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후기.

 

본문 중에 pronoun (대명사) 라는 말이 나온다. 그때 이 만화 스트립이 생각나서 올렸다. Calvin and Hobbes 만화의 으뜸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온라인에서 그림을 구할 수 있나 찾다 보니까 같은 생각인 사람들이 있어서 재미있었다. 노래는 Big Star 의 오래 된 곡, Try again 인데 역시 본문을 옮기다가 생각이 나서 연결했다. 노래가 좋고 가사도 좋다. (여기 누름-노래 파일이 플레이 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It doesn’t matter whether I express an intention (‘I’ll do x’) or receive what is beyond doubt a directive (‘do x’), whether I work out or am told something about myself, or give myself (or am given) an implicit directive (‘I/You must/should/ought to do x’), or (0) whether I work out, or       find out something about an action (‘x is/would be right’).

 

(0) 이번에 내용 옮기면서 그래 이 맛에 한다싶어지던 부분. 저자가 괜히 그런 것은 아닐테고, 그렇다면 둘 사이에 뭔가 차이가 있어서 work out find out 이 나란히 놓인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여태까지 이 둘을 그다지 크게 구분해 오지 않고 읽고 썼다. (물론 work out 에서 solve 의 의미 말고) , 둘 다 생각하다 발견하다 깨닫다 알게 되다 등으로. 두꺼운 사전을 찾아 보았더니 전자 work out calculation speculation 이 후자에는 discover make something in case experiences 등이 있었다. , 아마도 이 것인가 보다 하고 일단 접수를 한 뒤 도서관 옆 자리 학생과 또 친구에게도 물어 봤다. 이 둘이 그렇게 다르다고 봐도 되느냐고. 둘 다 그렇다고 대답해 주었다. , work out find out 은 많은 경우 서로 다른 의미로 쓰이는데 그게 엄격하다기 보다는 일용적이라는 말을 들었고, 전자는 reach an answer mostly through thinking 의 의미가 강하다면, 후자는 물론 through thinking 이 있되 전자에서는 강하게 드러나지 않는 의미, experiences 가 있다는 것. 즉 경험을 해서 깨달아서 혹은 어떤 방법을 써서 (직간접적으로 모두) 그게 그런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는 의미가 있단다. 작은 것이지만 하나 배운 것 같고, 이렇게 알면 까먹지 않을 것 같아서 공부가 된 것 같고 좋았다.  

 

I have not turned to an examination of my personal preferences, or the law, or a (1) Machiavellian acquaintance, for I want to do what can truly be assessed as right.

 

(1) 마키아벨리적 지식이라니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내게 마키아벨리적 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구글을 돌려 보았지만 나오는 게 없었다. 이 책은 설명이 상세한 편이고 어려운 전문 용어를 많이 쓰지도 않아서 책을 옮기면서 소외감 같은 것을 느낀 적은 아직 많지 않은데 이번에 크게 걸렸(?) .

 

But dilemmas which are resolvable only with remainder show how these two (2) may come apart.

 

(2) 둘이 서로 달리 가다. 보면 바로 알겠는데, 써 보라고 하면 distinguish differ discern 등이 나올까 먼저 나오기 힘들 말이다. 신문이나 문서에서 자주 보이는 말이면서도.  

 

But ‘y is the right action’ is now inappropriate; y is not right. It involves, say, causing a terrible amount of suffering, breaking a promise, or doing what is shabby.  In vain do I protest that now ‘I want to do what is right’, to undo past wrongdoing and start afresh with a clean slate. I should have thought that before. The(3) ‘satisfactory review of my own conduct’ is not for me, or at least, not yet; remorse and guilt are my portion.

 

이 문단은 번역이 아니라 독서고, 공부고 그랬다. 아무튼 (3) 은 지난 번 번역과 후기에서 흄이 명시한 세 개의 행복의 조건들 관련해서 반복된 것인데, 전보다 더 그 의미가 분명해지는 것 같다. , 여기서의 satisfactory 란 내가 나의 지난 행위를 돌아 볼 때 얼마나 잘 했다고, 옳았다고 평가할 수 있는가의 차원에서 만족할만한 그만하면 좋았다고 할만한의 의미다. 지난 번에도 의견이자 질문을 던져 봤듯이, ‘만족스러운 검토라고 직역을 해 버리면 뜻이 잘 통하지 않을 문구라고 생각한다. 이런 경우 어떤 것이 제일 좋은 대응일지. 우선 만족스러운 지난 행위의 검토 등으로 옮기고서 검토 과정이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 결과로서 내게 만족감과 다행감이 든다의 것을 뜻한다고 주를 달 수 있겠다 정도만 떠오른다.

 

Here we see action guidance and action assessment distinguished. The explicit directives and the oughts, shoulds, and musts give the guidance, but ‘y is the right action’ assesses the action and gives it (4) a tick of approval. And in some cases, the tick is not warranted. So ‘y is the right action’ is not true. 찬성의 도장 이렇게 하는 게 기계적인 번역이겠는데, 승인의 표식 정도로 받았다.

 

How does this point (5) fare in relation to the virtue ethics account? (5) compare to do 로 받았다.

 

이 문장이 무엇을 말하는지야 파악하기 어렵지 않았으나, fare 란 말에서 그 의미가 바로 전달되어 오지 않았다. 알고 지내는 원어민에게  이 말 이 뜻으로 자주 쓰냐고 물었더니 꽤 그렇단다. 이번 기회에 알아 두자고 정리했다.

 

7. to experience good or bad fortune, treatment, etc.; get on: He fared well in his profession. 

8. to go; turn out; happen (used impersonally): It fared ill with him. 

 

Some people may find this counter-intuitive, but I myself find it (6)an attractive feature of the account. (6) “매력적인이라는 말로 되지만 그렇게 옮기고 나면 그 이론더러 왜 매력적이라고 말하는지를 알 수 없어서, 이렇게 되면 저자가 마치 빈 말이나 자기만 아는 말 하는 것처럼 될까봐 appealing 으로 받아서, ‘논조가 호소력이 있다, 울림이 있다, 설득력이 높다정도의 뉘앙스로 받았다.

 

 

이거야 도덕적 결정,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 그런 것하고 상관 없지만, 그래도 이번에 옮긴 분량 또 지난 번 행복을 위해 매우 요청되는 조건들 있었던 분량..들 덕분에 생각이 많았다.

 

카테고리들을 몇 개 닫고 하얀 책과 다른 하나만 남겼는데, 나중에 이랬던 나와 이후를 돌아 보면서 “satisfactory review of my own conduct” 하게 될지 모르겠다. 나중에 아무리 많이 후회한들 소용 없고, 스스로를 엄한 데 빠지지 않게 미리 잘 해야 옳고 좋은 다는 말이 맞다 싶으면서도 고약하고 참 까탈스러운 소리다..하게 된다. 

 

이런 잡생각의 와중에 바로 이 부분을 읽었던 2월 어떤 날의 수첩을 펼쳐 봤다. 아마 그날 어디선가 봤던지, 시편 1편이라 해 놓고 덕 윤리학의 이번 내용하고 상관이 있는 것 같다고 적어 놨다. 구글로 시편 1 편을 다시 찾아 읽어 보는데 이걸 읽은 사람이 나 맞나 싶고 일년 안에서도 서로들 많이 깜깜하구나 싶고 그랬다.    

 

http://school.missionseed.net/middle/english/data/2003/06-09.html

 

 

* 아래는 위에 올린 노래 Try again 의 가사.

