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강유원 서평집
강유원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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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을 하는 전문가들의 공통점은 뭘까? 대상에 대한 내용이 모두 좋다는 것이다. 너무 좋아서, 마치 완벽해보일 정도다. 가령 소설의 끝자락에 붙어 있는 평을 보자. ‘주례사’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물론 소설이 훌륭하기에 그런 것도 있겠지만 어찌 된 이유인지 그런 평만 보면 한국 소설은 한결 같이 다시 볼 수 없는 ‘역작’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서평은 어떤가? 마찬가지다. 드물게 등장하는 서평집도 한결같이 좋은 말만 한다. 그래서일까. 괴리감이 느껴진다. 일반 독자들은 실망스럽다고 말하는데 반해 평하는 이들은 오색찬란한 칭찬만 늘어놓으니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이제 그 괴리감도 끝낼 때가 된 것 같다. 더 이상 칭찬만 늘어놓는 평이 아닌, 불만도 터뜨리고 과감하게 ‘맥을 잘못 짚었다’고 말하는 이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바로 자칭 ‘비정규직’ 철학박사라고 말하는 강유원, 그의 서평집 <주제>는 ‘색깔’이 있다. 고요한 호수, 마치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한국 특유의 정서로 똘똘 뭉친 호숫가에 커다란 돌덩이를 던지는 것 같은 뚜렷한 색깔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주제>에 대해 주례사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할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그러니 짤막하게 <주제>의 색깔을 볼 수 있는 부분을 보자.

<주제>가 왜 색깔이 있는가. 요즘 한창 주목받는 공병호에 관한 언급을 보자. 한창 자유주의 지식인으로 신바람을 내고 있는 공병호의 ‘핵심만 골라 읽는 실용독서의 기술’에 대해 강유원은 “그가 ‘지식인’이라는 이름으로 펼치는 언설들이 끼치는 해악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다”며 “신경 바짝 써서 경계해야 할 무리들은 바로 이들”이라고 말한다. 물론 개인적인 비판이 아니다. 책을 통해 비판이다.

강유원은 왜 비판하는가? ‘자본의 이익에 철저하게 복무하기 위해 사회에 개입’한 ‘지식인’과 그러한 지식인이 빠른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알려준다는 ‘독서론’은 공병호 스스로 말하는 ‘지적인 사업가’가 아닌 “대중을 자본이 먹기 좋은 떡으로 재형성해주면서 떡고물을” 먹는 ‘마름’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공병호뿐만 아니라 인터넷에서 꾸준히 입소문난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경우는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가 대상이다. 이 책은 인터넷 서점에서 꽤 입소문이 난 책으로 언론에서도 몇 번 언급되기도 했는데 강유원은 ‘경박한 지적 과시 분위기’를 풍기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독서가 ‘지식 쌓기’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때문에 “그의 방대한 지식에 감탄할지언정 감동하기는 어려울 듯”하다며 이 책은 교양을 쌓는데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쯤 되면 과감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대목만 보더라도 강유원의 과감함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다. 더불어 <주제>의 색깔로 짐작할 수 있을 테다.

<주제>는 여섯 개의 챕터로 구성돼 있다. 책과 교양, 역사, 근대, 파시즘, 전쟁, 한국과 동아시아의 주제로 구성돼 있는데 이들 여섯 개를 선정한 이유가 꽤나 진지하다. ‘책과 교양’은 “책이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궁극적으로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를” 알기 위한 과정이고, ‘역사’와 ‘근대’는 “살아가는 시대의 원리를 책에서 깨우쳐 보려는 시도”로, ‘파시즘’과 ‘전쟁’은 “근대의 가장 두드러지고 절망적인 모습”으로 특히 파시즘은 “그침 없이 찾아야 하는 주제”이기에, ‘한국과 동아시아’는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한 관심의 소산”이기에 그렇단다.

