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성공과 좌절>이 나왔다. 대통령 사후 그가 회고록을 준비중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많은 사람들이 이 회고록을 통해 노무현의 고민과 좌절, 그리고 꿈을 이해하고자 했을 것이다.  

<한겨레 신문>에서는 이 책의 출간 소식과 함께 간략하게 이 책에 대한 소개를 남겼다. 

 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77905.html

주요 대형서점을 비롯해서 인터넷 서점에 한 동안 <성공과 좌절>이 한 자리를 크게 차지할 성 싶다. 알라딘 미리보기에서 본 노무현의 회고록 구상이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각각의 질문들은 사실 노무현 대통령 혼자만 고민해야 할 몫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과 함께 그가 던진 질문에 대하여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이 회고록이 제 의미를 찾을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은 '나의 실패가 여러분의 실패는 아니다.' 라고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다. 영웅사관을 걷어차고 여러분 각자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라고 충언한다. 고인에 대한 아쉬움과 또 역사적 평가는 제각각 일 수 있다. 과도한 비난도 과도한 기대도 모두 '여러분의 역사'를 만드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미 노무현은 지난 역사의 교사이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든 노무현을 반복할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은 없어도 된다라고 말한다. 자유주의적 대의제 전통에 의하면 개인의 선험적 권리는 위임된다. 대의제는 기본적으로 권한의 이양에 근거를 둔다. 그런 틀 안에서 위임받은 권리를 포기하는 발언처럼 들린다. 그로 인해 비판도 있었고 그 비판에도 적실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포커스를 조금 돌려 긍정적으로 이해한다면 대통령은 -너무나 고전적이게도- 권리가 인민들에게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대통령이 움직이는게 아니다.' 라는 말은 원론적이지만 다시금 반복해서 강조해야 하는 대목이다. 

'투표장에서만 권리의 소지자'가 되는 시민은 결코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없다. 구체적인 정치 현안에 대한 입장은 잘 모르겠으나 그가 정치,역사, 시민들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들은 지극히 원론적이고 상식적이다. 그래서 그것이 마치 교과서에나 있는 이야기인 양 취급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를 두고 '바보 노무현'이라고 했다면 그가 그런 교과서적 가치들을 잊지 않고 삶의 원칙으로 지켜나가고자 했다는 것일게다. 그 일은 '바보 노무현'이란 대단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가고 있었고, 또 현재도 가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노무현은 그들 중에 한 사람이었고 또 그런 사람 중에서 가장 많은 권한을 위임받았던 사람이다. 

...노무현을 넘는 것은 결코 그를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도 나를 넘으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 옛시절에 판소리 스승들은 자기와 똑같은 소리를 낼 줄 아는 제자를 결코 최고로 치지 않았다. 그런 판박이 소리를 '기생소리' 라고 하여 2류 3류 취급했다. 스승으로 부터 배우고 그를 넘어 자기 스스로의 역사를 만든 제자만이 스승의 최고 제자로 인정받았다. 그런 마음으로 세상에 임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오만함이 필요하지않을까?  니체의 '초인'이 뭐 별건가...기존의 세계를 해체하고 자기의 세계를 만든 사람이 '초인'이다. 쥬얼리가 그러지 않던가..."그대가 슈퍼스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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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중에서 <심청가>는 '청승' 그 자체다.  <심청가>를 듣다보면 정말 우울해진다. 경증의 우을증이 발동할 정도다.(이건 내 경우 진짜다)...심청가는 처음부터 운다. 곽씨부인이 죽고, 눈먼 장님은 젓동냥 다니고, 어린 청이는 아버지를 위해 구걸다닌다. 결국엔 인당수까지 간다. 당시 민중들의 소설적 염원이 발현된 신화적 구재가 아니라면 이건 비극 그 자체다.  

어떤 다큐멘터리들은 정말 보기가 힘든 것들이 있다. 언젠가 mbc드라마넷의 <해바리기>라는 프로그램에서 본 ARC 증후군의 동건이 이야기는...나는 중간에 도저히 보지 못하고 여러번 채널을 옮겼다...지금도 다시 볼 자신이 없다. 판소리 <심청가>가 그런면이 있다.. 옛 명창 중에는 나이가 들어 판소리 <심청가>를 피한 사람도 있다. 홀로된 자신의 처지가 자꾸 투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그래도 쥐어짜는 슬픈 사설을 계면조에 싣어 창으로 하니 오래전 판소리 청자들이 어찌 울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온갖 매체의 혜택을 입은 나 역시 우울하게 되는데 말이다. 지금보다 훨씬 사실적인 공감을 끌어내는 울음이었을터.... 

버려지는 아이들과 버릴 수 밖에 없는 사연...그리고 다시 찾는 아이들과 다시 찾기를 기다리는 염원... 기사를 읽다 코끗이 징해진다. 산다는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모두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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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레시안에 난 기사를 옮깁니다.** 



"제 딸 '난희'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김상수 칼럼]그 시절,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딸을 버리진 않았다


기사입력 2009-09-17 오전 9:3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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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나는 서울이 발신인 낯선 분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나에게 메일을 보낸 분은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배광옥입니다"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문장으로 내용이 시작됐다.

8월 25일 여기 프레시안에 칼럼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미술작가이자 이론가, 대학 강의전시기획 분야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프랑스 국적의 한국인 '다프네 낭 르 세르장(Daphné Nan Le Sergent - 한국명, 배난희(裵蘭姬))에 대해서 글을 쓴바 있다.(관련 기사 : 정말 가난해서 저를 버렸나요?)

