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옷장 - 개정판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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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나는 2022년 수상 작가인 아니 에르노를 읽는다. 항상 그렇듯이 생소한 작가다. 이럴 땐 1974년 데뷔작인 <빈 옷장>을 펼친다. 그다지 많지 않은 분량이 우선 마음에 든다. 만만히 여겼다가 의외로 진도가 나가지 않음에 놀란다.

 

지긋지긋하다. 그들에게, 모두에게, 문화, 내가 배웠던 모든 것에 구역질이 난다. 나는 사방에서 농락당했다.... (P.15)

 

드니즈 르쉬르. 화자이자 주인공이다. 화자의 어릴 적부터 스무 살이 되기까지의 자전적 삶을 회상한다. 불유쾌한 개시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갓 대학생이 된 그녀는 방금 낙태 전문 산파의 집에 갔다가 나오는 길이다. 그녀의 삶이 어떠하였던가.

 

화자는 사회적, 문화적 부조화를 겪는다. 도시 외곽에 있는 가난한 마을의 카페 겸 식료품점 주인의 딸인 어린 드니즈. 그가 보고 듣고 말하는 이웃은 부모의 허름한 가게와 술집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가난한 서민들이다. 반면 시내의 사립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드니즈가 만나는 사람들은 전혀 다르다. 부모보다 고상하고 우아한 선생님, 자기와는 비교할 수 없이 세련된 반 친구들. 그는 거기서 어리숙한 촌닭이 되고 만다.

 

우리 집과 다르다는 것을, 선생님이 내 부모와 다르게 말한다는 것을 이내 알아버렸지만,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있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뒤섞였다. (P.68-69)

 

드니즈의 모순되고 이중적인 삶. 시내와 시골, 가난과 유복, 교양과 무지, 세련과 투박. 그 속에서 화자는 현실을 자각하고 부모와 이웃의 상대적 저열함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방법은 오직 자신이 지적으로 누구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뿐. 바칼로레아에 합격하여 대학에 진학하고 지긋지긋한 그들에게서 벗어난다.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모범생.

 

지겹다. 이 모든 것을 증오한다. 나는 갇혀 버렸다. 드니즈 르쉬르, 카페 겸 식료품점 집 딸, 한쪽에 나열해 놓은 음식들과 반대쪽에 술을 기다리며 주저앉아 있는 남자들로 가득 찬 테이블 사이에 껴 있다. (P.122-123)

 

화자가 일찍부터 성에 관심을 두게 되는 건 타고난 성향일 수도 있지만, 억눌린 욕망이 다른 배출구를 찾지 못하는 까닭일 수도 있다. 첫 고해성사의 참담한 실패 이후 드니즈는 은밀하게 숨긴다. 고등학생 시절 자신의 말처럼 사냥에 성공한 남자애와 짜릿한 쾌락을 즐기는 화자. 대학생이 되어서 만난 남자와의 고정적 관계는 드니즈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알 수 있다. 드니즈의 임신은 방탕과 무지의 결과라기 보다는 남자 친구 집안의 다른 세계로 진입하고자 하는 욕구의 발현이기도 하다.

 

그는 시험에 합격했고 나는 여전히 기다린다. 나는 그가 알아서 할 것이라고, 그의 가족들이 모두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P.225)

 

작가는 이 소설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드니즈가 겪는 내적 갈등과 모순된 생활의 단면. 고향에서 탈출하여 도시인으로 진입하고자 하는 시도의 실패. 여기에 드니즈의 남성 경험이 결부되어 어수선한 전개를 보이지만 서사는 비교적 간단하다. 다만 이 작품이 21세기가 아닌 20세기 후반에 쓰였다는 것이 당대 독자에게는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 있겠다. 오히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표현 기법이다. 어린 여학생의 자전적 글쓰기답게 직접 쓰는 듯한 다소 거칠고 혼란스러운 문장은 오히려 생동감을 자아낸다. 천진할 정도로 솔직하게 토로하는 듯하다가도 결정적 순간에는 감정과 행동, 사건을 직접 묘사하기보다는 간접적으로 슬쩍 암시하며 넘어간다.