여섯 개의 챕터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를 들으면 어렵지 않게 <주제>의 또 한 가지 색깔을 알 수 있다. 솔직함이다. 책을 쓰고, 읽는 것에 대해 ‘우주적인 보편적 가치’를 획득하려는 사람들의 글이 바다를 이루는 때에 지극히 개인적인 사색의 결과를 고백하는 강유원의 말은 솔직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의도만 이런 것이 아니다. 서평의 많은 부분도 그렇다. 책의 어느 부분만 읽어도 좋다고 말하는가 하면 학부생 리포트 모음집 정도의 수준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맥을 전혀 잘못 짚어 헷갈리게 만든다고 말하는가 하면, 책 때문에 당혹스러운 전기를 맞이하게 됐다고 말하기도 한다. 지나치게 솔직해서 위험해보일 정도다.

언젠가 무라카리 류의 추천사를 보고 감탄한 적이 있다. 추천사란 본디 평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그 책의 경우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평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었는데 무라카미 류의 추천사는 참으로 짤막했다. “재미있다”, 그뿐이었다. 너무나 단도직입적인 것이었는데 오히려 그 짧은 말이 더 가슴에 와 닿았다.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이 느낀 바를 있는 그대로를 말하려 했기 때문이다.

<주제>도 그렇다. 과감하고 솔직하다는 특징을 넘어 느낌 그대로를 적어놓았다. 책을 보며 개인적인 생각을 늘어놓는 모습을 보이는 것들까지 확실히 그렇다. 그렇기에 색깔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을 게다. 한결같이 둥글둥글한 모래들만 가득한 백사장에서 울퉁불퉁 모난 구석이 많은 <주제>는 단연 돋보인다.

너무 돋보이는 탓에 싸움박질 한번 크게 일으킬 것 같다는 섣부른 생각까지 드는데 어쨌거나 <주제>의 등장은 반가운 일이다. 일반 독자와 전문가 사이의 괴리감도 사라지고 제대로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까지 포착하게 해주니 정말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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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여행가방 - 박완서 기행산문집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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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의 기둥 박완서가 또 한권의 책을 선보였다. 소설은 아니다. 기행산문집이다. 그렇기에 놀라게 된다. 기행산문집이라면 기행을 근본바탕으로 한다는 것이 아닌가. 이럴 때면 작가에게 나이란 하나의 숫자임을 깨닫게 된다. 박완서의 나이가 벌써 일흔이 넘었다는 것이 아주 오래된 농담처럼 여겨지게 된다. 그렇다. 놀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책이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놀란다는 건 작가에 대한 모욕이다. 한국 문학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놀랄 건 사실이 아니라 사실 속에 담긴 진실이다. <잃어버린 여행가방>에 단긴 진실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 것, 그것이 작가에 대한 예우일 것이다.

<잃어버린 여행가방>은 박완서에게 한 걸음 다가갈 여지를 만든다. 소설이나 동화에서는 작가의 진짜를 찾기가 어렵다. 허나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그것에서 생각하고 깨달은 것들이 담긴, 때로는 투덜거리기도 하고 자신의 속마음을 수줍게 고백하는 기행산문집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래서일까. 박완서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 같다. 놀랍게 여겨질 정도다. 그것에 관해서는 이제껏 박완서의 이름을 달고 나왔던 어느 작품도 견주지 못할 정도다.

<잃어버린 여행가방>에 수록된 글은 열두편으로 기행지로 국내는 남도, 하회마을, 섬진강, 오대산이 있고 국외로는 바티칸, 상해, 티베트, 카트만두 등이다. 박완서가 방문한 곳들은 산발적이다. 여행의 목적을 정해서 장소들을 두루 선택했다기보다는 인생에 우연히 끼어든 기회 덕분에 찾은 곳들이 많은 탓이다. 때문에 첫 인상은 고향에 있다가 이웃사촌들의 인연 덕분에 고향 밖을 나가고 해외까지 나갈 기회를 얻은 어르신의 모습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우는 소리가 있다. 스스로의 몸을 생각하는지 가야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소리도 있다. 익히 알려진 유명한 여행가들이 계획부터 여행의 하나로 생각하고 부지런 떠는 것에 비하면 살포시 웃음이 나기도 한다. 허나 웃음은 곧 지워야 하리라. 탄성이 대신한다. 쌓인 인생의 경험이 거대한 탓인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젊은이들은 여행지에서 선언한다. 이 여행이 자신에게 거대한 소용돌이가 될 것임을. 또한 새로운 문화에 흠뻑 빠져들어 형용 가능한 모든 언어를 동원해 여행의 로망을 말한다. 그리곤 여행을 자신의 것으로 정의내리기를 즐긴다. 패기만만하다고 할 수 있는 모습, 이것이 요즘 주목받는 여행책들의 모습이다.