지난 6월 프랑스 파리에서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자신의 부모를 찾아 34년 만에 한국행 비행기를 탈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질문했다 "서울을 가면 저를 낳아준 부모님을 찾을 수 있을까요? 서울에 홀트아동복지회에 영어로 편지를 써서 보내봤지만 아무런 답신이 없었어요."

나는 어떤 확신도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수많은 해외 입양아들이 성장이후 부모를 찾아 한국을 방문하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정작 부모나 일가친족을 만나기란 너무나 어렵다는 얘기를 익히 듣고 있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34년 만에 딸이 생부를 서울에서 곧 만나게 됐다. 그간 있었던 배난희의 이버지 '배광옥'(64) 씨가 그의 딸 배난희를 찾았던 노력들이 이제 드디어 결실을 이루었다고 해야 더 정확하다.

프랑스 이름 '다프네', 원래 이름은 배난희인 그녀의 아버지 배광옥 씨는 나에게 보낸 이메일 편지에서 말하기를 "딸 난희가 추후 한국을 방문하여 친부모를 찾을 경우에 대비하여 홀트회에 연락처를" 남겼는데, "주소나 전화번호가 바뀌게 되면", "홀트회를 찾아 나의 정보를 변경하곤 하였습니다."

바로 그랬다. 생부의 예상대로 이 노력이 주효했다.

그리고 34년 전 그는 비록 딸아이를 해외에 입양 보낼 수밖에 없는 당시 처지였지만, 그는 딸과 헤어져 있는 긴 시간 동안 한시도 딸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나는 배광옥 씨의 메일에 즉시 답을 하면서 딸과의 만남이전에 하루라도 빨리 아버지와 딸이 소통할 수 있도록 딸의 프랑스 이메일 주소를 먼저 알려주었다.


▲ ⓒ김상수
그리고 나는 "난희 씨의 아버님께서 30년도 그 이전에, 어려운 사정에 처하여 아기를 해외로 입양시킬 수 밖에는 없었겠지만 그나마 주소와 전화번호를 홀트아동복지회에 꾸준히 남겨두신 일은 참으로 훌륭하신 판단이었습니다. 두 분의 만남을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부탁이 있습니다. 수많은 해외 입양아들이 부모를 찾아 한국을 찾지만 허탕을 치고 돌아간답니다. 부모들이 아기를 복지회에 맡긴 이후에, 난희 씨의 아버님처럼 변경된 전화번호나 주소를 복지회에 계속해서 남기면 다행이지만 대개의 경우에는 이런저런 사정상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두 사람의 만남은 아버님의 성실함에 전적으로 기인합니다. 이는 귀감이 되고 남습니다. 아기를 복지회에 넘겼지만 주소나 연락처가 변경될 때마다 계속 복지회에 연락처와 기록을 남긴다면 오늘 같은 만남의 기적도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같은 처지에 놓인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기를 나는 바란답니다. 아버님이 보내주신 서신이 비록 개인적인 서신이지만 이 서신을 <프레시안>을 통해 공개하여 수많은 비슷한 입장에 처한 사람들에게 소중한 교훈이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고 메일을 보냈다.

곧 난희의 아버지로부터 답이 왔다. "지금은 아련하기만 한 지나간 날들이 얼마나 눈물을 흘렸던 시간이었던지 이젠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80년대 초반 업무 차 김포공항을 찾을 때마다 많은 아이들이 입양 차 떠나는 현장을 목격하며 나는 소리 없이 울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울지 않겠습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딸 난희가 훌륭한 모습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그동안 난희에게 쏟아주신 관심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의 두서없는 글이 다른 입양인들에게도 귀감이 된다면 어디에 공개하셔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능하시다면 우리의 난희를 계속 보살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서울에서 배광옥 올림."

나는 배광옥 씨의 정중한 개인 서신을 그 분의 허락을 받아 여기에 공개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래서 해외 입양아들이 부모를 찾아 한국을 다시 찾아왔을 때, 배광옥씨처럼 연락처나 주소가 변경되어도 계속해서 자신의 처지를 아기를 넘긴 복지회 등에 기록으로 남겨, 언젠가는 반드시 귀중한 만남들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다.