 

드니즈의 선택은 올바른 것이었는가. 자기 부모를 증오한다고 밝힐 정도로 화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지긋지긋해한다. 시내의 사립학교 다녔기에 중산층 사회와 접할 기회가 컸고 그것은 자신과 가족과 이웃에 대한 상대적 열등감과 박탈감으로 이어졌으리라. 다만 그래도 클로파르 동네 아이들보다는 처지가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발전의 긍정적 동력으로 삼았다면 모르겠지만 자기 부정의 단초로 삼는 데 불과하였다. 결국 그것이 대학생으로서 지식인으로서 주체적 삶을 끌어나가는 밑바탕이 못 되고, 열등감을 품은 채 남자에게 의지하는 귀결로 이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모든 것이 뒤틀렸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P.228)

 

아직은 아니 에르노란 작가를 잘 모르겠다. 이 작품이 에르노 문학의 본령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옮긴이의 말에서 소개되었던 작가만의 독자적 주제 의식, 독특한 글쓰기 방식이 여기서는 두드러지지 않는다. 몇 편 더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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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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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그 여름

601, 602

지나가는 밤

모래로 지은 집

고백

손길

아치디에서

 

<쇼코의 미소>로는 아직 이 작가를 잘 모르겠다. 당시 감상평을 살펴보니, 일곱 가지 특징을 언급하고 있다. 글로벌 배경, 사회 부조리에 대한 강한 의식, 세월호 사건, 여성의 세계, 회상적, 소통과 단절, 순수한 서사의 미덕. 이것이 우연의 소산인지 작가 문학세계의 특성인지를 확인하고 싶어 후속 작품집을 읽는다. 역시 일곱 편이 담겨 있는데, <그 여름>, <모래로 지은 집>, <아치디에서>가 중편에 가까운 분량으로 작품집에서 비중을 차지한다.

 

<아치디에서>의 아일랜드를 제외하면 지역적 배경은 모두 우리나라다. 이 작품의 경우도 여주인공 하민을 고려하면 전작과는 글로벌 측면에서 많이 약하다. 여성의 세계, 회상적 특성, 소통과 단절 등이 전작보다 유독 두드러진다. 우정과 사랑이 보다 중심 제재에 가깝다. <그 여름><고백>처럼 여성 동성애를 중점으로 다룬 작품이 두 편이나 실려 있어 이채롭다.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관용 요구가 높아지고 대중문화에서도 심심찮게 소재로 등장하면서 개인과 사회가 이를 어떻게 반응하고 수용할 것인가도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이제 성소수자 인정은 당연한 것이고, 부정적으로 인식하면 오히려 구시대적 가치관에 매몰된 꼰대가 되는 시절이다. 친구 진희를 죽음으로 몰고 간 <고백> 속 미주의 눈빛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몇 년 지나지 않았지만. <그 여름> 속 수이와 이경의 사랑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이성 간이 아니라고 할 뿐 그들은 서로에게 여타 가족보다도 소중한 존재였다. 연인 내지 애인의 관계가 항상 사랑으로 넘치고 행복한 건 아니다. 사랑은 뜨겁다가 차갑게 식을 수 있고, 사랑의 틈을 타고 제삼자가 눈에 들어올 수 있으며 하찮은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미움을 유발하기도 한다. 독자는 수이와 헤어지려고 하는 이경을 뭐라고 할 수 없다. 그와 은지의 관계는 차라리 부차적이다.

 

수이는 이미 그때 이 연애의 끝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너지기 직전의 연애, 겉으로는 누구의 것보다도 견고해 보이던 그 작은 성이 이제 곧 산산조각날 것이라는 예감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최선을 다해서 마지막을 준비했는지도 모른다. (P.49, <그 여름>)

 

우정과 사랑의 경계는 여전히 모호하다. <모래로 지은 집><아치디에서>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전자에서 화자와 모래, 공무는 친구 사이지만 연인의 경계로 넘어가고자 하는 소망을 인정하지 않는다.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공무, 온실 속 화초 격인 모래. 화자의 눈에 비친 그들은 모두가 약점을 지닌 인물이다. 물론 우리는 화자 역시 마찬가지임을 알지만, 화자는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는다. <아치디에서>의 브라질인 화자가 잉여 인간 같은 삶을 살다가 생계를 위한 아일랜드의 시골 농장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 여자 하민. 그녀와의 교유와 우정을 통해 화자는 위로와 치유를 받고 예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서서히 변모한다. 양자에게 서로는 부끄러운 모습과 마음을 토로해도 괜찮은 멋진 친구다.

