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 창비시선 286
문인수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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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다. 그렇다. 깃털같은 가벼움이며 진흙뻘 같은 육중함이다.  

 시는 아폴론의 눈길 피한 위대한 패잔병이다. 젊은 신의 눈길을 피한 시는 화살처럼 날카롭고 예리하다. 뜨겁다.성마르다. 그들은 성에 굶주린 전쟁터의 군인들 마냥 가슴에 대고 검붉은 인두를 꺼내든다. 불에 달군 인두다. 아니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이름모를 이의 피가 묻은 칼이다. 상처에 더 깊이 살을 밀어넣는다. 그것은 칼이다.또 살이다. 시는 남은 모든 육체성을 그대로 대상에 전한다. 그 때 우리는 잠시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불같은 고통이 빠져나갈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왼쪽 가슴 아래께'  온 깊은 통증은 여전히 쑤신다. 

문인수의 <배꼽>은 그렇다. 나는 작년에 이 시집을 여러번 펼쳐 읽었다. 하지만 리뷰를 쓸 수 있는 날까지 기다리다가 한 해를 훌쩍 넘겼다. 장마철에 읽은 시집을 다음해 장마가 시작되는 날 다시 편다. 아마 리뷰를 쓰지 못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하나는 시를 읽는 내 능력의 부족함일 것이다. 시인의 꾹꾹 눌러쓴 언어적 제련에 비교될 수 밖에 없는 자괴감때문일 것이다. 하나는 개념어로 펼쳐낼 수 없는 시의 직접성 때문이다. 시나 아포리아를 다시 글로 옮길때 마다 느끼는 내가 느끼는 묘종의 불편함이 있다. 그것은 비재현의 문법을 가진 음악을 글로 옮길때 느끼는 것과 유사하다. 물론 언어의 옷이라도 걸치고 있는 시나 아포리아가 낫긴 하다만. 이런 것들에 리뷰를 쓴다거나, 언어의 힘을 빌어 정리를 하고 나면 정들었던 물건들을 재활용센터에 보낼때 느끼는 만족감과 허탈함 같은 것들이 동시에 떠오른다. '탁탁탁 정리 끝. ok. 다음' 

문인수의 <배꼽>은 정말 여러번 곱씹어 읽어도 아깝지 않을 시집이다. 볼 때 마다 허공 한 구석을 보게 만든다. 읽을 때 마다 새어나오지 못하는 가라진 음성을 들어야 한다.  

 뇌성마비 중증 지체.언어쟁애인 마흔 두살 라정식씨가 죽었다./자원봉사자 비장애인 그녀가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조문객이라곤 휠체어를 타고 온 망자의 남녀친구들 여남은 명뿐이다....(중략) 

떠먹여주는 사람 없으니 밥알이며 반찬, 국물이며 건더기가 온데 흩어지고 쏟아져 아수라장 난장판이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정은 씨가 그녀를 보고 한껏 반기며 물었다. 

#@$&*&.......? (선생님 저 욱을 때도 아주실 거죠?)/ 그녀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왈칵,울음보를 떠트렸다.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   <이것이 날개다> p84-85

시인에게는 '잃어버린 세계'와 '폐허가 된 현재' 를 쇠사슬처럼 연결하고 있는 증표가 바로 '배꼽'이다. 배꼽이 없는 사람이 없듯이 우리 모두는 '얼룩말 가죽'같은 법원 앞 횡단보도를 아랑곳없이 건너는 '생사의 숱한 기로를 이제 흐릿하게 지우기도 하는' 모성의 세계가 있었다.  

