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라리스 (반양장) 렘 걸작선 2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김상훈 옮김, 이부록 그림 / 오멜라스(웅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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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솔라리스>를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은 러시아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이다. 그는 1972년 동명의 영화를 만들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혁명이 영상에 자리를 내준 90년대를 거쳐온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지금보다 영화를 볼 수 있는 창구가 적었던 시절이다. 자고로 금지는 더 큰 열망을 낳는 법이다. 그 당시 타르코프스키는 매니아들 사이에서 올림포스에 사는 신족처럼 취급되었다. 그의 영화<희생>,<노스탤지아> 같은 작품들은 일종의 신탁이었던 셈이다. 실제 그의 영화는 중독성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강한 수면제가 발라져있다. 가끔 졸다가 눈을 떠보아도  상징적인 이미지가 언뜻 언뜻 지나간다. 뻑뻑한 눈을 비비며 보는 시적인 영상들은 '장자'와 '나비'를 서로 혼동케 하기도 한다. 내가 알던 한 지인은 타르코프스키의 기획은 그런 '몽매'의 상태를 영화적 장치로 이용하여 자신의 영화를 초현실적 단계로 이끌어가는 것은 아닐까라며 웃었다. 하여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명성은 어떤 의미로든 강력했다. 그 때문일까 <솔라리스>의 원작자도 그의 그림자에 가렸다.

옮긴이의 글에도 원작 <솔라리스>가 그 동안 SF팬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원작시나리오 정도로 취급받는 역전된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고 말한다. 나 역시  타르코프스키 때문에 <솔라리스>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영화 전체를 보진 못했다. 내게 직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따로 있다. 지젝의 <기묘한 영화강의>라는 영상물이다. 그 영상물에서 지젝은 직접 내레이터로 출현한다. 그는 그의 책에서 예로 들었던 영화물들을 직접 설명하면서 정신분석학적인 영화 비평을 시도한다. 영화<솔라리스> 역시 그렇게 소개된다. 지젝은 프로이드의 리비도에 대한 왜곡을 먼저 비판하면서-리비도 결정론적인 곡해-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로 들어간다. 닫힌 문을 뚫고 나오는 레야의 모습도 나오고 책과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결말도 나온다. 타르코프스키의 결말에서 지젝은 '아버지의 법'에 복종하는 프로이드적 결말을 읽어 낸다.  

스타니스와프 램의<솔라리스>는 일종의 정신분석학 텍스트이다. 나는 최근에 읽었던 지젝의 책들의 복습 문제처럼 이 텍스트를 읽었다. ( 편의적이고 작위적인 방식이어서 그다지 권할 만한 것은 아니다.) 대신 어떤 개념들을 자기화 해내는 방식- 학문적 엄밀함을 요구하기란 어렵다-으로, 소설을 즐기며 분석의 틀들을 대입해 본다는 것은 책을 읽는 또 다른 방식의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먼저 영화 예고식으로 줄거리를 그려보자.

지구로 부터 한참 떨어진 우주. 솔라리스라는 스테이션에 주인공 캘빈이 도착한다. 그렇지만 무언가 이상한 예감이 든다. 스테이션이 마치 유령의 집같다. 켈빈은 자기의 스승이자 동료였던 기바리안이 이상증상을 보이며 죽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리고 스테이션에 있는 나머지 두 동료들인 스노우와 사토리우스도 공통되었지만 각기 다른 이상 증상을 겪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그 증상은 캘빈에게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먼저 매혹적인 것은 '솔라리스 '라는 행성이다. 아니 생물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두 개의 태양이 떠있는 행성에 사는 '바다' 가 '솔라리스'다.  '생각하는 바다'는 밀물과 썰물을 바라보며 혀를 낼름거린다는 동화적 상상력을 극한으로 확정시킨다. 그 바다는 안개에 휩싸여 있고 끈적한 물질처럼 되어있다.그리고 가장중요한 것인데 인식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한계를 훨씬 넘는 형태의 고등진화된 생물이다. 렘은 솔라리스라는 행성이 발견되고 나서 지구에서 있었던 각종 연구들을 장황하게 설명해준다. '솔라리스학' 이 그것이다. 모두 각종 가설들이다. 하지만 어느 하나 명확하지 못하다. 모두 이런 생명 행성의 존재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언어로 담을 수 없는 것들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바다'를 둘러싼 다양한 과학적, 또는 철학적 주제들을 켈빈이 읽는 솔라리스 관련 저서들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조금 지루할 수도 있지만 상당히 흥미롭다. 마치 과학사 논쟁이나 철학사 논쟁을 보는 듯 하다. 

