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are a number of different stories to be told about why an increasing dissatisfaction with deontology and utilitarianism should have resulted in the revival of virtue ethics  (and no way of determining which is the most accurate), but certainly part of any story seems to be that the prevailing literature ignored or sidelined a number of topics that any adequate moral philosophy should address. Two I  mentioned above-motives and moral character; others were  moral education, moral wisdom or discernment, friendship and family relationship, a deep concept of happiness, the role of the emotions in our moral life, and the questions of what sort of person I should be, and of how we should live. And where do we find these topics discussed? Lo and behold, in Plato and Aristotle.

의무론과 공리주의에 관한 불만이 늘어난 결과 윤리학이 부활하게 이유를 설명하는 개의 진술들이 있다. (결코 어느 것이 가장 정확한지 결정할 수는 없지만) 어떤 설명이건 일부는 확실히 주요 문헌들이 적절한 어느 도덕 철학이라도 다루어야만 하는 많은 주제들을 무시했거나 중심에서 떼어 놓았다는 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동기와 덕성- 하나고, 도덕 교육, 도덕적 지혜 혹은 분별, 우정과 가족 관계, 행복에 관한 깊이 있는 생각, 우리의 도덕적 삶에서 감정이 차지하는 중요성,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들이 나머지 주제들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주제에 관한 논의를 찾아 것인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보라!

의무론과 공리주의에 대한 불만이 커진 결과로서 윤리학이  부활하게 이유를 설명하는 여러 가지 말들이 있다. ( 어떤 것이 가장 정확한지를 결정할 길은 없다) 그러나 확실히 어떤  것이라도 일부는 기존에 보편적으로 여겨진 이론을 토대로 발표된 문헌들이 도덕철학이라는 이름에 맞다면 의당 다루었어야 하는 많은 논제들을 무시했거나 방관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가지-동기와 도덕적 인격- 하나고, 도덕 교육, 도덕적 지혜 혹은 분별, 우정과 가족 관계, 행복에 관한 깊이 있는 생각, 우리의 도덕적 삶에서 감정이 하는 기능,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것인가와 같은 질문들이 나머지 주제들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이들 주제에 관한 논의를 찾아 것인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보라!

Now of course, this is not just a coincidence. The modern philosophers whom we think of as having put virtue ethics on the map-Anscombe, Foot, Murdoch, Williams, MacIntyre, McDowell, Nussbaum, Slote[1] -had all absorbed Plato and Aristotle, and in some cases also Aquinas. Their criticisms of 'modern moral philosophy' were no doubt shaped by what they had found insightful in those earlier writers and then found lacking in the modern. But the fact remains that, once they are pointed out, many people, not just those who have read the ancient Greeks, immediately recognize the topics as important ones in moral philosophy.

물론, 이것은 단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윤리학의 이름을 높여 왔다고 생각하는 앤스콤Anscombe, Foot, 머독 Murdoch, 윌리암스Williams, 매킨타이어MacIntyre, 맥도웰 McDowell, 누스바움Nussbaum, 슬롯Slote- 등은 모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일부 아퀴나스의 사상을 흡수한 근대 철학자들이다. ‘근대 도덕 철학 대한 그들의 비판이 그들이 초기의 저작에서 발견한 통찰력 있는 내용들, 그런데도 근대에 와서 결여된 그것들 구체화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일단 그런 지적들이 있고 나면, 고대 그리스 철학을 연구해 사람들 아닌 많은 사람들이 즉각 주제들이 도덕 철학의 중요한 내용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단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윤리학의 이름을 널리 알려 왔다고 생각하는 앤스콤Anscombe, Foot, 머독 Murdoch, 윌리암스Williams, 매킨타이어MacIntyre, 맥도웰 McDowell, 누스바움Nussbaum, 슬롯Slote- 등은 모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일부 아퀴나스의 사상을 흡수한 근대 철학자들이다. ‘근대 도덕 철학 대한 그들의 비판이 그들이 이전의 철학자들에게서 발견했던 통찰의 내용들, 그런데 근대에 와서 결여된 그것들 구체화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결국, 그런 지적들이 있고 나면, 고대 그리스 철학을 연구해 사람들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즉각 주제들이 도덕 철학의 중요한 내용임을 인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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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has modern moral philosophy revived the ancient approach of virtue ethics? On the face of it, it does seem odd that, armed with two theories derived from philosophers of the ‘modern world’, any moral philosopher, let alone a whole movement of them, should have felt it necessary to go all the way back to Plato and Aristotle. Given how long ago they wrote, given how different our world is from that of their Athens, given, moreover, Aristotle’s (at least) deplorable views on both slavery and women, is it not absurd to turn to them for inspiration on ethics? ‘On the face of it’ perhaps, yes, but in practice and in detail, no.

 

근대의 도덕 철학은 윤리학이라는 고대의 윤리 이론을 부활시켜왔을까? 얼핏 생각하면 근대 세계 철학가들에게서 나온 의무론과 공리주의 이론으로 훈련받은 어느 도덕 철학자가, 이론을 발전시키려는 모든 활동을 내버려두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로 되돌아야만 한다고 깨달았어야 했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 보인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그리고 당시의 아테네가 현재의 우리의 세계와 얼마나 다른지를 놓고 , 더구나 노예와 여성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어쨌든) 통탄스러운 관점을 고려해 , 윤리학의 영감을 그들에게 돌아가 얻겠다니 어리석지 않은가? ‘겉으로만 본다면’, 아마도 답은 그렇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그리고 자세히 따져보면, ‘그렇지 않다.’