반면에 박완서는 어떠한가. 말이 없다. 최대한 아끼고 고르는 모습이다.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들은 오밀조밀 잘도 보여주는데 가슴 속 깊은 것을 어찌 그리 아끼는지 요즘 여행책에 중독된 이들이라면 속이 탈 지경이다. 무슨 까닭일까? 그 여행책들은 여행으로 삶을 말하려 했다. 갑작스러운 문화 충돌에서 겪은 것, 새로운 장소에 삶을 동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잃어버린 여행가방>은 삶의 한 장면으로 여행을 말할 따름이다. 아니, 여행을 말한다는 것조차 어울리지 않는다. 어제 겪은 일, 내일 겪을 일을 말하는 것 같다. 그렇기에 아끼고 신중하다. 함부로 삶을 보여주지도 않을뿐더러 쉽게 재려는 것도 삼가는 모습이 가득하다. 때문인지 방문한 곳들 중에는 유명하고도 유명한 곳이 많지만 로망을 키워주는 것들은 없다. 로망이라는 단어가 이물질처럼 여겨질 정도인데 그저 지나가는 삶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또한 사색하는 시간에 동참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때문에 종종 기행산문집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잊게 되기도 하리라.

허나 어제 일처럼 이라고 할지라도, 또한 사색의 한 과정일지라도 할지라도 집을 떠난 것은 특별한 일이다. 때문에 생각의 나무는 높게 자라고 가지들은 사방팔방으로 뻗치기도 한다. 이럴 때 <잃어버린 여행가방>은 참맛을 낸다. <오래된 미래>로 국내에도 친숙한 티베트에 방문했을 적을 보자. 다른 이들처럼 박완서도 그 책의 영향을 받았는지 그것이 일종의 선입견처럼 작용했다고 말한다. 허나 도착한 시간부터 <오래된 미래>는 없다. 박완서의 눈과 생각이 지배할 뿐이다.

다들 티베트에서 ‘오래된 미래’를 볼 때 박완서는 무엇을 보았는가. 식민지 지배를 경험한 탓인지 한족과 티베트인들 사이의 괴리감을 본다. 구걸에 나선 티베트인들에 당황하고 그것을 내치고 싶어 하는 자신의 모습에 놀란다. 동시에 잘 빼입고 있는 한족들을 보며 식민지 시절의 일본인들을 떠올린다. 박완서는 화를 낸다. 또한 삶의 아득한 기억들을 떠올리며 자신들과 같은 관광객이 이곳을 모독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하는데 티베트를 신화화했던 여행책들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으리라. 물론 그것에 감응했던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일 테다.

고난에 처한 에티오피아와 인도네시아를 기행한 글도 마찬가지. 에티오피아에서 1950년대를 떠올리고 인도네시아에서 해일 피해를 목격한 박완서는 함부로 베푸는 자의 말을 꺼내지 않는다. 오히려 “부끄럽게도 내가 만약 어떤 불가피한 사정에 의해 일행과 그 난민촌에 혼자 남아 하룻밤을 지내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는 아찔한 고백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런 모습에 더 마음이 간다.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된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고 말하고 신생아의 얼굴에 난 웃음을 보고 처음으로 웃었다며,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건 놀랍고 아름다운 일이다”라는 말에 가슴이 동요하는 건 그런 이유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잃어버린 여행가방>은 삶이 앞장 서 있다. 여행에 몸과 마음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여행을 품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노작가, 아니 박완서라는 인간의 진실함이 묻어난다. 놀랍다. 앞서 말했듯 책이 나왔다는 사실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다. 사실에 담긴 진실이 놀랍다. 묵직하고 진지한, 가슴을 새기는 삶의 언어들이 꼬리를 무는 <잃어버린 여행가방>, 끝자락이 유달리 길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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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식모들 - 제1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박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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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에 따르면 인간이 되고 싶었던 곰과 호랑이는 동굴 안에서 고행을 하는데 호랑이는 견디지 못해 도망치고 곰은 고행을 견딘 끝에 여자가 된다. 그리고 그 후 곰은 단군과 결혼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아는 이야기인데 여기서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동굴에서 도망나간 호랑이는 어떻게 됐을까? 동물의 왕으로 사는 걸 만족했을까? 혹시 다시 인간이 될 기회를 찾지 않았을까?