 

모래의 말은 맞았다. 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의 자아를 부수고 다른 사람을 껴안을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P.152, <모래로 지은 집>)

 

모래의 고백을 거절한 공무, 공무가 화자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모래의 전언에도 무심한 화자. 화자에게 분노를 일으킬 정도로 남자친구에게 얽매여 있는 모래. 솔직하고 차분하게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에게 우리는 트집을 잡을 수 없다. 화자의 언행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범주 내에 속해 있는 지극히 평범한 정도의 것이므로. 그것은 후자에서 화자와 하민의 관계 역시 그러하다. 두 사람이 우정을 넘어서는 사적인 친밀감을 보여준 적은 없다. 그럼에도 화자가 라페스트로 가지 않고 더블린에서 전화 통화만 하는 장면은 담담함 속에서 아린 여운을 남긴다.

 

남녀차별, 남아선호, 남존여비 사상은 이제는 거의 사멸되다시피 했다고 믿는다. <601, 602>에서 나타나는 남녀차별의 유산은 화자의 유년기 속 회상에 그치기를 바라지만, 제아무리 드문 사례라 하더라도 오늘날 사회 일각에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기에 씁쓸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친구 효진이네 가족의 이해할 수 없는 봉건적 잔재에 대한 화자의 분노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자기 가족들도 마찬가지임을 깨닫게 될 때 더욱 치열하다. 무엇보다 자기 엄마가 아들을 낳으라는 주변의 요구에 결국 지고 말았을 때. 이제 화자네 가족은 더욱 행복해질까. 가족의 굴레가 갖는 무서움은 <모래로 지은 집>에서 공무의 고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부모와 자식으로 이루어진 전형적 가족의 의미는 오늘날 많이 퇴색하였다. 핵가족, 개인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특히 마지막 고리인 부모의 부재는 자식 간 유대의 끈을 약화한다. 가까운 이웃과 친구, 직장 동료에 비해 자주 만나지 않는 먼 형제자매는 남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단지 혈연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타인보다 가깝고 끌리는 관계라고 일컬을 수 있을까. <지나가는 밤>은 그렇다고 말한다. 평시에는 무소식이 희소식이고, 데면데면한 사이지만. 한쪽의 삶이 평안치 않은 때는 더더욱 그러하지만. 그래서 윤희는 주희가 따뜻한 잠이라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윤희는 주희가 추워하지 않기를, 추워 잠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따뜻한 단잠을 자기를 바랐다. 쌀쌀한 밤, 이불이라도 덮어줄 수 있는 사람으로 주희의 곁에 있다는 사실이 윤희의 마음에 작은 빛을 드리웠다. (P.102, <지나가는 밤>)

 

혜인과 숙모의 관계 역시 그러하다. 어릴 적 삼촌네 집에서 젊은 숙모의 손에 수년간 자랐던 그녀에게 숙모는 엄마이자 친구이고 어쩌면 삶의 롤 모델이었으리라. 그런 숙모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자괴감과 모멸감은 그녀를 향한 원망만을 쌓았다.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숙모가 감내해야 했던 답답함과 주변의 눈초리와 입방아를 어린 혜인은 헤아리지 못한 상태로. 어느덧 숙모 나이가 된 그녀는 숙모와, 아니 자신과 화해한다. 세상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자신의 뜻과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찌할 수 없이 선택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함을 비로소 알게 되어서다.

