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완 다이브'다. 내가 한 번도 제대로 해 본적이 없는 다이빙 자세를 말하는 거다. 아래에 있던 팔을 위로 들어올리며 둥그렇게 원을 그린후 팔부터 입수하는 평범한 자세. 나는 그렇게 입수해 본 적이 없다.  어린 시절에는 배치기 였고 커서는 엉금 엉금 수영장에 기어들어갔다. 수영장 알러지때문에 못내 마스터하지 못한 수영레슨이 조금더 지속되었다면 '스완다이브'같은 것도 해봤을텐데. 수영은 남의 운명, 못다핀 취미활동이다. 

음악 이야기를 하다가...못다배운 수영의 한이 흘러 나왔다.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알테지만 내가 음악을 조금 좋아하긴 한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그 때 그 때 좋아하는 편이다. 팝음악중 특히 애정을 가지는 장르는 포크음악이나 블루스 음악이다. 

물론 포크의 전성시대는 6-70년대이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정치적 의미와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런 포크의 명맥은 현대 모던락이나 '뉴 포크'같은 장르로 이어진다. 밥 딜런이나 닐 영같은 이들은 여전히 활동하고 있고 한참 후배인 트레이시 채프만 같은 이들도 음반을 계속 발표한다. 국내에서는 전통적인 의미의 포크음악은 이제 미사리같은 데로 사라졌다. '바위섬'의 김원중 같은 이들은 여전히 고향에서 포크의 명맥을 잇고 있고 한대수,송창식,정태춘 같은 이들도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가끔 소문을 들려주기도 한다. 그외에도 손병휘나 정지상 같은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래를 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가장 아까운 이름 한 명을 거론해야 한다. 김. 광. 석.  그를 잃은 것은 땅을 치며 안타가와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더 길게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최근에 포크는 하이브라이드화하여 여러 장르와 섞였다. 앞서 말한 모던락은 물론이고 일본의 시뷰야사운드 같은 식으로 말이다. 최근에 나오는 국내의 인디음반들 중에 대다수는 그런 분위기 아래 있다.  

1993년에 미국 내쉬빌에서 결성된 <스완다이브>도 따지고 보며 그런 팀이다. 이 팀은 남녀 두 명으로 구성되었고 애써 장르구분을 하자면 포크팝 정도로 구분한다. 하지만 워낙 하이브라이드가 대세인지라 어떤 하나의 장르로 말하는 것 자체가 이제는 어색하다. 그들은 그냥 <스완다이브>의 음악을 한다.  이 팀은 국내에도 몇 차레 방문을 했었다. 내가 이 팀을 처음 안 것은 퇴근길 자동차 안에서이다. 배철수의 음악 캠프에 이 팀이 출현했던 것이다. 단출한 사운드와 담백함이 나쁘지 않았다. 이후에 이 팀은 EBS에도 출현하고 그랬다고 한다. 스완다이브의 음악은 국내에서 이미 어느 정도 알려져있다.CF의 음악으로 몇 곡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스완다이브의 대표적인 히트곡인 Circle 이다. 포크적인 느낌보다는 밝은 챔버팝 분위기의 노래다. 하지만 스완다이브의 음악이 모두 '포카리스웨트'음악처럼 달콤한 것 만은 아니다. 전체적인 사운드가 무겁지 않다는 것이지 음악이 모두 쾌청발랄한 것은 아니란 말이다.   

 

스완다이브는 국내에 5종류의 음반이 나와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음반은 일종의 보사노바 트리뷰트 음반이다. 이런 장르도 요즘은 거의 대세가 아닌싶다. 일본의 리사 오노, 나오미 & 고로가 생각이 난다. 이 곡은 until이라는 곡인데 마이클 프랭스가 떠오른다.

   

좀 말랑 말랑한 포크-베이스한 음악들이다. 그런데..겨울이고 좀 쓸쓸한데 더 어울릴만한 음반을 찾는다면, 나는 고민하지 않고 임의진이 컴필레이션한 <여행자의 노래>시리즈를 추천한다. 앞의 것들이 봄여름의 포크적 음악이라면 임의진의 컴필레이션에는 가을겨울의 냄새가 난다. 

지금까지 모두 5장이 나왔고 어느 음반이든 훌륭하다.   이 시리즈 외에도 아름다운 몇 종류의 컴필레이션이 있다. 

임의진이 뭐하는 사람인가 궁금하다면 '선무당 닷 컴'(www.sunmoodang.com)'을 구경하면 될 뿐이고..

 

 

 

 

     

 

 

  

 

마지막으로 올린 노래는....<여행자의 노래 3집>에 있는 Day is done 이다. 이 컴필레이션에서는 키스 제임스가 리메이크한 곡이 올라있다. 여기는 오랜만에 닉 드레이크의 원곡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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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경의 '천상의 방랑자 슈베르트'도 읽었구 해서...오랜만에 <겨울나그네>를 들어봤다. 생각해보니 매년 겨울이면 서너번씩 듣곤 했는에 올해는 단 한번도 안들었다. 음악들을 마음이 안됐나보다.     

