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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평점 :
능소화 붉은 빛이 담장을 넘는 계절이다.
출근길에 재개발 지역을 지난다. 20여분 밖에 걸리지 않는 길이다. 그런데 두 곳의 재개발 지구를 지나쳐야 한다. 대한민국은 늘 '공사중'이다. 첫 번째 재개발 지구에는 외톨이 거인들이 사는 마을처럼 옛 집들이 군데 군데 아직 남아있다. 내가 능소화 붉은빛을 쐬는 곳이다. 내년쯤이면 담장너머 세상 구경을 나온 아이같은 꽃들을 만나지 못할 게다. 가슴 한 켠에 아릿함을 가지고 바닥으로 뚝뚝 붉은 물을 떨어뜨린 녀석들을 바라본다.
두 번째 재개발 지역에 이른다. 이미 폐허다. 변두리 식당의 후식으로 나온 사과에 꼽혀 있는 이쑤시게처럼 전봇대가 한 두 서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아래는 온통 크고 작은 녹색 정원이다. 텃밭이다. 거기에는 대나무로 만든 작은 전봇대들이 수없이 꼽혀있다. 고추대 이거나 가지대들이다. 재개발이 정치적 문제로- 이 사건은 유명해서 한동안 TV 뉴스를 장식하기도 했다- 차일피일 되자 그곳에 텃밭이 생긴 것이다. 원주민들의 작은 평원이다.
젊은 작가 최규석의 <대한민국 원주민>은 '흙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밭'을 가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최규석은 잊혀져가는 그들을 '대한민국 원주민' 이라고 한다. 그의 만화에는 미국으로 이민간 어떤 할머니가 도심의 공원에서 쑥뜯는 장면이 나온다. '땅' 한 평이 목숨과도 같았던 그들에게 '놀릴 땅'은 바늘 한 땀만큼도 없다. 논과 밭의 일을 슈퍼마켓과 마트의 일로 바꾼 우리들에게 그들의 정서는 '원주민'의 그것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일반화된 '슬픈 원주민'의 역사에 대해서 말이다.
최규석은 나보다 한 세대 어리지만 그는 내가 겪어보지 못했던 것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로 유사하게 벌어지는 일들이기때문이다. 내가 세대론에 대해 사회학적으로 동의하면서도 꼭 그렇지만도 못한 것이 이 때문이다.( 학자들은 연구 한계상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이해한다.)
소위 386세대와 만나보니 우리 누나들과 비교가 되더라. 그분들 데모할 바로 그 즈음 공장에서 일하던 누나들 생각을 했다. 역사책을 보면 중세 다음 근대, 그 다음 현대 이렇게 마디마디 넘어가지만 현실은 다른거다. 서로 다른 시대가 비율만 오르내릴 뿐 겹쳐 움직이는 거다. (김혜리와의 인터뷰 중에서)
유식하게 말해서 최규석은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말하고 있는 거다. 책으로 읽고 감동한게 아니라 자신의 살과 가슴으로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골 친구의 그림 속에 '순수'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최규석같은 친구들은 그래서 진솔할 수 있는 거고 오래갈 수 있다. 머리에 새긴 지성은 자기의 이기심에 쉽게 변절할 수 있지만 가슴에 새긴 기억들은 가끔 강력한 ABS 브레이크가 된다.
추락, 그거 별거 아니다. 한 발 더 내딛는가, 아닌가의 차이다. 그 길로 나아가면 관성의 법칙을 따라 갈 수 밖에 없다. 대신 그 앞에서 ABS의 위력을 한 번 발휘하면 또 다른 길로 이어진다.