 

표제도, 작가의 말도 무해한 사람을 가리킨다. 타인에게 일체의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이상적이지만 가능하지 않다. 제아무리 조심히 걸어도 발바닥으로 개미를 밟게 마련이듯이, 일체의 무해한 마음으로 하는 무의식적인 언행도 타자에게 유해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이고 현실이다. 이경은 수이에게 상처를 줄 마음이 없었다, 사랑하는 사이였으므로. 모래와 공무와 화자 나비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우정도 아픔과 슬픔과 생채기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 친구를 죽음으로 몰고 간 미주는 어떠하고. 윤희와 주희, 혜인과 숙모는 가족이기에. 랄도와 하민은 친구라고 믿었기에. 작품 해설에서 강지희 문학평론가는 이렇게 짚는다.

 

최은영은 관계가 연결되고 넓어지는 지점이 아니라 단절되는 지점을 잔인하리만큼 섬세하게 그려나간다. 이것이 짙은 애상을 자아내는 것은 우리가 이 단절에서 어떤 결정적인 이유나 잘못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P.317, 해설)

 

상처는 불가피하다. 모든 상처가 극단으로 치닫는 것도 아니다. 상처는 당장 쓰리고 고통스럽지만 낫게 마련이다. 일부러 상처를 만든 게 아님을 깨닫고 상처 치유를 통해 세상을, 사람 사이를 잘 이해할 수 있다면 훗날 상처 자국을 가만히 보듬을 수 있으리라. 쓸쓸하고 외로운 밤이면 더더욱 사람의 따뜻한 체온이 그리워지듯이 말이다.

 

작가 최은영이 상처 못지않게 화해를 중시하는 까닭도 멀지 않다는 생각이다. 작가는 섣불리 인물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한심한 삶을 살아가는 랄도조차도 독자는 하민의 처지를 통해서 역으로 랄도에게 열린 마음을 품게 된다. 하민을 찾아가지 않는 랄도에게, 그런 랄도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는 말투로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하민에게도 작가는 담담하다. 그리고 <지나가는 밤><손길>에서 각각 잠자는 동생을 바라보는 윤희에게, 공연장에서 숙모와 시선을 마주하는 혜인에게 작고 희미한 빛을 드리운다.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P.209, <고백>)

 

전작과 마찬가지로 회상적 형식은 여전하다. 당시에는 거칠고 조급한 감정과 편협한 사고로 수용하지 못하고 원망만 가득했던 사건이 훗날 차분히 가라앉은 감정과 세파의 경험으로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어서일 것이다. 그 회상 속에서 우리는 과거를 뼈저리게 반성할 수 있으며 자신의 선택에 아쉬움을 표할 수 있기도 하다. 어쩔 수 없던 이별의 불가피성을 뒤늦게나마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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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명 : 노예리 바이올린 독주회 "Soul into Spirit"

일시 : 2025년 10월 22일(수) 19:30

장소 : 금호아트홀 연세

연주 : 노예리 (바이올린), 노예나 (피아노)

프로그램

  - 쇼송, 시곡 Op.25

  -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3번 D단조 Op.108

  -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D단조 BWV 1004 중 샤콘느

  - 후바이, 카르멘 환상곡 Op.3, No.3


* 세줄평

개성있고 아름다운 곡들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이다. 쇼송의 시곡은 이번에 예습 차원에서 집중 감상하게 된 연유로 좋아하게 되었다. 표제에 맞게 시적으로 풀어나간다. 브람스의 소나타도 깊은 감정이입과 다이내믹을 잘 살려내었다. 바흐 샤콘느의 진지하고 사려깊은 몰입, 후바이 곡의 빛나는 발랄함과 기교는 대조적이지만 상통한다. 전체적으로 스케일을 강조한 연주는 아니고 기교와 섬세함, 적정한 감정이 좋은 어울림을 주는 연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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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역사 - 홀연히 사라진 4천 년 역사의 위대한 문명도시를 다시 만나다 더숲히스토리
카렌 라드너 지음, 서경의 옮김, 유흥태 감수 / 더숲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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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선주민 격인 수메르에 관한 책은 몇 권 읽었다. 주로 신화 형태로서 바빌론의 신화 체계가 설명되었지만, 문명과 역사로서 바빌론에 관한 책은 처음 접한다. 감수자 유흥태에 따르면 국내 최초로 바빌론의 역사를 소개하는 책이라고 하니, 기존에 관심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접근이 불가능하였던 셈이다.