 

근대의 도덕 철학은 윤리학이라는 옛날의 이론을 부활시켰을까? 언뜻 생각하면 근대 세계 철학가들의 사상에서 비롯된 의무론과 공리주의로 훈련받은 도덕 철학자가 이론적 동향 전체는 말할 것도 없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로 되돌아 필연성을 깨달았어야 했다는 것은 이상한 주장인 같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얼마나 오래 전에 책을 썼는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당시 아테네인들의 세상과 어느만큼이나 다른지, 게다가 노예와 여성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최소한) 통탄스러운 관점을 고려해 본다면, 윤리학의 영감을 그들에게 돌아가 얻겠다니 어리석지 않은가? ‘겉으로만 보면’, 아마도 그렇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그리고 자세히 따져 보면 그렇지 않다.’

 

 

For a start, it must be emphasized that those who espouse virtue ethics nowadays do not regard themselves as committed to any of the lamentable, parochial details of Aristotle’s moral philosophy, any more than many deontologists inspired by Kant think they are committed to his views on, for example, animals[1]. What each has done is provide Western moral philosophy with a distinctive approach, an approach that, its proponents think, can fruitfully be adapted to yield what we now recognize as moral truth.

 

먼저, 다음을 반드시 강조해야 겠다. 칸트의 철학에 감화받은 다수의 의무론자들이 그의, 예컨대 동물에 관한 견해에는 동조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칸트 자신은 동물이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동물에 대한 인간의 의무를 부정했다. 그러나, '동물 해방' 의 가장 유명한 두 옹호자 중 한 사람인 Tom Regan는 의무론자고, 게다가 칸트의 이념들을 사용했다: 그의 동물 권리론을 참고할 것. ), 오늘날 덕 윤리학을 지지하는 이들은 자신들이유감스럽고 편협하게 상술된 아리스토텔레스 도덕 철학의 어떤 사소한 내용에도 동의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각각의 이론이 베풀어 준 것은 서양의 도덕 철학에 특유의 접근법을 마련해 준 것이며, 그 접근법은 각 이론의 지지자들이 생각하건데 우리가 현재 도덕적 진리로 받아 들이고 있는 것들을 얻기 위해 생산적으로 수정될 수 있다. 

먼저, 다음을 반드시 강조해야 겠다. 칸트에게 감화받은 다수의 의무론자들이 그의, 예컨대 동물에 관한 견해에는 동조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칸트 자신은 동물이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동물에 대한 인간의 의무를 부정했다. 그러나, '동물 해방' 의 가장 유명한 두 옹호자 중 한 사람인 Tom Regan는 의무론자이고, 게다가 칸트의 개념들을 가져다 썼다: 그의 동물 권리론을 참고할 것.), 오늘날 덕 윤리학의 지지자들은 유감스럽고 편협하게 서술된 아리스토텔레스 도덕철학의 어떤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 그에 따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 각각은 서양 도덕 철학에 특유의 접근법을 제시해 주었고, 각 이론의 지지자들이 생각하건데, 그 접근법은 현재 우리가 도덕적 진리로 인정하는 것들을 표명하기 위해 생산적으로 수정될 수 있다. 

 



[1] Kant himself denied that we had any duties to any animals, on the grounds that they were not persons but things. However, Tom Regan, one of the two most famous defenders of ‘animal liberation’, is a deontologist and moreover one who employs Kantian ideas: see his The case for Animal Rights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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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이 설렁설렁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거의 새 작업이다시피 할 줄은 몰랐다. 아마도 이란 이름답게 아주 어색하게 옮겨져 있던 첫 두 문단을 이제 새삼스레 다시 보니 그랬나보다.

 

어릴 때부터도, 또 이런 일에서도 다, 나는 끝에 가서 점을 찍고 되돌아와야 하는 것 같다. 다 갔다 와서 다시 봐야 뭐가 보여도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세상 일이 나를 위해 그렇게 여유와 기회로 기다려주지 않음, 내게 세상이 그렇게 관대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으므로 잘 되지 못하고 잃고 잊혀져야 하는 시간들 앞에 별달리 변명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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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2 회분을 고쳤다. 생각으로는 역자 주의 내용을 확정짓고 그 내용을 밝히는 것으로 후기를 삼으면 좋겠다 했는데 지금은 더 못할 것 같다 . 아마도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 매일 해 올리고, 대신 아침저녁으로 덧붙이기..그렇게 되겠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한 반은 무척 바쁘고 한 반은 평소와 다름 없고 또 한 반은 여유 있어 보인다. 한 반쯤은 세상일에 신경 쓴다고 일에 지장 받는다고 하고 한 반쯤은 그래서 결론이 뭐래? 라고만 묻는다. 한 반 가량은 벌써부터 세밑 인사 메일을 보내시 시작했고 한 반 가량은 그게 뭐 일이며 중요하냐고 무심하리라. 이런 식으로 쪼개 버리면 내가 아는 사람은 한 반쯤 늙고 게으르다.

