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회사 자료실에서 <한겨레21>과 <시사인>을 본다.  

바쁜 주는 그냥 타이틀만 볼 때도 있고, 또 시간이 좀 있으면 관심 기사를 대략 훑는다. 오늘은 우연히 노조 사무실에 갔다가 놓친 8/8 <시사인> 을 봤다. 요즘 특집으로 <이명박시대를 제대로 보는 법>을 연재하는가 보다. 그 중 한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1년전쯤 부터 간간히 말했던 것들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알라딘에서도 나는 그런 부분이 내심 못마땅했지만, 분노의 내용에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더이상 말을 하진 않았다. 다만 '욕은 나도 누구보다 잘할 수 있다....' 에서 말줄임을 하고 말았다. 나는 '거리투쟁의 어휘'로는 이런 용어들을 긍정한다. 하지만 그것이 인식의 기저가 되거나, 그렇게 자기 만족이나 비관적 분노에 빠지는 상황을 우려를 한 것뿐이다. 

회사에 있는 모직원은 '욱의 대마녀'이다. (그런데 진짜 나도 욱은 잘한다.)   며칠 전에는 또 '씩씩'거리기에...왜 그러냐고 물었더니...조갑제라는 썅....'한 참을 어처구니 없다는 욕을 했다.  

그녀의 진보적 오버에 언젠가 한번쯤 이야기하고 싶었던 차에..."근데요....조갑제 같은 인간들의 글을 보면 아직도 흥분이 되고 그래요." 라고 해버렸다. 그녀의 자기구성적 오버가 눈에 거슬렸기때문에 좀 직접적으로 들이댄거다. 그녀는 좀 머뭇거렸지만 여전히 식식 거렸다.

그녀는 욕지거리를 해야지 분노하는 줄 알고, 욕지거리를 해야지 진보적 행위를 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당신 2중대군..."이라고 할 욕지거리가 들린다.

<시사인>의  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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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는 소수보다 ‘현실 꿰뚫는’ 수백만의 눈빛을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 담론이 쏟아진다. 하지만 그 엄청난 비판의 양과 강도에 비해 이명박 정부는 아직 멀쩡한 듯 보이고, 비판 주체도 의미 있는 정치적 실익을 얻는 것 같지 않다. 혹여 비판의 방향이나 설득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99호] 2009년 08월 03일 (월) 14:49:20 고동우 기자 intereds@sisain.co.kr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강행 처리는 마침내 ‘정권 퇴진’ 요구까지 불러왔다. 집회 현장의 즉흥적인 구호 수준이 아니라 엄연히 민주노동당과 언론노조 등 유력 단체의 공식적인 결의 사항이다.
하지만 실제로 정권이 스스로 물러나거나, 아니면 ‘민중의 힘으로’ 정권이 곧 무너지리라 예측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민주노동당 관계자도 “정말로 퇴진시키겠다는 생각보다는 지금 투쟁 국면에서 뭔가 확실한 차별성을 보여주겠다는 지도부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민주당은 물론이고, 또 다른 진보 정당인 진보신당이 함께 퇴진 투쟁에 나서지 않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보신당의 한 관계자는 “실현 가능성이 낮은 것도 문제지만, 국민이 과연 진보 진영만큼 현 국면을 심각하게 보느냐, 정권이 퇴진해야 할 만한 사안으로 보느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자칫 잘못하면 진보 진영이 대중의 신뢰를 잃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패배감만 확산시킬 수 있다”라고 ‘현실적인 고민’을 전했다.


   
진보 진영은 ‘독재 정권 퇴진’ 구호까지 외치고 있다. 7월5일 야4당과 시민사회단체 공동집회의 한 장면.
사람을 ‘흥분’시키는 비판만 넘쳐


사실 퇴진 구호의 등장은 그간 진보·개혁 세력이 줄기차게 제기해온 ‘독재’ ‘파쇼’ 담론의 필연적 귀결이라 할 것이다. ‘상식’대로라면 이런 성격의 정부와 ‘타협’이란 없으며, 오직 무너뜨리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다.

물론 이러한 비판에는 진정성이 없지 않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이명박 정부의 잘못을 더욱 강하고 선명하게 드러내려는 담론으로서,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며 좋은 세상을 향한 열망 같은 것도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는 게 박 대표의 견해다. 그는 “‘독재’ ‘파쇼’라는 비판은 사회를 선과 악으로 양분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정의로운 전쟁’에 나서도록 흥분시키는 담론이다. 그러나 사람은 늘 열정적으로, 흥분한 상태에서 살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꼭 필요한 시기에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도록 호흡 조절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경고한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증오와 뭔가 크게 ‘한판 승부’을 벌여 단박에 뒤집으려는 욕구가 너무 지나친 나머지, 진보·개혁 진영은 대중을 ‘동원’하려는 주장만 주로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실제 얻을 수 있는 게 뚜렷하지 않거나 희생만 커질 때 대중은 진보·개혁 진영에 등을 돌릴 수밖에 없으며 냉소주의 또한 커져간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변화가 일상적 시기에도 꾸준히 실천될 수 있도록 열정의 휘발성을 보완해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체제를 움직이는 힘의 구조와 작동 방식에 대한 합리적 이해가 깊어져야 한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정신적 스승으로 잘 알려진 사회운동가 사울 D. 알린스키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바 있다. “노여움과 이타심에 넘치는 분노는 사람을 움직인다. 하지만 이것들은 부정적 힘이기 때문에 오래 가지 못한다. 이성적으로 다다른 결론과 거기에 근거한 결단, 그리고 정치적 전망과 연결된 이념은 사람의 끈기를 더 오래 지켜줄 것이다.”


   

ⓒ청와대제공재벌과 보수 언론의 권력을 약화시키지 않는 한 ‘이명박 때리기’는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 지난해 9월 재계 총수와 만찬을 하는 이명박 대통령공.
‘독재’ ‘파쇼’ 같은 비판 담론이 가져올 수 있는 더 큰 문제는, 의도와 상관없이 우리가 대면해야 할 ‘진짜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점이다. 가령 미디어법의 경우를 보자.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들은 ‘재벌과 조·중·동의 여론시장 장악’을 걱정하고 심지어 “한나라당은 재벌과 조·중·동의 꼭두각시”(민주당 논평)라고 공격하지만, 정작 재벌과 조·중·동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나 이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위험성에 대한 여론화, 어떻게 제어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대안 제시 같은 것은 거의 내놓지 않고 있다. 오로지 비판의 타깃은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 맞춰져 있고, 국민은 이들의 ‘독재’에 맞서 분연히 떨쳐 일어설 것을 요구받는다. <시사IN>이 지난 7월 한 달 동안(1~27일) 민주당·민주노동당·진보신당이 낸 미디어법 관련 성명과 브리핑 113건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재벌과 조·중·동에 대한 의미 있는 문제의식을 드러낸 것은 5건에 불과했고 그나마 내용도 충분한 수준은 아니었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은 어찌할 것인가


민주노동당 중앙당의 한 간부는 이 같은 지적에 대해 전문성의 부족과 시야의 한계를 원인으로 꼽았다. “굳이 언론에 맞서지 않으려는 정치인의 심리가 반영된 것도 있겠지만, 그렇게 넓고 깊게 사안을 볼 수 있는 시야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일단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 위주로, 뭔가 시급하게 행동을 촉발할 수 있는 방향으로 비판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 12월 조·중·동을 규탄하는 언론노조 조합원들(위).
그러나 이러한 ‘한계’가 쌓이고 쌓였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부정적인 효과는 생각보다 훨씬 커 보인다. 재벌과 조·중·동이 가진 권력은 방치한 채, ‘선출된 권력’만 비판하고 무너뜨리려 할 경우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김윤철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의 말이다.