 

Lord I've been trying to be what I should

Lord I've been trying to do what I could

But each time it gets a little harder

I feel the pain

But I'll try again

Lord I've been trying to be understood

And Lord I've been trying to do as you would

But each time it gets a little harder

I feel the pain

But I'll try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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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6-11-09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헷 저 만화 퍼갈께요 ^^

am 2006-11-09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홈페이지를 갖고 계시면 게다가 그 살림까지 와..아닌가.. 그 살림이 이 살림이라 괜찮으신가..오지랍 넓은 생각이나 하고 말았습니다.

이건 가져 가시든 아니시든 저는 모르고, 암튼 딸기님 보시라고 하나 더 올리는 거네요. 이 무렵 제 뜻과 무관하게 고질라를 시대별로 연타로 봤었거든요. 그런 뒤에 만화를 봐서 그런지 무척 웃겼었어요. 자꾸 생각이 나서 또 웃기고..참 보고 앉아 있기 힘들던 고질라의 공포? 가 사라져서 그런지 그때 보다는 덜 웃기네요^^



* 또 아참, minotaurus 도 그렇고 위 만화도 그렇고, 일부는 두어 달 뒤, 일부는 몇 달 뒤에는 링크가 끊어질 거예요. (좋아 보이는 것들은 갖겠다고 따로 모아가고 있었거든요.) 그게 안 괜찮으시면 저장을 하시고 업로드를 하시면 되겠어요.

 

 

 

RIGHT ACTION AGAIN

다시 옳은 행위

 

Bearing the above in mind, let us look again at virtue ethics’ ‘account’ of right action. ‘An action is right iff it is what a virtuous agent would, characteristically, do in the circumstances’—and we are supposing that we have a standard list of virtues and vices. Does this ‘account’, we might now ask, provide action guidance, or action assessment, or both? The significance of the distinction between these two did not surface in the first chapter, but we now need to look at it.

 

위의 내용들을 염두에 두면서 옳은 행위에 관한 윤리학의 관점 다시 보도록 하자. ‘어떤 행위는 덕이 있는 행위자가 그가 처한 상황에서 그가 가진 덕의 특징 대로 하게 행동인 경우에만 옳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표준이 되는 덕과 악덕의 목록이 있음을 가정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다음을 물을 있을 같다. 윤리학의 이런 관점 행위 지침 주는가 아니면 행위 평가 내려 주는가, 아니면 다인가? 1 장에서는 둘의 차이가 갖는 중요성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으나, 이제는 점을 자세히 필요가 있다.

 

When I seek action guidance, I am asking, ‘What shall I do (in this situation in which I am, or with which I shall shortly be confronted)?’ A normative ethics is supposed to provide me with the wherewithal to find the answer (unless I am faced with an irresolvable dilemma).

 

행위의 지침을 찾으려고 노력 , 나는 ‘(내가 처한 또는 처하게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묻고 있는 중이다. 규범 윤리학은 그런 나에게 답을 찾아 방도를 주기로 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해결이 불가능한 딜레마에 직면하게 된다).

 

            ‘The’ answer may take many different grammatical forms. Having worked ‘it’ out for myself I may conclude ‘I must/should/ought to do x’, or ‘x is/would be the right thing to do/the right action to take’, or ‘I’ll do x’. A person advising me may say, ‘You must/should/ought to do x’ or ‘x is/would be the right thing to do’ or ‘Do x’. Writers in applied ethics rarely issue imperatives to their readers in the form of ‘If you are in…then you must/should/ought to[1] …’, but more often the pronoun is impersonal (‘Anyone who is in…must/should/ought to…’) or first or third person. And often they have ‘x is/would be the right thing to do/the right action’.

 

                답은 다양한 문법적 형태를 있을 것이다.  스스로 떠올려 보면서, 나는 나는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의무적으로 x 해야 한다혹은 ‘x 해야만 하는 옳은 /취해야 옳은 행동일 것이다또는 나는 x 것이다등의 결론을 내릴 있을 것이다. 나의 조언자는 너는 반드시/무슨 일이 있어도/의무적으로 x 해야만 한다.’ 혹은 ‘x 해야만 하는 옳은 /옳은 행동일 것이다.’ ‘x 해라 말할 있을 것이다. 응용 윤리학 분야의 저자들이 독자에게 만일 네가 정황에 처해 있다면, 반드시/무슨 일이 있어도/의무적으로 해야만 한다 명령법을 구사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명사는 무인칭이거나 (‘.. 상황에 있는 누군가는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의무적으로…’) 일인칭 또는 삼인칭인 경우가 훨씬 흔하다. 그리고, 그때의 명령어들은 종종 ‘x 해야만 하는 옳은 /옳은 행위다 형태를 취한다.   

 



[1] I am not unaware of the fact that some writers have drawn subtle distinctions between these three auxiliary verbs; I ignore them because I do not think they are relevant in this context. 저자들이 이 세 개의 조동사들을 민감하게 구별해 왔다는 점은 모르는 바 아니나, 그것이 지금의 맥락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그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겠다. 

 

 

 

In the context of seeking and finding action guidance from normative ethics, all these grammatically different forms may readily be regarded as saying the same thing, as giving the same answer. It doesn’t matter whether I express an intention (‘I’ll do x’) or receive what is beyond doubt a directive (‘do x’), whether I work out or am told something about myself, or give myself (or am given) an implicit directive (‘I/You must/should/ought to do x’), or whether I work out, or find out something about an action (‘x is/would be right’). For the context is, after all, supposed to be one in which my aim is practical and, moreover, proper. I am hoping to be able to form an intention, and, seeking directives, I have turned to normative ethics for guidance. I have not turned to an examination of my personal preferences, or the law, or a Machiavellian acquaintance, for I want to do what can truly be assessed as right. And, in many cases, we can regard the grammatically different answers as providing, simultaneously, action guidance and the reassuring action assessment. Deciding to do x is the morally correct decision and x is the morally right action.

 

                규범 윤리학으로부터 행위 지침을 얻고자 노력 중이라는 맥락에서 본다면, 문법적으로 서로 다른 모든 형식들은 동일한 ,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내가 의도를 표출하고 있느냐 (나는 x 것이다) 아니면 무엇을 하라는 분명한 지시를 받았느냐 ( x 하라), 또는 자신에 관해 무엇을 생각하게 되었느냐 아니면 누군가가 그것을 알려 주었느냐, 또는 내가 나에게 암묵적인 명령을 내렸느냐 (아니면 무엇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느냐) (나는/너는 반드시/무슨 일이 있어도/의무적으로 x 해야 한다), 또는 어떤 행위에 대해 생각을 통해 스스로 알게 되었느냐 아니면 발견하게 되었느냐 (x 옳다/ 옳을 것이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쨌든 배경은 목적이 실천적이고, 게다가 적절하다는 점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의향을 갖게 되기를 희망하는 중이고, 그래서, 지시어들을 추구하면서, 지침을 얻고자 규범 윤리학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나는그런 것이 아니다. 눈을 돌린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옳다고 평가될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바이기 때문에, 나는 개인적인 선호, , 또는 마키아벨리적 지식을 검토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가지 경우에서, 우리는 문법적으로 상이한 답들이 행위 지도의 제공과 행위 평가의 확정을 동시에 하고 있다고 있다. X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결정이며, x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이다.