저 할머니 이제/ 법이란 법 다 졸업한 '무법자'일까,신호등/빨간 불빛 따위 아랑곳없이/무인지경의 횡단보도에들어선다.까마득한/.....시꺼먼 길바닥이/문득 흰 젓 먹은 듯 고요하다. 풍금처럼 흐르는 모법이 있다.    <얼룩말 가죽> 중에서 p22-23  

모성의 세계,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그의 어머니를 형상화한 <뻐꾸기 소리>,<조묵단전>등에 반복되어 나타난다. 개인적으로 몇 해전 돌아가진 할머니의 작은 은비녀를 기억하는 나는 아흔 일곱에 미장원에 가서 파머를 한 작가의 어머니와 그리고 한 세기를 짊어져온 잘라진 머리 칼 속의 비녀를 '탈골'이라고 더듬는 대목에서 정말 '헉'이란 소리가 나왔다...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 단단한 비녀! 아 (  )탈골이다. <조묵단전> 비녀뼈 p99 

 작가는 두고 온 세계에 대한 일종의 우수같은 것이 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돌려 눈길을 보내는 곳에는 '웅크리고 있는','흉가'가 된 세상이 있다.  

삼켜버리고 싶은 과거는 맛이 없다.대개/거칠고 쓴데,저기/들어가 웅크리는 슬픔은 또/누구인지.언제/ 둥근 종소리 날까,/ 그렇게 깊이 날고 전소되겠다/  <흉가> p30 

마을 뒤, 산 밑에 오래 버려진 송산서원에서/ 나는 폐허에게 묻는다.이쯤에서 그만/풀썩 무너지고 싶을까./ 이것저것 깨묻는다.  <송산서원에게 묻다> p102 

작가에게 두 세계가 같은 고향을 같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단어가 '배꼽'이다. 어머니와 아들이 '배꼽'을 통해 연결되는 것이다. 땅에 사는 인간이라면 누구다 다 가지고 있는 '배꼽'. 사실 아이의 비릿한 탯줄을 자르기 전까지 나는 단 한번도 '배꼽'의 효용과 그 위대한 상징적 징표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다. 내가 스무번은 넘게 읽었을 '배꼽'과 관련된 아이의 동화책에는 그 상징적 징표에 대해 아주 명료하게 정의한다. 대충 기억에 의존해서 말해보자면'배꼽'은 '우리가 알에서 태어나거나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의 표시'이며 '엄마와 아빠의 사랑의 증표'라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배꼽'을 만들거나, '배꼽'을 자르는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연결의 시간을 후대와 갖지 못한 것은 모든 남성의 영원한 빈틈이다. (나는 나의 어머니와만 배꼽으로 연결될 뿐 나의 아들이나 딸과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위대한 여성이여!) 

외곽지 야산 버려진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매일 출퇴근한다/전에 없던 길 한가닥이 무슨 탯줄처럼/꿈틀꿈틀 길게 뽑혀나온다// 그 어떤 절망에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다/...... 사내는 아직 웅크린 한 채의 폐가다. <배꼽>p 47 

이제 어떤 해소가 남아 있는가? 세계는 그렇게 사랑으로부터 이미 멀길을 떠나왔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저 폐허의 집뿐이다. 이것은 열혈 청년의 비판의 도마 위에 올라야 하는 허무주의인가 비관주의인가? 차라리 철지난 낭만주의와 저속한 낙관주의가 더 가식과 자기 기만,자기 협잡 은 아닐까? 작가는 '송산서원'처럼 '대답하지 않는다.'  

차들이 검은 비닐봉지 하나를 연신 치고/달아난다/ 비닐봉지는 힘없이 떳다 가라앉다 하면서/찢어질 듯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지만 도통/소리가 없다. 연속으로 들이닥치는 무서운 속력 앞에/뒤에,두둥실/ 왠 허공이 저리 너그러운지.   <비닐봉지>p26   

오랜 세월 그리 심하게/몸을 비틀고 구기고 흔들어 이제 비로소 빠져나왔다, 다/왔다, 싶은 모양이다.이 고요한 얼굴/ 일그러뜨리며 발버둥치며 가까스로 지금 막 펼친 안심/창공이다. <이것이 날개다> p85 

"오늘 아침엔 경운기 시동이 참 잘 걸리네요."/ "그래,기분이 좋구만."/ 별다른 뜻이 없어도 오래 아프게 된 말/ 송사에 답사. 상가엔 꼭 상복을 입은 이별장면,별사가 따로 있다. <경운기소리> p19 

지금은 쓸쓸한 춘궁, 그래도 봄날은 올 것이며/씹어먹어도 먹어도/굽은 등 떠밀며 또 봄날은 갈 것이다. <동백 씹는 남자> p87 

작가는  다시 묻는다. 존재의 한 파편을 언뜻 바라본 자로서 다시 한 번 자신에게 사람들에게 묻는다. 마치 최승호의 시<북어>를 연상시키는 <도다리>란 시다. 