“우리는 얼마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의해 ‘선출된 권력’이 실제 죽음을 당하는 현실을 목격했다. 이명박 대통령이라고 이들로부터 자유로울까? 대기업에 투자 좀 해달라고 읍소를 하고 또 해도 말을 안 듣는 게 재벌 아닌가? 아무리 밉더라도 어쨌든 이 대통령은 민주주의 제도 내에 존재한다. 모든 문제가 선출된 권력에 있다는 식으로만 비판하면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대중의 회의는 더욱더 깊어질 것이다. 정권은 되찾을 수 있을지 몰라도, 선출되지 않은 권력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막강해져 있을지 모른다.”

미디어법과 함께 통과된 금융지주회사법에 대한 야당의 대응만큼 진보·개혁 진영의 현실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없는 듯하다. 모든 야당이 미디어법에만 주력하느라 이 법은 몇몇 정치인 외에 거의 거들떠도 안 보는 형편인데, 알다시피 대기업의 은행 소유를 허용해 재벌의 ‘경제 권력’을 한층 더 강화해주는 법이다. 언론시장에서 영향력 확대만 견제하면 됐지 경제 권력은 더 세져도 상관없다는 것일까? 아니면 ‘반이명박 전선’ 구축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사안(사실 금산분리 완화는 노무현 정부 때부터 추진돼온 것이다)은 무시해도 좋다는 것일까?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는 지난 7월23일 기자회견에서 “이명박 정권은 독재정권임을 확실하게 증명했다. 이명박 정권의 퇴진만이 민주·민생·평화·생태환경을 살리는 유일한 해결책임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되었다”라고 밝힌 바 있다. 강 대표의 이 발언처럼, 진보·개혁 진영은 이명박 대통령이 모든 문제의 원흉이고, 이 대통령만 바뀌면 금방이라도 ‘좋은 세상’이 찾아올 것 같은 언술을 자주 사용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런 식의 주장은 앞서 지적한 대로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대응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대중의 탈정치화와 냉소주의까지 부추길 염려가 있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미문학·문화 평론가)는 “모든 걸 이명박에서 출발하는 논리는 일종의 ‘메시아주의’와 관련이 있다. 이런 메시아주의에서 이명박에 대한 비판이 나오지만 또한 이 때문에 정치적 허무주의도 발생한다”라고 분석한다.

이명박만 사라지면 좋은 세상 올까

“‘모든 게 이명박 탓’이라는 비판은 이명박으로부터 해결책을 내올 수 있다는 생각을 뒤집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역설적으로 이명박 반대는 더 강력한 (또는 더 효율적인) 이명박에 대한 갈망이기도 하다. 한국의 대중은 메시아적 존재가 나타나서 단번에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길 바라는데, 이런 태도는 점진적인 개혁이나 개선에 대한 무관심 내지 냉소를 유발할 수밖에 없다. 저항해봤자, 투표해봤자 바뀌는 건 없다는 냉소주의가 탈정치화를 낳고 결국 정치적 행동에 대한 혐오를 낳는 것이다. 당연히 대중이 요구하는 메시아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진보·개혁 진영은 이명박만 바꾸면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그럼 박근혜는 괜찮다는 것인가?”

마찬가지로 특정 정치적·정책적 선택을 구조적 사안으로 보지 않고 ‘개인의 양심’ 문제로 환원해서 보는 시각 역시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예컨대 올해 초 진보 진영의 한 경제학자는 이명박 정부가 ‘부자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감세 따위 경제정책을 쓰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는데, 이런 논리는 이명박 대통령이 개과천선하면, 마음만 고쳐먹으면, 혹은 그를 몰아내고 ‘착한 대통령’을 앉히면 모순이 해결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은 멀리 갈 것도 없이 가장 진보적이고 친서민적이었다고 평가받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집권 5년을 되돌아보면 알 수 있다. 재벌 권력의 위험성을 알았지만 결국에는 재벌의 경제·사회 지배력을 오히려 확대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조·중·동과 임기 내내 싸웠지만 그들의 영향력을 줄이는 데는 실패했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비판이 나올 때마다 “재벌과 조·중·동 때문에…”라는 항변이 뒤따르듯이,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도 그러한 인식의 지평 위에서 제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누가 봐도 그들의 이해를 충실히 대변하는 이명박 정부를 옹호하자는 게 아니다. 비판의 대상과 방향이 좀 더 정밀하고 섬세하게 다듬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박상훈 대표는 이명박 정권을 지나치게 ‘괴물화’하는 비판 담론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부정의로 가득 찬 결정체,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미증유의 무엇, 사생결단으로 싸워야 할 무서운 존재로 묘사되면 될수록 국가권력과 대중의 괴리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가권력은 ‘우리 것’이다

“공포와 두려움이 확산되면 대중은 행동에 나서길 주저한다. 국가권력은 우리 밖에 있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 관계 안에 있는, 언제든 만질 수 있고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대중이 사안에서 ‘도피’하지 않고 자신감을 갖고 뭔가 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식의 저항과 비판을 고민해야 한다.”

사실 이명박 정부는 ‘겉보기와 달리’ 매우 허약한 정부다. 인기도 추락했고, 재벌과 조·중·동 눈치보기에 급급하며, 공권력 없이는 하루도 지탱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런 이명박 정부를 ‘실재보다’ ‘필요 이상으로’ 강력하게 만드는 건 역설적으로 진보·개혁 진영인지도 모른다. 다른 문제는 그대로 둔 채 오직 ‘정권 빼앗기’ 싸움에만 몰두한다면, 집권만 하면 하염없이 추락하는 이 ‘교착 상태’를 돌파할 길은 요원해 보인다. 소수의 분노도 중요하지만, 현실을 꿰뚫어보며 꾸준히 모순을 해결해나가는 다수의 각성된 시민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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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권이 하면 모든 게 ‘쇼’인가
 
 

[99호] 2009년 08월 03일 (월) 14:49:59 고동우 기자 intereds@sisain.co.kr
 

진보·개혁 진영이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주요 방식 중 하나는 모든 걸 ‘쇼’로 보는 것이다. ‘서민쇼’ ‘기부쇼’ ‘자전거쇼’ 등 야당과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진보 언론의 주장에서는 어렵지 않게 이런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사안을 세심히 뜯어보면 실제로 쇼 같은 요소가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미지’로 먹고사는 정치인의 특성상 이로부터 자유로운 인사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며, 또 같은 방식의 비판이 부메랑처럼 돌아올 수 있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자해행위’가 되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2008년 7월 첫 자전거 출근을 하는 유인촌 장관.
나아가 이런 식의 비판이 지배적이 되면 일말의 긍정성마저 사장되면서 ‘더 좋은 방향으로’ 논의가 확장되는 것을 방해한다. 이를테면 지난해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자전거 출근’을 했을 때 진보·개혁 진영 일각에서는 ‘연극’ ‘광대’ ‘좌파 적출이나 중단하라’는 비아냥을 퍼부었다. 하지만 <88만원 세대> 공저자인 박권일씨의 말마따나 “아무리 쇼라고 해도, 자전거를 타는 것은 자동차를 타는 것보다 무조건 ‘진보’다”. 꼴보기 싫더라도 유 장관의 자전거 출근을 계기로 “일반인도 자전거를 타고 큰 위험과 불편 없이 출퇴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각종 문화체육 시설에 자전거를 타고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어내는 방향으로 논의를 이끌어내는 게 먼저였다”라는 지적이다.