 

            But dilemmas which are resolvable only with remainder show how these two may come apart. Suppose I have, through previous wrongdoing, landed myself in a situation in which I am forced to choose between two evils. Ashamed of the previous wrongdoing, I turn to normative ethics for guidance—what shall I do? Supposing that the dilemma is resolvable, since x is worse than y, many of the answers remain appropriate—I’ll do y, Do y, I/you must/ought to do y, anyone who is in this situation ought to do y. But ‘y is the right action’ is now inappropriate; y is not right. It involves, say, causing a terrible amount of suffering, breaking a promise, or doing what is shabby.  In vain do I protest that now ‘I want to do what is right’, to undo past wrongdoing and start afresh with a clean slate. I should have thought that before. The ‘satisfactory review of my own conduct’ is not for me, or at least, not yet; remorse and guilt are my portion.

 

                그러나 잔여를 남김으로써만 해결이 가능한 딜레마들은 둘이 어떻게 서로 분리될 있는지를 보여준다. 과거의 잘못된 행위 때문에, 개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 속으로 내가 자신을 빠뜨리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예전의 잘못된 행동들을 수치스러워 하면서, 나는 행위 지침을 얻고자 규범 윤리학으로 눈을 돌린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딜레마가 해결 가능한 것이라면, x y 보다 나쁘기 때문에 많은 답들이 타당하다.  나는 y 것이다/y 하라// 반드시/의무적으로 y 해야 한다, 상황에 빠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의무적으로 y 해야만 한다. 그러나 지금 경우, ‘y 올바른 행위다 말은 타당하지 않다. y 옳지 않다. Y 엄청난 고통을 낳게 하고, 약속을 깨뜨리게 하고, 비열한 짓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는 옳은 일을 하고 싶다,’ 과거의 잘못된 행동들은 없었던 것으로 하고 출발을 하고 싶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나는 이전에 그랬어야 했다. ‘내가 행동에 대한 만족스러운 검토라는 것은 나에게 해당되는 바가 아니거나, 최소한 아직은 아니다.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이 내가 짊어져야 몫이다.

 

           

 

 

Here we see action guidance and action assessment distinguished. The explicit directives and the oughts, shoulds, and musts give the guidance, but ‘y is the right action’ assesses the action and gives it a tick of approval. And in some cases, the tick is not warranted. So ‘y is the right action’ is not true.

 

                우리는 여기서 행위 지침과 행위 평가가 구별되는 것을 본다. 명백한 지시어들과   해야 한다를 뜻하는 말들 (해야 한다, 의무적으로, 반드시) 행동을 지시한다. 그러나 ‘y 옳은 행위다라는 말은 행위를 평가하고, 거기에 승인의 표시를 부여한다. 그런데 일부 경우에서 그러한 표시는 장담되지 않는다. 따라서 ‘y 옳은 행동이다 참이 아니다.

 

            How does this point fare in relation to the virtue ethics account? Consider again the distinctly non-virtuous man who has induced two women to bear a child of his by convincing each that he intends to marry her, under the assumption that it would be worse to abandon A than B. (I am taking it as obvious that we are not imagining a case in which the double commitment has come about through an innocent mistake; he thought A had been killed in a car crash, say, and only then turned to B’s arms.) The virtue ethics account refuses to assure him that in marrying A he would be doing ‘a morally right act—a good deed’. He will not, in marrying A, be ‘doing what a virtuous agent would, characteristically, do in the circumstances’, because no virtuous agent would have got himself into these circumstances in the first place. An interesting further point is that that claim remains true even if, by extraordinary luck, everything works out as well as it possibly could. (Suppose that he does not even have to break his promise to B, nor condemn her child to illegitimacy because she is glad to release him from it and marry a previous lover who is delighted to adopt her child.) The consequences of his marrying A are just fine, he does not violate nay moral rule in doing so—but on the virtue ethics account, although he can congratulate himself on his good luck, he cannot congratulate himself on having done what is right. Some people may find this counter-intuitive, but I myself find it an attractive feature of the account.

 

                윤리학의 견해로는 이런 점이 어떻게 달리 설명될 있을까? 다시, 결혼을 미끼로 여성을 유혹해서 자신의 아이를 낳게 만든, 명백히 -유덕한 남자가 B 보다는 A 저버리는 것이 나쁜 상황에 놓여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나는, 우리가 양다리 걸치기 식의 이중 약속이 순수한 착오에서 벌어진 경우, 남자는 A 자동차 충돌 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했다오로지 그런 뒤에 B 품으로 눈을 돌렸을 뿐이다, 가정하고 있지 않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윤리학의 입장은 그에게 A 결혼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좋은 행동이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일을 거부한다.  A 결혼함에 있어서 그의 행동은 덕이 있는 행위자가 상황에서 그에게 있는 덕의 특징 대로 하게 행동 만무하다. 왜냐하면 덕이 있는 행위자라면 어느 누구도 애초에 스스로를 그런 상황에 빠지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그런 주장이, 심지어 극히 예외적인 행운으로 모든 것이 풀리는 경우에조차 여전히 참이라는 것이다. (B 기꺼이 그를 결혼 약속으로부터 놓아 주고, 자신의 아이를 기쁘게 받아들이려는 연인과 결혼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는 B 에게 약속을 깨지 않아도 되고, 그녀의 아이를 사생아라고 비난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그가 A 결혼하는 행위의 결과는 매우 좋다. 그는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어떠한 도덕 규칙도 위배하지 않는다. 그러나 윤리학의 견지에서는 그는 자신을 찾아온 행운을 축하할 있을 지는 몰라도, 스스로 옳은 일을 했다고 축복해서는 된다. 일부 사람들은 이것이 직관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것이 윤리학적 관점이 가지는 호소력이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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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6-11-09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딴지걸기인데요, 저는 영어는 잘 못하고, 한국말 번역에는 무지 신경 쓰는 편인데요,,

"Here we see action guidance and action assessment distinguished. " 

우리는 여기서 행위 지침과 행위 평가가 구별되는 것을 본다." 근데 이건 너무 영어처럼 들려요. 책 읽다보면 영어식, 일어식으로 옮겨져 있는 경우가 참 많은데, "여기서 행위 지침과 행위 평가가 구별되는 것을 볼 수 있다"라든가 "바로 여기서 행위지침과 행위평가가 구별된다"라든가, 이렇게 해주는 편이 자연스러울 것 같아요.

근데 am님, 영어 전문가이신가봐요 +.+ 부러워라... 요즘 제가 불현듯 영어공부 할 필요를 느끼고 버닝 중이거든요. 말씀해주신 Stories to Go 사이트를 제 친구들에게도 알려줬어요 ^^


am 2006-11-09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안하신 두 가지 다 제가 한 것 보다 좋네요. "여기서 행위 지침과 행위 평가가 구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 더 마음에 들어요. 고쳐 버리면 나중에 볼 때 제가 그런 줄 알테니까 (그러고도 남아요) 안 고치고 둘게요. 변명을 조금 하자면, we can see 의 의미라기 보다는, '(저자가) 위의 논증/설명을 해 놓고 난 결과, (독자들은) 이제 그게 그렇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제가 읽기로는요) 그런 의미였거든요. 그런 귀결의 의미를 어떡해야 좀 더 정확히 하나..하다가..안 되니까;;; 그렇게 기계적으로 옮겨 버렸어요.

제가 텍스트에 정통한 것이 전혀 아닌데다가, 영어도 그렇지만 우리말을 잘 못 해요. 그래서 웬만하면 부족하고 어색해요;;;;; (무슨 소리여요..) 책이 아주 두껍지는 않은데 느림보로 더듬더듬하고 있다 보니까 앞으로도 꽤 오래 갈 것 같거든요. 글쎄, 무작정 하기만 한다고 그게 되겠나 싶기는 한데, 그래도 조금씩 (태우다 보면) 늘고 쌓이는 게 있지 않을까 그러고나 있지요. 암튼 열심히 하겠...지요 뭐, 서로 활활~~(^^)

그나저나 이 서재는 제가 글을 여러 개 올린 날에도 열 두서너 분을 넘기기 어려웠는데..혹시 딸기님 여기 주소도 같이 알리셨나요? 부디 그건 아닌 일이었기를...

