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 기생뎐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9월
평점 :
<신기생뎐>은 2006년 동인문학상 최종후보까지 올랐다.그러나 상을 받지는 못했다.문학상이란 것이 그렇다.겉표지에 '00문학상 수상' 딱지를 하나 두르고 있으면 눈이 한번 더 간다.미스 코리아가 두른 어깨띠 마냥 '올해의 소설'띠를 두르면 그 아우라가 1년은 보장된다.한해가 지나가 또 다른 후보들이 신문 문화면을 채우면 고별 행진을 하며 스르르 기억에서 잊혀져간다.물론 아니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아주 오래도록 문어다리보다 질기게 독자들의 입맛을 붇돋아주는 책들도 있다고 말이다.맞는 말이다.올해 동인문학상은 <틈새>라는 작품이 받았다.그럼 작년(2005년)에 무슨 책이 받았을까?....국내 문학을 내 몸처럼 아끼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결국 보편적으로 말해 문학상의 유효기간은 1년이다.2007년 '이상문학상 수상집'이 나왔는데 2006년 수상집을 들고 다니면 왠지 뒤깍이 같아보이기 때문이다.
문학상 수상작품이 그럴진대 아무리 아까운 탈락이라지만 후보작을 오래 기억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을것이다.하지만 <신기생뎐>은 오래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싶은 작품이다.오히려 '2006 00상' 이라는 시간을 한정하는 딱지가 붙어 있지 않기에 더 긴시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글의 처음을 문학상과 관련된 이야기로 풀어서 그렇지 사실 문학상이나 콩쿠르 우승이니 하는 것이 예술가치를 평가하는 절대적 기준은 아니다.어떤 유명한 사람이 그랬다나.."경쟁은 경마장에서 하는 것이지 예술 작품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이현수라는 작가의 작품은 <신기생뎐>이 처음이다.신문에 난 동인문학상 최종후보군을 보고 보관함에 넣어두었다.물론 다른 몇몇 작품들도 함께.그러다가 수상발표가 난 후에야 책을 주문했다.1등 먹은 책보다 떨어진 책에 더 눈이 간 것은 아무래도 삐딱한 우월감이던가 아니면 곧 잊혀질 책에 대한 연민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좀 더 그럴싸한 이유를 대자면 '소재'의 특이성이 마음에 들었다.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보이긴 하지만 '일상사'의 질곡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한 소설들에 좀 지루함을 느껴왔다.후일담과 일상의 미묘함의 한 시대를 건너더니 요즘은 가벼움을 동반한 일탈이 패권을 잡는듯하다.무식을 무기로한 일반적 편견일 것이다.어쨋건 나의 부족한 식견은 한국 문학을 그렇게 재단하고 있었다.그 와중에 만난 <신기생뎐>의 소재는 특이해보였다.
내가 아는 기생이라봐야 책이나 영화로 만난게 전부다.대개 조선시대 황진이의 선후배들이다.가끔 정치드라마를 보면 정치인이나 군부 인사들이 모종의 계획을 도모하기 위해 만나는 요정,그리고 그 종업원 기생 정도가 가장 최근에 간접적으로 만난 기생이다.소설 <신기생뎐> 역시 허구이다.하지만 왠지 인간극장을 보는 듯 하다.즉 소설적 리얼리즘이 돋보인다는 말이다.부용각에 모여든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딘지 모르게 한번쯤은소설이나 영화에서 만나봤음직한 내용들이다.상투적이라기 보다는 무언가 원형의 기억같은 것을 툭툭 건드린다는 느낌이 더욱 강하다.
