 과정까지 거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면서 글을 올린 목적이 "서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였다"? 중간에 내부 분열까지 겪으면서?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대목이다.

<신동아> 보도로 '진짜 미네르바 찾기'는 사실상 끝?

<신동아> 보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혹은 해소되지 않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기사로 '진짜 미네르바 찾기'는 사실상 종지부를 찍은 셈이 됐다.

처음부터 검찰은 '제2의 미네르바'의 가능성을 차단해 놓았었다. 지난해 7월30일과 12월29일에 올린 글 두 개 만이 법적으로 문제가 되며, 이 글을 올린 사람은 박 씨가 분명하며, 본인도 이를 시인했다는 것. 나머지 글을 누가 올렸는지는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신동아> 기고문 관련된 수사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검찰의 입장은 달라진 게 없다.

검찰의 이런 태도 때문에 애당초 미네르바 진위 논란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의혹을 남을 가능성이 높았다. 여기에 '미네르바가 한 팀'이라는 <신동아> 보도는 결과적으로 '쐐기'를 박은 셈이 됐다. 검찰이 잡은 박 씨가 '가짜' 미네르바일 가능성에 대해선 의문을 던졌지만, 7명으로 늘어난 '진짜' 미네르바를 찾기는 매우 힘든 일이 됐다. 박 씨가 '가짜'라고 주장하는 1명의 미네르바가 나타난다 해도, 그가 '진짜'임을 입증하기는 상당히 힘든 일인데, 7명이라니….

검찰, '진짜' 미네르바를 '진짜' 모르나?

그렇다면 '진짜 미네르바 찾기'는 중요한가? 현재로선 중요하다. 왜? 제기된 의혹을 풀고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미네르바로 추정되는 한 사람이 구속 중이기 때문이다. <신동아> 보도대로 그가 '가짜'이거나 '진짜' 미네르바들이 쓴 글을 올리는 역할에 불과했다면, 그는 지금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다. 검찰은 법의 테두리를 넘은 두 개의 글이 중요하고, 나머지 500여 개의 글은 무관하다고 하지만 이는 억지다. 박 씨가 썼다고 추정되는 두 개의 글을 나머지 글과 연관성 상에서 의미와 영향력을 갖는 것이다. 또 박 씨가 의도적으로 미네르바라는 닉네임과 특정 IP 주소를 도용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수사해야 하는 사건이다.

따라서 검찰이 박 씨에 대해 죄를 묻고 싶다면 '진짜' 미네르바를 찾아내야 한다. 가뜩이나 박 씨의 구속이 적절한 것인지를 놓고 법적 논란이 일고 있는데 그가 아닌 다른 '진짜' 미네르바가 있다는 보도가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적당히 넘어가겠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는 검찰의 미네르바 수사가 충성심 경쟁의 발로이며,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희생양 만들기'였다는 사실을 스스로 시인하는 꼴이 된다. 누구도 검찰 수사 결과를 신뢰하지 못할 것이다.

구속된 박모 씨의 변호인단으로 그의 구속적부심에 참여했던 박재승 전 대한변협 회장은 박 씨가 '가짜 미네르바'라고 주장하면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대재앙이 떠오른다"고 경고했다. 박정희 정권은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이 선고된 8명에 대해 재판 다음날 새벽 서둘러 사형을 집행했다. 32년 만인 지난 2007년 재심을 통해 모두 정권에 의해 조작됐으며, 무죄임이 입증됐다.

검찰이 '진짜' 미네르바를 찾아낼 수 없다면, 혹은 찾아낼 능력이 없다면, 내지는 찾아내도 공개하기 어렵다면, 현재 구속된 박 씨를 풀어줘야 한다.

/전홍기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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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이 둘 사이에서 끝일까?  

어린 시절에 본 일지매가 생각나네. <일지매>라는 영화를 참 여러번 본 듯 하다. 내가 <일지매>를 처음 본 것은 동네 공터에 천막극장이 들어왔을 때 였다. 3편동시 상영극장이었다. 하나는 만화영화였고 다른 하나는 일지매,그리고 마지막은 성인관객을 위한 영화였다. 몇 년이 지난후 학교 강당에서 상영한 <일지매>도 봤다. 당시 학교에서는 단체관람이라는게 있었는데  영화관에 가서 보는 것은 훨씬 더 이후의 일이었다. 영사기 하나에 강당에 흰 천막을 치고 학년별로 둘러앉아 영화를 봤다. 1년에 한 두번 그런 일이 있었다. 앞반부터 보기 시작하는데 우리 반 순서는 언제일지 손꼽아 기다렸던 기억이난다. 가끔 우리 뒷반이 먼저 볼 때는 어린 마음에도 선생들간의 파워게임으로 파악하곤 했었다. 사실은 수업 배정과 운영상의 이유였겠지만. 