*저 이것도 질문 축에 들런지 모르겠는데요, 영어식 일어식 번역이 왜 나쁜가요? 아니면 어디서 무엇이 문제이길래 문제가 되나요? 저는 그런 주장에 반대하는 것은 전혀 아닌데요, 문제는 무엇이 왜 문제라서 그러면 안되는지, 그걸 좀 너무 당위적으로 스스로 주입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까 머리로는 강박, 실제로는 절실히 아님 자연스레 배어 있지 못해서 결과적으로는 생각 뿐인, 그런 식이 되는 것 같아서요. 바쁘신 줄 아니, 혹 참고할 자료 같은 것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건 지나가는 부탁이니까 못 들어 주셔도 당연히 되어요^^.

** 아참, 그게..제가 무지하게 잘 놀거든요. 근데 이제 고마 됐다, 하던 책이나 마저 펴거라..그러는 중이거든요.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그쪽으로 관심이 모여서 그리 놀고 있는 거네요. 그뿐이어요. (^^)
 




(정정) 먼저 지난 번 번역에서 the failure to mention remainder in debates in applied ethics is, I think, usually a deplorable oversight, the results of the writers’ having committed at least one of several fallacies 의 문장을 놓고the failure를 왜 복수 명사인 the results 로 받았는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확인해 보니 잘못 타이핑을 해서 생긴 잘못이었다. the result 가 맞다.

 

So we may truly, indeed, (1) trivially, (2) say when using ‘morally right decision’ in the second way. But if we are using ‘morally right decision’ in the first way, we cannot say this truly, for it is obvious false.

 

(1) 여기서의 trivially 는 하찮은 의 의미인 trivial 이 아닌 듯했다. 정말로, 실제로, 그리고 하찮게 는 어울리는 짝이 아니니까. trivially so common 이 있어서 이번 기회에 이 의미를 외워 두자고 한 뒤 그 말을 써서 옮겼다.

 

(2) 실은 이 부분을 보다가 책과 내가 옮긴 본문을 한 번 더 비교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이 문장을 보았을 때 나는 내가 this 또는 it 이란 말을 빼 놓고 타이프를 한 줄 알았다. 다시 보니까 여기서는 say + wh 절의 구조인 것 같아서 그렇게 옮겼다. 내가 헛갈렸던 이유는 아마도 그 바로 아래 문장에 나온 “we cannot say this truly” 의 구조를 먼저 본 바람에 그 위의 이 문장도 say this when 으로, when in case of 로 하는 3형식 구조로 넘겨 짚었던 것 같다. 어쨌든, 우리는 정말로 실제로 아주 흔히, 언제 우리가 인지를 말할 수 있다 라고 최종적으로 옮겼다.

 

The man who has induced two women to bear a child of his by promising marriage, can only marry one, but he may not be in an irresolvable dilemma; it may be worse to abandon A than B, and let us suppose he makes ‘the morally right decision’ and marries A, perforce breaking his promise to B and condemning her child to illegitimacy.

 

(3) 이 부분은: (a) 도덕적으로 옳은 결정이라고 스스로 자위했다->근거가 필요했다->그래서 B 의 아이가 사생아라고 비난하며 결혼약속 파기//(b) B 의 아이가 사생아라고 뒤집어 씌운다-> 결혼약속 파기의 근거마련-> 그럼 당연히 A (그리고 그 자신의 아이를) 버리지 않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결정이 된다-> 그렇게 A 와 결혼하겠다고 결정하고 결혼함, 둘 중에 어떤 수순인 것을 골라야 의미가 맞게 흐르는지 잠시 헛갈려 하다가 내가 아는 동명사 구문 해석대로 (b)로 했다.  

 

And even when the agent is faced with a resolvable moral dilemma through no fault of her own, the lesser of the two great evils that she (ex hypothesi rightly) decides to opt for will still not be a morally right or good act, not (4) one that leaves her with those ‘circumstances [so] requisite to happiness’, namely ‘inward peace of mind, consciousness of integrity, [and] a satisfactory review of [her] own conduct’ as Hume so nicely puts it. On the contrary, it will, or should, leave her with some sort of ‘remainder’.

 

(4) 이번에 옮길 때 가장 어려웠던 부분. 그런데 그 어려움이 어휘선택의 문제라기 보다는 정확한 (철학) 개념어 선택의 문제인 듯해서 머리 뜯으면서도 마음은 편했다. 흄의 철학을 모르는데 흄이 참 잘 말해 두었듯이이하를 내가 어쩌겠느냐 싶어서. 대신 그 덕분에 그 “so requisite to happiness” 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볼 시간을 가졌고, 예전에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의문스럽던 아주 작은 변화를 시작해 볼 수 있었다. 어려워도 이러면 좋다.   

 

Inward peace of mind 는 어렵지는 않았다. 정신 내면의 평화. 다만, 정신에 그럼 외면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는 했다. 이 말 뿐 아니라도, 외연 내연이라고 하면 그 기준이 도대체 뭔지 모를 때가 많다. Consciousness of integrity 에서 막혔다. Consciousness 는 깨어있음 정도로 감이 왔지만 여기서야 그 뜻이 아닐 줄은 알았다.각성, 자각, 의식 등 사전의 뜻풀이 중에서 가장 어색해 뵈는 의식이 실은 철학, 심리학 분야의 말로 되어 있었다. 의식 자아에 대해 도덕적인 통제를 하는 부분영어 사전에서 보면, having knowledge of/an alert cognitive state in which you are aware of yourself and your situation. 으로 한글 사전과는 약간 다르게, 무엇을 앎, 무엇을 자각하는, 정도로 넓게 설명되어 있었다. 문제는 Integrity 였다. 내가 알고 있던 integrity integral 아니면 uprightness noble decent 였는데, 그 둘이 consciousness 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알 수 없었다. integrity - an unreduced or unbroken completeness or totality, integrity - moral soundness 로 영어 사전에 별다른 뜻은 없었다.

 

완전성의 의식/고결성 의식/인격통합성 의식 할 만한 것은 다 해 봤지만, 다 어색하고 어정쩡했다. 혹시나 해서 Hume + integrity consciousness 로 구글 검색도 해 봤는데 웬 철학 논문이나 뜨고..

 

그러다 philosophy + integrity moral 로 다시 검색을 했다. 그랬더니http://plato.stanford.edu/entries/integrity/ 이 사이트가 떴고, 조금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도움을 많이 받았다. 본문 처음에 integrity 란 말은 무지하게 puzzling 한 말이다 에서 큰 안도를 (^^)

 

결론적으로 나는 저 말을 부담없이 옮기기로 했다. 대신 주위에 물어 보기로 했다. 흄 철학에서의 저 말이 무슨 뜻인지. 번역 자체는 integrity integral, unified, complete 로 형용사처럼 하고 consciousness 에 강조를 두었다. 맨 위의 그림은 모를 일일세..하던 와중에 이미지 검색 했을 때 여러 역시 모를 그림들 사이에서 그나마 좀 낫던 거라서 저장했다.  