"김 상 수 선생님

나는 서울
성북구에 거주하고 있는 배광옥(64세)입니다

나는 충청남도
광천에서 태어나 학업과 군복무를 마친 1973년 일자리를 찾아 단신 상경하여 지인의 도움으로 한강변에 위치한 아파트 건설현장의 경비원으로 취직을 하게 되었고, 이듬해인 1974년에 김순희(金順姬)를 아내로 맞아 달동네인 동대문구 면목동의 단칸방에 행복한 가정을 꾸미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나는
결혼 4년 전인 1970년에 맞나 그 동안 서로 인생의 반려자로 사귀었고 진정한 사랑을 토대로 맺어진 결혼생활은 비록 도아 주는 사람 하나 없는 낮선 서울이었지만 우리들만의 천국에서 지내왔던 시간들은 지금도 내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겨울이면 윗목에 놓아둔 물그릇이 밤사이 얼음으로 변해있었고, 300m가 넘는 산 아래 미끄러운 비탈길까지 내려가 물을 길어오는 일, 언젠가 잠든 밤에 연탄
가스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와 고생한 생각, 비만 오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로 인하여 부엌의 그릇이 총동원되기도 하였고, 그릇에 떨어지는 물방울소리가 우리의 사랑을 축복하는 화음소리로 들으며 밤을 새웠던 추억, 여름철 뒷산에서 내려오는 모기떼와의 싸움, 다닥다닥한 방문 앞의 고약한 화장실 냄새 등, 정말 열악하기만 한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사랑이 있었기에 어떤 불편함도 극복할 수 있었고, 그 보다 더한 어려움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쉬는 날이면 근교 산에 올라 먼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향수를 달래기도 하였고, 가끔 동네 시장에 들려 아내가 좋아하던 순대, 떡볶이, 오뎅 등을 나누어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또 밤이 되면 중랑천 뚝방에 앉아 물에 반사되는 불빛을 바라보며 아내가 좋아하던 노래를 같이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행복한 결혼 생활의 축복 속에서 아내는 어느덧 아이를 갖게 되었고, 사랑의 결실, 우리의 귀여운 아이가 태어나는 날 만을 고대하며 우리는 아기를 위하여 무었을 어떻게 해줄 것인가 하는 행복한 고민을 이야기하는 것도 우리 일과의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1975년 6월 18일, 아침 무렵부터 아내의
출산진통이 시작되었습니다. 고통스러워하는 아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습니다. 의사는 진찰결과 예상하지도 못했던 임신중독이라는 진단과, 제왕절개 수술을 하지 않으면 산모가 위험해 질 수 있다는 심각한 이야기까지 해 주었습니다. 임신말기 다리가 조금씩 부어오르는 증세는 임산부 대부분에게 발생되는 일반적인 현상이고 의사들은 산모가 출산차 병원을 방문하게 되면 많은 진료비를 받아내기 위하여 관행적으로 제왕절개 수술을 유도한다는 이웃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바 있는지라 의사의 수술권유에 대한 불신이 당시에는 매우 컸습니다.

그리고
수술비를 마련해야 한다는 금전적인 부담은 어리석은 판단으로 유도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아내도 수술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는지 집으로 그냥 돌아가기를 희망하여 설마 아내에게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하는 안이한 생각을 가지고 귀가하게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한동안 괜찮던 아내의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지더니 고통이 점점 심해지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이웃 아주머니의 소개로 근처 조산원을 찾게 되었는데 담당 산파는 오전에 병원에서
상담했던 내용들과 현재 산모의 상태를 살펴본 후 그렇게 심각한 정도는 아닌 것 같으니 자기네 조산원에서 출산할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또 조산원 2층에는 병원(산부인과)이 있어 만약 응급상황이 발생한다 해도 신속히 대처할 수 있겠다는 안도감으로 조산원에서 아이를 출산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아내는 시간이 지날수록 산고에 따른 신음의 간격도 빨라지고 또 그 소리도 점점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그 고통에 대하여 대신하거나 나눌 수 없는 나는 괴로워하는 아내의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고 한없이 초라한 존재였습니다.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것으로 현재의 심정이나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하였습니다. 아내의 진통은 한동안 이어지고 이러기를 세 시간 여, "앙!∼" 하는 아이의 힘찬 울음소리가 들리고 드디어 새 생명이자 나의 유일한 혈육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이때 병실의
시계는 밤 10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땀에 흠뻑 젖어있는 아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출산의 고통을 참고 견디면서 아이를 출산한 아내가 무척 대견하고 사랑스럽게 보였고, 아무리 첫 아이라 힘들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 심한 고통이라면 첫 번째 아이로 만족하고 말겠다는 마음속의 다짐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출산직후 계속 이어져야 하는 후산이 진행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조산원의 담당산파는 산부인과 의사와 전화로 무엇인지 상의하고 아내는 즉시 2층의 산부인과 병실로 옮겨지게 되었고 몇 병으로 헤아려지는 수혈이 진행되고 후산과 관련된 의사의 조치가 가해지는 순간, 아내는 많은 양의 피를 하혈하게 되면서 얼굴은 차츰 백지장처럼 변하고 있었습니다. 당황한 의사는 자신으로써는 감당할 수 없음을 판단했음인지 산모를 신속히 종합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결정을 하고 아내를 도심의 병원으로 이송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시만 해도 흔치 않았던
앰뷸런스를 불러 환자를 이송한다는 것은 아내의 현재 상태나 시간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그래서 급한 대로 택시를 이용하기로 하였는데 자정이 넘은 시간(당시만 해도 자정에서 새벽4기까지 통행금지 제도가 있었음)에 택시잡기가 용이하지가 않았습니다.

마침 일을 마치고 차고로 돌아가는 택시를 세워 정황을 설명하고 간곡히 부탁한 결과, 고마운
운전사는 흔쾌히 자동차 문을 열어주었고, 택시안 내 가슴에 안겨있는 아내는 편안하게 잠든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가느다란 신음소리만 현재의 고통을 표현하는 것 같았습니다.

"여보! 조금만 참아"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어서 빨리 병원에 도착하여 무사하기만을 기원하고 있는 나의 심정과 아내의 위급함을 알았는지
운전기사는 나름대로 속력을 높여 질주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자동차의 속도는 한없이 느리게만 느껴져 나도 모르는 사이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였습니다.

산부인과를 출발하여 도심 병원의 응급실 병상에 도착하기까지 약40여분, 의사는 진단결과 이미 숨을 거둔지 10여분이 경과하였다는 청천병력과 같은 이야기와 의료진 몇 사람이 달려들어 여러 차례 걸친 소생술을 시도하였으나 아내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저 세상 사람이 되고만 것입니다.