박진규는 <수상한 식모들>에서 호랑이들이 인간이 됐다고 상상한다. 그들도 곰처럼 여자가 됐는데 정통이 아닌지라 곰의 자리, 이른바 ‘안주인’자리를 빼앗기는 못한다. 그러면 호랑이들은 어떻게 되는가? 호랑아낙이 된다. 호랑아낙이 되어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간다. 그런데 근현대로 되면서 호랑아낙들과 출생이 비슷하지만 생각이 다른 여자들이 나타난다. 이른바 ‘수상한 식모’다. 복수를 꿈꾸며 그 일환으로 부르주아 가정을 뒤흔들고자 하는 여자들이 등장한 것이다.

소설의 맛을 살리는데 상상력이 한몫해야 한다는 걸 상기한다면 호랑아낙과 식모를 앞세운 <수상한 식모들>은 안정한 영역에 자리를 잡았다. 곰과 호랑이의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존재해도 존재감이 없었던 여자들과 그녀들의 복수를 상상해냈다는 것은 분명 기발한 것이다. 곰에 이어 호랑이도 여자가 될 수 있다는 상상을 가능케 했으니 분명 그 상상력은 한몫 단단히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상상력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이 아니다. 허무맹랑한 것이 있는가 하면 현실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상상력이 다른 것처럼 상상력에도 ‘등금’이 있다. 상상력이 제대로 발휘해야 소설의 맛깔스러움이 한껏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상한 식모들>은 어떤가? 맛깔스럽다. 대개 유부남의 불륜 대상이 된다는, 상상 같지도 않은 상상만 일으키던 식모를 개성 있게 만들어냈고 그것을 기반으로 역사까지 흔드는 새로운 해석을 만들어냈으니 맛이 생명력을 얻은 듯하다.

<수상한 식모들>의 주인공 신경호는 불쾌한 기억을 갖고 있다. 기억의 장면은 누군가 자신을 향해 쥐를 갖고 장난 같은 걸 쳤다는 것이다. 그 누군가가 누군지는 경호도 모른다. 그저 그것을 생각하며 가위눌림 같은 현상을 겪거나 기절을 한다. 그런데 우연히 경호는 그 누군가를 떠올린다. 식모다. 한창 자신의 집이 잘 나가던 시절에 집안일을 하던 식모라는 걸 기억해내고 이때부터 <수상한 식모들>의 상상력은 사방팔방으로 뻗어가기 시작한다.

상상력의 초반부는 무게가 없어 보인다. 가볍다. 장난 같이 보일 정도다. 하지만 경호가 식모를 만나면서부터 점차 무게가 생기기 시작한다. 사방팔방으로 뻗어가기 시작하던 것도 틀을 갖게 된다. 이것을 가능케 한 틀은 무엇인가? 경호가 식모와 거래를 하면서 생긴 틀이다. 경호는 얼굴만 빼고 돌이 된 식모를 만나고 왜 쥐를 갖고 못된 장난을 쳤느냐고 따진다. 식모는 정색을 하며 장난이 아니라 운명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운명은 무엇을 말하는가. 식모는 경호에게 식모들의 역사, 정확히 말하면 수상한 식모들의 역사를 기록해달라고 한다. 물론 이것을 위해서는 호랑아낙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경호가 그걸 해줄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수상한 식모들>에서 쥐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쥐는 수상한 식모들이 부릴 수 있는 것으로 어린 시절, 귀에 들어간 쥐는 아이의 꿈이나 감수성을 먹으며 아이를 흑백세계의 논리만 이해하게 만든다. 아니면 꼬리에서 발산하는 몽롱한 호르몬으로 감수성을 얽히고설키게 만들기도 한다.