1.안녕히(밤 인사)

먼 타향에서 왔건만 또 다시 떠나오/ 오월의 예쁜 꽃들 나 맞이 했건만
그 처녀 내게 사랑을 진심으로 언약하고/ 그녀의 어머니도 축복을 했건만
이 세상 모든 만물 슬픔에 잠기고 /내 발길 닿는 길도 눈 덮여버렸네
또 다시 방랑 떠날지 나 알지 못했소
캄캄한 어둠속에 길찾아 떠나오 /차가운 달빛속에 내모습 비치고
외로워 나의 발길 말없이 따르네 /눈 덮인 하얀들판 내앞에 펼쳐있고
들짐승 발길따라 밤길을 찾으리 /사람들 만나기전 이 곳을 떠나리
그녀의 집앞에서 짖어대는 개들 /사랑은 방랑하는 것 이여인 저여인
그것이 운명이라면 나 다시 떠나리

사랑은 방랑하는 것 내사랑 안녕히 /이여인 또 저여인 내사랑 안녕히
단잠에 빠진 그대 깨우지 않으리 /발걸음 소리 가볍게 문닫고 떠나리
그녀의 대문 위에 한마디 남기고 /그녀가 보게 될 때 내진심 알리라
그녀의 대문위에 이별의 인사로 /한마디 말로 안녕 내사랑 전하리  

 

5.보리수

성문 앞 우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나는 그 그늘 아래 단 꿈을 보았네
가지에 희망의 말 새기어 놓고서/기쁘나 슬플 때나 찾아온 나무 밑
오늘 밤도 지났네 그 보리수 곁으로/깜깜한 어둠 속에 눈 감아 보았네
가지는 산들 흔들려 /내게 말해주는 것 같네/'이리 내 곁으로 오라
여기서 안식을 찾으라'고

찬 바람 세차게 불어와 /얼굴을 매섭게 스치고
모자가 바람에 날려도 /나는 꿈쩍도 않았네

그곳을 떠나 오랫동안 /이곳 저곳 헤매도
아직도 속삭이는 소리는 /여기 와서 안식을 찾으라
 

7.냇물 위에서

즐겁게 재잘대며 흘러가던 시냇물이/어쩌면 그렇게도 침묵해 버렸느냐
두껍게 얼어붙은 얼음에 덮여서/싸늘하게 가로누워 모래를 씹는구나

나를 덮은 얼음을 모난 돌로 쪼아 /그리운 그 이름과 그 날 그 때를
나는 묻으리
처음 만나던 날을, 이별하던 날을 /지금은 부서진 그 날의 가락지를

내 마음아, 너는 이 시내에서/바로 네 모습을 보지 않느냐
겉으로는 얼었으나 밑바닥에는 /맑은 물이 끊임없이 넘치는 것을 

  

24.늙은 악사

마을 변두리에 라이엘의 악사가 홀로 서 있다/추위에 언 손이 쉬지않고 돌아간다
돈접시는 비어있고 하늘은 찬데...

듣는 사람도 없고, 돌아보는 사람도 없다/개들만 모여들어 노인을 향해 짖어댄다
그러나 못들은 척 라이엘을 돌린다

이상한 노인이여 나도 같이 갈까/내 노래에 맞춰
라이엘을 켜주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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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방랑자 - 서른 한 살 슈베르트, 그 슬픈 환희의 노래
김문경 지음 / 밀물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위대한 20세기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음악이 내게 의미하는 것을 전부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리고 <논리철학 논고>의 가장 유명한 말이 있다. "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 우리는 침묵해야만 한다."  