 

세 번째의 A satisfactory review of conduct 란 말도 까다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저기서의 satisfactory 의 의미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지니까. (a)리뷰의 결과가 만족스럽다 (고로 내 행동이 좋은 것이었다는 평가, review of conduct as satisfactory) 또는 (b) 리뷰의 절차 또는 리뷰 자체가 충분한 정도로 이루어진다 (엄중히 본다, review in a full/strict sense) 우리 말로야 충분한 검토 만족스러운 검토 둘 다 무리야 없을 줄로 아는데, 내 눈으로는 전자와 후자는 다른 의미의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고민했다. 옮기기는 만족스러운 이라고 했고 의미로는 전자로 읽었다. 행복의 요건이란 말하고 더 잘 맞는 짝인 것 같아서.

 

So my claim is that many philosophers who resolve hard cases in (5) applied ethics debates but fail to mention ‘remainder’ , frequently (of course not always) equivocate on ‘morally right decision’, and are thence readily led to accepting a false dilemma.

 

(5) 는 순간 applied ethics’ debate 가 맞지 않나 타이프 오류에의 의심이 한 번 더 들었던 부분.

 

This tendency to overlook remainder is, I think, (6) actively encountered by demanding at the outset that a normative ethics should ‘give an account of right action’; that this is what is required for it to be ‘action guiding’.

 

(6) 말로 풀기가 은근히 까다로웠던 문장. –의 초장부터 (at the outset) actively encountered 의 어감이 뭐가 좋은지 조금 불분명했다. 노골적으로/직접적으로/전면적으로/활발히 중에서 다 넣어 보고, 노골적인 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서로 거리가 있는 말 같아서 제치고, 나머지 중에서 적극적으로 라고 했다. 뚜렷하게 라고 할까도 생각했지만, 그 말도 active 란 의미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Utilitarianism and deontology are act-centered’; thereby, when their proponents consider hard-case dilemmas, they concentrate exclusively on the question, ‘which is the right act, x or y?’ And since one cannot decide to feel regret, and feeling regret is not an act in the required sense, they thereby cut themselves off from thinking of brining in that sort of ‘remainder’.

 

이 부분에서는 와- 소리가 저절로.. (^^)

 

(7) Although I am, personally, sympathetic to doctors rather than otherwise, one does hear occasional (8) hair-raising stores about the arrogance and callousness of some.

 

(7) rather than otherwise 를 꼭 옮겨야 할까 를 의문했다는 기록을 남긴다. 나보다 영어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음 했던 부분이다. 없어도 말이 통하는데, 빼 놓고 하자니 좀 걸리고, 그렇다고 옮겨 보니 어색하고..

 

(8) 저 말은 머리가 주뼛 서는 인 건 알겠는데, 그게 오싹의 의미인지 아니면 열이 솟아서인지가 좀 헛갈렸다. 원래 말 뜻은 dreadful 이 아닌가 싶은데, 여기서는 겁난다의 뜻이 아니라 경악스럽다 공노할 그런 뜻 같았다.  

 

No expressions of regret, no expression of concern over (9) whether anything could be done to make it less likely that such decisions would have to make in the future; having made (what they take to be) the morally right decision, they seem to think that they can review their own conduct with complete satisfaction. But if someone dies, or suffers, or undergoes frightful humiliations as a result of their decision, even supposing it is unquestionably correct, (10) surely regret is called for.

 

(9) 문장이 길게 꼬여서 옮기다가 두어 번 길을 놓쳤던 부분.

 

(10) 은 부사의 어순에 대해서 다시 또 한 번 생각해 보았던 부분이다. “후회는 확실히 요청된다/ 반드시 후회가 요청된다/ 후회가 요구됨은 분명하다셋이 엇비슷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 중에서 어떤 것이 우리 말 어순과 어법에 잘 맞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실제로 내가 고른 건 그런 규칙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냥 본문의 어순을 따르는 것이었다.   

 

(11) A does of virtue ethics might make them concentrate more on how they should respond, rather resting content with the thought that they have made the right decision.

 

의사들 이야기니까 dose 로 은유하시는 센스~ 웃으면서 읽었고, 그런데 막상 a dose of 를 약간, 소량의 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비유로 쓴 약, 약의 복용으로 할지 약간 고민. 약간의 덕 윤리학은 이라는 말은 좀 이상해서, 비유로 받아서 옮겼다.

 

(12) I did once think that, in being ‘act-centered rather than agent-centered,’ they were theoretically disarmed from being able to do justice to moral dilemmas with remainder in the Introduction. 이 문장도 은유가 섞인 것 같다. 무기를 뺐기다 로 하는 대신 이론적 장비가 없다 정도로 받았다.

 

(13) Deontologists and utilitarians are not cut off from doing this in virtue of being ‘act-centered’. 영어를 모른다기 보다 이해가 부족한 경우였던 구절. 다 옮겨 놓고도, 그래서 여기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뭘까, 두 이론들은 태만하다는 말일까 아니면 그게 제일 중요한 이유가 아니라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말일까. 위에 새로운 희망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세 이론들이 그렇게 절대절명하게 나뉘는 게 아니다는 통합의 시각에서 한 말 같기는 한데 분명치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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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ifference can be brought out by considering the claim: ‘When morally right decisions come off—when the agent succeeds in doing what she intended to do—we get morally right action.’ So we may truly, indeed, trivially, say when using ‘morally right decision’ in the second way. But if we are using ‘morally right decision’ in the first way, we cannot say this truly, for it is obvious false. The man who has induced two women to bear a child of his by promising marriage, can only marry one, but he may not be in an irresolvable dilemma; it may be worse to abandon A than B, and let us suppose he makes ‘the morally right decision’ and marries A, perforce breaking his promise to B and condemning her child to illegitimacy. He merits not praise, but blame, for having created the circumstances that made it necessary for him to abandon B; he should be feeling ashamed of himself, not proud, and so on. And even when the agent is faced with a resolvable moral dilemma through no fault of her own, the lesser of the two great evils that she (ex hypothesi rightly) decides to opt for will still not be a morally right or good act, not one that leaves her with those ‘circumstances [so] requisite to happiness’, namely ‘inward peace of mind, consciousness of integrity, [and] a satisfactory review of [her] own conduct’ as Hume so nicely puts it. On the contrary, it will, or should, leave her with some sort of ‘remainder’.

 

            차이는 다음의 주장을 검토함으로써 드러날 있다. ‘도덕적으로 옳은 결정이 실현되는 경우행위자가 자신이 의도했던 바를 행하는 성공하는 경우우리는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를 얻는다.’ 그와 같이, 우리는 정말로, 실제로, 흔히, 우리가 언제 번째의 방식으로 도덕적으로 옳은 결정이라는 말을 사용하는지를 말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번째 방식으로 도덕적으로 옳은 결정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면, 그것은 명백히 잘못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당연하게 말할 없다. 결혼을 약속한다는 말로써 여성을 유혹해서, 자신의 아기를 낳게 남자는 사람하고만 결혼할 있다. 그러나 그는 해결할 없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 아닐 있다. B 보다는 A 버리는 것이 나쁜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그가 B 아기는 사생아라고 선고를 내리면서, 부득이 B와의 약속을 파기하고, ‘도덕적으로 옳은 결정 내리고 A 결혼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B 저버리는 것이 필연적인 상황을 만들었기 때문에 칭찬이 아니라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수치심을 느껴야만 하며, 당당해서는 된다, 기타 등등. 자기가 저지른 잘못이 없는 상황에서 빚어진 해결 가능한 도덕적 딜레마에 직면해 있을 때조차, 행위자가 (가정상 옳게) 선택을 결정한 커다란 정도가 덜한 쪽의 악은 여전히 도덕적으로 옳거나 좋은 행위, 다시 말해, 흄이 아주 훌륭히 표현하고 있듯이,‘행복을 위해 [매우] 필수적인 조건들, ‘정신 내면의 평화, 통합된 의식, [그리고]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한 만족스러운 검토 같은 것들을 남기는 행위가 만무하다. 그와 반대로, 그것은 그에게 어떤 종류의 잔여 남길 것이며, 그래야 마땅하다.  