쥐는 심지어 시간과 공간의 구성을 해체하기도 한다는데 수상한 식모의 쉬운 표현에 따르면 “갈가리 찢어진 역사책의 문구들이 자기들끼리 마음대로 엉덩이와 아랫도리를 내밀어서 교접”하는 것이다. 이것을 더 쉽게 표현하자면 ‘과거를 보게 되는 것’인데 어쨌든 경호는 쥐를 이용해서 수상한 식모들의 과거를 보게 되고 이때부터 <수상한 식모들>의 상상력은 틀을 갖추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러한 <수상한 식모들>의 상상력은 확실히 놀랍다. 해석이 새롭다는 것이 그렇고, 작은 것들 하나하나에서도 상투적인 것을 거부했다는 것이 그렇다. 마치 소설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하다. 또한 그 상상력은 유쾌함으로 연결된다. 때문에 막힘이 없다. 계곡을 내려가는 물줄기처럼 멈추지 않고 뻗어나가는데 지켜보는 것으로도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다.

문학상 수상작은 어렵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수상한 식모들> 앞에서 그 말은 편견이 된다. 거침없는 상상력으로 무장한 <수상한 식모들>, 기억에 남을 유쾌한 잔치를 마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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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역사를 만나다 - 세계사에서 포착한 철학의 명장면
안광복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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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모든 학문의 기본이 된다는 말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게다. 철학의 중요성은 누누이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한번 물어보자. 철학은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대학의 철학과를 가야만 배울 수 있다면 대중이 철학을 배울 수 있는 길은 원천봉쇄되는 것과 같다. 그러면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안광복의 <철학, 역사를 만나다>는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된다. 안광복의 것에서 찾을 수 있는 답은 무엇인가. 철학은 난해하다고 여겨진다. 또한 철학의 영역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여겨진다. 철학이 모든 학문의 기본이라면 그것은 인간의 행보와 함께 한 것으로 여겨져야 하건만 철학은 ‘철학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안광복은 그것을 깨기 위해 역사를 동원했다. 세계사의 장면에서 철학을 끄집어내는 것과 동시에 철학의 높은 벽을 허물었다.

이 말에 혹여 <철학, 역사를 만나다>를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철학자들의 연대기를 다룬 것이 아니냐고 의심할 수도 있겠다. 아니다. 질이 다르다. 또한 몰아붙이는 힘도 다르고 주는 재미도 다르다. 철학입문서라고 하기에는 깊이가 부족하다 하겠지만 철학이 인간의 역사와 어떻게 걸음을 맞추었는지를 맛보게 해줄 뿐만 아니라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지식을 넘어 장구한 역사를 맛보는 즐거움까지 보장한다. 그러니 어찌 지루하고도 고루한 백과사전식 철학소개서들과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있겠는가.

구체적으로 책 속 장면을 들여다보자. 스토아철학, 노자, 십자군 전쟁, 주자학, 프랑스 혁명 등 총 16장면으로 구성된 <철학, 역사를 만나다>의 첫 장면은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맡았다.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등장하는 시대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고대 그리스의 양대 산맥을 이루던 시기다. 이 사실은 익히 알려진 것이다. 그런데 <철학, 역사를 만나다>는 다소 생뚱맞은 이야기를 꺼낸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가 스파르타와 흡사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를 스파르타 팬클럽의 회장에 비유하고 스파르타를 ‘민주주의의 백신’이라 말하니 엉뚱함을 넘어 생뚱맞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아테네는 민주주의의 꽃인 반면 스파르타는 ‘스파르타식’으로 불리는 강압적인 사회로 익히 알려졌지만 실상은 좀 달랐던 것이다. 플라톤은 왜 스파르타와 같은 사회를 원했을까?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엉뚱한 모함으로 죽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을 가능케 한 이유 중 하나가 아테네의 사회 구조였다.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민주주의라고 알려졌지만 그 민주주의는 제대로 빛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설을 출세의 도구로 삼아 말만 잘하면 성공하는 사회, 그것이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아테네의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플라톤은 그 사회에 실망했다. 때문에 이상국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아테네와 겨루고 있던 스파르타와 비슷했던 것이다. 장면이 핵심에 다다를 때, <철학, 역사를 만나다>의 생뚱맞아 보이는 문제 제기는 진지해진다. 전후사정을 무시한 채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지식의 위험함을 지적해주기 때문이다.