그래서 음악을 말로 표현해 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음표들의 높낮이를 정하고 길이를 정하고 그와 유사한 어울림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동시에 운행한다. 기술적으로 보면 그게 '음악'이다. 이것은 공기를 울리고 고막을 울리고 뇌파로 전송된다. 뇌에 도착한 이 뇌파화된 진동은 사람을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고 우울하게도 하고 심오하게도 한다. 기술적으로 보자면 이게 음악이다. 이런 과학적인 방식 말고 '음악'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실로 난망하다. 다 아는 듯 하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그런 질문들이다. 또한 '왜 저 음악이 좋냐?" 라고 물어도 몇 가지 단어외엔 설명하기 쉽지 않다. 어떤 이들은 구조의 완결성을 말하고 멜로디의 탁월함을 말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구조여도 별반 반응이 없을 수 있고 뛰어난 멜로디 라인은 가끔 저속함의 상징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결국 '음악'은 언어로 말하는 것보다는 '침묵'하는 것이 나은 전술에 가까운 영역이다. 그래서일까? 사실 좋은 '음악책'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서점에 가서 만날 수 있는 좋은 음악책이라 해봐야 '가이드책'일뿐이다. '명반 100선', '음악여행 에세이' 등등 이 그런 류의 책들이다. 조금 더 학술적인 책들은 음악학에 대한 기본적 소양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조금 어렵거나 딱딱할 수 도 있다. 그런 면에서 전문가같은 아마추어 김문경의 <구스타브 말러>시리즈는 그 틈새를 잘 포착해낸 책이었다. 나 역시 그 책을 상당히 좋아하고 요즘도 말러 음악을 들을 때 가끔 펼쳐놓고 본다. 사실 김문경이 <구스타프 말러>시리즈에서 본인 스스로 이루어낸 것은 책 부록에 나오는 말러 음반 리뷰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러>시리즈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그간의 방대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적당히 잘 조합해낸 아마추어의 열정과 애정때문이다. <말러>시리즈로 일약 김문경은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시선을 끄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슈베르트의 '재발견'이라고 할만한 <천상의 방랑자>는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별 두개를 겨우 줄 정도다. 그럼에도 별 하나를 더 준 것은 뒤에 붙어 있는 CD가 이 책에 소개된 곡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어서이다. 또 하나는 나름 독자도 가지고 강연도하면서 클래식 팬을 몰고다니는 사람의 책에 별 두개를 주었다가 악성댓글과 씨름해야할까봐 서이다. 일단 이 책에서 가장 불만족스러운 부분은  작가의 슈베르트의  재발견이라는 흥분에 덩달아 춤추기가  안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서두부터 음악팬들이 늘상하는 예의 그 과장된 표현들을 쓰면서 흥분에의 공감을 말한다. 

'루체른페스티벌에서 공연한 슈베르트의 현악5중주 D956는 나의 어설픈 슈베르트관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거대한 지진과도 같았다......인간사의 모든 감정을 세세히 그려내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나 역시 가끔 음악을 듣고 짧은 글을 쓸 때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해 감정을 과장하는 수사를 쓰곤 한다. 하지만 이게 상당히 쓰면서도 탐탁치 않고 듣기도 싫다. 그럼에도 음악팬들 중에는 이런 수사가  본질적 의미에 닿아있는 듯 착각하며 남발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우선 말로 표현하기 힘든것을 표현하려는 결과이기도 하지만 본인이 '순수한 영혼', '영적인 쾌유', '존재의 그림자' 뭐 이런 단어를 어떤 음악에 씌우면서 그런 음악을 향유하고 있는 본인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 그런 공간에 있는 그와 우리들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 내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대중들의 그런 감상태도 자체와 더불어 그를 재생산하고 확증해주는 '키치적 음악비평'의 태도이다. 대개 이런류의 음악에세이 작가들은 정서적 술어를 유추적으로 확대하여 사용한다. 그리고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상호관련성마저 희박해보이는 의미를 부여하여 작곡가와 곡,그리고 그걸 공유하는 청자에 아부한다. (가끔 듣는 클래식 FM의 진행자들을 보면 이런 주례사 비평을 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가 확실히 구분된다. 후자의 경우를 보면 '명연주 명음반'의 정만섭씨가 그렇다. 그는 담백하게 말하고 만다. 이런 식이다. " 이미 명연으로 소문난 음반이니 더 여러 말을 다는게 필요없겠지요....발군의 기량을 보여준 연주가 아닌가 싶습니다..등" 그런데 반대의 경우 -최근에 차를 타고 오면서 들었는데 도대체 어디까지 하나 싶어서 계속 들었다- 저녁시간 대에 하는 모 교수인지 평론가인지 하는 사람이다. 온갖 미사어구와 벅찬 감동의 수사가 흘러넘친다. 예술적 촉수가 더 발달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전체적으로 과함이 특징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곡'이라는 저속한 마케팅 구호처럼 립스틱 범벅이다.)

저자의 놀라운 발견 중 하나는 슈베르트가 아이의 세계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         ) 음악의 한쪽에는 방긋 웃는 아이가 보여주는 천사의 미소가 있고, 반대쪽에는 깊은 상처를 받은 아이의 트라우마가 존재한다." 

저자는 슈베르트만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실험해보자. 모짜르트를 넣으면 저 문장이 어색하게 들릴까? 쇼팽을 넣으면 어떨까? 심각하게 들릴 지는 모르지만 무리하자면 베토벤을 넣고도 저 문장의 의미를 강요할 수 있다. 좀 퇴폐미가 흐르지만 말러는 아닐까? 말러의 음악에도 그의 어린 시절 기억이 묻어있는 민속리듬들이 들어간다. 군악대 행진도 들어간다. 요즘말로 하면 좀 까진 아이로 말러를 취급하면 저 문장에 끼여도 그리 어색함은 없다. 저자는 천진한 세계와 광적인 발작의 세계라는 양극성을 말하기 위해서 슈베르트만을 저 문장 속에 포획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거의 모든 예술가들이 저 스펙트럼 사이에 있다. 좀 더 넓게 보면 인간이 저 도상 위에 있을 수도 있다.    

