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흘린 음식물을 닦다가 문득 '두려움'이란 생각이 들었다. 바닥에 걸레질을 하며-비하적 발언은 아니다-  결국 나를 이 모양으로 만든 것은 그 '두려움'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가끔 아버지도 나를 두고 그런 말씀을 하신다. "넌 결정적일 때 운이 좀 없다"

나는 그 말을 대충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뭐 살다 보면 운이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 법이니까..그게 꼭 나에게만 해당 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싶었다. 또한 나의 부족함을 '운' 탓으로 돌리는 흔해빠진 통속적 비관주의자로 분류되고 싶지 않기도 해서이다.

바닥 걸레질을 하다가 정말 '결정적인 운'들이 나의 편이 아닐 때가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아진 내가 내면에서 슬금 슬금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더 결정적인 것은 그것이 '운'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막연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진짜의 모습을 보고 만것이다.식탁 아래에서 말이다.

그것은 '두려움' 이다. 나를 결정적인 순간에 잡아 끈 것은 '두려움' 이었다. 언젠가 내가 좋아하는 형이 나에게 '넌 힘들겠다. 늘 50대 50의 긴장 상태를 살아서 ' 라고 한 말의 의미가 다시금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내가 그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지만 그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중 하나가 그 '두려움'이다.

나는 그 '두려움' 때문에 인생이 이 모양이 된 것이지 '운'때문이 아니다.

언제나 '두려움'은 ABS 브레이크다. 흔적도 남기지 않아서 좀 지나면 그게 '두려움' 때문이었는지도 잊는다. 그리고 그 자리를 판타지가 채운다. '현실적 선택', '합리적 생각' ,'안정적인 가치' 등등....

 대학 시절 시위를 할 때도 결국 나는 내가 달려도 크게 덮어 쓰지 않을 선에서 움직인 것이다. 병 던지고 돌 던져봐야  잘 안잡히고.. 잡혀도 하룻밤이다. 거기에는 '두려움' 이 있었다. 그 이후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원하는 직업이라 할 만한 첫 직장을 때려치고 다시 공부를 했다. 6개월쯤 지나니까...약간 두려움이 생겼다.연애도 시작하고 있었고...이러다가 다시 이 바닥에 진입못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또 어기적 현재 있는 회사에 붙어버렸다. 그것도 낮은 경쟁률은 아니었다. 수치상은 500대 1이었다. 그런데 그 결정도 '두려움' 때문이었다.

직장의 실체는 곧 드러났고...나는 공부할 생각을 해봤다. 외국 대학 홈페이지를 들랐거렷고 토플과 토익 성적표를 재발급 받기도 했다. 영어 스코어도 상당히 좋았다. ...그런데 결국 그것도 그냥 접었다. 갔다와서 보따리 장사하기도 싫었고 또 연애도 끝날게 뻔했기 때문이다.

어영 부영 11년 째 한 조직에서 부대끼고 있다.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다.

나의 인생에는 이런 일 말고 가족사의 파란만장한 부침이 꽤나 있었다. 정말 그러했다. 그래서였을까? 결정적인 순간에는 '두려움' 때문에 늘 '안정'을 선택했다.그 부침때문에 피곤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내는 나의 말을 듣고는....'자기가 아무런 기댈 언덕 없었기 때문에 그래' 라고 말한다. 실패하더라도 크게 데미지 입지 않고 다시 일으켜 줄 언덕 말이다. 그 말이 조금 위안이 되긴 했다. 실제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나 자신에게 미안한 '두려움'에 대한 굴종감을 만회하기에는 부족하다.

지금도 나는 두렵다.

나는 이제 또 다른 질문 앞에 섰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이 '두려움'에 어떻게 응전할 것인가? 객관적 상황은 더 큰 '안정'을 요구한다.

결국 가장 큰 적은  '두려움' 이다. 내가 반드시 만나고 뒹굴어야하는 적은 그 '두려움'이다.

....개인적으로 자기의 물적 토대를 괄호치고 뉴에이지적인 관념론으로 '두려움'을 응시하는 것은 용인하기 어렵다. 내 개인적으로는 받아 들이기 어렵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까지 뭐랄 수는 없다.

 '두려움'은 어떡게 극복되어야 하는가?

 나는 내가 대면하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 

결국 '자기 구타'의 물질성을 통해서만 건너갈 수 있을까?

나는 사실 답을 알고 있다.내가 성인이 되지 않는 한 그 방법 밖에 없겠지...결국 이 글도 '두려움'을 말함으로써 '근원적 두려움'의 문제는 회피하고 표피적인 것들만으로 눈가림하려는 속셈인 것이다.

진짜 '두려움'은 극복되어지고 난 이후가 아니면 말할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이 극복되면 삶은 소멸될지도 모르겠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8-04-09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그인을 했어요
자기의 물적 토대를 괄호치고 뉴에이지적인 관념론으로 '두려움'을 응시하는,,, 에 발이 걸려 가꼬요. 양심이 발을 걸었던 모양이에요. 언덕 없이 만들어 놓은 언덕이 그 물적 토대라는 것일 때, 응시하는 두려움 말고 돌파할 수 있는 두려움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의 판타지가 또 나를 먹여 살리고 있구나! 깨달아요. - 용기 - 가능한 것이었으면 좋겠어요. 감사히 읽었습니다

드팀전 2008-04-10 00:02   좋아요 0 | URL
판타지가 없으면 삶도 없다라는 말이 있어요.
안개같은 두려움이 있지요.암같은 두려움,벽지에 붙은 곰팡이 꽃 같은 두려움,칼날처럼 시퍼런 두려움,정전같은 두려움....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것이 공포이 듯이 그 안에 사는 개인의 삶도 그 하위 영역으로 복속되어 움질일 수 밖에 없겠지요.

웽스북스 2008-04-09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살면서 무모한 도전같은 건 한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게 어느순간이 되니, 참 후회가 되더라고요

그런데, 그러면서도 또 같은 순간이 되면 무모한 도전을 못해요
그래서 한번도 같은 삶을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 같아요

무한도전에 나오는 사람들이 무모한 도전이 가능한 건
그것이 생을 건 도전은 아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하죠
그래서 전 그들의 도전에는 박수를 치지 않아요 (잘 보지도 않지만 ;;)

대신 삶을 건 무모한 도전을 하시는 분께는 박수를 치는 편이에요
제가 못하는 일이어서 그런가봐요

드팀전 2008-04-10 00:05   좋아요 0 | URL
전 무모한 도전은 해봐요...그런데 전복적인 도전은 못하고 있는 듯 해요.
관망하면서 박수를 치는 행위가 이제 지겨워졌나봐요...
모래사장 위를 펄쩍 펄쩍 뛰는 것을 따라가는 시선이 아니고 싶은가봐요.
^^

2008-08-19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19 0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19 0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