영화 <일지매>는 한국판 '쾌걸 조로'인셈이다. 세계 여러 문화에 동시에 존재하는 의적의 문화 아이콘이다. <일지매>의 한국판 원형은 전우치나 홍길동이 될 것 같다. 아니 그 전에도 무언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국문학이나 민속학 전공자들이 더 잘 알겠지. 요즘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국민만화가 허영만의 만화<각시탈>도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복면 의적의 모티브와 동일하다. 최근 버전으로 보자면 만주벌판 말달리기 전 '이상한 놈' 송강호의 <반칙왕>이나 과속 스캔들 내기전 차태현의 <복면달호>가 전부 그런 복면 모티브다. 시대가 바뀌니 '복면'의 의협심은 일상의 소소함 속으로 사라졌다.  

영화 <일지매>의 결론 부분으로 기억을 거슬러 가 보자. 너무 오래전이라 정확한지 가물가물하다.악당-마을 수령이었던지 중앙에서 파견된 포도대장인지-이 인질을 잡고 언제까지 안나타나면 다 죽인다했던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되었다. 우리 주인공 일지매가 담장을 넘는데...뭥미? 여러명의 '진짜' 일지매들이 나타났다. 그 중에는 흰 옷을 입은 일지매도 있었다. 온통 리플리카? 아니다. 온통 '오리지널'이다. 전부 서로 모르는 사이들이고 입이라도 맞춘듯 모두 자기가 일지매라고 한다. 여러명의 일지매가 나타나자 서로 서로도 당황해했었다. 악당들 앞에서도 자기가 진짜 일지매라고 원본다툼을 하다가 -약간의 싸움도 있었나?-일단 악당이 '다 죽여'라고 하자... 악당과 '일지매들'이 싸운다. 물론 <일지매>영화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바보인지 머슴인지..하여간...그런데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그 영화적 진실 안에서 평소에는 바보로 연기한 그리고 위기에는 악당으로 변신한 일지매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결론은 그것보다 훨씬 복잡했다. 마지막 결투에 나타난 일지매들을 텍스트 안에서 보면 마지막 결투를 위해 등장한 인물들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 밖의 시각으로 읽는다면 그들은 각자의 공간에서 원본 '일지매'로 정의의 사도 역할을 하고 있었던것이다.  

나는 미네르바가 무슨 정의의 사도라고 생각치는 않는다. 또한 고난도의 경제용어들이 오고갔다고 하지만 그게 그(들)만의 특별한 재능이었다고 생각치도 않는다. 최근에 국내에 책이 나오기 시작하는 지오반니 아리기같은 이들은 무너질 것 같지않던 미국 금융시대의 파국을 20년전에 예측했다. 그것뿐인가? 단기적으로도 비판적 경제학자들이나 보수적으로 운영하는 애널리스트들 세계 경제의 위기나 한 국가의 위기상황에 대해 적절한 예측을 하기도 했다. 미네르바의 예측이 모두 맞는 것도 아니고,또 미네르바가 틀렸다고 그의 예측 전체가 다 공염불인 것도 아니다. 그건 어느 경제학자도 100%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경제학자나 애널리스트가 '노스트라다무스의 후예'도 아니다. 미네르바 신드롬('미네르바'가 아니라 '미네르바 신드롬'이라고 했다.) 에는 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실망과 실제적인 불안이 있다. 거기에 미네르바를 잡아들이겠다는 몰상식은 '미네르바신드롬'을 더 확산시켰다. 조중동은 그 '신드롬'을 꺽으면 된다는 생각에 학력론으로 아우라를 없애겠다고 두 팔 두 다리를 걷어붙혔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인해 스스로 허울좋게 뒤집어쓰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스스로 포기한다는 것을 선언했다.(사실 원래 없었다.) '우리가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는 너희같은 족속들이 아니라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세상이거든'이라고 조중동은 자기입을 통해 말하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존중한다는 '자유민주주의' 가치와 '하면된다'는 박정희식 의지주의에 의거한다면 검찰이 말한 전문대,무직 미네르바야 말로 인간승리의 주인공 아닌가?  

