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드의 ㅂㅁㅋ라인을 제대로 누르지 못하고 있다. 손가락 깁스라는 걸 했기 때문이다. 왼손 새끼 손가락은 지금 터미네이터 1.0 의 골조처럼 되어있다. 앞으로 10여일은 있어야 풀 수 있다.
사람이 원래 안하던 일을 하면 다친다. 간만에 혼자 쭐레쭐레 벌초를 갔다. 부슬부슬 비도 한두방울 내리고, 먼 하늘에는 버펄로떼마냥 검은 구름이 뭉실뭉실 몰려오고 있었다. 묘비 앞에 회향목 두그루가 고도비만 초등학생 만큼 자라서 가만두자니 영 마음이 불편했다. 근처 공사장에서 낫을 하나 슬쩍해와서 열심히 가지들을 쳐냈다. 미용사가 숱을 쳐내듯..싹뚝..싹뚝...척척척...
한참을 하다가
두뚝... 욱
똑..똑..똑...
풀만 벨것을 왜 벌목을 해가지고...눈에 띄는 걸 어쩌겠나.
왼손 관절을 낫이 먹어버렸네. 불같이 뜨거운 혓바닥이 쑤욱. 허겁지겁 장갑을 벗어 상처 부위를 누르는데 ..아 뭔가 하얀게 보여...이건 뭐...그건가 하여 겁이 덜컥났지만 너덜해진 살부위가 금세 쪼르르 아기고추처럼 말려들어가더군.
오랜 만에 와서 향도 하나 못 사르고 사가지고 간 작은 팻트병 소주 한 잔 빗물에 녹여 따르고 내려왔다.
공원묘비 관리실에서 밴드 하나 붙이고...1339
분당에 있는 종합병원으로 가는게 낫겠다 싶어 한 손을 누르며 운전을 했다.
명절이라서 응급실만 했는데, 가장 많이 눈에 띄는 환자는 아이들과 오토바이 사고자.
일단 검진을 했는데...손가락 다쳤는데도 쇼크가 오더라. 좀 누워 있다가 간호가가 하는 말이 통증이 싶하면 가벼운 쇼크가 오기도 한다고 ...
성형외과 담당의가 오기전에 항생제주사와 파상풍주사.
밤을 샌듯 졸린 눈을 한 20대 후반의 여자성형외과 의사가 와서 마취제 놓고 깁기 시작했다.두툼한 안경속의 그 친구 삶이 지루해보였다. 실제로 무척 지루한 표정이었다. 이름표 속의 사진은 봄날처럼 생기 있었는데... 가운입은 그녀는 그냥 백화점 엘리베이터 걸처럼 무표정. 아...20대의 이 처자가 어쩌다가 40대의 누런 옷을 입고 있는 건지...그래서 이래 저래 재미있게 말했다. 그런데도 이 친구 영 심심...별 대꾸도 없구.
한참 바늘질을 하는 걸 보면서, 매듭에 약한 나로서는 하기 힘든 직업이었겠구나 생각했다. 두번 감아서 쏙...두번 감아서 쏙...
하여간 그녀 말이 관절부근이어서 인대까지 다쳤단다. 그나마 신경이랑 뼈는 괜찮다고 했다.
"음...당분간 설거지는 안해도 되겠군요" 라고 했더니 결국 이 친구 빵터졌다.^^
"설거지 많이 하시나봐요?"
"설거지가 집안일 중 제일 쉬운 건데요. 빨래 널기 이런거 귀찮구. 육아는 최악이죠. 육아가 철인3종 경기라면 설거지는 산보죠"
"아...그래요..ㅎㅎㅎ"
응급실에 1-2시간 있다가 -얼마만에가 본 응급실인지- 문득 바람직한 생각이 들었다.
'건강하게 잘자라는 아이들에게 화 좀 내지말자' (오래 지키지 못해..ㅠㅠ )
아이 근데...왜 갑자기 맥주가 그렇게 먹고 싶은거야. 당분간 못 먹으니까 그런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