 

 

킹크스의 노래를 듣다 이런 말장난이나..그리고 덕분에 생각난 그림. http://www.aladin.co.kr/blog/mypaper/784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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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Virtue Ethics

 

Virtue ethics is perhaps the most important development within late twentieth-century moral philosophy. Rosalind Hursthouse, who has made notable contribution to this development, now presents a full exposition and defense of her neo-Aristotelian version of virtue ethics. She shows how virtue ethics can provide guidance for action, illuminate moral dilemmas, and bring out the moral significance of the emotions. Deliberately avoiding combative stance, she finds less disagreement between Kantian and neo-Aristotelian approaches than is usual, and she offers the first account from a virtue ethics perspective of action, from a sense of duty’. She considers the question which character traits are virtues, and explores how answers to this question can be justified by appeal to facts about human nature. Written in a clear, engaging style which makes it acceptable to non-specialists, On Virtue Ethics will appeal to anyone with an interest in moral philosophy.

 

덕 윤리학에 관하여

 

덕 윤리학은 20 세기 후반 도덕철학 내부의 가장 큰 발전이었던 것 같다. 덕 윤리학의 진전에 주목할만한 기여를 해 온 Rosalind Hursthouse 가 그의 신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덕 윤리학에 대한 완전한 해설과 변론을 내놓았다. 이 책에서 그는 덕 윤리학이 어떻게 인간 행위의 지침을 제시하고 도덕적 딜레마의 문제를 해명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감정이 가진 도덕적 중요성의 의미를 분명히 해 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호전적인 태도를 신중히 피해 가면서, 그는 칸트적 접근과 신 아리스토텔레스적 접근 사이의 불일치가 흔히 생각되는 것보다 적다는 점을 확인시키고,  의무감에서 벗어난  덕 윤리학적 행위관의 최초의 해석을 시도한다. 어느 성품들이 덕이 되는가에 관한 문제를 검토하고, 이에 대한 답변이 어떻게 인간 본성에 관한 사실에 호소함으로써 정당화될 수 있는가를 탐색한다. 비전문가들에게도 만족스럽게 전달될 수 있게끔 분명하고 매력적인 문체로 씌여진 덕 윤리학에 관하여’ On Virtue Ethics 는 도덕 철학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이 끌릴 책이다.   

 

아마도 덕 윤리학은 20세기 후반 도덕철학에서 이룬 가장 중요한 발전이었을지 모른다. 이런 발전에 두드러진 공헌을 해 온 로잘린드 허스트하우스 Rosalind Hursthouse가 이제는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의거한 자신의 덕 윤리학 이론을 상세히 해설하고 변호하려 한다. 이 책에서 그는 어떻게 덕 윤리학이 행동규범을 제시하고 도덕적 딜레마를 해명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감정의 도덕적 의의를 드러낼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호전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려는 신중함을 보이면서, 그는 칸트와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 두 접근의 격차가 으레 생각해 온 것보다 적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행동에 관해 의무 관념에서 벗어나처음으로 덕 윤리학의 견지에서 상술한다. 그의 연구는 어떤 인격적 특성이 덕이 되느냐의 문제를 주요하게 다루고, 이에 대한 답변이 정당화되려면 왜 인간 본성에 대한 사실에 호소해야 하는지를 면밀히 검토한다. 비 전문가들도 무난히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명쾌하고 매력적인 문체로 씌여진 덕 윤리학에 관하여 On Virtue Ethics 는 도덕 철학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마음이 끌릴 책이다.    

 

  

Introduction

 

“Virtue ethics” is a term of art, initially introduced to distinguish an approach in normative ethics which emphasizes the virtues, or moral character, in contrast to an approach which emphasizes duties or rules (deontology) or one which emphasizes the consequences of actions (utilitarianism). Imagine a case in which it is obvious that I should, say, help, someone in need. A utilitarian will emphasize the fact that the consequences of doing so will maximize well-being, a deontologist will emphasize the fact that, in doing so, I will be acting in accordance with a moral rule such as ‘Do unto others as you would be done by’, and a virtue ethicist will emphasize the fact that helping that person would be charitable or benevolent. Virtue ethics is both an old and a new approach to ethics, old in so far as it dates back to the writings of Plato and, more particularly, Aristotle, new in that, as a revival of this ancient approach, it is a fairly recent addition to contemporary moral theory.

 

서론

 

덕 윤리학은 하나의 기술 용어로, 처음에는 의무와 규칙(의무론)을 강조하거나 행위의 결과를 강조하는(공리주의) 윤리학의 접근과는 대조적으로 덕 또는 도덕적 성품을 강조하는 규범 윤리학 내부의 한 견해를 구별짓기 위해 소개되었다. 곤경에 빠진 사람에게 도움을 주어야만 하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경우를 상상해 보자. 공리주의자는 그런 행위의 결과가 복리를 최대화 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할 것이고, 의무론자라면 남을 돕는 일에 있어서, 나의 행위는 도덕 규칙, 예컨대 남에게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와 같은 규칙을 따르게 될 것임을 강조할 것이다. 그리고 덕 윤리학자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은 인정 많고 친절한 행동이라고 강조할 것이다. 덕 윤리학은 윤리의 제 문제에 관한 오래되고도 새로운 접근이다. 플라톤의 저작들, 보다 구체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에서 오래되었으며, 이런 고대의 탐구법이 부활한 것으로서, 상당히 최근에 와서야 현대의 도덕 이론에 추가되었다는 점에서 새롭다.