"하느님! 이 세상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어찌하여 저의 아내를"

하늘이 무너지고 모든 세상이 뒤바뀌는 심정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지나가는 자동차에 뛰어들고 싶은 나의 충동을 알았는지 동행했던 산부인과 의사는 항상 나의 곁에 있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사랑하는 아내는 나의 곁을 떠났고, 아내의 시신은 화장 후 평소에 자주 찾았던 북한산 바위에 올라 하얗게 부서지는 아내를 바람 속으로 날려 보내며 이제는 고통과 시련이 없는 편안한 하늘나라에서 영면하기를 빌었습니다.

아내의 장례를 마친 후 깜깜한 방안에서 한없이 울고 있는 어린 핏덩어리를 안고 3일간을 곰곰이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나의 무능함과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아내를 저 세상으로 보냈구나 하는 죄책감과 아내 없는 막막한 이 세상에서 혼자 살아서 무엇을 하겠는가 하는 생각들이 나도 아내 곁으로 가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옆에서 우는 아기에게 우유병을 물려주는 순간마다 비겁하기만 한 생각들에 채찍이 되어주곤 하였습니다.

아기는 나의 유일한 혈육이자 아내가 떠나면서 나에게 남겨준 마지막
선물이다, 그리고 아내가 없는 이 세상에서 아기만이 아내를 대신하는 유일한 나의 가족이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의 아버지로써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러나 무슨 수로 이 아이를 부양해야 하나 하는 현실과 관련된 대책에는 아무런 해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얻은 결론은 해외입양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발생된 고아나
미혼모 아이들의 해외입양을 주선하기 위하여 종교단체입양기관들의 성실한 노력으로 좋은 결실들을 보이고 있었고 이에 따라 해외입양에 대한 사회 인식도 비교적 좋은 편이었습니다.

또한 한국 보다 훨씬 잘살고 있는 유럽이나 미국 같은 선진국에 입양을 보낸다면 성장해 가는 아이의 앞날도 훨씬 좋은 환경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은 아기를 멀고 먼 해외로 보낸 후 어쩌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는 걱정들을 떨쳐 버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저 어린 핏덩어리를 어떻게 지금 보낼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은 입양의 실행에 있어 또 다른 문제로 나를 혼란스럽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1년이나 2년 이후로 입양을 미룬다면 그때 다시 입양 여부에 대하여 결정하여야 하는 새로운 괴로움이 따를 것이고, 이이를 키우는 동안 맺은 정을 떨쳐 버린다는 것은 더욱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어쩌면 입양을 영원히 포기해야 한다는 경우가 올 수 있다는 생각과 무엇보다도 남자 혼자 생업에 종사하며 핏덩어리에 가까운 아이를 키운다는 것도 내가 처한 현실로 보아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해외입양을 결정한 지금은 하루라도 빨리 보내는 것이 최선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최종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의 해외입양을 신속하게 결정하고 홀트아동복지회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 아이의 이름은 배난희(裵蘭姬)-

난초蘭- 계집姬-

蘭 : 난초는 온갖 풍상과 역경 속에 피어나는 우리나라 전래의 꽃임과 동시 꽃이 고아하고
향기가 그윽한 절개의 상징으로 조상들로부터 사군자 중에 가장 사랑을 받은 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姬 : 엄마의 이름(金順姬)중 마지막 姬자를 붙여주어 엄마를 기리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뒷 글자로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생년월일은 1975년 8월 18일- (홀트회에서 옮겨 적는 과정에서 6월 19일로 잘못 기재된 것으로 판단됨)

기타 태어난 장소 등 아기에 대한 나머지 정보들을 홀트회에 제공한 것으로 생각나지만 정확하게 어떤 정보를 어떤 내용으로 제공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고 있습니다.

잠시 늙으신 홀어머님이 당신께서 직접 난희를 키우겠다고 하시며 해외 입양을 만류하셨지만 저는 어머님의 뜻을 거역하는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난희를 떠나보냈고, 이후 난희의 해외 입양과 관련된 정보는 아무것도 확인 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다 홀트회에 문의를 하게되면 전혀 확인해 줄 수 없다는 냉랭하고 사무적인 메아리로만 되돌아 올 뿐 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것들이 난희의 해외입양 생활에서 혹시 있을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들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업무상 필요한 조치였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난희를 떠나보낸 후 괴로운 심정으로 한 달 정도를 술로 살았습니다. 날이 새면 아내생각, 그리고 술이 깨면 난희 걱정,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자책의 괴로움을 이겨낼 수 없었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아내와 아이의 환영으로 잠을 이룰 수 가 없었습니다. 어쩌다가 꿈속에서 아내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나는 소리를 지르며 아내를 불러 댔고, 차츰 멀어 가는 아내를 따라가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폐인이 되어 가는 아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셨는지 늙으신 어머님께서 상경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소식을 들은 친구 몇 명이 우리 집에 찾아와 나와 생활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이성과 냉정을 되찾게 되었고, 앞길이 구만리 같은 나의 앞날을 위하여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각오는 나를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 태어나게 했습니다.

다음 해에는 새로운 아내를 맞이하여
재혼도 하였고 새로운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들과 딸을 두게 되었습니다.