대한민국은 정말 문화사회학적으로 무궁무진한 아이템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게 너무 반복되는 패턴이어서 이제 학자들도 지루해하고 있고, 보는 사람도 지루하다는 것이다. 카산드라가 신의 노여움을 받지 않았어도 동어반복을 해서 그렇게 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든다. 

p.s) 가끔 나는 내가 속한 조직에서 카산드라가 된다. 문제는 정말 그런 일이 닥치면 다들 입장 바꾸고... 언제 그랬어..내가 그 때 그랬나...그 땐 그럴 수 밖에 없었지...라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사안 앞에서 그 '동어반복 게임'에 들어간다. 나도 다시 동어반복을 해야한다. 환멸스럽다.오늘도 새벽 2시30분에 잠이 깻는데 결국 이대로 출근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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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진실게임…검찰·신동아 점입가경 

 강병한·박홍두기자


ㆍ양측 주장 곳곳 허점… “IP·ID 공개를”

시사월간지 ‘신동아’가 자신이 ‘진짜 미네르바’라고 주장하는 ㄱ씨의 인터뷰 기사를 게재하면서 미네르바 진위 논란이 다시 불붙고 있다. 검찰은 인터뷰 내용에 대해 “전혀 근거가 없다”며 일축, 사건은 진실게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인터넷 주소(IP) 수수께끼=핵심 쟁점은 IP와 아이디(ID)다. IP는 집 주소처럼 컴퓨터마다 할당된 고유 주소로 이를 확인하면 인터넷 글 게시자의 컴퓨터를 추적할 수 있다. ㄱ씨는 “(7명의 미네르바) 멤버들과 IP를 공유했고 우리들이 사용한 IP는 2개”라고 밝혔다.

검찰은 그러나 “미네르바가 아고라에 올린 280여편의 글은 2개의 IP에서 일관되게 작성됐으며 모두 박씨의 컴퓨터 IP와 동일하다”고 거듭 밝혔다.

ID 문제도 의혹이다. 아고라 경제방에 글을 올리기 위해서는 포털 ‘다음’에 ID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접속해야 한다. 검찰은 2개의 IP로 등록된 미네르바 글이 하나의 ID로 접속됐고, 모두 박씨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신동아’와 ㄱ씨는 모두 ID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박씨 변호인인 박찬종 변호사는 “공동집필한 7명의 IP와 ID를 공개하기 바란다”고 요구했다.

◇누가 진짜인가=미네르바를 ‘인터넷 경제대통령’으로 만든 리먼 브라더스 파산 예측 글에 대해 검찰은 “박씨 IP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ㄱ씨는 인터뷰에서 “아무도 파산 가능성을 몰랐으나 나는 파산 1∼2주 전에 확신했다”고 주장했다.

ㄱ씨는 또 “박씨가 체포된 후 썼던 경제전망 글에서 중국 경제성장률을 -5~-8%로 예측했는데 이는 억측이고 과장된 것”이라며 박씨가 가짜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ㄱ씨의 인터뷰 내용에도 논리적이지 않은 점이 있다. ㄱ씨는 아고라에 올린 글 중 영국계인 HSBC를 ‘중국계 은행’이라고 표현한 부분에 대해 “실수했다. 멤버 중 다른 한 명이 썼는데 오타였다”고 말했다. 이 글은 아고라에서 활동하는 또 다른 네티즌이 작성한 것으로 최근 밝혀졌다. ㄱ씨는 쓰지도 않은 글에 대해 해명을 한 셈이다.

ㄱ씨가 검찰이 박씨를 구속하면서 허위사실이라고 규정한 2건의 글만 자신이 쓰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도 석연치 않다. 검찰은 “인터뷰 내용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없다”고 일축했다. 박찬종 변호사는 “법률상 명예훼손이 되는지 검토해보겠다”고 말했다.

반면 ‘신동아’는 “ㄱ씨가 인터뷰에서 밝힌 인맥 중에 외국계회사에서 근무하는 인물을 찾아내 신분을 재확인했다”고 주장했다.

<강병한·박홍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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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 세상에 

후진 회사에서 

후진 인간들과 

후지게 살고 있는 

후진 인생이 

'나'라는  

생각이 든다. 

우울증 점점 심각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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