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GHT ACTION AGAIN

다시 옳은 행위

 

Bearing the above in mind, let us look again at virtue ethics’ ‘account’ of right action. ‘An action is right iff it is what a virtuous agent would, characteristically, do in the circumstances’—and we are supposing that we have a standard list of virtues and vices. Does this ‘account’, we might now ask, provide action guidance, or action assessment, or both? The significance of the distinction between these two did not surface in the first chapter, but we now need to look at it.

 

위의 내용들을 염두에 두면서 옳은 행위에 관한 윤리학의 관점 다시 보도록 하자. ‘어떤 행위는 덕이 있는 행위자가 그가 처한 상황에서 그가 가진 덕의 특징 대로 하게 행동인 경우에만 옳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표준이 되는 덕과 악덕의 목록이 있음을 가정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다음을 물을 있을 같다. 윤리학의 이런 관점 행위 지침 주는가 아니면 행위 평가 내려 주는가, 아니면 다인가? 1 장에서는 둘의 차이가 갖는 중요성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으나, 이제는 점을 자세히 필요가 있다.

 

When I seek action guidance, I am asking, ‘What shall I do (in this situation in which I am, or with which I shall shortly be confronted)?’ A normative ethics is supposed to provide me with the wherewithal to find the answer (unless I am faced with an irresolvable dilemma).

 

행위의 지침을 찾으려고 노력 , 나는 ‘(내가 처한 또는 처하게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묻고 있는 중이다. 규범 윤리학은 그런 나에게 답을 찾아 방도를 주기로 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해결이 불가능한 딜레마에 직면하게 된다).

 

            ‘The’ answer may take many different grammatical forms. Having worked ‘it’ out for myself I may conclude ‘I must/should/ought to do x’, or ‘x is/would be the right thing to do/the right action to take’, or ‘I’ll do x’. A person advising me may say, ‘You must/should/ought to do x’ or ‘x is/would be the right thing to do’ or ‘Do x’. Writers in applied ethics rarely issue imperatives to their readers in the form of ‘If you are in…then you must/should/ought to[1] …’, but more often the pronoun is impersonal (‘Anyone who is in…must/should/ought to…’) or first or third person. And often they have ‘x is/would be the right thing to do/the right action’.

 

                답은 다양한 문법적 형태를 있을 것이다.  스스로 떠올려 보면서, 나는 나는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의무적으로 x 해야 한다혹은 ‘x 해야만 하는 옳은 /취해야 옳은 행동일 것이다또는 나는 x 것이다등의 결론을 내릴 있을 것이다. 나의 조언자는 너는 반드시/무슨 일이 있어도/의무적으로 x 해야만 한다.’ 혹은 ‘x 해야만 하는 옳은 /옳은 행동일 것이다.’ ‘x 해라 말할 있을 것이다. 응용 윤리학 분야의 저자들이 독자에게 만일 네가 정황에 처해 있다면, 반드시/무슨 일이 있어도/의무적으로 해야만 한다 명령법을 구사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명사는 무인칭이거나 (‘.. 상황에 있는 누군가는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의무적으로…’) 일인칭 또는 삼인칭인 경우가 훨씬 흔하다. 그리고, 그때의 명령어들은 종종 ‘x 해야만 하는 옳은 /옳은 행위다 형태를 취한다.   

 



[1] I am not unaware of the fact that some writers have drawn subtle distinctions between these three auxiliary verbs; I ignore them because I do not think they are relevant in this context. 저자들이 이 세 개의 조동사들을 민감하게 구별해 왔다는 점은 모르는 바 아니나, 그것이 지금의 맥락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그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겠다. 

 

 

 

In the context of seeking and finding action guidance from normative ethics, all these grammatically different forms may readily be regarded as saying the same thing, as giving the same answer. It doesn’t matter whether I express an intention (‘I’ll do x’) or receive what is beyond doubt a directive (‘do x’), whether I work out or am told something about myself, or give myself (or am given) an implicit directive (‘I/You must/should/ought to do x’), or whether I work out, or find out something about an action (‘x is/would be right’). For the context is, after all, supposed to be one in which my aim is practical and, moreover, proper. I am hoping to be able to form an intention, and, seeking directives, I have turned to normative ethics for guidance. I have not turned to an examination of my personal preferences, or the law, or a Machiavellian acquaintance, for I want to do what can truly be assessed as right. And, in many cases, we can regard the grammatically different answers as providing, simultaneously, action guidance and the reassuring action assessment. Deciding to do x is the morally correct decision and x is the morally right action.