대형 콘크리트 수조를 자세히 들여다 보니/ 아, 겨우 알겠다/ 흐린 물 아래 도다리란 놈들이 납작납작 붙은 게 아닌가/......당신의 비애라면 그러나/바닥을 치면서 당장,솟구칠 수 있겠느냐,있겠느냐  <도다리>p32 

문인수의 <배꼽>은 -상투적이지만- '절창'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시들이 '물 반 고기 반' 처럼 득실거린다. 독거노인의 모습을 그린<꼭지>, "죽는 거시 낫겄어야,참말로" 라는 '절창'으로 끝나는 '절창'을 담고 있는 <만금이 절창이다>, '극약 같이 짧은 시'만 쓴다는 서정춘 시인에 대한 시들.시끌벅적한 생명을 노래하는 <녹음>,<봄>등등....어느 하나 '탈골'시켜서는 안될 시들이 가득하다.  

한해 딱 한 권의 시집만 읽기로 작정한 이가 있다면 문인수의 <배꼽>은 목록에 들어가도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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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집에서 TV를 잘 보지 않는다. 20대후반, 혼자 살 때 TV 없이 1년 반 정도 살았던 경험이 내게 큰 영향을 끼쳤다. 누구나 한 번쯤 시도해 봄직한 도전이다. 'TV끊고 살기'... 그런 경험은 평범한 시청자에게 매체에 대한 '낯설게 하기'효과를 발휘한다. 이후 다시 TV를 보더라도 그 TV는 그 이전의 TV와 다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를 직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차선책으로 '부정의 부정'을 통해 이해라도 해야한다. 결국 다시 돌아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어도 이제 그 산은 그 산이 아니며 그 물은 그 물이 아니다. 

나는 TV가 완전히 바보상자라고 생각치는 않는다.  'TV=바보상자' 라는 도식의 의미를 알고 거기서 또 시작해야 하지만 그 명젱 완전히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제 내가 놓친 다큐멘터리는 내가 매력을 느끼는 주제들이다. <걸어서 세계여행>만큼이나...  

한국방송에서 5부에 걸쳐 방영된다. 이 사진은 일리야 레핀의 <볼가강의 뱃사람들>을 연상시키는 구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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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약 어느 작가가 최규석의 <섭씨 100도>를 살을 덧대어 소설로 썻으면 어땟을까?  

사람들은 그 책을 지금처럼 좋아했을까?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는 내가 대학다닐때 필독서처럼 읽혔다. 인간의지의 아름다움과 해방의 희망에 대한 숨결. 다시 쓰러져도 일어날 모든 어머니와 아들들에 대한 동경... 
 

이젠 아무도 <어머니>를 읽지 않는다. 

2. 결국 <섭씨 100도>같은 책이 열광적인 지지를 '단 하나도 누락됨 없는 별다섯'일 수 있는 것은 '시대적 징후'다. 사람들은 이 책을 보며 민주주의를 다시 살려낸 지난 기억을 떠올리거나 학습하여 현재의 유용성을 구한다. 어떤 이는 그 시기를 살았던 '자기'를 복원하고 어떤 이는 새로운 각성을 위한 '자기'를 구성한다.  