한 장면을 더 엿보도록 하자. 일곱 번째 장면인 십자군 역시 단편적인 지식의 위험을 알려준다. 먼저 십자군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성지 회복’을 위한, 종교적인 무장 세력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참일까? <철학, 역사를 만나다>에서는 십자군이 ‘무지’했다고 알려준다. 얼마나 무지했는가 하면 병사들이 마을에 도착해서 “여기가 예루살렘이냐?”라고 묻기도 하고, 아군을 공격하기도 했을 정도란다. 게다가 어찌나 병폐를 끼치는지 무슬림보다 기독교들이 먼저 그들을 두려워했을 정도라고. 이런 병사들이 과연 종교적 대의를 위해 움직인 이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철학, 역사를 만나다>는 분명하게 답을 내린다. 종교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해를 위해서였다고 말이다. 영토 전쟁이나 권력 다툼을 위한 그럴 듯한 핑계가 필요했을 뿐이지, 실상 종교적 대의는 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이러한 지적은 상당히 ‘깨는’ 것들이다. 십자군하면 얼마나 거룩해 보이던가. 어떤 나라는 침공할 때 스스로를 십자군 운운할 정도다. 그런데 알고 보면 십자군이란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가. 단편적인 지식을, 아니 단편적인 지식만을 알려주던 사회를 탓하게 될 수밖에 없다.

<철학, 역사를 만나다>의 장면들을 접할 때마다 의아심이 든다. 알고 있던 지식들, 특히 교과서에서 접한 것과 상당히 맥이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이유는 뭘까? 이 대목에서 <철학, 역사를 만나다>가 빛을 발하는데 그것은 사건을 지배하는 세상의 철학을 기본 바탕으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스파르타도 다르고 여겨지고, 십자군도 다르게 여겨진다. 히틀러가 니체를 좋아한 이유를 알 수 있게 되고, 공리주의가 어떻게 자본주의에 날개를 날아 줬는지도 알게 된다. 더군다나 이 과정은 결코 어렵지 않다. 세상 상식 이야기하는 수준이라고 할까. 때문에 사전 지식이 없더라도 막힘없이 읽을 수 있다.

<철학, 역사를 만나다>는 본격적인 철학서도, 개괄적인 철학입문서도 아니다. 때문에 그 분야의 깊이만큼은 얕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 역사의 장면을 통해 철학이 어떻게 탄생하고 어떻게 쓰였는지를 알려주고 철학이 ‘철학만의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철학, 역사를 만나다>는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러니 어찌 뻔한 책들과 동일선상에 놓고 보겠는가. <철학, 역사를 만나다>, 유쾌하고도 특별한 시간을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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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책 - 제3회 푸른문학상 수상작 푸른도서관 12
강미 지음 / 푸른책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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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소설은 친구이자 스승이다. 차가운 마음을 보듬어주니 친구가 되고 주어진 것을 뛰어넘는 내면의 힘을 이끌어주니 스승이 된다. 그렇기에 성장소설은 언제나 반갑다. 특히나 현실의 색을 생생하게 담아낸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 면에서 강미의 <길 위의 책>은 반가운 성장소설이다. 여고생들의 일상 위에 도서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성장소설들의 아름다운 장면들을 덧칠한 <길 위의 책>은 부담 없이 어울릴 수 있으면서도 만남이 헛되지 않도록 만드는 가르침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길 위의 책>의 주인공 이름은 필남. 여고생으로 상당히 소극적인 성격을 지녔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도 주위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지 못한다. 성격에는 환경적인 이유가 크다. 필남에게는 집안 환경이 그 이유가 된다. 필남의 집안은 재혼으로 인해 가계도가 복잡하다. 친형제와 이복형제까지 다사다난한 환경을 두루 갖추고 있다.

