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약 어느 작가가 최규석의 <섭씨 100도>를 살을 덧대어 소설로 썻으면 어땟을까?
사람들은 그 책을 지금처럼 좋아했을까?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는 내가 대학다닐때 필독서처럼 읽혔다. 인간의지의 아름다움과 해방의 희망에 대한 숨결. 다시 쓰러져도 일어날 모든 어머니와 아들들에 대한 동경...
이젠 아무도 <어머니>를 읽지 않는다.
2. 결국 <섭씨 100도>같은 책이 열광적인 지지를 '단 하나도 누락됨 없는 별다섯'일 수 있는 것은 '시대적 징후'다. 사람들은 이 책을 보며 민주주의를 다시 살려낸 지난 기억을 떠올리거나 학습하여 현재의 유용성을 구한다. 어떤 이는 그 시기를 살았던 '자기'를 복원하고 어떤 이는 새로운 각성을 위한 '자기'를 구성한다.
정말 때아닌 '리얼리즘' 문학의 재개와도 같다. 이 모든 것들이 그 분이 돌려놓은 시계 때문이다. 역사란 그런 지그재그 운동의 반복이지만 우리가 그 때와 같을 필요는 없다. 다시 돌아갈 지점이 '87체제'라면 우리는 너무 작은 꿈을 꾸는 것이고, 민주주의의 완성이라면 요원한 길이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래 생텍쥐베리의 <인간의 대지>에 나오는 말 처럼 " 나를 살린 건 앞으로 나아간 그 한 걸음이야" ,"언제나 우리는 그 한 걸음으로부터 시작하는 거야" 일 것이다. 그게 전부다. 그게 끝이다. 무슨 거대한 진리의 성취,진실과 함께 하는 발걸음...뭐 그런 거 없다. 나는 그런면에서 과격한 자기회귀,동어반복적 구호로 타자로부터 인정 받고자 하는 욕구가 크게 의미없다는 생각이든다.
3. 나는 평소 386세대-이 세대적 규정의 협착성도 이 단어를 쓸 때마다 부록처럼 꼭 쓴다-를 비판하는 쪽이었는데, 촛불 시기에 하도 386식 운동방식과 '다름'을 강조하는 일종의 불연속성에 대한 과잉상찬에 386의 역사적 의의를 칭찬한 적이 있다. 386에 대한 내 태도는 지금도 둘 다 유효하다.
4. 최규석의 <섭씨 100도>를 서점에서 사려고 갔다가 다행히 비닐커버 없는것이 있어서 대충 앉아서 읽어봤다. 서점에 사람도 많지 않아서 좋았다. 책 뒤에는 v도 나오더라. ... ... 이 책은 정말 시대적 퇴행의 '징후' 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역사적 내러티브와 이제는 진부해보이는 인물을 형상화시키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2009년에 만난 '80년대의 재래'다) 이 런 이야기가 다시 읽히고 공감을 끌어낸다는 것이 현재 이 정부가 시계를 어디까지 돌려놓았는지 알수 있게 하는 바로미터다.
시대배경은 다르지만 유머의 요소를 잃지않았던 영화<스카우트>방식. 영화<스카우트>를 보지 않으신 분이라면 재미있는 영화이니 한 번 보시길...
그런데 <섭씨100도>는 내가 대학다니던 시절에 익숙한 정공법을 택한다. 이것이 참으로 역설적인 '징후'라는 것이다.
5. 내 앞자리에 앉은 직원에게 묻는다. " 언제 태어났어?" "87년이요" .그래. 그렇다. 이 책은 그런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 88올림픽의 굴렁쇠 소년을 알지 못하는 세대.그 세대와의 소통의 단초가 되어줄 수 있을까. 그들에게 어떤 관심을 불러 일으킬 수 있을까? 그런 염원이 싹쓸이 별 다섯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
6. 사실 <섭씨100도>의 이야기보다 그 이야기가 소환하는,그리고 그에 응하는 개인들의 이야기가 곁들여진 리뷰가 훨씬 흥미롭다.
7.결국 <섭씨100도>를 사진 않았다. 대신 오늘 노조 집행부 회의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경남 진주사람...뭐 이런 대목이 오고가다가... 최규석의 이야기와 만화책 이야기를 해주었다. 위원장보고 노조 도서구매비로 한 권 사놓으시라고 말했다.
8.나는 그 전에 나온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쥬>를 사려고 했는데 그 큰 서점에 그 책이 없었다. 끙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