재혼 이후 열심히 노력한 20여 년, 어느 정도 생활에 안정을 찾게 되었고, 해외입양을 떠나보낸 난희의 소식이 궁금하고 걱정하는 정신적인 여유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취지에서 다시 찾은 홀트회는 모습이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우선
사무실의 규모도 그전에 비해 많이 축소된 것 같았고 담당직원은 종전과는 달리 나의 질문에 대하여 비교적 성실한 것 같았습니다. 확인된 것은 난희가 프랑스로 입양되었지만 나머지 사항들은 자신들로서도 알 수 없다는 답변과 프랑스 입양아 모임인 "한국의 뿌리"라는 단체가 있다는 사실도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입양아의 현실과 난희나 양부모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여 아무리 친부모라 해도 먼저 찾는다는 것은 아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충고도 해 주었습니다. 오로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난희가 추후 한국을 방문하여 친부모를 찾을 경우에 대비하여 홀트회에 연락처를 남기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후 입양아들이 대부분 여름철에 고국을 찾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의 주소나 전화번호가 바뀌게 되면 여름철 씨즌이 오기 전에 홀트회를 찾아 나의 정보를 변경하곤 하였습니다.

몇 년 전에는 아시는 신부님께서 프랑스에 방문할 일이 있으시다 하여 사정이야기를 드렸습니다. 마침 파리 시청에 아시는 분이 있어 프랑스 방문기간 동안에 한번 알아보겠다 하시어 난희의 인적사항과 입양아 모임인 "한국의 뿌리"회(당시회장, 미쉘 수스만스키)에 대한 알고 있는 정보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여러 가지 노력을 하셨지만 그러나 딸의 소식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어찌해야 난희를 볼 수 있을 것인가?


▲ ⓒ김상수
그러던 2009년 9월 7일, 뜻 밖에도 홀트회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난희가 지금 한국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습니다. 아니면, 내게 전화를 걸고 있는 사람의 진정한 의도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난희가 한국에 와있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더구나 난희가 나를 찾고 있다는 사실은 내 일생 최대의 신선한 충격으로 자극되어 한없는 눈물이 나오기만 합니다.

난희와 나는 9월 28일 홀트회의 주선으로 상면하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난희는 그 때까지 한국을
여행한다는 것이고 누구의 안내로 어디를 다니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지내고 있는 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난희가 한국에 와 있는 현실에도 지금은 아버지로써 딸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홀트회에 문의해 보아도 난희와 관련된 정보 등을 알려 줄 수가 없고 상면 시에 직접 확인하라는 답변뿐입니다. 심지어 프랑스 이름까지도 말입니다.

컴퓨터를 열심히 뒤졌습니다.

다행히 선생님께서 쓰신 프레시안에 칼럼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모습으로 성장해 있는 난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는 지금 가슴이 벅차 있습니다. 그동안 꿈속에서나 상상했던 사랑하는 나의 딸 난희를 그려보며 직접 만난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앞서기도 합니다.

그 동한 외로운 이국땅에서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응어리진 것을 가슴에 앉고 있었을 난희의 원망스런 시선 앞에 나서서 용서를 빌기가 한없이 두렵기만 합니다.

나는 이것을 감수함과 동시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어 소통의 장벽 속에 난희를 떠나보낼 수뿐이 없었던 절박한 당시의 상황을 꼭 이야기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설사 난희를 맞나보지 못한다 해도 이제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나는 난희의 훌륭한 모습을 이미 사진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난희에게 반드시 들려주어야 했고, 하고 싶었던 여러 가지의 이야기들이 언어의 장벽으로 모두 전달되지 못한다 해도 이제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눈빛으로
대화가 가능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몇 마디의 이야기로 전해줄 수 없었던 사연들은 진한 핏줄이 모든 것을 덮어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칼럼에 게재된 난희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눈매는 나를 닮은 것 같지만 입 주변의 모습들은 엄마를 보는 것 같습니다. 엄마가 생시에 좋아했던 진달래색
립스틱을 난희도 좋아했으면 좋겠습니다. 난희의 모습을 선생님이 쓴 칼럼 속에서 다운로드 하여 지금 내 컴퓨터 바탕화면에 올려놓았습니다.

난희를 떠나보내고 난 겨울 석유난로가
전복되는 주인집 화재사고로 가옥 전체가 소실되고 방안의 가재도구도 모두 불타 버렸습니다. 이때 나의 사진들도 함께 불타 버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는 언제든지 귀여운 난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꿈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난희 엄마의 생전모습을 직접 본 것 같아 무척 행복합니다.

이제는 난희를 이렇게 훌륭한 사람으로 키워주시고 보살펴주신 프랑스에 계시는 양부모님을 찾아 정말 감사하다는 인사도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스럽고 대견스런 난희의 발전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어떠한 노력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행복한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선생님! 두서없는 글이지만 끝까지 읽어 주시어 대단히 감사합니다.

2009년 9월 11일

대한민국 서울에서 배 광 옥 올립니다."

오는 9월 28일, 34년간 그 기나긴 간난(艱難)의 세월을 지나 드디어 두 사람은 절절(切切)한 만남의 시간을 갖는다. 나는 이분들의 상봉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베를린에서

김상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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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음반은 알라딘에 거의 없다..  