 

 

덕 윤리학이라는 말은 일종의 기술 용어로, 처음에는 덕 또는 도덕적 인격을 강조하는 규범 윤리학의 한 견해를 의무 또는 규칙(의무론)을 강조하거나, 행위의 결과를 중시하는 (공리주의) 견해들과 대조적으로 구별짓기 위해서 소개되었다.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도와야만 하는 것이 명백한 경우를 상상해 보자. 공리주의자는 그런 행위의 결과가 복지를 극대화 시키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할 것이고, 의무론자는 그렇게 할 경우, 나는 네가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와 같은 도덕 규칙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할 것이다. 그리고 덕 윤리학자는 그렇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은 자애롭고 선한 일이라고 강조할 것이다. 덕 윤리학은 윤리 문제를 다루는 새롭고도 오래된 방법이다. 플라톤의 저작들, 보다 구체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에서 오래됐으며, 이런 고대적 접근의 부활로서, 상당히 최근에 와서야 현대 도덕이론에 추가되었다는 점에서는 새롭다.

 

 

 

 

 

 

On Virtue Ethics

 

Virtue ethics is perhaps the most important development within late twentieth-century moral philosophy. Rosalind Hursthouse, who has made notable contribution to this development, now presents a full exposition and defense of her neo-Aristotelian version of virtue ethics. She shows how virtue ethics can provide guidance for action, illuminate moral dilemmas, and bring out the moral significance of the emotions. Deliberately avoiding combative stance, she finds less disagreement between Kantian and neo-Aristotelian approaches than is usual, and she offers the first account from a virtue ethics perspective of action, from a sense of duty’. She considers the question which character traits are virtues, and explores how answers to this question can be justified by appeal to facts about human nature. Written in a clear, engaging style which makes it acceptable to non-specialists, On Virtue Ethics will appeal to anyone with an interest in moral philosophy.

 

덕 윤리학에 관하여

 

덕 윤리학은 20 세기 후반 도덕철학 내부의 가장 큰 발전이었던 것 같다. 덕 윤리학의 진전에 주목할만한 기여를 해 온 Rosalind Hursthouse 가 그의 신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덕 윤리학에 대한 완전한 해설과 변론을 내놓았다. 이 책에서 그는 덕 윤리학이 어떻게 인간 행위의 지침을 제시하고 도덕적 딜레마의 문제를 해명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감정이 가진 도덕적 중요성의 의미를 분명히 해 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호전적인 태도를 신중히 피해 가면서, 그는 칸트적 접근과 신 아리스토텔레스적 접근 사이의 불일치가 흔히 생각되는 것보다 적다는 점을 확인시키고,  의무감에서 벗어난  덕 윤리학적 행위관의 최초의 해석을 시도한다. 어느 성품들이 덕이 되는가에 관한 문제를 검토하고, 이에 대한 답변이 어떻게 인간 본성에 관한 사실에 호소함으로써 정당화될 수 있는가를 탐색한다. 비전문가들에게도 만족스럽게 전달될 수 있게끔 분명하고 매력적인 문체로 씌여진 덕 윤리학에 관하여’ On Virtue Ethics 는 도덕 철학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이 끌릴 책이다.   

 

아마도 덕 윤리학은 20세기 후반 도덕철학에서 이룬 가장 중요한 발전이었을지 모른다. 이런 발전에 두드러진 공헌을 해 온 로잘린드 허스트하우스 Rosalind Hursthouse가 이제는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의거한 자신의 덕 윤리학 이론을 상세히 해설하고 변호하려 한다. 이 책에서 그는 어떻게 덕 윤리학이 행동규범을 제시하고 도덕적 딜레마를 해명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감정의 도덕적 의의를 드러낼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호전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려는 신중함을 보이면서, 그는 칸트와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 두 접근의 격차가 으레 생각해 온 것보다 적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행동에 관해 의무 관념에서 벗어나처음으로 덕 윤리학의 견지에서 상술한다. 그의 연구는 어떤 인격적 특성이 덕이 되느냐의 문제를 주요하게 다루고, 이에 대한 답변이 정당화되려면 왜 인간 본성에 대한 사실에 호소해야 하는지를 면밀히 검토한다. 비 전문가들도 무난히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명쾌하고 매력적인 문체로 씌여진 덕 윤리학에 관하여 On Virtue Ethics 는 도덕 철학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마음이 끌릴 책이다.    

 

  

Introduction

 

“Virtue ethics” is a term of art, initially introduced to distinguish an approach in normative ethics which emphasizes the virtues, or moral character, in contrast to an approach which emphasizes duties or rules (deontology) or one which emphasizes the consequences of actions (utilitarianism). Imagine a case in which it is obvious that I should, say, help, someone in need. A utilitarian will emphasize the fact that the consequences of doing so will maximize well-being, a deontologist will emphasize the fact that, in doing so, I will be acting in accordance with a moral rule such as ‘Do unto others as you would be done by’, and a virtue ethicist will emphasize the fact that helping that person would be charitable or benevolent. Virtue ethics is both an old and a new approach to ethics, old in so far as it dates back to the writings of Plato and, more particularly, Aristotle, new in that, as a revival of this ancient approach, it is a fairly recent addition to contemporary moral theory.