흥미롭지만 또한 미지의 것이 가져다 주는 공포로 인해 '생각하는 바다'는 양가적 대상이다. 하지만 승무원들이 공통으로 겪는 증상이 확인되면서 '생각하는 바다'는 상상하기 힘든 공포가 된다. 이것은 우리의 트라우마, 음침함, 타나토노스적 욕망등을 물질화하기 시작한다.  

머릿속에만 있던 그것이 어느 순간 피와 살이 되어 현실로 나타나지. 문제는 그게 전부야...우리는 현실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곳에'도착하게 되고 곧 진실-우리가 가능한 언급하기를 꺼리는 진실-과 맞부딪치는 거야. 이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지.....우리 자신의 추악함을 마치 현미경으로 보듯 몇 백 배나 확대한 것과 말야        

나는 공포영화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또한 SF소설은 쥘 베른 이후에는 거의 본적도 없는 듯 하다. (물론 SF영화가 더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하지만 이런 설정은 정말 최악의 공포다. 소설이 안타까운 건 음악이 없다는 것이다.그렇지만 자기 트라우마의 물질화라는 설정은 가히 최고 공포를 연상시킨다.(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는 음악으로 이런 긴장상태를 잘 유지했던 것 같다.) 나는 사실 이 소설을 보다가 어둠 한 편에서 나의 어떤 트라우마들이 형상화되어서 나오면 어떨까 생각하고 소름이 돋기도 했다. (물론 '나는 트라우마같은 것이 없어요.'라고 하는 사람은 앞으로도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면서 잘 먹고 잘 살면 된다. 그러니까 나같은 이를 비롯해서 인간에 대해 뭘 해도 이해가 잘 안되는거다. 또한 심리학 실험에서 거짓말 반응에 걸려서 실험 비적격 대상자가 될것이기도 하다. 심리학 실험에는 실험자의 정직도를 알아보기 위한 문항들이 몇개씩 있다고 알고 있다.)  

주인공 캘빈은 그의 자살한 아내를 만난다. 캘빈이 그냥 홧김에 던진 말이었는데 그것때문에 그녀는 자살한 것이다. 그녀는 캘빈이 자고 있는 동안에 나타났다. 잠이라는 소재는 프로이트의 주전공 아닌가.(잠을 자야 꿈을 꾸지)그렇지만 이 존재는 꿈과는 다르다. 앞서 말했듯이 이미지가 아닌 물질화된 대상이다. 지젝은 '살아 있는 시체들의 귀환'이라는 말을 썻다. 그는 현대 대중문화의 근본적인 환상이라고 말한다. 즉 죽음에 머무르려 하지 않고 거듭거듭 산 자를 위협하기 위해 귀환하는 사람들에 대한 환상이다. 소설 속에서 귀환한 레야는 직접적으로 캘빈을 위협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무의식의 귀환은 자살만이 탈출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미치게 한다. 그렇다면 왜 죽은자들이 돌아오는가?  지젝은 라캉이 이에 대해 아주 쉽게 답변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이 제대로 매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죽은 자의 귀환은 상징화 과정(이게 제대로 이루어져야 맘고생 없지 뻔뻔하게 잘살 수 있다.)에 있어서의 교란을 나타내는 기호이다. 라캉은 <햄릿>의 햄릿왕과 <안티고네>의 안티고네가 이 상징적 채무를 물질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레야라는 존재를 일종의 '실재'의 침입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캘빈은 솔라리스 스테이션에서 일종의 사물의 영역으로 넘어간 것이다. 즉 존재가 고통 속에서 고집하는 금지된 경계 영역으로 말이다. 무의식은 어떤 비지식의 토대 위에서 그 일관성을 유지해야하는 것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우리의 상징화 작용 속에 비상징화되는 중핵들이 봉쇄되어야 한다. 지젝은 '징후'로 이를 설명한다. 즉 주체가 자신에 관한 어떤 근본적 진실을 무시해야만 존해하는 어떤 특정한 형성물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캘빈처럼 실재의 조각 정도가 아니라 실재가 전면적으로 침입할 때 그런 징후는 스스로 와해된다.  