 

                규범 윤리학으로부터 행위 지침을 얻고자 노력 중이라는 맥락에서 본다면, 문법적으로 서로 다른 모든 형식들은 동일한 ,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내가 의도를 표출하고 있느냐 (나는 x 것이다) 아니면 무엇을 하라는 분명한 지시를 받았느냐 ( x 하라), 또는 자신에 관해 무엇을 생각하게 되었느냐 아니면 누군가가 그것을 알려 주었느냐, 또는 내가 나에게 암묵적인 명령을 내렸느냐 (아니면 무엇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느냐) (나는/너는 반드시/무슨 일이 있어도/의무적으로 x 해야 한다), 또는 어떤 행위에 대해 생각을 통해 스스로 알게 되었느냐 아니면 발견하게 되었느냐 (x 옳다/ 옳을 것이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쨌든 배경은 목적이 실천적이고, 게다가 적절하다는 점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의향을 갖게 되기를 희망하는 중이고, 그래서, 지시어들을 추구하면서, 지침을 얻고자 규범 윤리학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나는그런 것이 아니다. 눈을 돌린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옳다고 평가될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바이기 때문에, 나는 개인적인 선호, , 또는 마키아벨리적 지식을 검토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가지 경우에서, 우리는 문법적으로 상이한 답들이 행위 지도의 제공과 행위 평가의 확정을 동시에 하고 있다고 있다. X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결정이며, x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이다.

 

            But dilemmas which are resolvable only with remainder show how these two may come apart. Suppose I have, through previous wrongdoing, landed myself in a situation in which I am forced to choose between two evils. Ashamed of the previous wrongdoing, I turn to normative ethics for guidance—what shall I do? Supposing that the dilemma is resolvable, since x is worse than y, many of the answers remain appropriate—I’ll do y, Do y, I/you must/ought to do y, anyone who is in this situation ought to do y. But ‘y is the right action’ is now inappropriate; y is not right. It involves, say, causing a terrible amount of suffering, breaking a promise, or doing what is shabby.  In vain do I protest that now ‘I want to do what is right’, to undo past wrongdoing and start afresh with a clean slate. I should have thought that before. The ‘satisfactory review of my own conduct’ is not for me, or at least, not yet; remorse and guilt are my portion.

 

                그러나 잔여를 남김으로써만 해결이 가능한 딜레마들은 둘이 어떻게 서로 분리될 있는지를 보여준다. 과거의 잘못된 행위 때문에, 개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 속으로 내가 자신을 빠뜨리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예전의 잘못된 행동들을 수치스러워 하면서, 나는 행위 지침을 얻고자 규범 윤리학으로 눈을 돌린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딜레마가 해결 가능한 것이라면, x y 보다 나쁘기 때문에 많은 답들이 타당하다.  나는 y 것이다/y 하라// 반드시/의무적으로 y 해야 한다, 상황에 빠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의무적으로 y 해야만 한다. 그러나 지금 경우, ‘y 올바른 행위다 말은 타당하지 않다. y 옳지 않다. Y 엄청난 고통을 낳게 하고, 약속을 깨뜨리게 하고, 비열한 짓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는 옳은 일을 하고 싶다,’ 과거의 잘못된 행동들은 없었던 것으로 하고 출발을 하고 싶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나는 이전에 그랬어야 했다. ‘내가 행동에 대한 만족스러운 검토라는 것은 나에게 해당되는 바가 아니거나, 최소한 아직은 아니다.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이 내가 짊어져야 몫이다.

 

           

 

 

Here we see action guidance and action assessment distinguished. The explicit directives and the oughts, shoulds, and musts give the guidance, but ‘y is the right action’ assesses the action and gives it a tick of approval. And in some cases, the tick is not warranted. So ‘y is the right action’ is not true.

 

                우리는 여기서 행위 지침과 행위 평가가 구별되는 것을 본다. 명백한 지시어들과   해야 한다를 뜻하는 말들 (해야 한다, 의무적으로, 반드시) 행동을 지시한다. 그러나 ‘y 옳은 행위다라는 말은 행위를 평가하고, 거기에 승인의 표시를 부여한다. 그런데 일부 경우에서 그러한 표시는 장담되지 않는다. 따라서 ‘y 옳은 행동이다 참이 아니다.

 

            How does this point fare in relation to the virtue ethics account? Consider again the distinctly non-virtuous man who has induced two women to bear a child of his by convincing each that he intends to marry her, under the assumption that it would be worse to abandon A than B. (I am taking it as obvious that we are not imagining a case in which the double commitment has come about through an innocent mistake; he thought A had been killed in a car crash, say, and only then turned to B’s arms.) The virtue ethics account refuses to assure him that in marrying A he would be doing ‘a morally right act—a good deed’. He will not, in marrying A, be ‘doing what a virtuous agent would, characteristically, do in the circumstances’, because no virtuous agent would have got himself into these circumstances in the first place. An interesting further point is that that claim remains true even if, by extraordinary luck, everything works out as well as it possibly could. (Suppose that he does not even have to break his promise to B, nor condemn her child to illegitimacy because she is glad to release him from it and marry a previous lover who is delighted to adopt her child.) The consequences of his marrying A are just fine, he does not violate nay moral rule in doing so—but on the virtue ethics account, although he can congratulate himself on his good luck, he cannot congratulate himself on having done what is right. Some people may find this counter-intuitive, but I myself find it an attractive feature of the account.