게다가 필남이 창피하게 여기는 것처럼 집이 식당을 한다. 부모님이 하는 것인데 식당일이 워낙에 거칠다보니 필남의 어머니는 필남에게 자랑스러운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필남은 집 밖을 맴돌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집 밖에서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붙임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성격이 쾌활한 것도 아니니 쉬는 시간에도 혼자 돌아다니는, 이른바 ‘왕따’다.

다만 그 ‘왕따’를 당하는 정도가 심각한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필남이 그것을 불편해하지지 않기에 별다른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필남이 좋아하는, 책을 보거나 꽃을 구경하는 데는 혼자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친해지는 것은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니 필남은 오히려 혼자가 낫다는 생각까지 한다. 결국 필남이라는 여고생은 교실에서 있건 없건 간에 별로 티가 나지 않는, 아웃사이더인 셈이다.

하지만 삶은 언제나 변할 가능성을 무궁무진하게 열어놓기 마련이다. 필남의 삶도 그렇다. 필남에게 그것은 무엇인가? 책이다. 필남은 선생님 도움으로 어렵사리 학교 도서반 모임에 들어간 상태로 새 학년이 되고 새로운 도서 목록을 얻게 되는데 그 내용은 성장소설이 된다. 필남은 물론이고 도서반 학생들 모두 한 해 동안 성장소설을 가슴에 끼고 살아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길 위의 책>을 말하면서 밝혔듯이, 성장소설은 친구이자 스승이 된다. 도서반 학생들이 만나는 성장소설들도 그렇다. <외딴방>, <호밀밭의 파수꾼>,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 <데미안> 등이 친구가 되어 그들을 엮어줄 기회를 마련하고 스승이 되어 그들에게 우정이 무엇이고 앞으로 나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물론 소극적인 성격의 필남도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다.

필남과 같은 공간에 있던 여고생들은 어떻게 변할까? 서로에게 익숙하지 않던 때에, 서로에 대한 오해, 서로에 대한 질투로 적대심과 미움이 불꽃처럼 타오른다. 욕하고 화를 내고 싫증낸다. 여고생들은 도망치려 한다. 삐끗하는 걸 감당하지 못한다. 하지만 책으로 만들어진 인연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던 미움을 봄눈 녹듯 서서히 지워나가고 새싹이 돋듯 서로에 대한 정을 키워가게 된다.

<길 위의 책>에서 친구의 모습을 찾자면 역시 여고생들의 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일 게다. 작은 모임에서 지지고 볶는 그 모습들을 보는 것은 아기자기한 맛이 있으면서도 생각 이상으로 굴곡 짙은 감정을 경험케 한다. 더욱이 현실과 동떨어진 생활을 묘사해 생생함을 얻는데 실패하는 성장소설들이 많은데 비하면 여고생들의 삶과 고민을 설득력있게 그린 지은이의 솜씨는 확실히 눈에 띈다.

그렇다면 스승의 모습은 무엇일까? 필남이 성장소설을 보며 감정을 만들고, 그것에서 다시 자신의 내면을 변화시켜가는 모습이 그것일 게다. 지은이는 필남의 고민을 유명한 성장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내면과 서로 엮어가며 풀어내는 시도를 했고 적절하게 그것을 소화해냈다. 덕분에 필남의 내면이 변하는 모습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고 확실한 공감대를 얻어낼 수 있게 됐다. 더욱이 주인공과 책 속의 인물을 엮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지고 있으니 어렵지 않게 책 내용 그대로에 빠져들 수 있다.

필남은 책 덕분에 개인에서 벗어나 세상과 소통할 여지를 마련했다. 그것은 독서의 힘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길 위의 책>도 소극적인 누군가를 필남처럼 변화시킬 가능성을 담고 있다. 삶은 언제나 변할 가능성을 무궁무진하게 열어놓기 마련이다. <길 위의 책>을 만나는 것도 그 가능성의 하나라고 표현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아니다. 비약은커녕 적절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만큼 유쾌한 친구이자 마음 좋은 스승이 되어주는 책을 자주 보기는 어려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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