정말 때아닌 '리얼리즘' 문학의 재개와도 같다. 이 모든 것들이 그 분이 돌려놓은 시계 때문이다.  역사란 그런 지그재그 운동의 반복이지만 우리가 그 때와 같을 필요는 없다. 다시 돌아갈 지점이 '87체제'라면 우리는 너무 작은 꿈을 꾸는 것이고, 민주주의의 완성이라면 요원한 길이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래 생텍쥐베리의 <인간의 대지>에 나오는 말 처럼 " 나를 살린 건 앞으로 나아간 그 한 걸음이야" ,"언제나 우리는 그 한 걸음으로부터 시작하는 거야" 일 것이다. 그게 전부다. 그게 끝이다. 무슨 거대한 진리의 성취,진실과 함께 하는 발걸음...뭐 그런 거 없다. 나는 그런면에서 과격한 자기회귀,동어반복적 구호로  타자로부터 인정 받고자 하는 욕구가 크게 의미없다는 생각이든다.  

3. 나는 평소 386세대-이 세대적 규정의 협착성도 이 단어를 쓸 때마다 부록처럼 꼭 쓴다-를 비판하는 쪽이었는데, 촛불 시기에 하도 386식 운동방식과 '다름'을 강조하는 일종의 불연속성에 대한 과잉상찬에 386의 역사적 의의를 칭찬한 적이 있다. 386에 대한 내 태도는 지금도 둘 다 유효하다. 

4. 최규석의  <섭씨 100도>를 서점에서 사려고 갔다가 다행히 비닐커버 없는것이 있어서 대충 앉아서 읽어봤다. 서점에 사람도 많지 않아서 좋았다. 책 뒤에는 v도 나오더라. ... ... 이 책은 정말 시대적 퇴행의 '징후' 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역사적 내러티브와 이제는 진부해보이는 인물을 형상화시키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2009년에 만난 '80년대의 재래'다) 이 런 이야기가 다시 읽히고 공감을 끌어낸다는 것이 현재 이 정부가 시계를 어디까지 돌려놓았는지 알수 있게 하는 바로미터다. 

시대배경은 다르지만 유머의 요소를 잃지않았던 영화<스카우트>방식. 영화<스카우트>를 보지 않으신 분이라면 재미있는 영화이니 한 번 보시길... 

그런데 <섭씨100도>는 내가 대학다니던 시절에 익숙한 정공법을 택한다. 이것이 참으로 역설적인 '징후'라는 것이다.  

5. 내 앞자리에 앉은 직원에게 묻는다. " 언제 태어났어?" "87년이요" .그래. 그렇다. 이 책은 그런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 88올림픽의 굴렁쇠 소년을 알지 못하는 세대.그 세대와의 소통의 단초가 되어줄 수 있을까. 그들에게 어떤 관심을 불러 일으킬 수 있을까? 그런 염원이 싹쓸이 별 다섯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  

6. 사실 <섭씨100도>의 이야기보다 그 이야기가 소환하는,그리고 그에 응하는 개인들의 이야기가 곁들여진 리뷰가 훨씬 흥미롭다. 

7.결국 <섭씨100도>를 사진 않았다. 대신 오늘 노조 집행부 회의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경남 진주사람...뭐 이런 대목이 오고가다가... 최규석의 이야기와 만화책 이야기를 해주었다. 위원장보고 노조 도서구매비로 한 권 사놓으시라고 말했다.   

8.나는 그 전에 나온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쥬>를 사려고 했는데 그 큰 서점에 그 책이 없었다. 끙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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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지음 / 산책자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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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나는 로쟈를 만났다. 일반적 용어로 '만남이라 하기엔 부족하지만 또 스쳐 지나갔다고 하기엔 너무 가깝다.' (<로쟈의 인문학서재> 리뷰를 쓰기 전에 그와의 개인적 인연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을 이해하시길...) 