정권진의 <심청가>, 강도근의 <흥보가> 사진이다. 강도근의 <흥보가>는 앨범 자켓이나 만듦새가 영 아니다. CD 1장이 한 트랙이라니...아무리 완창이라도 이건 너무 무성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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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모차르트 : 피아노 4중주 K.478, 493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작곡, 폴 바두라-스코다 (Paul / Arcana / 2009년 6월
23,700원 → 19,900원(16%할인) / 마일리지 200원(1% 적립)
2009년 09월 18일에 저장
품절
[수입] 안톤 브루크너 - 교향곡 5번
안톤 브루크너 (Anton Bruckner) 작곡, 필립 헤레베헤 (Philippe Her / Harmonia Mundi / 2009년 6월
23,200원 → 19,500원(16%할인) / 마일리지 200원(1%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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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바흐: 푸가의 기법 - 카알 리스텐빠르트 [2CD]- [이 한 장의 역사적 명반]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작곡, 리스텐파르트 Kar / 워너뮤직(WEA) / 2009년 7월
16,000원 → 13,400원(16%할인) / 마일리지 140원(1%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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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황병기 - 가야금 작품집 제5집 : 달하 노피곰 (Darha Nopigom)
황병기 연주 / 씨앤엘뮤직 (C&L) / 2007년 5월
16,000원 → 13,400원(16%할인) / 마일리지 140원(1% 적립)
*지금 주문하면 "5월 9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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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451 환상문학전집 1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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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451>의 세계는 평화롭다. '평화롭다'는 것이 핵심이다.모두 행복하다. 이게 핵심이다. 이 둘은 동서양과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가장 원하는 미래상이 아니던가. 여덞가지 어려움(불교에서 말하는 '팔고')의 세상 속에 고립무원으로 던져진 인간에게 '평화와 행복'만큼 간절한 것이 어디있겠는가? 그래서 <화씨 451>의 세상은 표면적으로 평화롭고 또 행복하다.  

그런데 

이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이 좋은 평화와 행복은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라는 질문이 봉쇄되고 억압되는 한에서만 만들어지는 위선적인 평화와 행복이기 때문이다. 배부른 돼지는 용납되지만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권력에 의해 차단당한다. 의문을 갖는 행위, 다르게 생각하는 행위, 즉 철학하는 행위 자체를 아예 막는데 디스토피아적 세계의 묘미가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질문하지 않는다.' 

방화수 몬태그에게 이웃집 사는 소녀 클라리세가 이런 말을 한다. 

"제가 질문을 하면 그냥 생각 없이 금방 대답을 하시고, 대답을 생각해 보려고 걸음을 멈추거나 하시진 않았거든요." 그리고 뭔가 어리벙벙해하는 그에게 사울이 바울되는(여기엔 이견이 있다.원래 두 이름을 동시에 썻다는) '사건' 이라 할 만한 질문을 던진다.  

 "아저씬  행복하세요?"  몬태그는 비로소 존재와 세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원자화된 개인에서 타자에 대해,관계에 대해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는 <화씨 451>이 시작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회의의 거미줄 속에 있는 걸린 사람이된다. 방화-기계로서의 몬태그는 책 전체에서 보자면 그다지 길게 나오지 않는다. 그에게 존재에 대한 의심은 클라리세를 만나기 1년전 공원에서 만난 파버 노인과의 조우에서부터 내재해있었다. 클라리세를 만난 후 1년전 기억이 환기된 것은 그 안에 이미 회의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는 증거이며 소설의 흐름상  '방화-기계' 몬태그에 대해 그다지 길게 할애할 필요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몬태그는 방화서에 배치된 로봇개(수배자 정보를 맹목적으로 쫓도록 만들어진 기계동물)에게 불편함을 느끼며 그 도구를 통해 '도구화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유비한다. 

"우리들이 저놈(로봇개)에게 기억시켜 놓은 거라곤 그저 쫓고 사냥하고 죽이는 일뿐이지요. 저놈이 아는 게 그것뿐이라면 우리가 부끄러워 할 일입니다."  

 몬태그의 '흔들림'은 그래서 중요하다.이것은 일종의 '본원적 경험',즉 존재 자체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몬태그를 직접적으로 변화시킨 일은 클라리세의 실종과 분서 과정에서 책과 함께 분신한 어느 노파와 관련된 사건이다. 이런 체험은 몬태그를 더 이상 주입된 세계에 머물 수 없게 만든다.  한나 아렌트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무세계성'이 '사건'을 통해 '세계에 대한 자각'으로 변모한 것이다. 

 몬태그가 로봇개와의 유비를 통해 예시했듯이 <화씨451>의 세계는 '억압가설'에 토대를 두고 있다. 권력 집단 내지는 권력의 중심 같은 것은 소설 끝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푸코의 말처럼 권력은 그저 힘으로 관계속에 작용하고 있으며 어느 곳에나 임재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런 권력의 말단 대리인은 소설 속 갈등의 구현을 위해 존재한다. 많은 것을 알고 있음직한 방화서장 비티이다. 그런데 비티라는 캐릭터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신비에 쌓여 있다. 내러티브적이라기 보다는 시적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영화적이라기 보다는 연극적 인물로 더 적합하다. 비티와 몬태그의 대화 장면들은 마치 헤롤드 핀터의 희곡 속 상황같다. 그가 각색한 영화<추적>속의 마이클 케인과 주드로의 대화장면 같기도하다. 소설 속에서는 노련하며 냉소적인 비티가 늘 이긴다.  

