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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통행로 / 사유이미지 ㅣ 발터 벤야민 선집 1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외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1월
평점 :
발터벤야민 선집의 첫번째 책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는 파편적 아포리즘의 백화점이다. 이 책에 나오는 철학적 단상들을 '의미 있는 맥락'으로 결합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으며, 또 벤야민이 시도한 글쓰기의 의미에도 부합하지 않을 듯 하다. 물론 벤야민 전문가들은 이 책의 내용들을 빗금을 따라 잘 오려내어 색깔별로 도화지에 붙이듯 분류하고 정리할 수 있다. 또한 이후 그의 책에 나오는 내용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가 갖는 의미를 배치 할 수도 있다. 이 책의 역자는 해제에서 친절하게 그런 내용을 언급한다.
<일방통행로>는 단순한 꿈과 기지에 찬 아포리즘들의 모음, 아방가르드적 산문형식의 특이한 실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 폭발력을 갖는 벤야민의 중후기 사유의 모티프들이 응축되어 있는 책이다. ...(중략)... 그 모티프들 가운데서도 특히 정신/의식/인식 대신 신체/감각/경험, 의지,개념적 인식 대신 이미지(를 통한 신경감응), 예술의 (자율적,영역적 성격 대신 기술 (내지 영영 없는 예술)이 벤야민의 아방가르드 미학과 정치학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데.....<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p60
내용인 즉 1924년에 나온 이 '독특한 비학문적인 저술'에서 우리는 그 뒤에 펼쳐질 벤야민 사상의 맹아들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브레히트로 부터 영향을 받은 유물론적 세계관, 초현실주의자적인 아방가르드 미학, 기술낙관론적 매체관, 또한 유대 신비주의적 경험, 이것들이 정치학과 결합되는, 다분히 모순적이지만 그만큼 다양한 해석가능성을 제시한 벤야민의 상이 이 책에서 본격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대도시를 여행하면서 일단의 사유이미지들을 얻어낸다. 그가 이 책의 제목을 <일방통행로>라고 지은 것은 도시의 철학자, '파사쥬'의 철학자 벤야민으로서는 일관성이 있어보인다. 그의 최후의 대작 <파사쥬>는 <일방통행로>의 아이디어와 소묘들을 더욱 확장하고 세밀하게 만들어낸 것이라는 말도 있다. 그렇다면 벤야민은 어떻게 도시를 여행했을까? 김유동은 <발터벤야민의 새로운 천사>라는 글에서 그의 여행방식과 독해의 어려움을 이렇게 말한다.
그는 자신을 수동적인 수용기관으로 만들어 외부 세계의 떨림과 변화를 지진계에 기록한다. 그러나 그 지진계에 그려진 형상들을 판독하는 것은 문학 작품의 형상들 뒤에 숨은 의미를 천착해 들어가는 작업만큼이나 쉽지 않다. <아도르노와 현대사상>p32-33
일단 이 책의 구성을 있는 그대로 따라가보자. 벤야민이 애정을 둔 감각인 '시각'만큼이나 이 책은 '시각적' 이다.'시선은 한 인간의 마지막 부분'이라고 벤야민은 말할 정도이다. 그렇지만 이 '시각적'이라는 것이 1차적 감각의 전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의 몸을 통해,그의 시선을 통해 드러온 감각들이 그의 세밀한 지진계와 화학반응을 불러 일으켜서 전달되는 방식이다. 그래서 어떤 글들은 실끊어진 미노타우루스의 동굴같이 더듬거리게 만든다. 벤야민은 이 책을 그의 연인에게 헌사했다. 벤야민의 세계는 그녀 아샤 라치스를 만나면서 모종의 전환을 이룬다. 벤야민은 여행을 통해서-대도시를 어슬렁거리며- 급속히 변해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와 각종 인상들을 머릿 속에 스케치한다. 그의 시각이 특이했던 것은 그가 확대경을 쓰지 않고 현미경으로 작업했다는 것이다. <발터벤야민>이라는 얇은 평전을 쓴 몸메 브로더젠은 발터벤야민의 작업을 '일상의 현상학'이라고 표현했다.