 

수메르는 메소포타미아 남부이며, 바빌론은 중부에 위치한다. 왕조사로 보면 바빌론은 수메르를 계승하고 페르시아 제국에 멸망함으로써 종말을 맞이한다. 문명사로 보면 바빌론이 완전히 버려지는 시기가 알렉산더 대왕 사후인 기원전 300년 전후이다. 수록된 연대표에 따르면 바빌론이 조그만 왕국의 수도가 된 게 기원전 20세기이므로 약 17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존속하였다. 단일 왕조는 아니다. 바빌론이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여러 왕조가 교체한다. 대표적으로 바빌론 왕국(고바빌로니아), 카시트 왕조, 이신 왕조, 아시리아 제국, 신바빌로니아(칼데아 제국), 페르시아 제국, 그리고 알렉산더 제국과 셀레우코스 왕조이며, 이 책도 대부분 이들 왕조를 중심으로 풀어나간다. 아카드인, 카시트인, 아시리아인, 칼데아인, 페르시아인, 그리스인 등 지배 민족도 다양하다.

 

<성경>에 등장하는 바빌론은 신바빌로니아를 지칭한다. 성경 속 바빌론이 대체로 부정적으로 기술되는 까닭은 유대인에게 치욕적인 바빌론 유수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전성기를 누리던 당대 바빌론과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명성은 대단하였다고 한다. 7장에서는 당대의 바빌론 시티투어를 가상으로 전개한다. 마르두크 신전 에산길라를 필두로 여러 신전이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바빌론은 당대 최대의 도시 규모를 자랑했을 것이다. 이 당시가 도시 바빌론의 가장 빛나던 시기이자 마지막 불꽃이 아니었을까.

 

이런 찬란한 바빌론 문명이 오늘날 제대로 보존되지 못한 연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들의 주된 건축재가 진흙벽돌이라는 점이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에 금방 만들 수 있지만, 내구성이 약한 탓에 문명이 유지될 때는 개보수가 이루어졌지만, 퇴락했을 때는 단기간에 도시가 폐허가 되어버린다. 석재로 지은 타 문명의 건축물과 달리 바빌론의 웅장했던 건축물이 대다수가 진흙더미로 퇴락한 점은 못내 아쉽기만 하다.

 

이 지역의 도시국가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그의 전략에 있어 새로운 법규범의 도입은 대단히 중요한 수단이었다. 함무라비법전은 각 도시국가의 수용과 안정을 보장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P.88)

 

세계사 시간에 배우는 함무라비법전의 출처가 바빌론 왕국인 까닭도 흥미롭다. 난립하던 군소국가를 통일한 함무라비 왕은 통치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여러 법전을 통합하여 정리하였다. 그게 함무라비법전이다.

 

바빌론의 숙적은 엘람이다. 바빌론 동남부, 오늘날 이란 땅에 위치한 엘람은 호시탐탐 메소포타미아로 쳐들어왔고, 특히 바빌론 세력이 약해질 때는 커다란 피해를 보거나 일시적으로 지배를 받기도 하였다. 이때 뺏긴 마르두크 신의 조각상을 훗날 되찾아 온 이신 왕조의 네부카드네자르 1세가 오랜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고 하는 점은 시사적이다. 이들의 투쟁은 아시리아와 엘람을 모두 멸망시킨 페르시아에 의해 끝이 난다. 20세기 말 이라크-이란 전쟁의 성격도 새삼 다시 보게 된다.

 

마르두크가 왕위를 승계받는 자가 아니라 승리자에게 왕권을 하사한다는 개념은 매우 실용적이면서도 새로운 개념이었다. (P.145)

 

서양 기독교 사회에서 도시 로마는 특수한 지위를 누렸다.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위상은 떨어졌지만, 여전히 교황이 다스리는 종교도시이자 교황령의 본거지로 이따금 외침을 당하면서도 끝내 생존에 성공하였다. 오늘날 바티칸시티가 그 유산이다. 이런 면에서 바빌론은 도시 로마와 성격이 흡사하다.