진보·개혁 진영은 이렇게 상대를 ‘모욕’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할 일을 다한 것처럼 생각할 때가 종종 있는 듯하다. 한 진보 언론의 기사 제목을 보니 “2MB는 사기꾼, 생쥐, 바퀴벌레”다. 통쾌하신가? 하지만 이런 비판은 결국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사회운동가인 사울 D. 알린스키는 이런 경향을 ‘구두선식 급진주의’라고 비판하면서 그 폐해를 다음처럼 꼬집었다.

“낡아버린 옛 단어나 구호를 사용하고 경찰을 ‘돼지’라든지 ‘백인 파시스트’라고 부르는 등의 방식은 오히려 자기 자신(급진주의자)을 정형화함으로써 남들이 ‘아, 뭐 쟤는 그냥 저런 애’라고 하는 말로 대응하고는 즉시 돌아서게끔 만든다.”

알린스키는 “의사소통은 듣는 대중의 경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타인의 가치관을 온전히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또 하나 그가 의사소통에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유머 감각’이다. 상황이 매우 안 좋은 건 사실이지만, 요즘 진보·개혁 진영을 보면 항상 너무 비장하고 너무 심각해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만 해서는 대중이 편하게 다가오기 어렵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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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노무현 대통령 장례식때 모습이 무척 힘들어보이셨는데...결국 올해를 넘기시지 못했다. 

며칠전 피랍 36주년을 병실에서 맞으시더니...  

평양 공항을 내리시던 그 장면이 아직도 기억난다. 

...

그에 대한 평가가 어떻든 간에 한국사에 큰 족적을 남긴 한 분이 영면하셨다.   

 너무나 진부해져 버린 '민주화'라는 구호가  

유령처럼 거리를 돌고 있는 이 시절에 말이다.   

..

먼저 간 노무현 대통령이 그를 평안한 길로 안내하시길... 

..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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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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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네 목표는 그곳에 이르는 것이니/그러나 서두르지는 마라/ 비록 네 갈 길이 오래더라도/ 늙어져서 그 섬에 이르는 것이 더 나으니/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이타가가 너를 풍요롭게 해 주길 기대하지 마라. .... 콘스탄티노 카바피의 시<이타카>중

카바피의 시는 <오뒷세이아>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또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언젠가 이 시를 보고 <오뒷세이아>라는 텍스트의 안팎이 이야기하는 것을 이처럼 잘 함축한 시도 드물것이라고 생각했다. 트로이를 떠난 오뒷세우스가 이타케까지 돌아오는 데 20년이 걸렸다. 그리고 그 시간은 내가 <오뒷세이아>를 다시 발견한 시간과도 거의 비슷하다. 이젠 말하기도 쑥스러운 나의 10대 시절에 이 책은 '기이한 모험집'이었다. 그러나 먼 바다를 돌다가  나이 40 줄에 이르러 보니, 지난 시절 상상력을 붇돋우던 독성 강한 기담은 예전만큼 강한 자극을 주지는 않는다. 그 대신 남루해진 오뒷세우스에게서, 또는 신과 같은 오뒷세우스에게서 삶의 그림자가 끌고온 향기들을 맡게 된다. 오뒷세우스의 모험담이 흥미롭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오래 묵힌 밀주처럼 진득하다. 두 번의 <오뒷세이아> 사이에 나는 아들에서 아버지가 되었고,-그것도 두 아이의,- 젊은 시절의 고민들을 채 해결하지도 못하고 또 다른 시간이 만든 짐들만 어깨에 얹고 있다. 지난 시간이 가져다 준 서당개 생활에서 주워들은 풍월들, '길 너머를 그리워하다' 결국 '길 위에서 죽고 말것'이라는 평범한 깨우침 정도를 얻었을까. 

벤야민은 낯선거리에서 풍경의 원근법이 무너짐을 이야기한다. 거리감의 상실은 사물들을 2차원 도상 위로 올려놓기 때문에 쉽사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낯선 도시에서 몇 개월 살아본 사람은 이런 경험을 이해할 것이다. 동서남북조차 모호하고 매일 가는 길인데도 무엇 하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한 일주일 쯤 지나고 나면 비로서 사물들이 하나씩 독자적인 소리를 내고 한데 엉겨붙어 있던 사물들이 하나씩 자기 영토를 확인시켜준다. 같은 영화를 두번 이상 보면 이제 줄거리말고, 구성이나 음악,대사, 미장센들을 보게 되고 또 상징적 은유들을 찾아보게 된다. 그래서 사실 요즘은 새로운 책을 읽는 게 아니라 과거에 본 책들을 다시 한 번 더 읽을까 하는 생각도 문득 문득 든다.  

마흔에 읽은 <오뒷세이아>에서 가장 눈에 들어 온 것은 구성이다. 역자 해제에 의하면 <일리아스>,<오뒷세이아>는 '트로이 서사시권'의 8권 중  2번째,7번째 서사시에 해당한다. 하지만 다른 모든 시들을 앞도할 만큼의 분량과 내용이다. 그만큼 중요하며 흥미롭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특히 이 서사시들은 구비전승 과정을 통해 내용적 풍부성이 확보된 것이 확실하다. 호메로스를 단일인물인지 집단의 총체적 인물이지 두고 논쟁이 있었다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 일것이다. 그 사실이 어떻든 간에 <오뒷세이아>의 구성이 가진 '압축성과 입체성'은 '시대의 연마'를 거쳐서 이룩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23장에서 호메로스의 우수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호메로스는 앞에서 말한 것을 되풀이하자면 이점에서 다른 시인들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그는 트로이 전쟁이 시작과 결말이 뚜렷이 존재하는 하나의 전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는 전체에서 한 부분만을 다루었으며 그 밖의 사건들은 그저 에피소드로 쓰고 있다." 

호메로스의 뛰어난 점은 바로 단일한 사건을 중심으로 한 압축성에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오뒷세이아>를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는가?  생각보다 쉽다. '한 남자의 귀향이야기' 가 그것이다. 신의 미움을 받아 고생 고생하다가 집에 돌아왔으나 다른 남자들이 아내를 탐하고 집안을 거덜내고 있다. 계략을 짜서 이들을 처단한다. <오뒷세이아>가 이 내용이다. 물론 각자의 에피소드들이 기발한 상상력으로 뇌를 자극하고 인간의 운명과 고난에 맞서는 용기로 감동을 자아내고는 있지만 이 중심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드라마전개의 중심축에 탁월함을 부여하는 것이 구성의 입체성이 아닐까 싶다. 시간의 도치와 압축. 영화용어로 치자면 플래쉬백의 적극적 활용으로 극적인 탄력을 높이는 것이다. 