나는 1년에 두 서너번 쯤 서울에 간다. 지난 해도 그랬다. 잔설이 군데 군데 남아 있는 겨울, 모 대학 캠퍼스에 들를 일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 오래여서인지 퇴행적 낭만성에 시달렸다. 입시전쟁에 시달릴 때, '대학 홍보달력'이 주던 캠퍼스의 판타지같은 것을 말한다. 달력은 매 달마다 모의 고사를 치뤄야하는 아이들에게 매 달마다 아름다운 판타지로 말을 건다. '조금만 더 참아라. 조금만 더 견뎌라. 저기 가면 자유와 사랑과 젖과 꿀이 흐른다.'  판타지는 과잉된면이 있지만 순간적으로 견딜 수 있는 힘을 주기도 한다. 내가 로쟈를 만난 그 날도 판타스틱한 겨울 캠퍼스만큼은 아니었지만 내게 꽤나 낭만적으로 보였다. 이미 나를 떠난 공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습기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기 마련이다.  

이래 저래 습기 '촉촉' 할 수 있는 날이었다. 대학 강의동 앞을 지나고 있었다. 멀리서 '중용적'인(중년의 치고는 날씬한) 몸매의 한 사람이 양손에 복사물을 잔뜩 안고 걸어오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겨울학기 강의 뛰는 강사 양반처럼 보였다. 그의 걸음은 경쾌했다. 거리가 가까와 지면서 나는 '어..어디선 본 듯 한 사람인데?" 하는 생각을 했다. 나의 뇌가 파편적으로 시신경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데이터 베이스 속에서 분석하고 있는 동안, 그는 내 곁을 지나갔다.  벌건 대낮에 나의 '래피드 아이 무브먼트'를 알아차린 것일까, 코가 닿을 만한 거리에서 그가 나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게 끝이다. 그와의 만남의 전부다. 뭔가 드라마를 기대했다면 조금 실망스럽긴 하겠지만 나로서는 흥미로운 기억이었다. 나는 그 때까지 아직 몽타주 분석작업을 마치지 못했거나 아니면 마쳤더라도 확신하지 못했다. 대학 강의동으로 돌아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몇 번 더 바라보면서 나는 그가 '로쟈'임에 왠지모를 확신이 들었다. 전도연처럼 손나팔을 만들고 "저기요...혹시 로쟈님 아니세요?" 라고 불러볼까도 생각했다. 충분히 들릴 거리였고, 그 날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어도 무방한 햇볕이 은은한 겨울날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1년에 서너번 서울에 올라가고 그 날 따라 안가던 대학 캠퍼스를 가게 되었고, 로쟈는 하필이면 그 때 도서관에서 복사물을 가지고 그 앞을 지나갔다.  

실증적으로 보자면 평범한 시선교차다.  1초도 되지 않는 순간의 시간이다. 하지만 불교적 의미로 우연이 맺어지는 경우의 수를 생각하면 그 찰나는 거대한 부딪힘으로 변용된다. 물론 그걸 통해 실제적으로 내가 얻은 것은 별로 없다. 하지만 그런 만남의 경험도 '만남'일 수 있다는 가능성의 만개감같은 것은 수확이다..그와의 단순한 인사가 주는 효용대신에 내가 얻고자 한 것은 이것이다. 일종의 '반시간성'. 어색함과 반가움이 공존하는 만남의 기회비용으로 값어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의 저자 로쟈(이현우라는 본명보다 이게 더 익숙하다.)는 겸손하게도 스스로를 '곁다리 인문학자'라고 칭한다. 저자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마당이니 종국에 '현고학생부군'의 이불을 덮게 될 나같은 독자는 '곁다리 독자'라고 하는게 마땅하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리뷰란 것도 '곁다리 인문학자'의 생각을 훔쳐본 '곁다리 독자'의 감상 정도 되는것이다.(세상은 '현고학생부군'이 만드는 것이고, 결국 우리는 <선언>의 진부함을 돌려내 '만국의 곁다리 독자여 단결하라.!!'라고 외칠 수도 있을 것이다.) 