 

So my claim is that many philosophers who resolve hard cases in applied ethics debates but fail to mention ‘remainder’ , frequently (of course not always) equivocate on ‘morally right decision’, and are thence readily led to accepting a false dilemma. The question, ‘Which is the morally right decision, to do x or to do y?’, is confounded with the very different question, ‘Which is the morally right action (With no qualification about remainder, the good action about which the agent need feel no regret), x or y?’ If there are no irresolvable dilemmas, the first question does not pose a false dilemma, but even if every moral dilemma is resolvable, the second certainly does, for the correct answer may well be ‘Neither’.

 

그래서 내가 주장하려는 것은, 응용 윤리학 논쟁에서 윤리적 난제들을 해결하고 있으나 잔여 언급하는 일에는 태만한 많은 철학자들이 종종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도덕적으로 옳은 결정 관해 모호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로부터 쉽게 잘못된 딜레마를 받아들이게 되더라는 것이다. ‘무엇이 도덕적으로 옳은 결정인가. x 하는 것인가 아니면 y 하는 것인가?’ 라는 물음은 어떤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인가 (잔여에 관한 아무런 제약 조건 없는, 행위자가 후회를 느껴야 어떠한 필요도 없는, 좋은 행동) x 인가 y 인가?’ 라는, 그와 전혀 다른 물음과 혼동되고 있다. 만약  해결이 불가능한 딜레마란 것이 전혀 없다면, 번째 질문은 잘못된 딜레마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지만, 설사 모든 도덕적 딜레마가 해결할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번째 질문의 정답이 아니다 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번째 질문은 확실히 거짓 딜레마의 문제를 드러낸다.  

 

 

 

This tendency to overlook remainder is, I think, actively encountered by demanding at the outset that a normative ethics should ‘give an account of right action’; that this is what is required for it to be ‘action guiding’. In order to dispel the prevailing illusion that virtue ethics, in being ‘agent-centered rather than act-centered’, does not even pretend to give any action guidance, I began by yielding to this demand, and stressing the point that virtue ethics can be regarded as supplying a whole lot of rules—the v-rules. But we can now see some point in pulling back a bit, in re-introducing the idea that the virtue ethics concentrates on the agent rather than the act. ‘Utilitarianism and deontology are act-centered’; thereby, when their proponents consider hard-case dilemmas, they concentrate exclusively on the question, ‘which is the right act, x or y?’ And since one cannot decide to feel regret, and feeling regret is not an act in the required sense, they thereby cut themselves off from thinking of brining in that sort of ‘remainder’. A proponent of virtue ethics, concentrating on the question, ‘What would a virtuous agent do in this situation?’, is, given the concentration on the agent and the wider scope of ‘do’, all set up to answer (for example), ‘x, after much hesitation and consideration of possible alternatives, feeling deep regret, and doing such-and-such by way of restitution.’ Although I am, personally, sympathetic to doctors rather than otherwise, one does hear occasional hair-raising stores about the arrogance and callousness of some. What people often complain about is not whatever decision the doctors made, but the manner in which they delivered it or acted on it. No expressions of regret, no expression of concern over whether anything could be done to make it less likely that such decisions would have to make in the future; having made (what they take to be) the morally right decision, they seem to think that they can review their own conduct with complete satisfaction. But if someone dies, or suffers, or undergoes frightful humiliations as a result of their decision, even supposing it is unquestionably correct, surely regret is called for. A does of virtue ethics might make them concentrate more on how they should respond, rather resting content with the thought that they have made the right decision.

 

생각으로는, 잔여를 간과하는 이런 경향은 규범 윤리학은 옳은 행위에 관한 설명을 제시해야만 하며, 그것은 규범 윤리학이 행위의 지도이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라는, 요구의 최초에서부터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윤리학이, ‘행위 중심 이라기 보다는 행위자 중심 상황에서, 행위 규범을 제시하려는 시늉조차 하려고 들지 않는다는 주된 착각을 깨기 위해서, 나는 이러한 요구에 양보를 취하고, 윤리학은 덕의 규칙들이라는 총체적인 규칙들을 제공하고 있다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써 논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윤리학은 행위 보다는 행위자 집중한다는 견해를 다시 소개하면서, 문제를 조금 뒤로 물러 서서 바라 있겠다. ‘공리주의와 의무론은 행위 중심이다.’ 따라서, 그들의 지지자들은 답을 찾기 어려운 딜레마의 문제를 검토할 오로지 무엇이 옳은 행동인가, x 인가 y 인가?’ 문제에만 집중한다. 그런데 사람은 후회를 하게 말지를 결정할 없으며, 후회하는 감정을 갖는다는 것은 필수적인 의미에서 행동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그런 종류의 도덕적 잔여 낳는 것들을 생각해 보는 일로부터 스스로 차단된다. ‘덕이 있는 사람이라면 상황에서 무엇을 것인가?’ 질문을 강조하는 윤리학 옹호자라면, 행위자에 대한 강조와 보다 넓게 해석되는 한다 의미에 기반하여, 최대한 (예를 들면) ‘아주 많은 망설임과 여러 대안의 검토 후에, 깊이 후회하고 보상을 위해 이런 저런 것을 하면서, x’ 같은 답을 주장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의사들에 대해 다른 어떤 것이라기 보다 우호적이지만, 누구나 몸이 오싹해지는 일부 의사들의 오만과 냉정함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사람들이 자주 토로하는 불만은 그것이 무엇이건 의사가 내린 결정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것을 전달하고 그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방식과 태도에 관한 것이다. 아무런 유감의 뜻도 보이지 않는 표현, 자신이 내릴 결정이 앞으로 일으킬 문제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 뭔가를 있지는 않을까에 대한 염려가 전달되지 않는 표현. 도덕적으로 옳은 결정 (그들이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는 ) 내리면서, 의사들은 자신들의 행동검토가 완전히 만족스러울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일 자신이 내린 결정의 결과로 누군가가 죽거나, 고통을 받거나, 혹은 끔찍한 굴욕을 겪게 된다면, 설사 그것이 의심할 없이 옳은 결정이었다고 가정하더라도, 반드시 후회의 감정이 요구된다. 윤리학이라는 약의 복용은 의사들을 옳은 결정을 내렸다는 생각에 안주시키기 보다,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에 많이 유념하게끔 있을 것이다   

 

   

 

 

 

 

 

I do not make these remarks in a combative spirit; as I said in the introduction, my aim is not to do utilitarianism and deontology down. I did once think that, in being ‘act-centered rather than agent-centered’, they were theoretically disarmed from being able to do justice to moral dilemmas with remainder in the Introduction. There is, now, neo-Kantian interest in what agents should feel (as part of virtue), and some utilitarian concern with the necessity of cultivating certain character traits, namely, virtuous ones, in agents. When this is carried over to the treatment of dilemmas in applied ethics, we shall, I hope and expect, find that the discussions change for the better. After all, once one has noticed the possibility of giving the virtue ethicist’s answer, one will be more ready to remember about regret, and then, thinking of how the regret might be expressed, come up with richer answers such as ‘x-and-apologize-or-make-restitution-as-soon-as-possible’ or ‘x, after a long, patient, sensitive discussion with those involved’. Deontologists and utilitarians are not cut off from doing this in virtue of being ‘act-centered’.