<오뒷세이아>는 크게 세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면 된다. 하나는 처음부터 4권까지 텔레마코스이야기, 5권부터 13권까지 오뒷세우스의 귀향이야기 그리고 이하 이타케에서의 복수극이다. 4권까지 '텔레마토스 이야기' 에서는 오뒷세우스의 아들이 주인공인데 이를 통해 전후 사정들을 소개하고,또 미래의 갈등을 미리 보여준다.물론 오뒷세우스는 이때 바닷가에 있을테니 이를 전혀 모른다. 5권부터 오뒷세우스가 등장하는데, 시작은 신들의 회의로부터다. 제우스가 칼립소로 부터 오뒷세이아를 풀어주기로 결정하는 과정이 나오는데 오뒷세우스를 방해하는 포세이돈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벌이진다.이 장에서는 모든 이야기가 명백히 3인칭 시점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 시점은 다음 장에서 바뀐다.  6권은 이타케를 앞둔 마지막 도착지인 파이아케스족의 나라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편집으로 보자면 텔라마코스의 씬과 거의 교차편집되는 장으로 거의 동시간대 벌어진 일어거나 조금 후에 일어난 장면인 셈이다. 이렇게 현재의 시간들을 교차하는 형태로 붙여놓으며 6권까지 현재 상태의 갈등요소들을 재현한다. 하나는 완성되지 못한 귀향, 그리고 고향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장판. 오뒷세우스만 모르지 독자들은 이미 신탁의 내용을 통해 그가 고생끝에 이타케에 도착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즉 독자들을 극의 파국 직접까지 도입부에서 끌고와서 긴장감을 높여놓는 것이다. 그게 뭐가 대단하냐고? 그렇다. 지금봐선 요즘 TV드라마에서 초보작가나 연출가들도 쓸 수 있는 구성이다. 그런데 이런 구성이 기원전 8세기에 만들어졌다면- 판본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이고 이런 형태로의 완성은 아마 더 후가 아니었을까 싶긴하지만- 이 작가를 우리가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 호메로스는 오뒷세우스의 귀향을 앞두고 다시 서사시를 거꾸로 돌려서 회고하는 방식으로 향하는 전환점을 만든다.  7권부터 시작되는 오뒷세우스의 고난들이 그 이야기이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오뒷세우스는 이타케에 도착한다. 후반부의 복수극이 시작되면서 페렐로페의 구혼자들에게 마지막 한방을 먹이기 위한 잠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후반부 '복수극'에서도 호메로스는 '지연의 효과'도 적극적으로사용한다. 마이클 티어노의 <스토리텔링의 비밀>에서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말을 이렇게 인용한다. 

 "영화 속에서 테이블 밑에 있는 폭탄이 갑자기 터진다면 좋은 영화가 아니다." 즉 갑자기 복수가 시작되고 문제가 해결되어 버리면 독자들이나 관객들은 멍해지는 것이다. 만약 오뒷세우스가 이타케에 도착해서 아이기스를 두른 아테네의 도움으로 일거에 구혼자들을 제거해버렸다면 어떻게 될까? <오뒷세이아>는 분명 반쪽 서사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복수는 지연되어야 한다.'라는 말이 쉽게 이야될 것이다. 이런 '지연의 효과'를 위해서는 먼저 독자는 음모를 알지만 극중 인물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어야한다. <오뒷세이아>에서는 텔레마코스와 오뒷세우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복수의 준비'에 대해 까맣게 모르고 있다.  

구혼자들은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이라는 것도 모른 채 걸인으로 변한 오뒷세우스를 모욕하는 장면이 있다. 독자들은 '이런 바보같은 곧 죽게될 운명인데' 라고 연민과 함께 작중인물의 어리석음을 책하게 된다. 이게 무얼 의미하는가? 별거 아니다. 이미 텍스트에 깊이 빠져 버린 독자를 의미한다. 모욕의 정도가 높아질 수록 독자의 복수에 대한 쾌감은 비례한다. 그런데 이런 드라마작법은 인류학적인 공통 유산에서 나온 것 같다. (서사 구조라는 것 이야기다.)   

 우리의 전통 소설<춘향전> 또는 판소리<춘향가>를 떠올려 보자. 이몽룡이 과거 급제를 하고, 짐짓 거지 행세를 한다. 오뒷세우스도 아테네의 도움으로 걸인으로 변신한다. 오뒷세우스가 두 가지 목적으로 -하나는 누설 시 복수의 좌절 우려와 식솔들의 충성 여부 확인- 거짓 행세를 한 것 처럼 이몽룡은 '공무 집행'과 '춘향의 진정성'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끝까지 자신의 신분을 숨긴다. 또한 오뒷세우스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화살의 시험을 거치는 것 처럼 이몽룡은 '금준미주 천일혈'로 시작하는 시 한 소절로 마지막 한 방을 예비한다. 이런 복수의 전조 앞에 몇 몇 눈치빠른 이들은 줄행랑을 치며,어떤 이들은 그런 징후조차 부인하고 결국은 '이빨로 흙을 물게 된다'  

결국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오뒷세이아>는 오랜시간 사랑을 받을 수 있을 만한 완성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오뒷세이아>의 주인공 오뒷세우스라는 인물에 대하야 이야기를 해보자. 그는 간계와 지혜가 아테네에 버금갈 만큼의 지략가이며 전사이다. <삼국지연의>의 여포나 장비가 아니라 주유 정도 되겠다. 아킬레우스를 트로이 전쟁에 불러들인 것도, 트로이 목마를 고안한 것도 그의 지혜이다.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서 그의 첫번째 대사는 의미심장하여 눈여겨 볼만한다. 칼립소가 제우스의 명령을 받잡고 오뒷세우스를 풀어주겠다고 했을 때 그가 처음으로 뱉은 말이다. 

"여신이여! 그대는 나를 보내줄 생각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게 분명하오."  

이게 무슨 뜻일까?   

 이 말에서 나는 오뒷세우스가 상징하는 알레고리의 가장 중요한 한 대목을 본다. 그것은 '의심'이다. '오뒷세우스는 의심하는 인간'이다. 물론 텍스트의 맥락 상 보면 '신들의 장기판'에서 놀아나던 인간이 신들의 장난질을 못믿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오뒷세이아>에서 최초로 그가 뱉어낸 이 말은 '의심하는 인간'으로서의 신들의 세계를 의심하는, 그래서 결별하려는 '의심'으로 읽어내면 큰 울림을 갖는다. 

이렇게 <오뒷세이아>를 '탈신화화를 목표로 하는 계몽의 알레고리' 로 읽어낸 이들이 20세기 가장 음울한 책이라는 <계몽의 변증법>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이다. 그들은 <오뒷세이아>를 '주체가 신화적 힘들로부터 도망쳐 나오는 도정" 이라고 말한다. 