오래된 소나무 향기를 내뿜은 부용각,어머니의 자궁처럼 낮은 사람들의 사연과 욕망,회한을 묵묵히 그러나 포근하게 안아준다.못난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했던가. 옴팡진 눈에 박복한 생김의 타박네는 뒤틀려있어 위태로와보이면서도 수백년 절을 지켜온 일주문의 기둥처럼 등굽어가는 부용각을 건사해낸다.부엌에서 잔뼈가 굵은 그녀는 시장터에서 만나는 욕쟁이 할머니이다.그녀가 내뱉는 말들은 하나의 운율을 이루어 잘만들어진 요리처럼 맛갈나다.욕을 들으며 즐거워지는 것은 그 욕이 세월의 향기속에 숙성되기 때문이다.세속적이지만 약아 빠지지 않았다.실속을 챙기지만 남을 해하지 않는다.무뚝뚝하지만 숭늉같이 -그 말 밖에 없다-그냥 숭늉같은 의리와 인정이 있다.연꽃의 대궁처럼 텅비어가는 기생들을 바라보며 그 텅빈 마음을 채워주는 것이 부엌 흙냄새가 나는 타박네의 역할이다.타박네의 욕질과 적재적소의 옛스런 표현들은 <신기생뎐>의 비타민같다.몰락의 기운이 서려있는 기생들 속에서 그녀는 거울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햇빛과 같다.유려하게 흐르던 흐름은 타박네가 등장하는 순간 액센트를 받는다.셋 잇단음표가 되고 스타카토가 되어 소설의 스피드를 높인다.<신기생뎐>의 완급이 타박네의 말에 의해 조절된다는 것이 재미있다.그리고 캐릭터를 보고 웃음을 띄는 순간, 소설속에서 튀어나와 '너는 뭐하는 종잔데...웃고 지랄이여' 라며 머리통을 칠 것 같은 등장인물의 생생함.작가 이현수의 은근한 공력이 느껴진다.
타박네가 소설의 한축을 이룬다고 하지만 <신기생뎐>의 주인공은 역시 기생들이다.이 소설에는 세 명의 기생이 등장한다.채련,오마담,미스 민.....채련과 오마담은 동기이고 미스 민은 차기 부용각의 기대주이다.이 세명은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아 왔지만 기생이라는 이름으로 똑같은 한의 정서를 지닌다.그리고 셋은 변증법적으로 하나가 되기도 한다.뛰어난 춤솜씨로 촉망받던 채련은 사랑을 얻을 수 없는 처지를 비관하여 이른나이에세상을 접는다.모두를 사랑하지만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는 잔인한 운명을 스스로 끊어버린 것이다.유명한 소리꾼도 고개를 떨구개 만든다는 오마담은 채련과는 다른 방법으로 그 운명과 대면한다.자기를 비우는 방법으로 소리를 지키고 부용각을 지킨다.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슬픔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수많은 남자들에게 몸을 주고 정을 주지만 늘 돌아오는 것은 배신일 뿐이다.오마담은 서운해하지 않는다.그녀는 기생의 삶이 몸에 배게한 허무의 정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지는 벚꽃이 가는 봄을 원망하지 않듯이 대숲의 떠림을 간직한채 그녀는 기생의 운명을 따라간다.미스 민은 마지막 기생이라는 떨리는 감투를 써야할지도 모르는 사람이다.철길 옆의 가난은 그녀를 국악원 대신 기방으로 몰았다.오마담의 허무미와 다르게 그녀는 야망의 푸른빛이 서려있다.소설은 그녀의 기대와 다짐을 통해 사라져가는 문화공간으로서의 기방의 미래에 나지막한 희망을 싣는다.기생들의 캐릭터와 그녀들의 한을 풀어나가는 솜씨 역시 눈여겨볼만하다.특별한 세계를 살아온 그녀들의 이야기가 깨진 독에서 흘러내리는 달콤쌉싸름한 술처럼 흘러내린다.작가는 기생을 전통문화를 이어가는 예인으로서도 파악한다.물론 예인과 기생은 성과 속의 세계로 나뉘어 살고 그렇게 인정받고 있지만 말이다.오마담의 소리,채련이나 미스민의 춤 등 묘사하는 작가의 호흡과 표현력도 근래 소설에서 만날 수 없는 깊은 맛이 난다.몇 번 씩 소리내서 읽어도 아깝지 않은 문장들이 도처에 깔려있다
<신기생뎐>을 읽다가 책장 위에 꽂혀 있는 최명희의 <혼불>에 눈길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