물론 말장난처럼 들릴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는 어떤가? 저자는 이 책에서 슈베르트의 재발견 흥분감에 비추어 '예술사적 존재'로의 슈베르트의 문제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책의 3분의 1이 괴테의 <빌헬름마이스터의 수업시대>로 이루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저자가 한 일이란 괴테의 소설을 요약하고, 그 안에 나오는 마뇽과 노인의 시를 정리하고, 슈베르트 자료들을 모은 것 뿐이다. 그리고 그나마 안타까와 하는 이야기가 '괴테가 슈베르트를 몰라봐줘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정도이다.  저자가 강조한 슈베르트의 특성인 '양극성'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를 재인용한 슈베르트의 '불완정성' '불연소성'의 문제는 과연 슈베르트만의 문제였을까?  이미 <클래식으로 읽는 인생>이라는 -책은 읽지 않았지만 책 추천사는 음악,인생,예술,철학을 집대성하는 이란 말이 나온다- 책을 썻다면 저자가 결코 '초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적 특성에 대해 몰랐을리가 없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관계성에 대한 부분은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아쉬운 부분이다. 슈베르트는 사실 음악예술사에서 가곡의 왕이지만 또한 낭만주의의 증인이다. 쉽게 말하면 슈베르트의 음악과 그의 예술적 교류, 세계관 등은 그런 낭만주의의 도래와 무관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런 관련성은 직접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반면에 이 책에는 낭만주의의 숭고미를 상징하는 프리드리히 카스파르 다비트의 그림이 여러번 나온다. 이 그림들은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의 CD자켓에 아주 빈번히 사용된다. 이 그림과 슈베르트 사이의 관계는- 저자가 지난 책에서 말했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 연관이 없는 것 일까?  결국 이 부분을 삭제하다 슈베르트가 마치 독자적인 예술천재로서만 그려지고 있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이 책의 전체적 시각은 서가에 꽂힌 책을 폈다가 이제는 기억도 없는 멋진 문장에 친 밑줄을 보고 감동하는 것과 유사하다. 나쁜 의미만은 아니다. 그런 정도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내게는 그 점이 <말러>시리즈에 비해 아쉽다는 것이다.

슈베르트의 시대는 프랑스 혁명 이후의 시대이다. 아놀드 하우저같은 경우에 이 시기의 예술가들이 자기 나라에서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고향상실, 고독한 감정들은 세계적인 정서가 되었다고 말이다. 이것은 고향에 대한 향수, 무한에 대한 동경, 미지의 것에 대해 일종의 숭고함을 갖는 반응으로 나타난다. 결국 이것은 생의 낭만화 경향으로 조응하고 낭만적 유토피아 건설에 대해 꿈을 꾸기도 한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에서 저자는 이 곡이 영원한 아웃사이더의 노래라고 말한며 한과 자기혐오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과거에 '그까짓 사랑때문에 한심한 지식인 같으니"라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깊은 속을 헤아린 겨울나그네는 존재의 상처때문에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이것이 비단 슈베르트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단 한번도 지적하지 않는다.  

앞서 말한 슈베르트의 '양극성' 측면도 보자. 저자는 슈베르트가 기괴함과 아름다움 사이를 오고간 작가였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가곡들도 많지만 '난장이'같은 (불륜과 파멸을 소재로 한다.)곡들도 상당량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미의 역사>의 한 대목을 그대로 인용해 보자. 낭만주의 미학을 잘 정리한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낭만주의의 무엇보다도 독창적인 면은  다양한 형식들 사이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관계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이성에 의해 맺어진 것으로 모순점들을 배제시키거나 반명제(유한/무한, 전체/일부, 삶/죽음, 정신/마음)를 해소시키지 않고 그것들을 공존하게 하는데 낭만주의의 진정한 특성이 있다.'

유명한 소설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이 씌여진 것이 1818년 슈베르트 21살때 일이다. 왜 <프랑켄슈타인>을 예로 들었는지는 알아서 생각해 볼 일이다. 음산함, 그로테스크 함 같은 것들은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아이템이 된다. 음악교과서에서 표제음악의 선두로 말하여지는 -그리고 단두대 장면으로 유명한-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이 1830년 ,즉 슈베르트 사후 2년 뒤에 나온다. 만약 슈베르트가 살아있었다면 33살이다. 