오뒷세우스가 얼마나 주체적으로 영리한 지는 뗏목을 떠다닐 때 그를 불쌍히 여긴 레우코테아의 충고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창조적으로 변용하는데서도 보여진다. 그녀는 뗏목을 버리라고 말하는데 그는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아아 괴롭구나! 그녀가 나더러 뗏목을 떠나라고 명령하니...나는 아직은 그 명령을 따르지 않을 거야. 나의 피난처가 될 것이라고 그녀가 말한 땅은 아직은 멀리서 볼 수밖에 없으니까"  

물론 오뒷세우스는 신들에 의탁한다. 그렇지만 그 자신의 지혜와 재능을 적절히 조합해내는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필연적 운명을 수용하고 거기에 이성이라는 능력을 통해 운명의 거센 풍파를 헤쳐나가는 것이다. 운명을 거부하지 않느며 운명에 맞서는 용기가 바로 그리스적 용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세이렌'과 관련된 우화를 통해 오뒷세우스의 '도구적 이성'과 자본 아래 '소외'되는 자본가와 노동자를 알레고리로 읽고 있는 유명한 글을 남긴다. 그들은 오뒷세우스로부터 '시민적 개인'의 탄생을 소급해서 읽어내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오뒷세우스는 생존의 본능을 위해 자연을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반복적 현상으로 인식하고 이를 인간의 이성적 능력으로 지배하려는 근대적 개인의 원형이 되는 것이다. 물론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목적은 이렇게 지배적인 '자기동일성'에 근거한 '근대적 이성'과 '도구적 이성'을 '반성'과 '성찰'을 통해 다시 계몽하려는 의도였다. 그들이 '계몽하지 않는 계몽'에서 무서운 폭력을 바라본것은 그들이 겪었던 나치의 정신을 근대적 이성이 언제라도 불러들일 수 있는 최종적 기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뒷세우스의 모험담은 초반부에 나오는 이야기다. 오뒷세우스가 포세이돈의 미움을 받게 되는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다. 즉 오뒷세우스의 '하마르티아'(비극적 고통을 만들어내는 과오)인 셈이다. 이런 고통은 엄밀하게 말해서 개인의 잘잘못과는 무심하게 발생하곤 하는데 그리스인들은 그런 존재의 불가해적 운명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간 어찌 어찌 하여 오뒷세우스의 전함들은 퀴클롭스들이 사는 섬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거대한 퀴클롭스들이 양을 키우며 살고 있다. 오뒷세우는 외교적 방법을 택하다가 전우들을 잃는다. 우선 오뒷세우스는 크게 '참는다.'. 그리스의 중요한 덕목이라는 '절제' 를 여러번 다짐한다. 고통을 감내하기 위해 눈물을 참던 그마저도 전우를 잃어야한다는 대목에서 눈물을 머금지만 그래도 그는 '참는다'. 그리고 어떤 신의 도움도 받지 않고 기다림 속에서 나온 자기 지혜를 바탕으로 퀴클롭스에게 포도주를 먹인다. 폴리페모스가 묻는다. 

 "너는 자진하여 그것을 한잔 더 주고 네 이름을 말하라.".....오뒷세우스는 "내이름은 '아무도아니'요" 라고 답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언어는 사고를 위장한다. 의복의 외적 형식으로부터 그 바탕에 놓여 있는 사고의 형식을 추론하는 것은 그만큼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의복의 외적 형식은 몸의 형식을 드러내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목적을 위해서 의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오뒷세우스의 저 대답은 다른 퀴클롭스들로 하여금 그를 비존재화시켜버리는 위력을 발휘한다. 오뒷세우스의 '아무도아니요' 라는 대답은 단순한 기지라고 하기에는 거의 혁명적이다. 아도르노는 오뒷세우스의 여정이 '이성의 자기동일화'를 위한 과정이라고 했다. 그 안에는 이미 '랑그와 빠롤'의 자기 분리 마저도 포함하는 이성의 포용적 간특함이 들어있다. 삼류독자로서 나는 오뒷세우스의 대답이 중요한 정치적 파괴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무도 아니요'를 몇 년 전에 본 영화<브이 포 벤테터>의 마지막 장면과 연계시킬 때 쉽게 그려진다. 모든 이들이 '아무도 아닌' 것이 되는 순간-영화에서는 동일한 브이의 가면을 쓰고 광장에 나타난다-  거대한 퀴클롭스들을 무너뜨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이다. 오뒷세우스의 여행이 자극하는 상상은 종류도 다양하니 그 정도를 하나 더 추가한다고 고전의 바다가 넘치거나 범람하지는 않을게다. 정치적 해방의 가능성은 지난 시절의 강박적 회귀나 또는 찬란한 반짝임에 대한 자기 상찬에서 나오지는 않을 듯 하다. 그것은 그저 '내가 자청한 고난'이며 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자의 '뼈아픈 후회'일 뿐이다. 그날은 '사건'이라 할 만한 절박이라는 조건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것' 에서 나올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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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통행로 / 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선집 1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외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발터벤야민 선집의 첫번째 책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는 파편적 아포리즘의 백화점이다. 이 책에 나오는 철학적 단상들을 '의미 있는 맥락'으로 결합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으며, 또 벤야민이 시도한 글쓰기의 의미에도 부합하지 않을 듯 하다. 물론 벤야민 전문가들은 이 책의 내용들을 빗금을 따라 잘 오려내어 색깔별로 도화지에 붙이듯 분류하고 정리할 수 있다. 또한 이후 그의 책에 나오는 내용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가 갖는 의미를 배치 할 수도 있다. 이 책의 역자는 해제에서 친절하게 그런 내용을 언급한다.    


<일방통행로>는 단순한 꿈과 기지에 찬 아포리즘들의 모음, 아방가르드적 산문형식의 특이한 실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 폭발력을 갖는 벤야민의 중후기 사유의 모티프들이 응축되어 있는 책이다. ...(중략)... 그 모티프들 가운데서도 특히 정신/의식/인식 대신 신체/감각/경험, 의지,개념적 인식 대신 이미지(를 통한 신경감응), 예술의 (자율적,영역적 성격 대신 기술 (내지 영영 없는 예술)이 벤야민의 아방가르드 미학과 정치학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데.....<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p60  

내용인 즉 1924년에 나온 이 '독특한 비학문적인 저술'에서 우리는 그 뒤에 펼쳐질 벤야민 사상의 맹아들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브레히트로 부터 영향을 받은 유물론적 세계관, 초현실주의자적인 아방가르드 미학, 기술낙관론적 매체관, 또한 유대 신비주의적 경험, 이것들이 정치학과 결합되는, 다분히 모순적이지만 그만큼 다양한 해석가능성을 제시한 벤야민의 상이 이 책에서 본격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대도시를 여행하면서 일단의 사유이미지들을 얻어낸다. 그가 이 책의 제목을 <일방통행로>라고 지은 것은 도시의 철학자, '파사쥬'의 철학자 벤야민으로서는 일관성이 있어보인다. 그의 최후의 대작 <파사쥬>는 <일방통행로>의 아이디어와 소묘들을 더욱 확장하고 세밀하게 만들어낸 것이라는 말도 있다. 그렇다면 벤야민은 어떻게 도시를 여행했을까? 김유동은 <발터벤야민의 새로운 천사>라는 글에서 그의 여행방식과 독해의 어려움을 이렇게 말한다.  