 

나는 전투적인 태세로 이러한 언급들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론에서 밝혔다시피, 나의 목적은 의무론과 공리주의를 끌어 내리는 것이 아니다. 일찍이 서문에서, 나는 행위자 중심이라기 보다는 행위 중심 상태로는, 이론에는 잔여가 있는 도덕적 딜레마의 문제를 정당하게 다룰 있는 이론적 장비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한데, (덕의 일부로써) 행위자가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 라는 주제에 관한 -칸트주의의 관심, 그리고 특정한 성품, 다시 말해, 행위자의 유덕한 성품을 육성시켜야 필요성에 관한 일부 공리주의자들의 관심이 생기고 있다. 이런 것들이 딜레마를 다루는 응용 윤리학 내부의 작업으로 옮겨진다면, 우리는 아마도, 이것이 내가 희망하고 기대하는 바이다, 기간의 논의가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어쨌든, 덕 윤리학자들의 해답이 제시되는 가능성에 주목했던 적이 있는 사람은 앞으로 더욱 기꺼이 후회의 감정을 상기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그런 후회가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서, 예를 들면 ‘x를 한다-그리고 사죄를 하거나, 가능한 빨리 보상을 한다아니면 관련된 사람들과 오래, 끈질기게, 신중을 기해 논의를 거친 뒤, x 를 한다와 같은 보다 풍부한 답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의무론과 공리주의는 그것이 행위-중심이기 때문에 이런 일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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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하얀 책 서문을 번역할 때 이틀에 한 번씩 두 문단씩 했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거나 사전에 가늠을 하고서 그런 게 아니라, 처음 그렇게 해 보고 난 뒤에 그냥 그렇게 굳어졌다. 나는 두더지가 아니지만 어느 땐 그 수준이다 싶어질 때는 있다. 잠깐 정신 놓았다, 싶어지면 또 어느 틈에 삽질을;; 하면서 꾸역꾸역 파 들어가고 앉아 있는 날 볼 때가 있으니까.

 

이번엔..해 봤지만 역시 미리보기는 어려웠다. 얼마 정도 분량을 어떻게 해야 무난하고 무리가 없을까. 그런데 막상 시작을 하고 보니, 다 아는 소리 같으면서도 실은 각 장이 압축된 내용인지라 전혀 무슨 말인지를 모르고 서문을 옮길 때에 비해 따라가는 재미가 있어서 좋았고, 번역도 서문 하던 때의 머리 뜯던 때에 비하면 숨은 쉬어 가며 하니까 좋았고, 혼자 눈으로나마 읽어 둔 내용이라 그때와 지금의 이해의 차이, 그저 나란 차이를 느껴가는 것도 좋아서 어느 틈에 1 장이 끝나 버렸다.

 

그래서 어제 생각을 했다. 이번에는 두더지 잡기 놀이기구 상상을 하면서. 어떤 두더지는 이렇게 외쳤다.

지난 번에 10 번에 끝냈으니까 이번에도 열 번에 맞춰서 끝내라- 그 녀석을 따꿍, 집어 넣었다. 다음 두더지는 또 이렇게 외쳤다. 지난 번에 보니까 한 번에 다섯 문단씩 했으니 앞으로도 계속 다섯 문단씩 해라- 또 따쿵, 들어가게 했다. 제법 세게 튀어 오른 두더지는 이렇게 외쳤다. 이틀에 한 번씩 한 지가 어언 얼마냐, 그것만큼은 지켜라- 따따쿵, 걔도 제압을 했다. 다 됐나 싶어지려던 찰나에 구석에서 정말로 강력한 두더지 하나가 이렇게 외쳤다. 이게 어떤 책이냐, 무지하게, 허벌나게 열심히 해라-

근데 나는 무슨 수를 썼길래^^ 그 두더지는 따쿵도 안 하고 지가 알아서 기어 들어가게 했다.

(왜 이런 말로 시작을 하게 됐을까;;;;)

  

==

 

 

The failure to mention remainder in debates in applied ethics is, I think, usually (1) a deplorable oversight, (2) the results of the writers’ having committed at least one of several fallacies.

 

(1) 개탄스러운 간과-> 개탄스러운 태만-> 개탄스러운 부주의. (2)는 사실 잘 모르겠다. failure 를 복수로 받은 것인지. 

           

Sometimes it results from simply committing (3) the fallacy of  the false dilemma. The writers (frequently unconsciously) (4)take the dilemma to be ‘either x is the morally right act to do here (without qualification) and y is the one that’s morally wrong or y is the morally right act (without qualification), etc.’ They simply overlook the third possibility of, for example, ‘Well, they are both pretty awful, but (supposing the dilemma is resolvable) x isn’t quite as bad as y.’ 

 

(3) 잘못된 딜레마의 오류는 전에 논리학 책에서 본 말이었는데 그게 뭔지 그새 까먹었다.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았다. 논증에서의 오류들은 맞춤법 띄어쓰기 규칙들처럼 보면 다 맞는 말이고, 보면 다음엔 이거 안 틀릴 수 있어, 싶다가도 막상 실전이 되면 다른 소리가 되어 버린다. 반복하고 지적당하고 그러는 게 내 경우엔 제일 효과 좋은 처방인 것 같다. (4) 저자가 독자들이랑 참 편한 상태;;로 이야기하듯 글을 쓰고 있다는 감이 순간 왔던 말. 가끔씩 이렇게 casual 아님 informal? 한 말들을 보면 저자의 사진이 떠오르고 나도 한숨 쉬어 가게 되고 그런다.  

           

The unconscious assumption that, in any case of (5) moral dilemma or conflict, one side must be unqualifiedly morally right and the other plain wrong runs very deep in everyday thought, extending even to the cases in which the moral conflict is between two different agents.

(5) 아이쿠, 했던 부분. 지난 번에는 또 좋아하면서 “conflict problem” 을 상충됨의 문제, 상반됨의 문제로 하겠다고 했는데, 그 앞에 도덕적이란 말을 하나 붙이고 나니 도덕적 갈등이란 말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지난 번의 갈등을 지우는 게 아녔다는 뒤늦은 후회도 든다. 도덕적 갈등, 딜레마 상황의 갈등,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는데 왜 지난 번에는 그렇게도 말이 이상하게 다가 왔는지 모르겠다.

 

 I find it noteworthy (and deplorable) that, in some theatres where (6)David Mamet’s Oleanna was performed[1], a notice board in the foyer invited those who had seen the play to answer the question, ‘Who is right? Her or Him?’, and thousands of people signed up saying ‘Her’ or ‘Him’.

 

(6) 나는 이 연극을 연극으로 못 보았고 영화로 본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구글 검색을 해서 대강의 정보를 얻었다. 위의 그림은 여러 포스터나 사진 중에서 제일 의미가 다가오던 것이라서 올려 봤다.

http://www.drama21c.net/writers/mamet/ryuoleanna.htm

 

(7) 얼마 전에 리드미파일 님 사이트에서 her 를 번역할 때의 의견에 관해 읽은 기억이 난다. 소나기에서의 her 를 소녀가 아니라 그녀로 했다면 어땠겠느냐는. 그러고보니 으악스럽다. 그런데, 그와 함께 전에도 이미 적었던 소리지만, 나는 그네 그녀네 남학생 여학생이네 남자아이여자아니 그 자체의 구분이 (저자의 표현대로) will be blurred, 흐려지면 좋겠다. 한때는 일부러라도 그녀라는 말에 의미를 두고 그런 적이 있다. 그런데 한 일 이년 전쯤 친구들의 대화를 곁에서 듣다가 왜 그래야 하는지를 의문하게 되었고, 그 다음부터는 부득불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녀를 앞세워 표현할 이유가 없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어떤 글에서도 그는 그냥 그, 사람을 칭하는 말로 쓰면 되는 것 같다.  

