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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강유원 서평집
강유원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평’을 하는 전문가들의 공통점은 뭘까? 대상에 대한 내용이 모두 좋다는 것이다. 너무 좋아서, 마치 완벽해보일 정도다. 가령 소설의 끝자락에 붙어 있는 평을 보자. ‘주례사’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물론 소설이 훌륭하기에 그런 것도 있겠지만 어찌 된 이유인지 그런 평만 보면 한국 소설은 한결 같이 다시 볼 수 없는 ‘역작’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서평은 어떤가? 마찬가지다. 드물게 등장하는 서평집도 한결같이 좋은 말만 한다. 그래서일까. 괴리감이 느껴진다. 일반 독자들은 실망스럽다고 말하는데 반해 평하는 이들은 오색찬란한 칭찬만 늘어놓으니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이제 그 괴리감도 끝낼 때가 된 것 같다. 더 이상 칭찬만 늘어놓는 평이 아닌, 불만도 터뜨리고 과감하게 ‘맥을 잘못 짚었다’고 말하는 이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바로 자칭 ‘비정규직’ 철학박사라고 말하는 강유원, 그의 서평집 <주제>는 ‘색깔’이 있다. 고요한 호수, 마치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한국 특유의 정서로 똘똘 뭉친 호숫가에 커다란 돌덩이를 던지는 것 같은 뚜렷한 색깔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주제>에 대해 주례사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할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그러니 짤막하게 <주제>의 색깔을 볼 수 있는 부분을 보자.
<주제>가 왜 색깔이 있는가. 요즘 한창 주목받는 공병호에 관한 언급을 보자. 한창 자유주의 지식인으로 신바람을 내고 있는 공병호의 ‘핵심만 골라 읽는 실용독서의 기술’에 대해 강유원은 “그가 ‘지식인’이라는 이름으로 펼치는 언설들이 끼치는 해악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다”며 “신경 바짝 써서 경계해야 할 무리들은 바로 이들”이라고 말한다. 물론 개인적인 비판이 아니다. 책을 통해 비판이다.
강유원은 왜 비판하는가? ‘자본의 이익에 철저하게 복무하기 위해 사회에 개입’한 ‘지식인’과 그러한 지식인이 빠른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알려준다는 ‘독서론’은 공병호 스스로 말하는 ‘지적인 사업가’가 아닌 “대중을 자본이 먹기 좋은 떡으로 재형성해주면서 떡고물을” 먹는 ‘마름’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공병호뿐만 아니라 인터넷에서 꾸준히 입소문난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경우는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가 대상이다. 이 책은 인터넷 서점에서 꽤 입소문이 난 책으로 언론에서도 몇 번 언급되기도 했는데 강유원은 ‘경박한 지적 과시 분위기’를 풍기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독서가 ‘지식 쌓기’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때문에 “그의 방대한 지식에 감탄할지언정 감동하기는 어려울 듯”하다며 이 책은 교양을 쌓는데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쯤 되면 과감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대목만 보더라도 강유원의 과감함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다. 더불어 <주제>의 색깔로 짐작할 수 있을 테다.
<주제>는 여섯 개의 챕터로 구성돼 있다. 책과 교양, 역사, 근대, 파시즘, 전쟁, 한국과 동아시아의 주제로 구성돼 있는데 이들 여섯 개를 선정한 이유가 꽤나 진지하다. ‘책과 교양’은 “책이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궁극적으로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를” 알기 위한 과정이고, ‘역사’와 ‘근대’는 “살아가는 시대의 원리를 책에서 깨우쳐 보려는 시도”로, ‘파시즘’과 ‘전쟁’은 “근대의 가장 두드러지고 절망적인 모습”으로 특히 파시즘은 “그침 없이 찾아야 하는 주제”이기에, ‘한국과 동아시아’는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한 관심의 소산”이기에 그렇단다.
여섯 개의 챕터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를 들으면 어렵지 않게 <주제>의 또 한 가지 색깔을 알 수 있다. 솔직함이다. 책을 쓰고, 읽는 것에 대해 ‘우주적인 보편적 가치’를 획득하려는 사람들의 글이 바다를 이루는 때에 지극히 개인적인 사색의 결과를 고백하는 강유원의 말은 솔직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의도만 이런 것이 아니다. 서평의 많은 부분도 그렇다. 책의 어느 부분만 읽어도 좋다고 말하는가 하면 학부생 리포트 모음집 정도의 수준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맥을 전혀 잘못 짚어 헷갈리게 만든다고 말하는가 하면, 책 때문에 당혹스러운 전기를 맞이하게 됐다고 말하기도 한다. 지나치게 솔직해서 위험해보일 정도다.
언젠가 무라카리 류의 추천사를 보고 감탄한 적이 있다. 추천사란 본디 평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그 책의 경우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평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었는데 무라카미 류의 추천사는 참으로 짤막했다. “재미있다”, 그뿐이었다. 너무나 단도직입적인 것이었는데 오히려 그 짧은 말이 더 가슴에 와 닿았다.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이 느낀 바를 있는 그대로를 말하려 했기 때문이다.
<주제>도 그렇다. 과감하고 솔직하다는 특징을 넘어 느낌 그대로를 적어놓았다. 책을 보며 개인적인 생각을 늘어놓는 모습을 보이는 것들까지 확실히 그렇다. 그렇기에 색깔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을 게다. 한결같이 둥글둥글한 모래들만 가득한 백사장에서 울퉁불퉁 모난 구석이 많은 <주제>는 단연 돋보인다.
너무 돋보이는 탓에 싸움박질 한번 크게 일으킬 것 같다는 섣부른 생각까지 드는데 어쨌거나 <주제>의 등장은 반가운 일이다. 일반 독자와 전문가 사이의 괴리감도 사라지고 제대로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까지 포착하게 해주니 정말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