그는 자신을 수동적인 수용기관으로 만들어 외부 세계의 떨림과 변화를 지진계에 기록한다. 그러나 그 지진계에 그려진 형상들을 판독하는 것은 문학 작품의 형상들 뒤에 숨은 의미를 천착해 들어가는 작업만큼이나 쉽지 않다.    <아도르노와 현대사상>p32-33  

일단 이 책의 구성을 있는 그대로 따라가보자. 벤야민이 애정을 둔 감각인 '시각'만큼이나 이 책은 '시각적' 이다.'시선은 한 인간의 마지막 부분'이라고 벤야민은 말할 정도이다. 그렇지만 이 '시각적'이라는 것이 1차적 감각의 전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의 몸을 통해,그의 시선을 통해 드러온 감각들이 그의 세밀한 지진계와 화학반응을 불러 일으켜서 전달되는 방식이다. 그래서 어떤 글들은 실끊어진 미노타우루스의 동굴같이 더듬거리게 만든다.  벤야민은 이 책을 그의 연인에게 헌사했다. 벤야민의 세계는 그녀 아샤 라치스를 만나면서 모종의 전환을 이룬다. 벤야민은 여행을 통해서-대도시를 어슬렁거리며- 급속히 변해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와 각종 인상들을 머릿 속에 스케치한다. 그의 시각이 특이했던 것은 그가 확대경을 쓰지 않고 현미경으로 작업했다는 것이다. <발터벤야민>이라는 얇은 평전을 쓴 몸메 브로더젠은 발터벤야민의 작업을 '일상의 현상학'이라고 표현했다.  

가장 일상적인 것 아래에 뚤려 있는 가장 깊은 갱도의 바닥에는 얼마나 무시무시한 골동품 보관소가 놓여 있는 것일까? <일방통행로>p72

상상력이란 무한히 작은 것 속으로 파고 들어갈 줄 아는 능력이고 그 모든 집약된 것 속으로도 새로운,압축된 내용을 풍부하게 부여할 줄 아는 능력이다. <일방통행로>p 116

 중요한 것은 '일상의 증후'라는 것이다. 그가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에서 바라보고, 생각하고, 토로하는 것들은  20세기 초 독일의,또는 자본주의 사회의 현상들과 그 안의 인간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관계성 속에서 파생되는 영역들'즉 세기초의 혼란을 겪은 총체적인 사회와 인간의 증후들을 철학적으로, 형이상학적 이미지로 구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일방통행로> 초반부에 등장하는 소재들을 보자. 

 첫 글은 '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보다는 사실에 훨썬 더 가까이 있다.'로 시작되는 '주유소'이다. 이어서 '아침식당','지하실','중국산 진품','문방구','유실물보관소' 등등이 벤야민이 걷는 일방통행로에 배치되어 있던 공간이다. 벤야민은 이 공간을 유유자적 산책하면서 연신 샷터를 눌러대는 사진작가처럼 행세한다. 짐짓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처럼 때로는 심각하게 두 손으로 사각프레임을 만들어 구도를 제어보고, 때로는 접사를 위해 피사체에 가까이 다가간다. '독일의 인플레이션' 을 찍던 사진가는 잠시 담배를 피우면서 '책과 창녀의 공통점'에 대해 생각하다가, 또 '플라토닉 러브'에 대해 단편들을 이어 간다. 이 모든 것들이 그의 사진기 안에 담기는 (철학적)이미지들이다.  벤야민가 찍은 '주유소'에는 달려와 카드를 요청하는 감찍한 아가씨도 없고 '천문관 가는 길'에는 친절한 관측 해설가 선생님도 없다. 

벤야민은 '예술의 정치화'라는 측면에서 기술문명이 가져다주는 영상문화의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이 책 곳곳에는 그런 단초들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부지를 임대함>을 보자.이 글은 비평과 광고 그리고 영상미학에 대한 단상이 주를 이루는데 '비평의 적당한 거리두기' 대신 새롭게 등장한 광고와 영화에 대해 말한다.그는 '더 이상 아무것데도 놀라거나 감동 받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극장에서 다시 우는 법을 배우는 것 처럼' 이라는 말로 그 의미를 말한다. '다시 우는 법'이라는 것은 벤야민의 개념어로 표현하면 '충격'이며 공감을 통한 '미메시스' 에 해당하는 것이다. 물론 벤야민은 이 관계 속에 자본주의적 관절이 있음을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새로움'으로서의 영상이라는 텍스트의 가능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궁극적으로 광고를 비평보다 그토록 우월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빨간색으로 반짝이며 흐르는 전광판 글자가 말해주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아스팥트의 물웅덩이 위에 반영된 그 글자의 붉은 빛이다' <일방통행로>p139 

벤야민은 어떤 확고한, 아날로그적, 영속성보다 단절과 정지가 주는 '충격'개념을 중요시했다. <두번째 안뜰 왼편, 마담 아리안느>라는 글에 이를 예견하는 표현이 있다. 

정신의 깨어 있는 상태(정신집약)야말로 미래의 진핵이기 때문이다. 순간에 일어나는 일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저 멀리 놓여 있는 것을 미리 아는 것보다 더 결정적이다. <일방통행로>p153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영화'라는 매체를 '아우라붕괴' 시대의 새로운-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미학의 증거품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벤야민은 특히 에이젠슈타인의 소비에트 몽타쥬-충돌의 몽타주같은-것들을 이런 '충격'의 예술적 표현방식으로 읽고 있다. 즉 파편화된 이미지들의 충돌을 통해 인식에 어떤 '충격'을 가하고-벤야민은 지식인의 글쓰기란 '화재경보기' 여야된다고 믿었다.-그런 '정지상태'를 통해 무겁게 가라앉고 있는 세계를 건져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충격은 붕괴를 이끈다는 사실이다.  ... 충격을 약속하는 그 사람들이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멈춤의 순간까지도 인정할 의사가 있겠는가?  <사유이미지>p194 

우리가 할 일은 엔진에 다다가서 그 뒤에 윤활유를 쏟아 붓는 것이 아니다. 숨겨져 있는 그러나 반드시 그 자리를 알아야 할 대갈못과 이음새에 기름을 약간 뿌리는 것이다. <일방통행로>p70
 

 이외에도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의 속에는 벤야민의 '충격','정신산만','도취','환등상' 등의 미학적 개념들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나 해방을 위한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고민들이 툭툭 불거져 나온다. 또 그의 비평과 철학에 대한 태도, 이론과 현실의 상호 개입문제, 글쓰기,꿈, 대중, 사랑,자연 등등의 문제들이 길거리에 부딪히는 군중들처럼 삶의 한복판으로 뛰어든다.  

그렇지만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를 모두 학문적으로 제대로 해석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런 정본 해석이 있을리도 만무하지만, 그 난해함을  좀 이겨 내며 순간 순간 보여지는 그의 그림자를 보는 것 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흥미롭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정말 기술적이지만 - 처세의 아포리즘이 아니라 다른 사유를 관통할 수 있을 벤야민의 아포리즘을 통해 잠시라도 문장을 부여안고 고민할 수 있는 시간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침묵의 시간만큼 '충격'의 와인은 익는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의 아포리즘 하나 하나를 실험적인 단편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 어떻게 형상화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봤다. 이미 어떤 알레고리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상영을 마친 것들도 있으리라.  