 '물처럼 존재하는' 권력의 집행기구를 찾긴 힘들어도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억압 구조를 찾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레이 브래드버리가 직조한 소설 속 세상은 가시적인 두 개의 억압 장치 안에서 작동한다. 이 뒤에 권력 기구가 숨어있다. 먼저 하나는 거대 외연을 싸고 있는 '전쟁의 공포'이다.('전쟁'은 디스토피아 세계의 감초다.)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전쟁의 정치화' ,즉 전쟁이 늘 낮은 구름 위에서 일상을 장악하고 있는 곳이 <화씨451>의 세계이다. 폭격기가 수시로 굉음을 내며 하늘을 가르는 데도 도시 속 사람들은 무감각할 만큼 나른하다. 또다른 장치때문이다. 마치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을 구현한 듯한 것이 브래드버리가 예견한 미래상이다. 입체 벽멱 TV와 난무하는 정보 속에서 사람들은 감각적인 쾌락 안에서만 살아갈 뿐이다. 인민의 아편 TV가 되시는 것이다.(브래드버리는 후기에 실린 인터뷰에서도 영화<물랭루즈>와 TV CF를 예로 들며 0.5초의 짧은 컷트의 자기장 속에 빨려 들어가는 수동적 대중들의 비존재성을 지적하고 있다. ) 몬태그의 부인인 밀드레드는 전형적인 TV피플로 등장한다. 그녀에게 세계는 TV와의 매개없이는 불가능하다. 현대문명에 비판적인 영화감독들이 좋아하는 60년대 도시 외곽의 중산층 부인처럼 무미건조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그녀다. 그러면서도 행복해하고 이어질 드라마의 귀추에 생의 행복을 투사하는 존재다. 하지만 그녀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TV와 수면제를 빼놓고 그녀는 아무런 관계적 만족감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브래드버리는 소설 초반부터 수면제라는 소품을 통해 그녀가 누리고 있다는 만족감이 사실은 왜곡된 형태임을 보여준다.(진정 행복한 사람은 수면제를 먹지 않는다.!!)   

 <화씨 451>에서 브래드베리가 보여주는 미래 세계에 대한 상상력은 사실 50년전의 것이다 보니 올드패션하다. 또한 구성이나 인물들의 관계에서도 무언가 성긴 구멍들이 있다.사실 SF소설을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스토리의 급진적 진행에 비해 얼개가 성긴 경우가 종종 있어보인다. 예를 들어 악역으로 등장하는 비티 서장의 경우 해박한 그의 이야기로 또 하나의 작품을 만들 수 있을 만한 캐릭터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그에 대한 전후 설명이 부족하다.( 연극 대본 작업에서 작가 역시 이부분을 다시 첨가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올드패션한 설정도 살펴보자. 작가의 상상력 역시 그 시대의 범주 안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인정해야만 한다. 핵전쟁이 등장하고 불로 책을 소각하고, 헬기가 수색하고 하는 장면들은 완벽한 미래상이라기 보다는 가까운 실현가능성이 있는 사실성에 바탕을 둔 상상적인 글쓰기이다. 66년 프랑소와 트뤼포가 만든 영화처럼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오래된 미래'같은 미래상이다. 스티븐 다라폰트감독이 <화씨 451>을 영화화한다고 하는데 각색 과정에서 미래세계를 그린다면 이와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아마 하늘로 자동차가 날아다니고 소각 대상인 책은 종이 책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 소설의 가치를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은  미래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사실은  우화적으로 현실을 그리고 있는 SF 소설의 거대한 지류와 합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화씨451>에서 중요한 주제는 통제되는 미래상이라기 보다는 인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런 전체주의적 질서와 통제 권력의 억압, 그리고 그에 따라 왜곡되는 인간성과 사회상의 측면이기 때문이다. 

물론 미래상에 대해서도 사실적인 의미에서 재미있는 요소들이 있다. 여러가지가 있지만 미디어에 대한 것을 좀 보자. 브래드베리는 '책의 소각'이 단지 물질적 소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현재의 우리도 몬태그처럼 책을 물리적으로 태우고 있지는 않지만 '분서'행위를 하는 문화 속에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한 장으로 요약 정리할 수 태도 , 그리고 그것을 바쁜 세상에, 알아야 할 것 많은 세상에 합리적이라고 믿는 태도,이 역시 '분서'와 같은 것이다.결국 책의 그 내밀함과 접촉하여 소통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브래드버리가 당대의 다이제스트식 출판문화를 꼬집고 싶었던 듯 하다. 이는 악역으로 나오는 비티 서장의 입을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된다. 

" '햄릿에 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해 드립니다.' 해서 보면 기껏해야 한 페이지 정도 설명해 놓은 게 다가 되었지. 그러면서 광고엔 이렇게 나오고, 이제 당신은 모든 고전들을 완전히 통달할 수 있습니다. 읽으십시오!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알겠나? 보육원을 나와서 대학을 들어갔다가는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가는 거네. 지난 5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사람들의 지적인 문화형태라는 건 그런 식어었네"   

반대로 TV는의 향응이다. 통제권력의 이데올로기적 장치구실을 하고 있다. 소설에서 보여지는 TV 프로그램은 크게 쌍방향 소통형 프로그램과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조지 오웰의 <1984> 버전 텔레비젼보다 진일보한 형태라고 할까?) 하나는 린디와 이웃 집 여인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프로그램인데, 대략 추측컨데 시청자의 피드백이 반영되는 드라마 같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상상은 5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도 브래드버리의 상상력만큼 구현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TV 실험들과 징후들은 한 두가지씨 보이곤 한다. 리얼리티 쇼는 몬태그의 추격씬을 생중계하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마치 영화<트로먼쇼>의 야생버전처럼 어떤 에피소드 하나 정도를 생중계하는 방식은 요즘 기술로도 가능하다. 한때 미국에서 바람난 남편부인잡는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었던 적이 있다. 

