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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여행가방 - 박완서 기행산문집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12월
평점 :
한국 문학의 기둥 박완서가 또 한권의 책을 선보였다. 소설은 아니다. 기행산문집이다. 그렇기에 놀라게 된다. 기행산문집이라면 기행을 근본바탕으로 한다는 것이 아닌가. 이럴 때면 작가에게 나이란 하나의 숫자임을 깨닫게 된다. 박완서의 나이가 벌써 일흔이 넘었다는 것이 아주 오래된 농담처럼 여겨지게 된다. 그렇다. 놀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책이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놀란다는 건 작가에 대한 모욕이다. 한국 문학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놀랄 건 사실이 아니라 사실 속에 담긴 진실이다. <잃어버린 여행가방>에 단긴 진실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 것, 그것이 작가에 대한 예우일 것이다.
<잃어버린 여행가방>은 박완서에게 한 걸음 다가갈 여지를 만든다. 소설이나 동화에서는 작가의 진짜를 찾기가 어렵다. 허나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그것에서 생각하고 깨달은 것들이 담긴, 때로는 투덜거리기도 하고 자신의 속마음을 수줍게 고백하는 기행산문집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래서일까. 박완서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 같다. 놀랍게 여겨질 정도다. 그것에 관해서는 이제껏 박완서의 이름을 달고 나왔던 어느 작품도 견주지 못할 정도다.
<잃어버린 여행가방>에 수록된 글은 열두편으로 기행지로 국내는 남도, 하회마을, 섬진강, 오대산이 있고 국외로는 바티칸, 상해, 티베트, 카트만두 등이다. 박완서가 방문한 곳들은 산발적이다. 여행의 목적을 정해서 장소들을 두루 선택했다기보다는 인생에 우연히 끼어든 기회 덕분에 찾은 곳들이 많은 탓이다. 때문에 첫 인상은 고향에 있다가 이웃사촌들의 인연 덕분에 고향 밖을 나가고 해외까지 나갈 기회를 얻은 어르신의 모습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우는 소리가 있다. 스스로의 몸을 생각하는지 가야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소리도 있다. 익히 알려진 유명한 여행가들이 계획부터 여행의 하나로 생각하고 부지런 떠는 것에 비하면 살포시 웃음이 나기도 한다. 허나 웃음은 곧 지워야 하리라. 탄성이 대신한다. 쌓인 인생의 경험이 거대한 탓인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젊은이들은 여행지에서 선언한다. 이 여행이 자신에게 거대한 소용돌이가 될 것임을. 또한 새로운 문화에 흠뻑 빠져들어 형용 가능한 모든 언어를 동원해 여행의 로망을 말한다. 그리곤 여행을 자신의 것으로 정의내리기를 즐긴다. 패기만만하다고 할 수 있는 모습, 이것이 요즘 주목받는 여행책들의 모습이다.
반면에 박완서는 어떠한가. 말이 없다. 최대한 아끼고 고르는 모습이다.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들은 오밀조밀 잘도 보여주는데 가슴 속 깊은 것을 어찌 그리 아끼는지 요즘 여행책에 중독된 이들이라면 속이 탈 지경이다. 무슨 까닭일까? 그 여행책들은 여행으로 삶을 말하려 했다. 갑작스러운 문화 충돌에서 겪은 것, 새로운 장소에 삶을 동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잃어버린 여행가방>은 삶의 한 장면으로 여행을 말할 따름이다. 아니, 여행을 말한다는 것조차 어울리지 않는다. 어제 겪은 일, 내일 겪을 일을 말하는 것 같다. 그렇기에 아끼고 신중하다. 함부로 삶을 보여주지도 않을뿐더러 쉽게 재려는 것도 삼가는 모습이 가득하다. 때문인지 방문한 곳들 중에는 유명하고도 유명한 곳이 많지만 로망을 키워주는 것들은 없다. 로망이라는 단어가 이물질처럼 여겨질 정도인데 그저 지나가는 삶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또한 사색하는 시간에 동참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때문에 종종 기행산문집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잊게 되기도 하리라.
허나 어제 일처럼 이라고 할지라도, 또한 사색의 한 과정일지라도 할지라도 집을 떠난 것은 특별한 일이다. 때문에 생각의 나무는 높게 자라고 가지들은 사방팔방으로 뻗치기도 한다. 이럴 때 <잃어버린 여행가방>은 참맛을 낸다. <오래된 미래>로 국내에도 친숙한 티베트에 방문했을 적을 보자. 다른 이들처럼 박완서도 그 책의 영향을 받았는지 그것이 일종의 선입견처럼 작용했다고 말한다. 허나 도착한 시간부터 <오래된 미래>는 없다. 박완서의 눈과 생각이 지배할 뿐이다.
다들 티베트에서 ‘오래된 미래’를 볼 때 박완서는 무엇을 보았는가. 식민지 지배를 경험한 탓인지 한족과 티베트인들 사이의 괴리감을 본다. 구걸에 나선 티베트인들에 당황하고 그것을 내치고 싶어 하는 자신의 모습에 놀란다. 동시에 잘 빼입고 있는 한족들을 보며 식민지 시절의 일본인들을 떠올린다. 박완서는 화를 낸다. 또한 삶의 아득한 기억들을 떠올리며 자신들과 같은 관광객이 이곳을 모독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하는데 티베트를 신화화했던 여행책들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으리라. 물론 그것에 감응했던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일 테다.
고난에 처한 에티오피아와 인도네시아를 기행한 글도 마찬가지. 에티오피아에서 1950년대를 떠올리고 인도네시아에서 해일 피해를 목격한 박완서는 함부로 베푸는 자의 말을 꺼내지 않는다. 오히려 “부끄럽게도 내가 만약 어떤 불가피한 사정에 의해 일행과 그 난민촌에 혼자 남아 하룻밤을 지내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는 아찔한 고백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런 모습에 더 마음이 간다.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된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고 말하고 신생아의 얼굴에 난 웃음을 보고 처음으로 웃었다며,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건 놀랍고 아름다운 일이다”라는 말에 가슴이 동요하는 건 그런 이유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잃어버린 여행가방>은 삶이 앞장 서 있다. 여행에 몸과 마음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여행을 품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노작가, 아니 박완서라는 인간의 진실함이 묻어난다. 놀랍다. 앞서 말했듯 책이 나왔다는 사실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다. 사실에 담긴 진실이 놀랍다. 묵직하고 진지한, 가슴을 새기는 삶의 언어들이 꼬리를 무는 <잃어버린 여행가방>, 끝자락이 유달리 길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