 

여러 왕조가 명멸하는 가운데서도 바빌론 도시와 문명은 여전히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수도로 기능하거나, 수도가 아니더라도 독자적 지위를 인정해 주었으니, 세금을 면제하는 특권을 오랜 기간 누려왔던 것이다. 이 특권이 폐지된 것이 페르시아 제국 때인데, 그들은 다른 종교 체제를 지니고 있어서다. 즉 이전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했던 왕조들은 바빌론이 주창하는 종교 체제를 수용하였기에 수도이자 종교도시로서 바빌론의 특수성을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바빌론의 왕이라는 명예를 누렸으니, 마치 서로마제국 황제라든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호칭과 유사한 성격이다.

 

바빌론의 왕이라는 특권에 집착하던 아시리아 왕들과는 달리 페르시아 왕들은 마르두크의 총애를 원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P.226)

 

세금 특권이 박탈당하고, 셀레우코스 왕조에서 수도로서 마지막 지위마저 빼앗기자 바빌론은 빠르게 몰락하였다. 때마침 마르두크 신앙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신앙 운동들이 등장하여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빠르게 확산했다. 종교에 이어 전통 문자, 음악도 쓸모를 상실하고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게 되는 바빌론의 모습이다.

 

이 책은 바빌론이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왕조들의 흥망성쇠를 다루지만 여기에 매몰되지 않는다.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바빌론 도시와 문명, 종교이다. 정치적 격변에서도 바빌론의 귀족과 사제 세력이 권위와 특권을 유지한 채 영광과 부활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고대의 유산을 잊지 않기 위해 치열한 교육을 놓지 않았다. 그들이 남긴 수많은 점토판과 쐐기문자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당대인들의 삶과 사고, 산업과 경제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바빌론의 일부 과학기술은 현대 사회에도 남아 든든한 토대를 이룬다.

 

328면 중 본문은 25면에서 시작하여 254면까지로 그렇게 분량이 많은 편은 아니다. 앞부분은 감수의 글과 충실한 연대표가 자리한다. 뒷부분은 참고문헌 목록과 찾아보기 등이다. 교양서치고는 참고문헌이 꽤 긴데, 전공자들을 고려한 까닭으로 보인다. 원서 자체가 비교적 최근에 출판된 책이니만치 최신 연구 성과와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점도 좋은 점수를 줄 수 있는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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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2025-10-22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타이트>나 <바빌론>과 같은 문명 탄생 시기의 나라들에 대해 궁금했는데,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해요!
 


공연명 : Luciano Berio 100 - The Complete Sequenzas : Concert 3

일시 : 2025년 10월 20일(월) 19:30

장소 : 일신홀

프로그램 및 연주

  1) 베리오, 세쿠엔차 Ⅺ for Guitar

     - 신승수 (기타)

  2) 베리오, 세쿠엔차 Ⅻ for Bassoon

     - 장현성 (바순)

  3) 베리오, 세쿠엔차 XIII for Accordian

     - Stefan Hussong (아코디언)

  4) 베리오, 세쿠엔차 XIV for Cello

     - 윤석우 (첼로)


* 세줄평

그나마 두 번째라고 오늘은 조금 낫다. 기타 곡은 바로 앞좌석 사람에 가려서 연주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잠시 애쓰다가 그냥 눈을 감은 채 귀 기울인다. 그래서일까 별다른 감흥이 없다. 바순 곡은 거의 진기명기다. 20분 가까이 순환호흡으로 연주를 계속해야 하는데, 테크닉 이전에 체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리라. 오늘 연주자도 막판에는 호흡이 끊어지던데, 내 무지의 소치인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앞사람이 퇴실해서 시야가 확보된다. 아코디언의 신비스러운 음향도 인상적이지만, 확실히 보는 재미로서는 첼로 곡이 최고다. 비로소 첼로가 타악기임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첼로를 이렇게도 연주할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의 시간이기도 했다. 베리오의 세쿠엔차 시리즈는 오디오용 음악이 아니라 비디오용 작품이다. 연주자의 연주 행위가 음악과 어우러질 때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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