 

 

How could they have failed to see that the alternatives presented—she is right/(8)morally justified or he is right/morally justified—(9)so signally fail to exhaust the possibilities? Rejecting the forced choice offered by the notice boards, I wanted to say that neither was right, nor morally justified; I thought that they both behaved badly (though, (10)marginally, he as even worse than her).

 

(8)은 도덕적으로 정당한으로 하고 싶었는데, 정당화 되는의 의미가 강해서 내가 임의로 정당한 just 한 으로 바꾸어도 되는지 자신이 없어서 그냥 사전에 나온 의미대로 했다. (9) 이번 번역에서 까다로웠던 부분. 우선은 exhaust possibilities 야 있는 가능성을 다 제시한다의 의미인 줄은 알았지만 관람객들은 왜 그걸 못했을까? 의 맥락에서 가능성의 규명 제시 이런 말이 좀 튀어서 어떡할까를 고르느라 좀 그랬고, so signally 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다가오지 않아서 그랬다. Signally notably 인데 그게 사실 surprisingly 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눈이 튀어 나오게 이렇게 할 수도 없고..내 어휘력이 좀 부족해서 옮겨 두고도 마음에 썩 들지 않은 구절이었다. (10) 도 같은 말이다. 근소하게라고 옮겼는데 미미하게로 할까 하다가, 그런데 미미하게는 정확히 말하면 insignificantly 이므로 서로 같다고 볼 수는 없었다.

 

Now it may be easier to see the fallacy in the Oleanna case because the forced choice (Which is morally right one?) is between two people, not two courses of action. My bet is that, if the noticeboards had asked ‘Who would you like as a friend, Her or Him?’, many more people would have (1) slipped between the horns of the dilemma and roundly said ‘neither’. (Moreover, my guess, borne out by conversations I have had with people about my rejection of the forced choice, is that those who signed up implicitly took themselves to be answering a question about a course of action: ‘If you had to back one of them, whom would you back, Her or Him?)

 

생각이 멈추게 되던 문단이었다. 맞다 맞어. 내가 꼭 그런데 하고 공감도 되고, 그러네, 질문을 살짝 틀기만 하면 많이 달랐었겠네 하게 되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볼 줄 아는 사람하고 연극도 보고 대화도 하고 그럼 배우기도 하고 색다른 자극도 되고 참 재미있겠네그런 상상도 들고. (11) be in a dilemma=be on the horns of a dilemma=be put in[into] a dilemma 딜레마[진퇴유곡] 빠지다. Slip 이 굳이 사용된 것을 보아서 그 의미를 살려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딜레마의 문제로 슬그머니->슬쩍->무심결에 로 골라서 옮겼다. 

 

Why is the fallacy harder to see when the choice is between two courses of action? (12) At least in part because it is very easy to confound two different senses of the phrases ‘morally right decision’, or ‘right moral decision’.  Suppose we have a moral dilemma which is resolvable—x is worse than y. Then the decision to do y rather than x is, in the circumstances, the right decision. Moreover (supposing the decision to have been made on the moral grounds that x is worse than y), it is a moral decision, or one that has been made morally. So it is the ‘morally right decision’ or the ‘right moral decision’, and this is one way in which we use those phrases.

 

(12) 는 이번 분량의 punch line 인 줄을 알겠는데 약간 어려워서 몇 번이나 읽어 두었다. 나중에 반복해서 그 의미 혼동의 문제가 설명되기 때문에라도. 문제는 내가 그 첫 번째 방식의 도덕적으로 옳은 결정에 대해서 조금 헛갈리는 부분이 있었다는 것인데: x y 냐 를 따지고 더 나은 것을 고르면 그게 옳은 결정이요, 그런데 그 결정이 도덕적인 근거 하에 내려진 것이라면 도덕적인 결정, 고로 도덕적인+옳은 결정이라는 것이 첫 번째의 경우라고 (저자의 설명을) 이해했는데, 그 도덕적인 기준이란 것이 뭐냐? 에서 헛갈렸다. 뒤의 두 번째 방식을 보면 아주 막연하게나마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중요한 건 행위의 결과가 성공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행위의 결정과정, 행위의 내용, 행위의 지향이 과연 도덕적으로 (덕으로) 근거 있는 것이냐, 그 점이 첫 번째 방식과 두 번째 방식의 차이가 될 수 있다는 소리 같기도 하고..;;;

 

 

 Now suppose we have a morally right act—a good deed. As such, it is an act that merits praise (13) rather than blame, and act that an agent can take pride in doing rather feeling unhappy about, the sort of act that decent, virtuous agents do and seek out occasions for doing (given the truism that ‘the virtuous agent does what is right’). They are the sorts of decision that decent virtuous agents make—and are praised for thus deciding, whether or not the act comes off. Suppose it does not (14)come off, well, that is a pity but still, we say, they made the ‘morally right decision’, the ‘right moral decision’; good for them. And here, we use those phrases in a second, different ways.

 

(13) not A but B 를 써도 무리가 없는 부분인 것 같은데 왜 rather than 이라는 (약해 보이는) 구를 사용했는지 조금 헛갈렸다. 칭찬과 비난 자긍심과 수치심은 서로 거리가 멀다기 보다는 상반되는 극점들인 것 같은데 보다는 이런 식으로 번역하려니 어색했다. 그렇다고 그 어감을 무시하고서 가 아니라 라고 할 수도 없었고. 그래서 절충했다. – 하느니 를 한다. (사전에서 찾아 확인해 보고) (14) 이번에 외워 두기로 하고 용례를 찾아 본 숙어.

 

2. 거짓딜레마

 

공적인 논쟁에 사용될 때, 매우 효과를 얻는 오류가 거짓딜레마이다. 이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실제로 그 논증에서 제시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논증이다.

 

오류는 흔히 ~ 이거나 ~ 이다. 라고 표현되며, 해결 가능한 여러 종류의 답안의 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답안의 수를 인위적으로 조작한다.

 

나는 유리컵을 깨뜨렸다.

나는 엄마에게 혼나거나 아빠에게 혼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경우 꾸중을 듣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한 채 결론을 내린 것이므로 거짓딜레마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흔히 '무지 논증'(Argument from Ignorance)이라고 하지만 무지(無知)
다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로 부지(不知) 나은 표현이 아닐까 생각하여
논증 오류라고 적었습니다. 세상 모르는 것이 많은데서 비롯된 논증
오류라고도 있으나 사실 여부를 알지 못하는데 기인한 논증 오류라
생각한 것입니다.

1.
그릇된 딜레마

부지 논증 오류 그릇된 딜레마(False Dilemma) 특별한 경우에 속한다
합니다. 진정으로 A 아니면 B 경우를 딜레마라고 합니다. 경우
경우인지 논증을 하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데 A
또는 B 여야만 하고, A 아니라면 B라고 하는 경우를 그릇된 딜레마라고
합니다.

요사이 선거로 시끄럽습니다. 어떤 입후보자가 "당신은 나의 선거 운동에
열심이 아니다. 반대편임에 틀림없다"라고 경우에 이는 그릇된 딜레마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내편 아니면 반대편이라고 사고를 해서 이런 오류
범한 것입니다. 귀찮게 여기는 선택도 있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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