저자는  독일 가곡이 슈베르트 이후 퇴보했다고 말한다. 이유는 저자가 곡과 멜로디가 최적상태를 유지하는 고전주의적 가곡관을 지향하고 있기때문이다. 바그너나 말러는 물론이고 볼프같은 이들도 이 최적상태를 유지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언어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 이런 류의 문장은 내 기억에  이 책에서 두 번이 등장한다. 문제는 '슈만'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것이다. 첫번째에는 슈만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나는 왜 슈만을 언급하지 않지? ' 라고 벼루면서 보고 있었는데 책 후반부에 다시 슈베르트 가곡의 고전적 완성미를 강조하며서 단 한번 비로소 슈만이 등장한다. 슈만은 그나마 가곡의 황태자 대접은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멜로디라인에서 대중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앞으로도 슈베르트 가곡의 수준에 이르지는 호응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동감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저자는 특이하게도 슈베르트의 재발견에 들어가면서 멜로디 라인이 떨어져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슈베르트의 곡들에 힘을 실어서 말한고 있다. 슈베르트와 슈만의 비교에서 슈만이 멜로디 라인이 대중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인기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걸 그대로 슈베르트의 곡들 사이의 비교로 적용해 본다면 어떨까? 현재 인기가 없는 슈베르트의 곡은 그런 단점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슈베르트의 가곡이 최고 수준은 아니다. 책 전체적으로는 겨울나그네나 들장미,아베마리아 같은 곡들이 있지만 저자의 시선은 숨겨진 곡을 찾는데 있다. 저자가 인정하듯이 음악팬들의 '지적 스노비즘' 의 한 예라고 자기 입으로 말하고 있다. (그런 방식에는 나도 자유롭지 못하다.) 

저자의 슈베르트에 대한 과잉은 가곡 '마왕'의 예에서 나타난다.'마왕'은 드라마라는 구조뿐만이 아니라 성악과 반주면에서 탁월한 곡이다. 딱 떨어지는 느낌을 준다. 저자는 4분짜리 완벽한 곡을 만든 이가 어떻게 기악곡 등에서는 구조의힘이 떨어졌는지 묻는다.  요즘 말로하자면 CF 잘 만드는 감독이 왜 극영화는 실패하냐는 투다. 질문부터 웃음이 묻어났다. CF 잘만드는 것과 영화 잘만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 호흡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물로 저자는 하루키를 인용하면서 스스로 답을 제기한다. 베토벤식의 튼튼한 구조에 대한 애착이 전도된 질문이라는 것이다. 베토벤식의 구조는 슈베르트에게 의미 없었음을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우리는 낭만주의의 일부 특징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낭만주의는 기본적으로 어떤 종류의 객관적 예술법칙의 타당성도 부인한다.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일종의 집단에 대한 개인의 투쟁이었고 이런 흐름은 현재까지도 예술가들의 작업을 규정하는 한 축이 된다. 당연히 개성적 표현법칙과 기준은 개인화된다. 그렇다면 하이든,모차르트 시대의 고전적 양식으로 부터의 탈피는 슈베르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게 된다. 베토벤의 작품 속에서도 이리 그러한 변화의 징조들이 나타난다는 것이 교과서적 접근 아닌가. 슈베르트의 '불연소성', '반복성' 같은 것은 그런 전체 차원에서 조망해 볼 수도 있을 법하다.  저자 슈베르트 개인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결론을 맺는다. 물론 구조와 개인의 상호 관계문제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슈베르트라는 개인 하나만 놓고 보면 음악계에 있어서 낭만주의의 원인이자 결과이기 때문이다. 요점은 슈베르트라는 개인을 둘러싼 영향들에 대해 저자는 사적인 관계들 외에 거의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슈베르트라는 한 천재의 작품으로 낭만주의 음악과 슈베르트의 작품들을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 지점이 못내 아쉽다는 것이다.

슈베르트를 말할 때 '슈베르티아데' 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슈베르트가 여인보다 친구들과의 예술적 관계를 더 소중히 여겼다고 말한다. 이것 역시 슈베르트에게만 일어난 일은 아니다. 혁명 이후 과거 예술계층에 분화가 오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시민적 예술애호층들이 늘어나고 그룹으로 발전하게 된다. 슈베르트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저자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든 슈베르트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그 모임 자체를 상당히 수준높은 예술가들의 모임정도로만 말한다. 그리고 슈베르트의 사인-매독에 의한-같은 것들은 날라리 친구 한 명의 꾐에 빠진 한 번의 실수라는 식으로 대충 지나간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저자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언가를 생각해보면 슬쩍 웃음이난다. 영웅적인 베토벤 상이 후대의 이미지이듯 천상의 방랑자, 순결한 청년의 영혼 슈베르트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한 노력말이다.  요즘 대세가 '퀴어'라서 그런지 나는 슈베르티아데에서 '퀴어'의 향기가 난다.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영화적 상상력으로 슈베르트 영화를 만든다면 나는 '퀴어'로 만들겠다. 요즘같으면 매독이 아니라 AIDS라 해야 이해받을지도 모르겠다. 요즘이야 매독으로 죽는 이들은 거의 없을테니...좀 모독적이라는 생각이들기도 한다. 밀로스 포먼이 아직도 모짜르트와 소송 중이라니 그 판례를 보고 수위를 조절해 볼 생각이다. 