<로쟈의 인문학서재>에는 그동안 로쟈가 '저공비행'하면서 지상에 떨어뜨린 작은 꽃다발들이 가득하다. 그의 격납고가 있는 알라딘은 그의 사상의 고향은 못되도 비행기의 집은 될 수 있다. 덕택에 알라딘의 주민들은 그의 '저공비행'을 밭일 하면서 또는 아이를 유치원보내면서 쉽게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그가 새벽안개 속에 입김을 내뿜으며 발진하는 모습이나 붉은 황혼을 뒤로하고 털털거리는 기체를 몰고 돌아오는 모습들은 알라딘 마을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다. 그의 비행기가 좋은 점은 주민들의 민원이 발생하는 '굉음'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아주 '친환경적'이다.) 누가 비행기 주변에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면 조종사는  만져보라고 이야기할 뿐, 과잉 친절도 과소 관심도 없다. 그 적절함은 격납고와 그의 비행기를 바라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조종사의 노련함 때문일지 아니면 소심함때문일지 그는 묵묵히 비행에 전념을 하고 꽃다발을 날리고 또 그에 보람을 느끼는 듯 하다.(그가 종국에는 본인이 원하는 곳에서 개인연구실 하나 얻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비록 '저공비행'은 예전만큼 자주 못하게 되더라도.)  

 개인적으로는 종이로 만들어진 <로쟈의 인문학서재>에서 그를 알게된 2006년 이전의 글들이 여럿 수록되서 좋았다. 책 전체에 '로쟈식 유머'가 많이 묻어 있지만 최근에 인터넷에 오르는 그의 글보다 과거 글에서 그런 '웃음'과 '비틀기'가 자주 등장하는 듯 하다.  <로망스와 포르노>라는 글에 등장하는 이런 대목들을 보자. 

좀 오버해서 말하자면, 에로영화적 관점에서 80년대는 '애마부인'의 시대였고, 90년대는 '젓소부인'의 시대였다.... <젓소부인>을 특징짓는 건 '포만감'이다. 그 포만감을 이 시리즈는 노골적이고 조야한 수준으로까지 전시한다.(이 정도 사이즈에도 만족 못 하겠느냐?!)...<애마부인>의 관객들이 대개 극장에서 '공동으로' 영화를 보았다면(욕망의 죄의식의 공동체!),<젓소부인>의 관객은 대부분 밀폐된 비디오방에서 혼자 보는 경우다. <로쟈의 인문학서재> p141 

 <애마부인>을 부모들이 일나간 친구의 집에서 훔쳐보고 <젓소부인>을 다른 테잎 두 개 사이에 끼워서 빌려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키득거리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었다. <로망스와 포르노>라는 글은 '포르노의 시선은 전체주의적 시선이다'라는 왠만한 사람들은 모두 아는 그런 내용을 중심으로 카트린 브레야의 영화와 지젝의 비평 사이를 오고 간다. 로쟈는 그러면서 슬쩍쿵 하고 '선정적'이라는 단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한국 사회의 기묘한 모순에 대해서도 일갈을 가한다. 오히려 '선정적인 것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말이다. 

'이 삶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을 통해 니체가 외친 반형이상학적 주장을 '이게 다에요!' 라는 '아줌마철학'의 세속성으로 풀어낸 대목도 읽는 내내 미소 짓게 만든다. 저자는 <늙어가는 느릅나무들>이라는 짧은 글을 통해서 니체를 중심으로 한 철학사의 전환대목을 유머러스하게 풀어간다. 만약 이것을 학술적인 방식으로 설명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분기점을 설명하고 각각의 이론적 쟁투를 '학술적으로 표현'하려면-과연 누가 대중들이 읽게 될지 모르겠으나-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소용돌이에 잠긴 종이배처럼 아득하다. 하지만 로쟈는 다분히 유머러스한 문학적인 결론을 통해 이를 화해시킨다. 이미 슬글슬근 이야기는 다 끝냈다. 결론이 이렇다. "우산 셋이 나란히,티격태격 걸어갑니다." "느릅나무는 다형질적이다.다형질적 조합이다. 여럿이 나란히 제각각 살아남는 느릅나무들" 이라고 말이다. 이 말 뒤에 로쟈는 다시 뒤에 인용되기도 하는 '몰락하는 자'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론 4장에 나오는 말이다.(4장에는 하여간 멋진 아포리아들이 많다. 니체가 다그렇긴 하지만)  나는 -추측이긴 하지만-이 말이 후기에 나오는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와 함께 현재 로쟈의 인간에 대한,학문에 대한,인식에 대한 어떤 자세를 읽게 해주는 문장이라고 생각하는 바 ( '-는 바' 는 내가 단 한 번도 쓴적이 없는 어투이고, 로쟈는 틈틈이 쓰고 있는 어투여서 재미있게 생각되었다.) 그대로 인용한다,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말로 저기 저편으로 건너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p 222. 