가장 일상적인 것 아래에 뚤려 있는 가장 깊은 갱도의 바닥에는 얼마나 무시무시한 골동품 보관소가 놓여 있는 것일까? <일방통행로>p72
상상력이란 무한히 작은 것 속으로 파고 들어갈 줄 아는 능력이고 그 모든 집약된 것 속으로도 새로운,압축된 내용을 풍부하게 부여할 줄 아는 능력이다. <일방통행로>p 116
중요한 것은 '일상의 증후'라는 것이다. 그가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에서 바라보고, 생각하고, 토로하는 것들은 20세기 초 독일의,또는 자본주의 사회의 현상들과 그 안의 인간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관계성 속에서 파생되는 영역들'즉 세기초의 혼란을 겪은 총체적인 사회와 인간의 증후들을 철학적으로, 형이상학적 이미지로 구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일방통행로> 초반부에 등장하는 소재들을 보자.
첫 글은 '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보다는 사실에 훨썬 더 가까이 있다.'로 시작되는 '주유소'이다. 이어서 '아침식당','지하실','중국산 진품','문방구','유실물보관소' 등등이 벤야민이 걷는 일방통행로에 배치되어 있던 공간이다. 벤야민은 이 공간을 유유자적 산책하면서 연신 샷터를 눌러대는 사진작가처럼 행세한다. 짐짓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처럼 때로는 심각하게 두 손으로 사각프레임을 만들어 구도를 제어보고, 때로는 접사를 위해 피사체에 가까이 다가간다. '독일의 인플레이션' 을 찍던 사진가는 잠시 담배를 피우면서 '책과 창녀의 공통점'에 대해 생각하다가, 또 '플라토닉 러브'에 대해 단편들을 이어 간다. 이 모든 것들이 그의 사진기 안에 담기는 (철학적)이미지들이다. 벤야민가 찍은 '주유소'에는 달려와 카드를 요청하는 감찍한 아가씨도 없고 '천문관 가는 길'에는 친절한 관측 해설가 선생님도 없다.
벤야민은 '예술의 정치화'라는 측면에서 기술문명이 가져다주는 영상문화의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이 책 곳곳에는 그런 단초들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부지를 임대함>을 보자.이 글은 비평과 광고 그리고 영상미학에 대한 단상이 주를 이루는데 '비평의 적당한 거리두기' 대신 새롭게 등장한 광고와 영화에 대해 말한다.그는 '더 이상 아무것데도 놀라거나 감동 받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극장에서 다시 우는 법을 배우는 것 처럼' 이라는 말로 그 의미를 말한다. '다시 우는 법'이라는 것은 벤야민의 개념어로 표현하면 '충격'이며 공감을 통한 '미메시스' 에 해당하는 것이다. 물론 벤야민은 이 관계 속에 자본주의적 관절이 있음을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새로움'으로서의 영상이라는 텍스트의 가능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궁극적으로 광고를 비평보다 그토록 우월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빨간색으로 반짝이며 흐르는 전광판 글자가 말해주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아스팥트의 물웅덩이 위에 반영된 그 글자의 붉은 빛이다' <일방통행로>p139
벤야민은 어떤 확고한, 아날로그적, 영속성보다 단절과 정지가 주는 '충격'개념을 중요시했다. <두번째 안뜰 왼편, 마담 아리안느>라는 글에 이를 예견하는 표현이 있다.