 

                윤리학의 견해로는 이런 점이 어떻게 달리 설명될 있을까? 다시, 결혼을 미끼로 여성을 유혹해서 자신의 아이를 낳게 만든, 명백히 -유덕한 남자가 B 보다는 A 저버리는 것이 나쁜 상황에 놓여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나는, 우리가 양다리 걸치기 식의 이중 약속이 순수한 착오에서 벌어진 경우, 남자는 A 자동차 충돌 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했다오로지 그런 뒤에 B 품으로 눈을 돌렸을 뿐이다, 가정하고 있지 않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윤리학의 입장은 그에게 A 결혼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좋은 행동이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일을 거부한다.  A 결혼함에 있어서 그의 행동은 덕이 있는 행위자가 상황에서 그에게 있는 덕의 특징 대로 하게 행동 만무하다. 왜냐하면 덕이 있는 행위자라면 어느 누구도 애초에 스스로를 그런 상황에 빠지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그런 주장이, 심지어 극히 예외적인 행운으로 모든 것이 풀리는 경우에조차 여전히 참이라는 것이다. (B 기꺼이 그를 결혼 약속으로부터 놓아 주고, 자신의 아이를 기쁘게 받아들이려는 연인과 결혼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는 B 에게 약속을 깨지 않아도 되고, 그녀의 아이를 사생아라고 비난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그가 A 결혼하는 행위의 결과는 매우 좋다. 그는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어떠한 도덕 규칙도 위배하지 않는다. 그러나 윤리학의 견지에서는 그는 자신을 찾아온 행운을 축하할 있을 지는 몰라도, 스스로 옳은 일을 했다고 축복해서는 된다. 일부 사람들은 이것이 직관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것이 윤리학적 관점이 가지는 호소력이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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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6-11-09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딴지걸기인데요, 저는 영어는 잘 못하고, 한국말 번역에는 무지 신경 쓰는 편인데요,,

"Here we see action guidance and action assessment distinguished. " 

우리는 여기서 행위 지침과 행위 평가가 구별되는 것을 본다." 근데 이건 너무 영어처럼 들려요. 책 읽다보면 영어식, 일어식으로 옮겨져 있는 경우가 참 많은데, "여기서 행위 지침과 행위 평가가 구별되는 것을 볼 수 있다"라든가 "바로 여기서 행위지침과 행위평가가 구별된다"라든가, 이렇게 해주는 편이 자연스러울 것 같아요.

근데 am님, 영어 전문가이신가봐요 +.+ 부러워라... 요즘 제가 불현듯 영어공부 할 필요를 느끼고 버닝 중이거든요. 말씀해주신 Stories to Go 사이트를 제 친구들에게도 알려줬어요 ^^


am 2006-11-09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안하신 두 가지 다 제가 한 것 보다 좋네요. "여기서 행위 지침과 행위 평가가 구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 더 마음에 들어요. 고쳐 버리면 나중에 볼 때 제가 그런 줄 알테니까 (그러고도 남아요) 안 고치고 둘게요. 변명을 조금 하자면, we can see 의 의미라기 보다는, '(저자가) 위의 논증/설명을 해 놓고 난 결과, (독자들은) 이제 그게 그렇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제가 읽기로는요) 그런 의미였거든요. 그런 귀결의 의미를 어떡해야 좀 더 정확히 하나..하다가..안 되니까;;; 그렇게 기계적으로 옮겨 버렸어요.

제가 텍스트에 정통한 것이 전혀 아닌데다가, 영어도 그렇지만 우리말을 잘 못 해요. 그래서 웬만하면 부족하고 어색해요;;;;; (무슨 소리여요..) 책이 아주 두껍지는 않은데 느림보로 더듬더듬하고 있다 보니까 앞으로도 꽤 오래 갈 것 같거든요. 글쎄, 무작정 하기만 한다고 그게 되겠나 싶기는 한데, 그래도 조금씩 (태우다 보면) 늘고 쌓이는 게 있지 않을까 그러고나 있지요. 암튼 열심히 하겠...지요 뭐, 서로 활활~~(^^)

그나저나 이 서재는 제가 글을 여러 개 올린 날에도 열 두서너 분을 넘기기 어려웠는데..혹시 딸기님 여기 주소도 같이 알리셨나요? 부디 그건 아닌 일이었기를...

*저 이것도 질문 축에 들런지 모르겠는데요, 영어식 일어식 번역이 왜 나쁜가요? 아니면 어디서 무엇이 문제이길래 문제가 되나요? 저는 그런 주장에 반대하는 것은 전혀 아닌데요, 문제는 무엇이 왜 문제라서 그러면 안되는지, 그걸 좀 너무 당위적으로 스스로 주입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까 머리로는 강박, 실제로는 절실히 아님 자연스레 배어 있지 못해서 결과적으로는 생각 뿐인, 그런 식이 되는 것 같아서요. 바쁘신 줄 아니, 혹 참고할 자료 같은 것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건 지나가는 부탁이니까 못 들어 주셔도 당연히 되어요^^.

** 아참, 그게..제가 무지하게 잘 놀거든요. 근데 이제 고마 됐다, 하던 책이나 마저 펴거라..그러는 중이거든요.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그쪽으로 관심이 모여서 그리 놀고 있는 거네요. 그뿐이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