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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평점 :
<수록작>
그 여름
601, 602
지나가는 밤
모래로 지은 집
고백
손길
아치디에서
<쇼코의 미소>로는 아직 이 작가를 잘 모르겠다. 당시 감상평을 살펴보니, 일곱 가지 특징을 언급하고 있다. 글로벌 배경, 사회 부조리에 대한 강한 의식, 세월호 사건, 여성의 세계, 회상적, 소통과 단절, 순수한 서사의 미덕. 이것이 우연의 소산인지 작가 문학세계의 특성인지를 확인하고 싶어 후속 작품집을 읽는다. 역시 일곱 편이 담겨 있는데, <그 여름>, <모래로 지은 집>, <아치디에서>가 중편에 가까운 분량으로 작품집에서 비중을 차지한다.
<아치디에서>의 아일랜드를 제외하면 지역적 배경은 모두 우리나라다. 이 작품의 경우도 여주인공 하민을 고려하면 전작과는 글로벌 측면에서 많이 약하다. 여성의 세계, 회상적 특성, 소통과 단절 등이 전작보다 유독 두드러진다. 우정과 사랑이 보다 중심 제재에 가깝다. <그 여름>과 <고백>처럼 여성 동성애를 중점으로 다룬 작품이 두 편이나 실려 있어 이채롭다.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관용 요구가 높아지고 대중문화에서도 심심찮게 소재로 등장하면서 개인과 사회가 이를 어떻게 반응하고 수용할 것인가도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이제 성소수자 인정은 당연한 것이고, 부정적으로 인식하면 오히려 구시대적 가치관에 매몰된 꼰대가 되는 시절이다. 친구 진희를 죽음으로 몰고 간 <고백> 속 미주의 눈빛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몇 년 지나지 않았지만. <그 여름> 속 수이와 이경의 사랑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이성 간이 아니라고 할 뿐 그들은 서로에게 여타 가족보다도 소중한 존재였다. 연인 내지 애인의 관계가 항상 사랑으로 넘치고 행복한 건 아니다. 사랑은 뜨겁다가 차갑게 식을 수 있고, 사랑의 틈을 타고 제삼자가 눈에 들어올 수 있으며 하찮은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미움을 유발하기도 한다. 독자는 수이와 헤어지려고 하는 이경을 뭐라고 할 수 없다. 그와 은지의 관계는 차라리 부차적이다.
수이는 이미 그때 이 연애의 끝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너지기 직전의 연애, 겉으로는 누구의 것보다도 견고해 보이던 그 작은 성이 이제 곧 산산조각날 것이라는 예감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최선을 다해서 마지막을 준비했는지도 모른다. (P.49, <그 여름>)
우정과 사랑의 경계는 여전히 모호하다. <모래로 지은 집>과 <아치디에서>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전자에서 화자와 모래, 공무는 친구 사이지만 연인의 경계로 넘어가고자 하는 소망을 인정하지 않는다.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공무, 온실 속 화초 격인 모래. 화자의 눈에 비친 그들은 모두가 약점을 지닌 인물이다. 물론 우리는 화자 역시 마찬가지임을 알지만, 화자는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는다. <아치디에서>의 브라질인 화자가 잉여 인간 같은 삶을 살다가 생계를 위한 아일랜드의 시골 농장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 여자 하민. 그녀와의 교유와 우정을 통해 화자는 위로와 치유를 받고 예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서서히 변모한다. 양자에게 서로는 부끄러운 모습과 마음을 토로해도 괜찮은 멋진 친구다.
모래의 말은 맞았다. 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의 자아를 부수고 다른 사람을 껴안을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P.152, <모래로 지은 집>)
모래의 고백을 거절한 공무, 공무가 화자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모래의 전언에도 무심한 화자. 화자에게 분노를 일으킬 정도로 남자친구에게 얽매여 있는 모래. 솔직하고 차분하게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에게 우리는 트집을 잡을 수 없다. 화자의 언행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범주 내에 속해 있는 지극히 평범한 정도의 것이므로. 그것은 후자에서 화자와 하민의 관계 역시 그러하다. 두 사람이 우정을 넘어서는 사적인 친밀감을 보여준 적은 없다. 그럼에도 화자가 라페스트로 가지 않고 더블린에서 전화 통화만 하는 장면은 담담함 속에서 아린 여운을 남긴다.