   
  내 글에 등장하는 인용문들은 무장을 하고 나타나 한가롭게 지나가는 행인에게 확신을 강탈하는 도쩍떼와 같다  <재봉용품> 

생각된 그대로 표현되는 진실보다 더 가련하게 있을까. 그런 경우 종이에 적힌 그 진실은 질이 나쁜 사진보다 못하다. 진실은 우리가 카메라의 검은 수건 밑에 웅크리고 있을 때에는 활자의 렌즈 앞에서 조용히 그리고 정말 친절하게 바라보기를 거부한다.....'글을 쓴다는 것'은 그러한 경고음을 작동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긴급 기술 지원대> 

우둔함과 비겁함으로 점철된 독일 시민의 생활방식을 일상적으로 드러내는 화법 중에서도 특히 생각해볼만한 것은 절박한 재난에 대해 말하는 화법이다. '이런 식으로 더 이상 안된다'는 말이 그것이다. 뾰족한 대책없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안정과 소유 관념에 매달려온 일반 시민들은 지금 상황이 전적으로 새로운 안정성이 지배하는 상황임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 .... 도처에 생에 대한 이론과 세계관이 넘쳐나는데 이 이론들은 종국적으로는 거의 언제나 진부하기 짝이 없는 개인적 상황을 인준하는데 봉사하면서 이 땅에서 오만한 행세를 하고 있다.  <카이저 파노라마> 

성취는 오로지 이 의심과의 연관속에서 즉 구원,결단의 형태로만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성취가 이러한 형태로 실현되자마자, 벌거벗은 순전한 성취 자체에 대한 새로운 참을 수 없는 동경이 순식간에 들어선다. <한번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 속에 지니고 다니는 자신의 본질에 대한 소위 내적 이미지라는 것은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순전한 즉흥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그 이미지는 그 이미지 앞에 들이대는 마스크에 전적으로 정향해 있다. 세계는 그와 같은 마스크의 저장고이다.<사람들이 우리에게 예언한 것들에 대한 믿음에 대하여> 

그것의 밀려나 있고 움츠려든 충만 속에서 '삶의 정오' '여름정원'속의 사상가인 차라투스트라의 시간이 도래한다. 왜냐하면 인식은 자기 궤도의 정상에 다다른 태양이 그런 것처럼 가장 엄격하게 사물들의 윤곽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짧은 그림자들> 

누군가를 아무 희망없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사람을 제대로 안다. <아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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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와대의 최종 목표는 쌍용차가 아니었다 (***프레시안 기사)

"최악의 선례가 될 것이다."

6일 쌍용차 노사의 협상 타결 소식을 들은 노사관계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전체 노사관계 및 노정관계에 미칠 영향에 대한 평가였다.

77일의 옥쇄 파업의 결론은 마지막 농성자 640명 가운데 48%, 300여 명의 고용 보장이었다.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를 통한 전체 조합원의 '총고용 보장'이라는 처음의 목소리는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희망퇴직'으로 공장을 떠난 1700여 명은 커녕 구제 기준 인원이 애초 정리해고자 976명이 되지도 못했다.


▲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를 통한 전체 조합원의 '총고용 보장'이라는 처음의 목소리는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희망퇴직'으로 공장을 떠난 1700여 명은커녕 끝까지 파업에 참여한 600여 명 전체의 고용보장도 얻지 못했다.ⓒ프레시안

사실상의 '패배'였다. 현재 상황에서의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길고 참혹했던 전쟁 같은 시간에 비교하면 얻은 것은 보잘 것 없다. 노조는 77일 동안 공장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파업을 벌였고, 지난달 20일부터는 사실상 감금 상태에 놓여 물과 음식물, 의약품마저 차단된 '생지옥'을 살았다. 그 결과가 처음 발표된 정리해고 인원 2646명 가운데 10%를 구해낸 것이었다.

반면 회사와 정부는 이겼다. 그나마 회사는 노조의 장기 파업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각종 생산시설의 파손 등으로 경영 정상화까지 많은 과제가 남았지만 정부는 모든 것을 얻었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뒷짐 진 채 당초의 목표를 모두 이뤘다. "어떤 일이 있어도 노조에 지지 않는다"는 원칙을 전체 노동계에 확실히 각인시켰다.

"15만 금속노조는 사라지고 600여 쌍용차 홀로 싸웠다"


▲ 쌍용차노조는 홀로 싸웠다. 완성차 4사 가운데 가장 작은 쌍용차노조의 '처절한' 싸움에 같은 업종의 완성차노조들은 사실상 모르쇠로 일관했다. ⓒ프레시안
엄밀히 말하면 쌍용차지부의 '패배'가 아니라 정부의 '승리'였다. 600여 명 가운데 48%의 고용보장이라는 최종 합의는 사실 지금 쌍용차지부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다. 77일은 그냥 77일이 아니었다. 노조는 그 시간 동안 대답 없는 회사와 목을 죄어오는 경찰, 단전과 단수로 인한 신체적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5일 있었던 격렬한 경찰의 진압 작전 이후 이탈하지 않은 노조원도 극도의 불안감을 호소했다. 더 버틸 힘이 없었다.

게다가 쌍용차노조는 홀로 싸웠다. 완성차 4사 가운데 가장 작은 쌍용차노조의 '처절한' 싸움에 같은 업종의 완성차노조들은 사실상 모르쇠로 일관했다. 상급단체인 금속노조가 몇 차례 부분 파업을 벌이긴 했지만, 형식적인 '연대'였다. 기아차지부를 제외하고는 전면 파업도 아닌 부분 파업조차 완성차노조는 참여하지 않았다. "남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금속노조의 핵심 동력현대차는 내부 갈등 및 상급단체와 갈등으로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쌍용차 노동자를 지원할 의지도 없었다. 현대차지부 대의원들은 쌍용차지부의 파업에 연대하기 위한 '동조 파업안'을 부결시켰다. 심지어 파업도 아닌 '잔업·특근 거부안'조차 49.5%의 찬성만 얻어 부결됐다.

"현대차, 기아차의 '연대'는 참혹한 수준이었다"

GM대우차지부는 쌍용차지부의 파업이 한창이던 지난달 22일 자동차 업계에서 최초로 '임금 동결'에 합의하고 올해 임단협을 마무리지어버렸다. 쌍용차 노사의 협상이 결렬되고 공권력이 진압 작전의 시기를 저울질하며 쌍용차 사태가 최고의 고비를 맞았던 8월 첫 주, 완성차 3사는 모두 휴가를 즐겼다.

15만 금속노조 가운데 쌍용차지부 600여 명의 조합원만이 물과 전기, 가스가 모두 끊긴 도장2공장에 갇혀 있었다. 이상호 금속노조 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쌍용차 파업에 대한 현대, 기아, GM대우의 연대는 사실 참혹한 수준이었다"고 평가했다. '산별노조'라는 단어가 무색했다.