사람도 두 다리가 있으니 교량일테지만 '왜 몰락하는자'여야하는 지는 각자 생각해 보면 되겠다. 로쟈는 '어깨 결림'이란 말로 또 '닭'이라는 말로 이야기한다. 

구원도 해탈도 아닌 막막한 걸음걸이,우리는 모두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 막막함을 함부로 제멋대로 제 편한 것으로 바꾸어버리지 않고 그 길을 끝까지 가는것. <로쟈의 인문학서재>p20- 이성복,<세상과의 연애>재인용 

 내 조촐한 생각에 '눈 뜬 자들의 근대적 계몽의 오만'은 다시 찾을 때 찾더라도 잠시 잊어주어야 '몰락'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주제 사라마구가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하얀 세상'을 만든 것을 나는 다분히 지젝의 실재계로 받아들였다. 그곳은 경계가 없는 백색의 허구이다. 진실은 그렇게 하얀 것일 지도 모른다.  눈을 뜨고 있을 때 더 많이 걸려 넘어졌다는 리어왕의 독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그리고 이런 개념을 '야만으로 가자는 말인가?'..그렇다 알레고리로 '야만인을 위하여' 이기도 하다만- 계몽으로 굳어진 마음의 짐을 잠시 내려두어도 좋다. 

로쟈는 하이데거의 '현존재'라는 유명한 개념을 비틀어, 문학적으로  "우리는 '거기에 깨어져 있음', 그러게 '널브러져 있음' 그렇게 '찌그러져 있음'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냐구, 도대체 어디서 희망을 찾느냐구?' 라는 질문에 -나는 반어적이긴 하지만 긍정적으로 이해했는데- '그래도 모두 '선팅'을 해 비가 와도 반짝인다.' 라고 말한다. 과격하게 말하자면, '신이 없어도 안죽는다.' '희망적이지 않다고 절망한 것은 아니다.' '이데아적 목표가 없어도 우리는 헤쳐나갈 수 있다.' 이른바 '틈'이다. 경계이다. 그곳에서 해방의 싹이 보일지도 모른다. 하여간 목표달성-과업수행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해봄직하다. 우리의 철학적 실천이란 것이 '목표달성-과업수행'의 직선적 세계관에서 얼마나 벗어날 수 있는지 말이다.   


내가 크게 박장대소한 표현은'자명종-벤야민'에 대한 이야기에서이다. 먼저 로쟈는 벤야민의 '충격'개념을 이야기한다. '충격'은 벤야민에 대한 브레히트의 영향력일 것으로 보는게 지배적인 듯 하다. 벤야민은 '충격을 위한''깨어남'을 위한 자명종이 되길 바랬다는 것이다. 그런데 벤야민에게는 현실의 강적이 있었다. 바로 히틀러다. (벤야민의 육신은 결국 히틀러의 산을 넘지 못한다.)현실은  벤야민의 기술 문명에 대한 혁명적, 긍정적 해석에 반하여 일어난다. 괴링과 히틀러 역시 대중을 깨우고 있는 것이다. 당시 '독일이여 깨어나라!' 가 나치즘의 슬로건이었는데 벤야민의 '예술의 정치화' 대신 '정치의 미학화'가 지배적인 현상으로 드러난 것이다. 로쟈는 여기서 벤야민-히틀러의 대립을 '자명종-벤야민'과 '확성기-히틀러'로 표현한다. 간단한 표현이지만 함축성이 크다. 실제 역사적 파괴력을 보더라도 적확하다. 대중은 시계종소리보다 확성기 소리에 즉각적으로 반응했기 때문이다. 양자의 공통점은 이후 많은 학자들을 먹여살렸다는 것이다. 