나는 고향이 아닌 사람들이 모인 '새마을'에서 자라났다. 70년대 말, 당시 전국에는 내가 자란 마을과 같은 '신흥촌'이 부지기수였다. 모두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이다. 하지만 도시의 중심가로 가지는 못했다. 서울의 위성도시, 그 중에서도 시내 가장 외곽 변두리. 내가 자라났던 곳이 그런 곳이다. 아무래도 그 정서가 여전히 내 '변두리' 근성을 만들고 있는 듯 싶다. 우리마을 근처에 '동일방직'과 '동양나일론'이 있었고 내 친구들의 집은 '쪽방'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 우리 동네에 '천막극장' 이 들어왔다.대학 다닐때 친구들이 전부 신기한 듯 생각했다. 최규석의 친구들이 그의 이야기에 그랬듯이... '천막극장'은 그 '변두리성'의 상징이었다. 나는 여태까지 '촌'의 상징으로 그 기호를 이용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시내에는 영화관이 있으니 '천막'이 필요없다. 그리고 최규석의 고향 처럼 '완전 깡촌'은 수요가 많지 않으니 '천막'이 갈 필요도 없었다. 결국 나의 '촌'은 '변두리'였지 진짜 '촌'은 아니었던 셈이다. 나는 최규석의 <대한민국원주민>을 읽으며 과거 내가 무용담처럼 말하던 '천막극장'의 사회경제적 위치를 다시금 생각해봤다. 물론 '촌스런 영웅담'이 희석된다고 '천막극장'의 즐거운 풍경이 내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때문에...
최규석이 부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한 것은 그가 <대한민국 원주민>에서 자기 가족을 중심으로한 구술사를 쓰고 있기때문이다. 언젠가 나도 내 가족을 중심으로 이런 작업을 한 번 해보고 싶었다.그런데 젊은 그가 예쁜 그림과 따뜻한 정서로 먼저 작업을 한 것이다. 차일피일 미룬 것이 부끄럽기도 하다. 물론 가족사를 그린 다는 것이 한계가 있긴 하다. 왜냐하면 객관성을 담보하기가 좀처럼 곤란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원주민>에도 보면 아버지에 대한 양가적 감정, 어머니에 대한 순진무구한 숭고, 누이들의 희생에 대한 감사, 형에 대한 거리감 같은 것들이 동시에 묻어난다. 그런데 어차피 학문을 할 것도 아닌데 그런 객관성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모든 다큐멘터리스트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객관성'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상에 대한 진정한 '애정'이다. 그런데 최규석은 '만화'라는 장르가 가진 유연성과 '다큐'가 가진 사실성을 미숫가루처럼 잘 섞어낸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가족만화'를 보면서 건강한 '관음증'의 즐거움을 느끼면서도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하고 또 잠깐 잠깐 생각에 잠기기도 하는 것이다. 그가 과거로 부터 현재를 동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미 FTA에 대한 생각부터 한국전쟁,가부장제 등에 대해 그는 몇 컷의 만화프레임 안에 그 생각을 열어놓고 있다.
나는 이런 그의 더듬이의 제일 민감한 위치에 '촌의 감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순수'의 마음이다. 하지만 촌사람들이 모두 순수하다거나 도시 사람들이 모두 되바라졌다고 생각치는 않는다. 그가 어린시절에 보고 느끼고 들을 수 있었던 거대한 자연의 내러티브가 그에게 준 능력이다. 이건 내 경험적인 편견이기도 하다. 실제 '시골 출신'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 그가 그런 능력을 소중히 여긴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이 친구 한 번 만나보고 싶어진다.
<대한민국 원주민>은 내게 전부는 아니어도 내 유년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도 해주었다. 담벼락에 앉아 매일 해바라기하던 독침 할머니의 상여길, 늘 신경을 써주었던 아버지를 자주 찾아 왔던 산업체 여고 누나들, 나락 쌓아 놓은데서 놀다가 주인에게 매맞고 울며 돌아가던 길, 뒷 집 바보 국이 엄마가 아들을 위해 했던 굿판을 훔쳐보던 두려움, 매 맞다가 우리 집으로 피신했던 옆 집 아줌마와 성난 아저씨를 훈계하던 아버지의 목소리, 개구리를 잡아 아궁이에 구워 먹던 기억들...
아..더 나이가 드시기 전에
내 가족들을 위한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
P.S) 나는 이 책을 이희재의 <간판스타>와 함께 사서 읽었다. 이희재의 독특한 스타일도 마음에 들고 최규석의 교과서적 스타일도 예쁘다. 두 작가의 스타일은 다르지만 둘 다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다. 형식과 작화, 주제에 대한 접근방식이 각 각 특색이 있다. 또한 20여년의 세대 간극이 있어서 그 '보편성과 특수성'을 따라 읽는 재미가 꽤나 흥미로왔다. 이희재의 <간판스타> 리뷰는 쓰지 않기로 했다. 누가 읽겠는가 ..시대에 덜떨어진 이런 고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