 

서론

 

덕 윤리학은 하나의 기술 용어로, 처음에는 의무와 규칙(의무론)을 강조하거나 행위의 결과를 강조하는(공리주의) 윤리학의 접근과는 대조적으로 덕 또는 도덕적 성품을 강조하는 규범 윤리학 내부의 한 견해를 구별짓기 위해 소개되었다. 곤경에 빠진 사람에게 도움을 주어야만 하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경우를 상상해 보자. 공리주의자는 그런 행위의 결과가 복리를 최대화 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할 것이고, 의무론자라면 남을 돕는 일에 있어서, 나의 행위는 도덕 규칙, 예컨대 남에게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와 같은 규칙을 따르게 될 것임을 강조할 것이다. 그리고 덕 윤리학자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은 인정 많고 친절한 행동이라고 강조할 것이다. 덕 윤리학은 윤리의 제 문제에 관한 오래되고도 새로운 접근이다. 플라톤의 저작들, 보다 구체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에서 오래되었으며, 이런 고대의 탐구법이 부활한 것으로서, 상당히 최근에 와서야 현대의 도덕 이론에 추가되었다는 점에서 새롭다.

 

 

덕 윤리학이라는 말은 일종의 기술 용어로, 처음에는 덕 또는 도덕적 인격을 강조하는 규범 윤리학의 한 견해를 의무 또는 규칙(의무론)을 강조하거나, 행위의 결과를 중시하는 (공리주의) 견해들과 대조적으로 구별짓기 위해서 소개되었다.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도와야만 하는 것이 명백한 경우를 상상해 보자. 공리주의자는 그런 행위의 결과가 복지를 극대화 시키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할 것이고, 의무론자는 그렇게 할 경우, 나는 네가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와 같은 도덕 규칙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할 것이다. 그리고 덕 윤리학자는 그렇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은 자애롭고 선한 일이라고 강조할 것이다. 덕 윤리학은 윤리 문제를 다루는 새롭고도 오래된 방법이다. 플라톤의 저작들, 보다 구체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에서 오래됐으며, 이런 고대적 접근의 부활로서, 상당히 최근에 와서야 현대 도덕이론에 추가되었다는 점에서는 새롭다.

 

 

 

 

  

 

Up until about thirty years ago, normative ethics was dominated by just two theories: deontology, which took its inspiration from the eighteenth century philosopher Immanuel Kant, and utilitarianism, which derives, in its modern incarnation, from the eighteenth-and nineteenth-century philosophers Jeremy Bentham and J.S. Mill. In the hundreds of books and articles on normative ethics published during the sixties and seventies, it was common to find versions of one or both of these theories outlined, discussed, amended, applied, compared, and criticized-but no mention made of any third possibility which harked back to the ancient Greeks.

 

약 삼십년 전까지, 규범 윤리학에서는 18 세기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에게 영감을 받아 형성된 의무론과 18, 19 세기 철학자 제레미 밴담과 J.S. 밀의 근대적 구체화 작업 속에서 나온 공리주의라는 단지 두 가지 이론이 지배적이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출간된 수 백권의 규범 윤리학 관련 도서와 문헌 중에서 이들 두 이론의 하나 혹은 둘 모두의 개괄, 논의, 개정, 적용, 비교, 및 비판 형식을 띤 텍스트는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시대로 되돌아가 귀를 기울이려는 제 3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

 

30년 전까지, 규범 윤리학 분야는 단지 두 개의 이론, 18 세기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에게서 영감을 받은 의무론과, 18, 19 세기 철학자 제레미 밴담과 Jeremy Bentham 존 스튜어트 밀 J.S. Mill 의 근대적 체현에서 비롯된 공리주의가 지배적이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출간된 수 백권의 규범 윤리학 관련 도서와 문헌에서 이들 두 이론 중 하나 혹은 둘 다에 대한 개괄, 논의, 개정, 응용, 비교 및 비판의 형식을 띤 텍스트는 일반적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 되돌아가 귀를 기울이는 제 3의 가능성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Gradually, a change was observable. In some books designed as undergraduate text in normative ethics, various articles critical of the prevailing orthodoxy were cited as calling for a recognition of the importance of the virtues, and a few paragraphs on 'what a virtue ethicist would say' inserted. At first, the mentions tended to short and dismissive. Virtue ethics was regarded not as the third approach in its own right, but as emphasizing a few interesting points-such as the motives and character of moral agents-that deontologists and utilitarians could usefully incorporate into their approaches. Then, as more articles were written in its defence, it acquired the status of 'the new kid on the block'-yet to establish its right to run with the big boys, but not to be dismissed out of hand. And now in the latest collections (as I write, in 1998), it has acquired full status, recognized as a rival to deontological and utilitarian approaches, as interestingly and challengingly different from either as they are from each other.

 