'생각의 바다'가 끌어낸 레야라는 대상-나중에 이런 대상들을 '파이-생물'이라고 부른다.재미있는 것은 실재계에서 상상계로 향하는 관계를 지젝이 파이라고 부르고 있다. - 은 정확히 말하자면 캘빈의 증상으로서의 레야이다. '여자는 남자의 증상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여성이 남성에게 일관성을 부여하는 한에서만 남성이 존재함을 가리킨다. 남성의 존재는 사실 그 자신에 대해 외부적이며 여성은 무이다. 이 '무' 를 통해서 실재적인 주체성의 창출이 가능한 것이다. 지젝은 1930년대 필름 느와르의 팜므 파탈이라는 여성 존재를 통해 이 과정을 설명한다.('여자는 없다.'라는 말을 페미니스트적 오해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솔라리스>속에서 캘빈의 죄책감에 의해 만들어진 레야는 여기서 특이한 행동을 통해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레야는 캘빈의 머릿 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캘빈의 의식 밖의 영역에 대해서는 '무'에 가깝다. 아무런 코딩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것은 레야가 스스로 '비존재'라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생각의 바다'가 주체의 트라우마를 통해 구축해낸 물질화된 '시뮬라르크'가 특별한 매게 없이 자기 인식을 시작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유령이 유령인지 스스로 아는 것이다.' 이거야 말로 '죽은 신도 못하는 일'을 스스로 해내고 있는 것 아닌가? 레야는 몇 몇 특정한 동물과 인간만이 한다는 '자살'을 시도한다. 그렇지만 그녀의 육체화,정신은 금새 다시 복원된다. 자해와 복원의 고통스러움을 복기해야하는 캘빈은 이제 돌아온 그녀가 '비존재'임을 알면서도 혼동을 겪게 된다. 여기서 스타니스와프 렘의 매력이 나온다. 만약 레야라는 존재를 단지 캘빈의 무의식정도로만 취급했다면 이 책 <솔라리스>의 매력은 절반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생각의 바다'는 원래 상호주관성이 결여된 영역이다. 즉 '레야'라는 존재가 대상/응시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단순한 '시뮬라르크'만은 아니란 것이다. 이것은 상호주관성이라는 인식영역에서는 논리적으로 타당하고 쉬운일이다. 하지만 '생각의 바다'는 완전히 '비인격적' 존재이다. 그렇기때문에 '존재론적' 고민을 하는 레야의 탄생은 마치 진화론의 지적 설계론을 풀어낸 것 같다. 실제로 책 후반부에서 스노우와 캘빈은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 

그 신은 무한을 창조했지만 자신의 능력의 척도여야할 무한이 결국은 그 자신의 끊없는 패배를 가능하게 하는 척도가 되버렸던 거지....불와전한 신 ..이거야말로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 속죄나 구원이 목적이 아닌,아무 목표도 없이 다만 그곳에 존재할 뿐인 신이기 때문이지

스타니스와프 렘을 비롯해서 외계인 또는 미지의 세상과 조우하는 인류를 다룬 영화들은 일련의 공통된 주제들이 있다. 조금씩 다른 변주를 취하고 있지만 결국 '인간'에 대해 어떤 종류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지? 우리는 과연 진리와 독대할 수 있는지? 의식의 한계는 어디까지 인지? 그 영역 밖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또한 우리는 어떤 형식으로 타자에 접근해왔는지? 어떤 접촉 양식을 취해왔으며 어떤 소통의 방법들을 이룩해왔는지?  이 과정에서 우리의 이성과 이로부터 추출되기도 하는 폭력은 어떤 패턴을 밟아왔는지? 소설<솔라리스>에서 우리는 수시로 이런 질문들을 추출해낼 수 있다.

 <솔라리스>의 원작자 스타니스와프 렘은 타르코프스키와 2002년에 있었던 소더버그의 리메이크 작업에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논쟁의 핵심은 두 영화가 공히 '소통과 인간 인식의 한계' 문제보다는 '로맨스'쪽으로 방향을 잡았기 때문이라고 알려져있다. 두 영화 모두를 보지 않은 입장이라 무어라 말하기 어렵지만 내가 영화 감독이었어도 그런 방향으로 따라가기 쉬울 성 싶다. 원작 <솔라리스>의 후반부는 다분히 설명적이고 철학적이다. '솔라리스학'이라는 것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과 서술들은 드라마적 진행에 있어서는 방해가 된다. 물론 이런 논쟁의 함의를 읽고 지적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 역시 많을 것이다. 요는 렘의 <솔라리스> 후반부는 드라마라는 측면에서 취약하다는 것이다.  2% '행동'이 부재하거나 이펙트가 약하다. 이미지의 결합과 분배를 통해 초현실주의적인 영화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면 감독들은 이런 드라마 구조에 대해 고민하기 마련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는 '예술은 모방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 미학을 한 줄로 요약한 이런 말이 나온다.

비극은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과 삶, 행복과 불행을 모방한다....우리가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은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 

영화<솔라리스>의 감독들이 '생각하는 바다'인 솔라리스보다 주인공인 캘빈과 레야의 문제로 자꾸 시선을 옮겨가려는 것도 어느정도 이해해 줄 수는 있다. 영화<솔라리스>를 최근에 구하고 있는데 영화를 보고 나면 또 다른 방식의 리뷰도 가능해지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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