정신의 깨어 있는 상태(정신집약)야말로 미래의 진핵이기 때문이다. 순간에 일어나는 일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저 멀리 놓여 있는 것을 미리 아는 것보다 더 결정적이다. <일방통행로>p153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영화'라는 매체를 '아우라붕괴' 시대의 새로운-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미학의 증거품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벤야민은 특히 에이젠슈타인의 소비에트 몽타쥬-충돌의 몽타주같은-것들을 이런 '충격'의 예술적 표현방식으로 읽고 있다. 즉 파편화된 이미지들의 충돌을 통해 인식에 어떤 '충격'을 가하고-벤야민은 지식인의 글쓰기란 '화재경보기' 여야된다고 믿었다.-그런 '정지상태'를 통해 무겁게 가라앉고 있는 세계를 건져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충격은 붕괴를 이끈다는 사실이다. ... 충격을 약속하는 그 사람들이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멈춤의 순간까지도 인정할 의사가 있겠는가? <사유이미지>p194
우리가 할 일은 엔진에 다다가서 그 뒤에 윤활유를 쏟아 붓는 것이 아니다. 숨겨져 있는 그러나 반드시 그 자리를 알아야 할 대갈못과 이음새에 기름을 약간 뿌리는 것이다. <일방통행로>p70
이외에도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의 속에는 벤야민의 '충격','정신산만','도취','환등상' 등의 미학적 개념들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나 해방을 위한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고민들이 툭툭 불거져 나온다. 또 그의 비평과 철학에 대한 태도, 이론과 현실의 상호 개입문제, 글쓰기,꿈, 대중, 사랑,자연 등등의 문제들이 길거리에 부딪히는 군중들처럼 삶의 한복판으로 뛰어든다.
그렇지만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를 모두 학문적으로 제대로 해석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런 정본 해석이 있을리도 만무하지만, 그 난해함을 좀 이겨 내며 순간 순간 보여지는 그의 그림자를 보는 것 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흥미롭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정말 기술적이지만 - 처세의 아포리즘이 아니라 다른 사유를 관통할 수 있을 벤야민의 아포리즘을 통해 잠시라도 문장을 부여안고 고민할 수 있는 시간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침묵의 시간만큼 '충격'의 와인은 익는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의 아포리즘 하나 하나를 실험적인 단편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 어떻게 형상화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봤다. 이미 어떤 알레고리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상영을 마친 것들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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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에 등장하는 인용문들은 무장을 하고 나타나 한가롭게 지나가는 행인에게 확신을 강탈하는 도쩍떼와 같다 <재봉용품>
생각된 그대로 표현되는 진실보다 더 가련하게 있을까. 그런 경우 종이에 적힌 그 진실은 질이 나쁜 사진보다 못하다. 진실은 우리가 카메라의 검은 수건 밑에 웅크리고 있을 때에는 활자의 렌즈 앞에서 조용히 그리고 정말 친절하게 바라보기를 거부한다.....'글을 쓴다는 것'은 그러한 경고음을 작동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긴급 기술 지원대>
우둔함과 비겁함으로 점철된 독일 시민의 생활방식을 일상적으로 드러내는 화법 중에서도 특히 생각해볼만한 것은 절박한 재난에 대해 말하는 화법이다. '이런 식으로 더 이상 안된다'는 말이 그것이다. 뾰족한 대책없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안정과 소유 관념에 매달려온 일반 시민들은 지금 상황이 전적으로 새로운 안정성이 지배하는 상황임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 .... 도처에 생에 대한 이론과 세계관이 넘쳐나는데 이 이론들은 종국적으로는 거의 언제나 진부하기 짝이 없는 개인적 상황을 인준하는데 봉사하면서 이 땅에서 오만한 행세를 하고 있다. <카이저 파노라마>
성취는 오로지 이 의심과의 연관속에서 즉 구원,결단의 형태로만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성취가 이러한 형태로 실현되자마자, 벌거벗은 순전한 성취 자체에 대한 새로운 참을 수 없는 동경이 순식간에 들어선다. <한번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 속에 지니고 다니는 자신의 본질에 대한 소위 내적 이미지라는 것은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순전한 즉흥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그 이미지는 그 이미지 앞에 들이대는 마스크에 전적으로 정향해 있다. 세계는 그와 같은 마스크의 저장고이다.<사람들이 우리에게 예언한 것들에 대한 믿음에 대하여>
그것의 밀려나 있고 움츠려든 충만 속에서 '삶의 정오' '여름정원'속의 사상가인 차라투스트라의 시간이 도래한다. 왜냐하면 인식은 자기 궤도의 정상에 다다른 태양이 그런 것처럼 가장 엄격하게 사물들의 윤곽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짧은 그림자들>
누군가를 아무 희망없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사람을 제대로 안다. <아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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