점차, 변화를 주목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몇몇 규범 윤리학 교재에 덕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요구로서 기존의 정론에 비판적인 여러 문헌들이 인용되었고, ‘덕 윤리학자라면 무엇을 말하겠는가에 관한 몇 개의 단락이 삽입되었다. 초기에, 그 언급들은 불충분하고 미미한 편이었다. 덕 윤리학은 그 본래로 제 3의 길로 생각되지 않았고, 의무론자와 공리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이론에 유용하게 포함시켜볼만한 몇 가지 흥미로운 지점들-도덕적 행위자의 동기와 성품 같은- 을 강조하려는 차원에서 고려되었다. 그 후, 덕 윤리학을 변론하는 더 많은 문헌이 나오게 됨에 따라, 덕 윤리학은 풋내기의 지위를 얻게 되었으나, 그것은 거물들과 경주를 벌일 권리가 생겼다는 것이 아니라, 당장 퇴장 당하지 않게 되었다는 정도의 결과였다. 그리고 최근의 (말하자면, 1998) 문헌에서, 이제 덕 윤리학은 목적론과 공리주의가 서로 다른 것처럼, 그 두 이론의 어느 하나와 흥미롭고 논의를 자극하는 차이를 보이는 경쟁자의 완전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차츰 변화를 볼 수 있었다. 대학교 교재로 기획된 일부의 규범 윤리학 책에 일반적인 정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이론에 비판적인 여러 문헌들이 덕의 중요성이 재인식 될 필요가 있다는 차원에서 인용되었고, ‘덕 윤리학자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주장할 것이다의 내용이 몇 단락 삽입되었다. 처음에 그런 언급들은 짧고 미미한 편이었다. 덕 윤리학에 대한 평가는 독자적인 제 3의 길이 아니라, 의무론자와 공리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견해에 유용하게 통합시켜볼만한  몇 가지 흥미로운 점들 -도덕 행위자의 동기와 인격과 같은-을 강조해 준 정도였다. 그 후 덕 윤리학을 지키려는 더 많은 문헌들이 나오게 됨에 따라, 덕 윤리학은 ‘신진’ 의 지위를 얻었으나, 그것의 의미는 기존의 주자들과 경주를 벌일 권리가 생겼다는 것이 아니라 당장 퇴장당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라는 정도였다. 그리고 이제 최근의 (예를 들면 내가 쓴 1998년도 판) 문헌들 속에서 덕 윤리학은 목적론과 공리주의가 서로 다른 것처럼, 그 두 이론의 어느 하나와 흥미롭고도 논쟁을 자극할만큼 차이가 나는 경쟁자의 완전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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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character traits 란 말이 나왔다. 처음도 아니지만 이번에도 조금 더 자연스레 그 말을 받을 수 없을까 몇 개의 후보 말들 사이를 왔다갔다 하다가, 스누피 그림이 함께 실린 책 제목에 이 말이 실려 있는 것을 웹에서 봤다. 작업하면서 한 몇 번, 이 책은 아주 먼 옛날 NL-PD 로 서로 싸울 때 그 중 어느 한 편에 딱지 붙이곤 하던, 칭찬도 됐고 욕도 됐던 성품론 이름표 생각이 나네..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기억이 다시 났다.   

 

 

오늘 남은 책 분량을 다 옮겼다. 지금까지 한 것 중에 가장 길었고 저자의 말대로 뒤로 갈수록 어려운 내용이라서 나도 모르게 마감처럼 정해졌던 시간을 훌쩍 넘겼다. 하지만 실제로 예상이 깨진 것은 어제 인터넷 신문에서 본 기사들과 녹취록 공개 전후의 일들을 따라간답시고, 평소랑 다르게 어제와 오늘에 걸쳐 하면 된다고 정한 것을 지키지 못해서 그랬다.  어쨌든  http://www.aladin.co.kr/blog/mypaper/782470

오늘 초벌을 마친 기념으로 올려 보는 노래다. 원래는 The Czars Goodbye를 올리려고 했는데 작업하며 듣기에는 좀 무겁길래 바꿔 들었다.  다정한 안녕이라니 제목도 좋고. http://www.aladin.co.kr/blog/mypaper/783068

 

 

 

수정 자체가 의미 있다기 보다는 좀 돌아보면서 훗날 할 공부 예습삼아 정리해 두려는 것들은 아직 몇 번 남았으니까 천천히 고치고 기록하도록 하고, 오늘은 하던대로의 후기. 하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서 엉성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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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art III. Rationality The final section of the book is on the ‘rationality of morality’ in relation to virtue ethics, the question of whether there is any ‘objective’ criterion for a certain character trait’s being a virtue. Character traits 는 앞으로 (성격기반, 인격의 특성, 성격적 특성 성품 인품 중에서) 인격적 특성으로 옮길 생각이다.   

 

2.       The standard neo-Aristotelian premise that ‘A virtue is a character trait a human being needs for eudaimonia, to flourish or live well’ should be regarded as encapsulating two interrelated claims, namely, that the virtue benefit their possessor, and that the virtues make their possessor good qua human being (human beings need the virtues in order to live a characteristically good human life). These are separately discussed in the first three chapters of this part, and eventually brought together at the end of final one. 다루기 힘들었던 문장들. 먼저 Standard 는 지난 번에 이어 마땅한 번역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사전적으로 표준하면 고민할 이유가 없는데, ‘표준 전제라는 말이 너무 어색해서 그런 것 같다. 이럴 경우 사전적 의미를 번역자가 다르게 받아도 될런지, 꼭 그럴 필요가 없고 처음부터 그런 습관을 들이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확신은 없다.  

 

3.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전제한다는 덕에 대한 저 구절은 나름대로 옮기는데 시간을 들였는데.  덕은 인간이 참 행복eudaimonia을 위해서, 영화롭고, 잘 살아가기 위해서 갖출 필요가 있는 인격적 특성이라고 해 놓고 보니 또 그렇게 만족스럽지는 않다. Characteristically good 는 지난 번처럼 특징적인-> 그다운 -> 따라서, 인간다운 삶 으로 옮겼다.