<로쟈의 인문학서재>에는 문학,예술,철학,번역 비평등이 소개된다. 각각의 글들을 통해 해박한 지식과 자기해석을 거친 설명들을 만날 수 있다. 거기에 앞서 말한 유머러스함은 서비스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이미 로쟈의 글쓰기의 범주와 스타일에 대해 어느 정도 사전 지식이 있는 사람일게다. 난이도에 대해서는 알아서 판단을 하면 된다. 내가 보기에 '대학 신입생에게 추천하는 책 '이라는 어떤 신문의 서평 기사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가 대학생들을 무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대학생들의 수준이 내가 졸업한 후 꽤나 높아졌는지-오래전이니 가능성도 있겠다만-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실제 이 표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상적 궤적들이 이 책에는 줄줄줄 흘러나온다.(왼쪽부터 쓰기를 기본으로 사진순서를 이해하면 '지젝에서 시작해서 라캉'으로 끝난다. ^^ ) 특히 로쟈는 '지젝'에 대하야 아애 한 챕터를 할애했다. 주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지젝이 만난 레닌>,<이라크> 등을 1차 텍스트로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지젝이 기대고 있는 몇몇 라캉의 개념들과-로쟈는 이를 비유를 통해 비교적 쉽게 말하긴 한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정치,사회,철학적 베이스가 없으면 '딴나라'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릴 수 도 있다. (미용사의 판타지를 위해서도 우리는 상상계,상징계,실재계를 알아야된다.)  

 로쟈는 책의 시작에서 '당신에게 클래식이란 무엇인가?' 라며 '인문학으로의 초대'로 살짝 유혹하지만 실제 '인문학'은 -모든 일이 그렇듯이- '경험축적'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바둑에 비유하면 좋을 것 같다. 바둑을 둔다고 모두 이창호나 이세돌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 대신 바둑의 포석을 알고,싸움의 기술을 알고,묘수풀이를 '아하'하면서 신통방통해 할 수 있어야 '바둑TV'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참고로 내게 '바둑TV'는 그저 컬러로 방송되는 '흑백TV'이다.) 인문학도 부산말로 '내나 마찬가지다.' 고로 초대는 달콤하지만 초대 이후는 산행길이 될 수도 있다. 쉽지 않은 길이다. 제대로 학문하는 사람들은 알피스트가 되어야 한다. 장비를 갖추고 전문적 훈련을 받고 정상의 쾌락을 위해,또는 밥벌이를 위해 '입을 틀어막고 우는 울음'을 참고 간다. 대개 그들은 말이 좋아 전문인이지 비정규직 생활을 오래 해야한다. 하지만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것만이 '산'을 느끼고 아는 것은 아니다. '낮은 산이 좋다'는 말처럼 조금의 인내와 피로를 즐거움으로 여기며 산을 완상한다면 이것도 즐거움이고 깨달음이 돨 수 있다. 그리고 그 숲 어디에선가 우리가 '인문학적 상상력'이 가져다 주는 해방감을 만끽하고, 우리 세계를 조금 다르게 이해하고 또 조금 나아지게 만든다면 도전해 볼만한 산행이 아닌가.^^ 그런면에서 로쟈는 분명 젊은 프로 산악인이지만 또한 동네에서 만날 수 있는 주말 등산가이드이기도 한셈이다.

지금까지 곁다리 인문학자의 책을 즐겁게 읽은 곁다리 독자의 리뷰였다.  

P.S) 아..격납고 주변인의 요망사항은...로쟈님이 이 책으로 돈방석에 앉았으면 좋겠다는 것. 열쇠는 역설적이게도 이명박이 쥐고 있다. 부디 이명박 장로가 눈길 한번주시길. 월스트리트도 좋아한다는 마르크스도 아닌 레닌이 여기에도 있는데 왜 여긴 눈길 한 번 주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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