브래드베리는 전쟁을 통한 디스토피아의 전체적인 붕괴를 새로운 희망의 전제조건으로 그린다. 지배집단에 대한 대중적 저항의 가능성 자체가 미비한 상황 속에서 전면적 파괴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어보인다. 마치 나치 독일의 철저한 패망 이후 재건이 가능했던 것 처럼 말이다. 이것 역시 브래드버리가 가진 한계의 한 측면이 될 것이다. 브래드버리가 새로운 미래의 맹아로 그린 '북피플들'은 제 때에 저항하지 못한 지식인들이 주류다. 그들에게는 후회와 미래에 대한 가능성만이 잔존할 뿐인다. 그런면에서 그들은 '분서'의 공모자는 아니어도 협조자들인 셈이다. 지식인 파버의 자탄에서도 드러나듯이 '시대의 후퇴'를 방관했던 업은 결국 그들에게도 돌아왔다. 브래드버리의 혜안 중에 뛰어난 점은 권력과 이 들이 서로를 간섭하지 않으며 병존하려 했다는 점에 있다. 권력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발본색원 자체는 애초 불가능하기 때문에 파편화된 개인으로 존치시키는 편이 나았고 실기한 지식인 그룹들은 양팔을 잃은 장수처럼 소수의 유목민이 되어 세대 유전을 통한 지식의 전수만을 먼 미래를 위해 남겨둘 수 밖에 없는 수동적 존재로 남게 되었다. (어떤 중핵만 건드리지 않는 다면 무엇과도 공존할 수 있는...') 지식인 파버와 방화수 몬태그의 저항을 위한 대화는 통속적이긴 하지만 '지식인-대중'의 상호관계에 대한 브래드버리식의 비유다. 몬태그식의 '이성없는' 급진적 행동주의가 갖는 위험과 '행동없는' 관조적 이성주의가 갖는 문제를 거의 대놓고 보여준다. 물론 브래드버리식의 상호작용을 통한 변증법적 타협의 길도 슬쩍 흘린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대놓고... 그렇다고 사회주의 소설처럼 구호조로 꺼내지는 않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미국적 세련됨이라고 해야하나..

<화씨451>은 '분서'에 대한 이야기지만 사실 '분서될 수 없는' 책의 위대함에 대한 예찬이다. 우리에게 도서관만 있다면 다시 인류 문명을 세울 수 있다는 말처럼 인류의 위대한 지적 전통에 대한 브래드버리의 숨은 애정이 배어있다. 물론 인류는 도서관에 다 적혀있어도 같은 실수를 여러차레 반복할테지만 말이다. 다시 영화화가 곧 된다고 하니 수 년 안에 스크린으로 만나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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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이 가지런히 줄 처진 종이를 주거든 

줄에 맞추지 말고 다른 방식으로 써라. 

                    -후안 라몬 히메네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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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 비래드버리의 <화씨 451>에 첫 장에 인용된 히메네즈의 글이다.    

부랴 부랴 히메네즈를 검색....(음 ...) 

아저씨들도 없고 해서, 컴퓨터 앞에 <화씨 451>을 꺼내 놓고 이어폰으로는 한국방송의 <동창이 밝았느냐>를 듣고 있다. 

최근 거의 논문글(?)들을 읽느라 머리가 자꾸 큐브처럼 구획지는 듯 했다. 어젯밤 흥미로운 판소리 논문책 하나를 다 읽고 나서-시인 정양의 <판소리 더늠의 아름다움>,예술사회학책이다.민중 정치적이다. - 지난 여름 사 둔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을 출근길에 안아 왔다. 

책을 터억 하고 펼쳤는데.... 히메네즈의 문장이 눈에 화악하고 들어온다. 

줄 쳐진대로 쓰지 말라는 시인의 말. 

정치적 의미로 읽는 것도 가능하고,실존적 의미로 읽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아방가르드적 미학의 측면에서 읽는 것도 모두 모두 자유다. 하여간 하나의 개념어는 하나의 의미만 가지지 않는다.  

언젠가 속으로 웃었던 경험..  

내가 (정치적) 자유주의를 비판한다는 것을 아는 분이었는데 내가 '자유' 를 이야기하니까... '지난번에는 자유주의를 비판하셨잖아요.' 라고 했었다.어이할꼬? ^^ 아마 나는 니체나 데리다식의 해체적 자유까지도 말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거기에 기대지 않아도 '날라리딴따라근성'으로도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구만리 장천 같은 이야기를 어찌 다 할 것이냐... 

히메네즈의 시선집이 국내 번역된게 하나 있다.  ...  

다시듣기로 듣는 라디오에서 가수 조관우의 아버지가 <수궁가>중에서 토끼 용왕 속이는 소리를 하고 있다. 판소리 다섯마당의 사설은 예술사회학적으로 보면 모두 정치,사회소설이다. 어린 시절 금성출판사 버전으로 본 전래동화,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운 전통소설....모두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거의 알고 있는게 별로 없었다는 것을 요즘 다시 느낀다. 멋진 소리와 함께 즐거운 재발견의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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