이 책은 내가 최근 가장 빨리 읽은 책이다. 그다지 어려운 내용도 많지 않고, 나는 읽지 않을 <빌헬름마이스터>를 읽느라 고생한 흔적도 보인다. 여러가지 안좋은 소리를 해서 좀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하자. 이 책의 표지는 정말 최악이다. 디자인에 대한 아무런 고민이 없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지 여실히 보여준다. 리어카에서 파는 CD 자켓도 이 책의 디자인보다는 낫다.  

슈베르트에 대한 책이 거의 없다는 저자의 문제의식에는 공감을 한다. 그런면에서 또 한번 틈새를 노린 점은 훌륭했다. 그러나 결코 좋은 점수를 주긴 힘들다. 말러에서 보여준 공력을 기대어 다음 번 슈베르트 책은 진일보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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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론의 핵심은 세대갈등이 아니라 계급갈등"
공저자 박권일씨, "조선일보의 노이즈 마케팅에 우석훈이 낚였다"
 

2009년 01월 30일 (금) 16:48:00 이정환 기자 ( black@mediatoday.co.kr)
 
"우석훈이 변희재에게 낚였다." 20대 비정규직 문제를 다룬 베스트셀러 '88만원 세대'의 공저자인 우석훈씨가 변희재 실크로드 CEO포럼 회장의 실크세대론을 치켜세운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씨는 지난 14일 한겨레에 기고한 "20대 당사자 운동과 변희재의 실크세대"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변씨가 주도하고 있는 창업운동을 "우파 버전의 당사자 운동"이라고 평가하고 "386의 우리끼리주의를 깨고 새로운 당사자 운동이 생겨나길 바란다"고 밝혔다. "잘 하는 일", "건투를 빈다" 등의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변씨가 최근 조선일보에 기고한 일련의 칼럼에 따르면 실크세대는 "1970년대 이하 출생으로 386세대와 달리 인터넷과 대중문화를 기반으로 세계를 연결하는 새로운 실크로드를 열어나가는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를 말한다. 변씨는 "88만원 세대론을 폐기처분하고 실크세대론을 이야기하자"고 주장하면서도 386의 통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 이상의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실체가 모호한 개념인 셈이다.

문제는 변씨와 우씨가 88세대론을 실크세대론으로 물타기하면서,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씨가 변씨의 실크세대론에 말려들면서 88만원 세대가 제기했던 20대 비정규직의 문제가 386세대와 지금의 20, 30대와의 갈등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변씨는 조선일보 칼럼에서 "우 박사가 당사자 운동으로서 창업 아이템을 선택한 실크세대론의 긍정적 측면을 부각시켜준 것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고 밝히기도 했다.

변씨와 우씨의 기묘한 결합과 관련,
   
  ▲ 88만원 세대, 우석훈·박권일 공저 ⓒ레디앙.  
 
'88만원 세대'의 공저자인 박권일씨는 30일 레디앙에 기고한 "88만원 세대론, '조선' 독우물에 빠지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우씨의 글 때문에) 88만원 세대론은 이제 조선일보의 실크세대 기획의 '부록'으로 움직이게 될 가능성이 예전보다 훨씬 높아졌다"고 지적했다.

박씨는 "조선일보가 변씨의 실크세대론을 띄우는 이유는 20대 이하의 세대들이 자신이 처한 사회구조적 모순에 눈감아 버린 채 오직 386세대만을 증오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면서 "그런 식의 사고방식은 우리가 처한 문제를 결코 해결해 줄 수 없다"고 비판했다.

박씨는 "88만원 세대가 뚫어내야 하는 벽은 386세대 개개인이 아니라, 386세대가 싸우며 만들어냈지만 이제는 20대에게 굴레와 질곡이 되어버린 사회시스템"이라면서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88만원 세대론'은 단순히 세대끼리 싸움 붙이는 담론 외에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고 강조했다. 변씨의 실크세대론을 겨냥해서도 "'능력과 전문성도 없는 386세대'와 '무한한 잠재력과 전문성을 가진 젊은 세대'로 구별짓기하는 변희재식 세대론은 세대론이 아니라 차라리 변형된 인종주의에 가까운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박씨는 "고민스러운 건 '88만원 세대'를 가장 열심히 읽는 20대가 이른바 명문대생이란 점"이라면서 "정작 88만원 세대에 한없이 가까운 20대들일수록 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 "젊은층이 88만원 세대라면, 고령층은 50만원 세대"라거나 "세대간 갈등을 부추기는 우파 담론에 88만원 세대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이 책에 대한 비판을 소개하기도 했다.