 

 

4.       In these chapters I express disagreement with two main schools of thought. I assume, rather than argue for, the view that it is a mistake to suppose that ethics can be given any sort of foundation ‘from the neutral point of view’.  I assume that ethical thought has to take place within an acquired ethical outlook. However, despite disagreeing with those who seek to provide such a foundation, I do not take up the other familiar position which locates all fundamental ethical disagreements in disagreements about values, which I also deny. Ethical disagreements can be seen to lie in disagreements about facts, albeit, frequently, rather odd facts.

 

5.       Express 피력하다로 받았는데 괜찮다 싶었고, 하지만 어떤 문장에서 문장을 맞추려고 실제 그 말의 어조를 넘는 강도나 느낌의 말을 빌어와 쓰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이때 한 번 더 들었다. 이번 작업에서 알게 된 큰 하나는 내가 매일매일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접하는 번역된 글들이 실은 너무나도 주관적인 번역을 거친 글임을 그 자체로서 알게 되었다는 것 같다.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눈으로 일일이 볼 때의 느낌과 참 달랐다. 번역문을 볼 때 잘 보고 선택해야 한다거나, 남의 번역을 무조건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도 역시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깜짝 놀랐다거나 실망했다거나 부러움을 느꼈다거나 배웠다거나 하는 느낌들을 겪어 보면서 내게 소용이 닿는 경험으로 살게 된 것 같다. 

 

6.       저 위 문장의 세 번째 밑줄친 문장은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몇 번을 꼬였다. 단순하게 되어서 잘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렇게저렇게 해 봐도, 내가 문장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혼동이라서 그럴 때는 차라리 단순하게 직역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서 그렇게 옮긴 것 뿐이다. 윤리를 바라보는 이견들이 사실을 보는 관점 차이에 있다는 말은 알겠는데 왜 그것이 상식을 벗어나는 기묘한 일인지, , 그 기묘함이나 상식 밖이 무엇 때문에 이상한지를 깔끔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7.       Chapter 8. The Virtues Benefit their Possessor. Some familiar objections to the very idea that the virtues on the standard list benefit their possessor can quickly be cleared away.  아마도 처음 느끼지 않았나 싶은데, 이 부분부터 아래의 설명들을 적을 때는 저자가 꽤 적극적으로 글을 쓰네 싶었다. 태는 수동태지만 실제로는 편을 가르고, 그만큼 강하게 선이 그어지도록 문장이 이해되게끔 글을 써 내려가더라고 해얄까. 어쨌든 cleared away 에서 저 말을 the objections –cleared away  끝낼 수 있다-> 무릎을 꿇게 할 수 있다-> 무력화시킬 수 있다 등등 뭘 써도 좀 튀고 격한 듯 해서 이것저것 해 보다가, 결국은 그 뒤의 문장들을 읽고 그 어조에 맞춰서 내 편 있는데로 넘어온 세력들을 물리쳤다 또는 쫓아보냈다로 결정했다.

 

 

8.       We may also note that, when we consider the claim in the context of brining up our own children or reflection on our own lives, rather than in the context of trying to convince the wicked or the moral sceptic, we believe it.   이 문장을 어떻게 받을까 끙끙대다 어느 순간에, ‘이 분도 꽤 행간을 읽으라고 시키시네..’ 싶어지던 구절이 이거였다. 의무론 공리주의처럼 여기서도 저자는 두 입장을 놓고서 따지고 있는데, 내용이야 잘 모르겠지만 그 하나하나를 the wicked the sceptic 으로 받아서 이중은유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내 착각일 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놓고보니 그 앞선 문장에서의 cleared away 의 의미도 더 잘 다가왔다. , 우리가 볼 때 영 아닌 입장들이 틀렸다고 입증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문제는 그러고 있을 때 보다는 (말 귀 못알아 듣는 사람들에게 수고를 들이기 보다는, 우리들 스스로를 성찰하고 덕을 스미게 하는 돌봄을 줄 때 덕의 의미와 중요성이 내게 더 잘 배어들게 된다..의 의미로 받고 옮겼다.그래서 wicked 를 심술궃은, 못된, 사악한 중에서 뭘 해야 하나, 처음엔 강한 톤의 사악한을 제쳤다가 이 부분을 이런 식을 이해하고 나서는 (도덕적으로) 사악한으로 아래에서는 받았다.

 

9.       According to Phillips and McDowell, we believe it in so far as we are virtuous, because we have special conceptions of eudaimonia, benefit, harm, and loss, which guarantee its truth. Hence any appeal to the sort of facts that Hare and Foot give in support of the claim are irrelevant. I agree with them that there is no discerning the truth of ‘the virtues benefit their possessor’ from a neutral or wicked standpoint, but not with their explanation. The sorts of facts that Hare and Foot give form essential support for the clam, and are essential to our inculcating virtue in our children. However, they are odd facts, which philosophy has, as yet, no easy way to classify. 너무 기본적인 뜻을 몰랐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Appeal 을 좋은 뜻으로만 해석해 왔던 것 같다. 이 문장에서는 그런데 그렇게 하면 말이 통하지를 않았고, 그러다 퍼뜩 야구나 그런 스포츠 경기에서 항의하고 그럴 때 appeal 한다고 하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전 봤고 항의, 항소의 의미가 있는 것 확인했다. 문제는, 설령 그렇다고 해도 저 밑줄친 부분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는 거다. 왜 그 문장이 앞의 문장과 연결되는 것인지를, 즉 왜 HENCE 가 나와서 연결해 주는지를 모르겠다.  