▲ 쌍용차 파업에 대한 현대, 기아, GM대우의 연대는 사실 참혹한 수준이었다. '산별노조'라는 단어가 무색했다.ⓒ프레시안

민주노총은 말할 것도 없었다. 쌍용차지부의 파업 초입부에 있던 지난 6월 14일 일찌감치 "정권 퇴진 투쟁"을 선언한 민주노총은 이후 두달 가까운 시간 동안 같은 말만 반복했다. 국면 전환을 위한 실력은 물론이고, 물이 끊긴 평택공장 안에 식수를 실은 트럭을 넣을 힘조차 민주노총에겐 없었다.

시간이 길어지면서 여론도 노조에 불리하게 흘러갔다. 지난 6월 18일 설문조사에서 '공권력 투입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79.0%(한길리서치연구소)였지만, 지난 3일에는 54.4%(모노리서치)로 줄어들었다.

"처음부터 쌍용차는 노정갈등이었다"…'작은 놈' 활용한 정부의 큰 그림은?

이번 사태의 결론이 단순한 '쌍용차지부의 패배'가 아닌 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애초부터 이 문제는 개별 기업의 노사갈등의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상호 연구위원은 "처음부터 노사갈등이 아니라 노정갈등이었다"고 말했다. 법정관리에 들어간 쌍용차에서 노사관계로 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당연히 노사협상에서 노조만큼이나 사측도 운신의 폭이 좁았다.

그런데 정부는 지난 1월 상하이차가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부터 예고됐던 이 격렬한 노사갈등에서 초지일관 '무대응과 방관'의 원칙을 고수했다. "반드시 쌍용차에서 정리해고를 이뤄내야 한다"는 작은 목표가 아니었다. 정부는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상호 연구위원은 "정부는 제일 덩치 작은 놈을 가지고 본보기로 사용하고 싶었던 것"이라며 "작은 놈을 확실히 제압해 덩치 큰 놈에게 '위협효과'로 사용하려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의 목표가 '쌍용차노조 죽이기'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그 '큰 놈'은 누구일까? 전문가들은 "현대차와 기아차노조, 더 나아가 금속노조 전체"라고 말했다.

"멀지 않은 곳곳의 곡소리…노조 발목 잡을 쌍용차 위협효과"

사실 자동차업계가 하반기 구조조정을 앞두고 있다는 것은 업계의 오래된 중론이다. 법정관리 중인 쌍용차처럼 대규모는 아닐지라도 다양한 방식과 직군에서 인원 조정이 이뤄질 것이라는 얘기다. 이명박 대통령도 틈날 때마다 "구조조정"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옥쇄 파업만 77일, 지난 4월 정리해고 규모가 처음 발표된 이후 무려 4개월 가까이 싸운 쌍용차지부의 결론은 각 제조업 노조에 확실한 교훈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다행히 회사 파산에까지 이르진 않았지만, 공공연한 파산 협박이 막판 노조에게 큰 심적 부담이 됐던 것도 다른 기업의 노조가 '정리해고 반대 투쟁'에 선뜻 나설 수 없는 큰 걸림돌이다.


▲ 다행히 회사 파산에까지 이르진 않았지만, 공공연한 파산 협박이 막판 노조에게 큰 심적 부담이 됐던 것도 다른 기업의 노조가 '정리해고 반대 투쟁'에 선뜻 나설 수 없는 큰 걸림돌이다.ⓒ프레시안

이상호 연구위원은 "쌍용차 효과가 당장 다른 노조들을 상당히 위축시킬 것"이라고 내다봤다. "저렇게 처절하게 싸워도 정리해고를 모두 막을 수는 없구나"라는 인식이 빠르게 전체 노동계에 퍼질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연구위원은 "각 노조들이 아주 '소프트한 구조조정', 즉 전환배치나 비정규직 해고, 사무직 인원조정, 희망퇴직 등을 큰 저항 없이 수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정부가 공권력을 투입해 강제해산시키지도 않고, 그렇다고 공적자금을 투입해 쌍용차 사태 중재에 나서지도 않은 것은 그런 효과를 노린 장기적 플랜이었다는 얘기다. 오민규 전국비정규직노도연대회의 정책위원도 "정부의 쌍용차에 대한 정책의 목표는 자동차업계의 구조조정에 있다"며 "전국에서 곡소리가 날 날이 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런 측면에서 청와대와 더불어 이번 사태 추이를 가장 주목했을 또 다른 주체는 현대차다. 이상호 연구위원은 "단지 현대차가 몇 대 더 팔리느냐 마느냐 때문이 아니라 노사관계에 미칠 영향을 본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노사관계의 가늠자로 꼽히는 현대차 노사관계를 협조적으로 묶어놓기 위한 청와대와 현대차의 일종의 담합이었던 것이다.

"장기적 플랜의 정부에 대응하는 노동계 시각은 좁았다"

정부는 이처럼 강 건너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에 대응하는 노동계의 시각은 좁았고 전략은 허술했다. 노동계는 개별 기업에서의 '정리해고 반대'라는 하나의 프레임에만 갇혀 있었다.

물론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 사회는 다시 한 번 '해고에 대한 격렬한 노동자의 저항'을 경험했다. '정리해고가 생각보다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들어간다'는 교훈을 얻었다. 더불어 해고에 대한 개별 노동자의 강한 거부감은 취약한 사회안전망 때문이라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지적도 쏟아졌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미 8년 전인 2001년 대우차 정리해고를 둘러싼 갈등 때 깨달았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8년 후 똑같은 사태가, 더 잔인하게 반복됐다. 이런 악순환의 1차적 책임은 물론 스스로 제 역할을 포기해버린 정부에게 있지만,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내지 못한 노동계의 책임 역시 크다.

한 국책연구기관 연구위원은 "진작 노조가 해고 이후의 대책을 놓고 회사나 정부와 협상을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일부 해고를 인정하더라도 해고자에 대한 재취업 알선이나 창업 지원 등 실질적인 생계의 길을 위한 재원 및 통로를 정부와 회사로부터 따내는 것이 현실적인 노조의 최대치였다는 것이다.

"정리해고 숫자 협상에 갇혀버린 한계에 대한 성찰은 이제 시작이다"

이상호 연구위원도 "단지 해고만 막는 것이 아니라 최악의 경우 해고를 한다면 어떤 절차와 기준에 따라 하고 어떤 보상을 해야 한다는 노동계 내부의 가이드라인을 진작 만들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총고용 보장'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단 한 명의 해고도 안 된다'고 버티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 연구위원은 "노동계가 스스로 해고에 대한 일정한 룰과 경로를 마련하면서 동시에 회사와 정부 수준의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런 면에서 '정리해고'라는 정부의 프레임에 말려 해고자 비율이라는 숫자에 갇힌 협상을 해야 했던 쌍용차지부의 상황은 전체 노동계의 한계였다.

쌍용차 사태의 강력한 '위협효과'의 약효는 이제 시작이다. 동시에 우리 사회가, 노동계가 이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시작됐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77일 동안의 힘겨운 파업을 통해 던진 '값비싼' 교훈에 대한 성찰은 남은 이들의 몫이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77일 동안의 힘겨운 파업을 통해 던진 '값비싼' 교훈에 대한 성찰은 남은 이들의 몫이다.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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