박씨는 이 책이 "계급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세대론에 집중하다보니 세대 내부의 양극화, 20대와 50대에서 쌍봉형으로 나타나는 불안정노동과 같은 주요 문제들이 언급되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었다"고 지적했다. 박씨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일보와 변씨 등이 엉뚱한 실크세대론을 들고 나와 우씨를 끌어들인 것도 계급갈등을 세대갈등으로 치환하려는 노이즈 마케팅의 일환인 셈이다.
최초입력 : 2009-01-30 16:48:00   최종수정 : 0000-00-0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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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 페일리 : 진화론도 진화한다 지식인마을 1
장대익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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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생물선생님이셨다. 젊은 나이에 도전하셨던 사업은 보기좋게 실패했다. 동거동락을  하며 형제같았던 절친한 친구는 그나마 있던 몇 푼마저 훔쳐서 야반도주했다. 아버지는 백수 상태로 꽤 지냈다. 그리고 그 맘때 그의 첫아들이 세상에 나왔다. 외갓집에서 조금씩 분유값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촌에 새로 생기는 사립고등학교 교원모집을 보고 이력서를 냈다. 북한에서 내려온 자수성가한 이사장은 성실해보이는 사람이 고생하는게 딱해보였는지 취직을 시켜주었다. 그리고 몇 해 전 퇴직하시기 전까지 아버지는 한 학교에서 30년이라는 시간을 생물선생으로 지냈다. 교장 교감은 해보지도 못했다. 퇴직할 때 주는 이름 모를 훈장과 선심쓰듯 이름만 주는 교감 호칭만이 남았다.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 때 지구과학 선택이어서 생물선생을 아버지로 둔 덕을 그다지 보진 못했다. 나와 생물학은 내 아버지와 나의 거리만큼 가까왔지만 늘 강 건너 있었다.

 <과학동아>는 올해 첫 번째 기획특집으로 '다윈과 진화론'을 다루었다. 당연한 일이다. 올해는 다윈 탄생 200주년이 아니던가.  현재의 한국지질연구원 출신의 권영인 박사는 다윈의 비글호 항로기를 따라 탐사여행을 하고 있다. 그가 타고 있는 요트의 이름은 '장보고호'이다. 하여간 올해는 전세계적으로 다윈과 진화론에 대한 좋은 책들과 좋은 다큐멘터리들이 많이 제작될 듯 하다. 대중문화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이런 돈되는 아이템들을 놓칠 일은 거의 없다. <과학동아>에서는 몇 권의 진화론 관련 서적들을 소개했다. 이 쪽 분야에 문외한이라 메모를 들고 서점에 가서 한 권 씩 확인을 했다. 에른스트 마이어의 <진화란 무엇인가>는 작은 판형이 보기 좋았지만 책형태처럼 너무 딱딱해보였다. 데이빗 버스의 <욕망의 진화>같은 책들은 진화심리학에 대한 이야기이기때문에 지금 맞추고 있는 내 핀트와 맞지 않았다. 찰스 다윈이 쓴 <나의 삶은 천천히 진화해왔다> 도 아니었고, 결국 <종의 기원>을 뒤적이기도 했다. 그리고 결론은 " 쉽게 가자" 였다. 어차피 진화론에 코박을 것도 아니고 진화론의 내부논쟁에 달려들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생물학을 포함한 과학은 중요한 부분이지만 내가 독서하는 방향의 메인스트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동아>를 비롯한 여러 군데서 추천한 <다윈의 식탁>을 바구니에 넣었다. 하지만 <다윈의 식탁> 역시 내가 시작하고 싶은 출발선과는 조금 달랐다. <다윈의 식탁>의 메뉴는 '근대적 종합' 이후 진화론 내부의 4가지 주요 쟁점들이기 때문이다. <다윈의 식탁>과 이 책 <다윈 & 패일리>의 저자인 장대익은 논쟁의 4대 기둥을 '변이의 생성, 자연선택의 힘, 이타성의 진화, 진화의 속도에 관한 논쟁' 이라고 정리한다. 실제 <다윈의 식탁>은 가상 토론회 형식을 빌어 이 4가지 주제를 놓고 '도킨스 팀 vs 굴드 팀' 이 서로 으르렁거리게 만든다. (실제로도 이들은 으러렁 거렸던 듯 하다.) 결국 <다윈의 식탁>에 다윈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후예들은 우글거리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가장 만만해 보이는 <다윈 & 패일리>를 <다윈의 식탁>과 함께 계산대에 올렸다. 