 

 

10.    Chapter 9. Naturalism. There is another way of interpreting the premise that the virtues are those character traits a human being needs for eudaimonia, to flourish or live well, which has it expressing a form of naturalism. 자연주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정말 적어서 주로 의료계열이나 생존/적자/약육강식의 논리로 사회를 보는 사회이론들의 경우 이 자연주의를 바탕에 깔고 분석하는 경우 전제하는 자연주의론을 염두에 두면서 말을 옮겼다. 그래도 이 부분은 좀 나았고..

 

11.    We interpret it as saying that the virtues are those character traits that make a human being a good human being—are those traits that human beings need to live well as human beings, to live a good, characteristically human, life. Ethical evaluations of human beings as good or bad are taken to be analogous to evaluations of other living things as good or bad specimens of their kind. The analogy is instructive, because it reveals that several features of ethical evaluation thought to be peculiar to it, and inimical to its objectivity, are present in the quasi-scientific evaluation even of plants.

 

12.    밑줄친 부분이 참 이해가 안 가서 이래봤다 저래봤다 하다 역시 이럴 때는 단순하게, 로 그렇게 옮겼다. Inimical objectivity 가 모두 문제였는데, 나는 처음에 저 objectivity objection 인 줄 알고 쉽게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 나에게는 고유하되 남 ()에게는 해로운으로. 그런데 그게 아니고 객관성, 객관적 실재의 objectivity 가 되어서 헛갈린 것 같다.

 

 

13.    Chapter 10. Naturalism for Rational Anmals. However, the analogy can only be pushed so far. Ethics is not a branch of biology. Other living things have characteristic ways of going on that they cannot choose to change, against the background of which they can be evaluated as good or bad specimens. But in so far as we have characteristic ways of going on, we can intelligibly ask ‘Is that a good way to go on?’ of almost any of them and look for ways of changing it if we think the answer is ‘No’.

 

 

14.    Hence it can be rightly claimed that ethical naturalism, construed as the attempt to ground ethical evaluation in a scientific account of human nature, is a misconceived enterprise. But that is a far cry from claiming that no account of human nature can be objectively well-founded and moving straight to the idea that any conception of it is as good as any other. 이번에 또하나 알게 된 것은 내가 ,rightly 란 말, right 란 말에 무척 취약하다는 거였다. 이 말은 나올 때마다 옳다/정당하다/제대로다/맞다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게 된다. 이번에는 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다로 했는데 그거 결정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영문을 읽을 때 사전을 찾거나 하지 않고도 큰 어려움 없이 읽어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런 내 생각이 참 이상한 생각이었다.

 

15.    말 나온 김에..아마 다음부터의 글에서 한 번쯤은 더 언급될 내용인지도 모르지만, 이번에 하얀 책 옮기면서 했던 제일 깊고 컸던 생각은 난 정말 날 너무 모르는구나..’ 였다. 그 모름의 대상은 내가 실제로 할 수 있는 혹은 발휘할 수 있는 능력/과욕이기도 했고,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자신감/늘 애매함 이기도 했고 또다른 의미에서의 자기승인/겸손/위선 이기도 했고 여러 번, 아주 다각도에서 느꼈다. 그 끝에 이런저런 생각들을, 아직은 결심의 점에 다다르지 못한 것들이지만 해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번 일은 정말 남달랐다.

 

 

16.    Chapter 11. Objectivity. The two different interpretations of the premise that ‘a virtue is a character trait a human being needs for eudaimonia’ can ultimately be seen as interrelated, for both rely on the idea that our nature is such that the virtues, as we know them, suit human beings.  역시 애매했던 문장. 나는 이 문장이 일종의 성선설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꼈고 그래서 suit 의 의미를 인간에게는 덕이 어울리고, 그런 것이 인간의 본성이니라..의 어조로 받았다. 그렇게 두었으면 되는데 as we know them 이라는 말이 자꾸 걸려서, 혹시 덕을 가지면 좋아진다는 그 의미인가 싶었고, 다시 문장을 알다시피 덕은 인간을 만족시킨다(좋게 해준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다로 했다가 <- 이 경우는 말이 되지 않아서 고쳤다.

 

 

17.    This fact, if it is a fact, is a highly contingent one. It is a contingent fact that we can, individually, flourish or achieve eudainomia, contingent that we can do so in the same way as each other, and contingent that we can do so all together, not at each other’s expense. If things had been otherwise then, according to the version of virtue ethics presented here, morality would not exist, or would be unimaginably different.  나는 여기서의 contingent 를 조건부나 우연의 의미 말고 불확실성 또는 철학에서 경험명제라고 하는 그 의미로 받았다. 그랬던 것은 뒤 문장을 보면 틀린 것 같지 않다. 문제는 if 이하인데 나는 if –otherwise then, 에서 왜 otherwise 가 나오나 if 가 있는데 그냥 not 을 쓰지 않고서..가 의문이었고 혹시 다른 뜻이 있는지 확인을 여러 번 한 뒤에, 아무래도 여기서는 otherwise if not 이라기 보다는 그냥 다른, 그와 다른의 의미인 것 같다고 직감적으로 번역을 했다.  잘 되었는지 모르겠다. 전체적으로도 이렇게 문장의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해서 머뭇거리듯 옮긴, 이번 작업은 대체로 그랬다고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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