<다윈 & 페일리>는 시간을 150여년전으로 돌린다. 다윈이 비글호를 타고 갈라파고스로 가기 이전에 흰색 출발선을 긋는다. 우리는 다윈이 '진화론'의 출발점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 이전부터 진화론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했었다. 물론 지배적인 것은 '창조론'이거나 '지적 설계론'이었다. 하지만 다윈이든 페일리든 용불용설로 다윈마저 걸려넘어지게 했던 라마르크든 모두 같은 질문을 고민했다. 위대하며 세대 유전되는 본원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 이렇게 정교한 기능을 가진 생명체들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세상사 모두 그렇지만 문제는 하나인데 답은 여러개로 나뉘었다. 페일리는 도킨스가 돌려치기 한 시계공의 비유를 들면서 '지적인 존재의 설계'를 주장한다. '창조론'과 '지적설계론'은 신학 논쟁에도 가끔 나오는 것인데 거칠게 그 차이를 말하자면 '설명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창조론을 강하게 주장하는 측에서 신의 영역은 불가지의 영역이다. 결코 '설명'의 영역이 아닌 믿음의 영역이다. 반면 신학 내부에서도 이를 지적인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종교전통이다. '지적 설계론'과 '창조 과학'은 신의 조각들을 가지고 귀납적인 설명을 통해 신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한다. 실제로 '창조론'과 '지적 설계론'은 같은 선상에 있다. 다만 그 표현방식에서 다른 논증을 택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이건 내가 거칠게 이해한 방식이다.) 

다이제스트판 책답게 <다윈 & 페일리>는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공적을 몇 가지로 정리한다. 첫번째 진화에서 자연선택의 중요성을 발견한 것. 진화의 패턴을 계단형에서 수목형으로 바꾸어 이해한 것. 그리고 성선택의 중요성에 대해 인지한 것이다.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은 아니지만 곰곰히 생각해 볼 수록 혁신적이다. 다윈이 20년 동안이나 <종의 기원>의 출간을 두고 끙끙거리고 또 여러차례에 걸쳐서 판본을 바꾼것이 단지 그의 소심함때문만은 아닐 듯 하다. 별 것 아닌 아이디어같지만 다윈의 생각은 세상을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보는 지평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진화심리학자여서 팔이 안으로 감겼다는 비판을 가할 수는 있지만 다니엘 대닛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아이디어를 준 사람으로 다윈을 꼽은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프로이트 덕분에 인간은 의식 영역 말고 빙산 아래 가라앉은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세계를 얻은 것이다. 그보다 더 실제적인 관점에서 다윈은 인간을 전혀 새로운 물질과 장구한 진화의 시간 위에 던져놓았다. 다니엘 대닛은 물질영역과 생명영역을 통합한 공이 인류 역사에 다윈이 준 선물이라고 말한다. 

<다윈 & 페일리>의 책 절반은 앞서 말한 다윈의 학문적 성과와 그에 바탕이되거나 영향을 받은 동시대인들의 상호관련성의 이야기를 다룬다. 다윈이 영향을 받은 지질학자 라이엘, 인구론의 멜서스, 사회진화론이라는 말을 말들어낸 스펜서 등등이 그들이다. 물론 다윈과 다른 지평에서 상호관계된 페일리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의 나머지 절반 부분은 '다윈 이후' 진화론의 분화와 관련된 것이다. 앞서 말한 진화론의 4대내부논쟁을 중심으로 이후 중요한 진화론의 범주 확장과 중심인물들을 다룬다. 크게는 '적응주의자'와 '반적응주의자'로 구분하여 구분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기적 유전자>의 도킨스, 집단유전학의 해밀턴, <마음의 진화>의 다니엘 대닛, <사회생물학>,<통섭>의 윌슨등이 전자이다. 반대쪽으로는 <풀하우스>의 굴드, <DNA독트린>의 르윈튼 등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다윈의 식탁>에서 조금 더 흥미진진하게 다루어진다.  

<다윈 & 페일리>는 입에 쏙 들어갈 크기만큼의 작은 주먹밥처럼 다윈을 이야기한다. 한 권 안에 진화론의 여러 주제에 대해 언급해야 하다 보니 다윈에게 약간의 양보를 요구할 수 밖에 없었던 듯 하다.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이나 최근에 나온 굴드의 <다윈 이후>가 어떨지 모르겠다.) <다윈의 식탁> 부록에 저자는 이 책이나 중고서점에서 상당히 싼 가격에 산 칼 짐머의 <진화>를 논쟁적인 진화론으로 들어오기 위한 에피타이저라고 말한다.(칼 짐머의 <진화>는 그렇게 에피타이저는 아니다. 설명은 평이하나 판형이나 분량이 부답스럽다.) 어쨋거나 에피타이저는 맛을 봤으니 이제 슬슬 포크를 들어볼까. 주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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