남녀차별, 남아선호, 남존여비 사상은 이제는 거의 사멸되다시피 했다고 믿는다. <601, 602>에서 나타나는 남녀차별의 유산은 화자의 유년기 속 회상에 그치기를 바라지만, 제아무리 드문 사례라 하더라도 오늘날 사회 일각에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기에 씁쓸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친구 효진이네 가족의 이해할 수 없는 봉건적 잔재에 대한 화자의 분노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자기 가족들도 마찬가지임을 깨닫게 될 때 더욱 치열하다. 무엇보다 자기 엄마가 아들을 낳으라는 주변의 요구에 결국 지고 말았을 때. 이제 화자네 가족은 더욱 행복해질까. 가족의 굴레가 갖는 무서움은 <모래로 지은 집>에서 공무의 고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부모와 자식으로 이루어진 전형적 가족의 의미는 오늘날 많이 퇴색하였다. 핵가족, 개인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특히 마지막 고리인 부모의 부재는 자식 간 유대의 끈을 약화한다. 가까운 이웃과 친구, 직장 동료에 비해 자주 만나지 않는 먼 형제자매는 남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단지 혈연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타인보다 가깝고 끌리는 관계라고 일컬을 수 있을까. <지나가는 밤>은 그렇다고 말한다. 평시에는 무소식이 희소식이고, 데면데면한 사이지만. 한쪽의 삶이 평안치 않은 때는 더더욱 그러하지만. 그래서 윤희는 주희가 따뜻한 잠이라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윤희는 주희가 추워하지 않기를, 추워 잠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따뜻한 단잠을 자기를 바랐다. 쌀쌀한 밤, 이불이라도 덮어줄 수 있는 사람으로 주희의 곁에 있다는 사실이 윤희의 마음에 작은 빛을 드리웠다. (P.102, <지나가는 밤>)
혜인과 숙모의 관계 역시 그러하다. 어릴 적 삼촌네 집에서 젊은 숙모의 손에 수년간 자랐던 그녀에게 숙모는 엄마이자 친구이고 어쩌면 삶의 롤 모델이었으리라. 그런 숙모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자괴감과 모멸감은 그녀를 향한 원망만을 쌓았다.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숙모가 감내해야 했던 답답함과 주변의 눈초리와 입방아를 어린 혜인은 헤아리지 못한 상태로. 어느덧 숙모 나이가 된 그녀는 숙모와, 아니 자신과 화해한다. 세상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자신의 뜻과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찌할 수 없이 선택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함을 비로소 알게 되어서다.
표제도, 작가의 말도 ‘무해한 사람’을 가리킨다. 타인에게 일체의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이상적이지만 가능하지 않다. 제아무리 조심히 걸어도 발바닥으로 개미를 밟게 마련이듯이, 일체의 무해한 마음으로 하는 무의식적인 언행도 타자에게 유해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이고 현실이다. 이경은 수이에게 상처를 줄 마음이 없었다, 사랑하는 사이였으므로. 모래와 공무와 화자 나비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우정도 아픔과 슬픔과 생채기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 친구를 죽음으로 몰고 간 미주는 어떠하고. 윤희와 주희, 혜인과 숙모는 가족이기에. 랄도와 하민은 친구라고 믿었기에. 작품 해설에서 강지희 문학평론가는 이렇게 짚는다.
최은영은 관계가 연결되고 넓어지는 지점이 아니라 단절되는 지점을 잔인하리만큼 섬세하게 그려나간다. 이것이 짙은 애상을 자아내는 것은 우리가 이 단절에서 어떤 결정적인 이유나 잘못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P.317, 해설)
상처는 불가피하다. 모든 상처가 극단으로 치닫는 것도 아니다. 상처는 당장 쓰리고 고통스럽지만 낫게 마련이다. 일부러 상처를 만든 게 아님을 깨닫고 상처 치유를 통해 세상을, 사람 사이를 잘 이해할 수 있다면 훗날 상처 자국을 가만히 보듬을 수 있으리라. 쓸쓸하고 외로운 밤이면 더더욱 사람의 따뜻한 체온이 그리워지듯이 말이다.
작가 최은영이 상처 못지않게 화해를 중시하는 까닭도 멀지 않다는 생각이다. 작가는 섣불리 인물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한심한 삶을 살아가는 랄도조차도 독자는 하민의 처지를 통해서 역으로 랄도에게 열린 마음을 품게 된다. 하민을 찾아가지 않는 랄도에게, 그런 랄도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는 말투로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하민에게도 작가는 담담하다. 그리고 <지나가는 밤>과 <손길>에서 각각 잠자는 동생을 바라보는 윤희에게, 공연장에서 숙모와 시선을 마주하는 혜인에게 작고 희미한 빛을 드리운다.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P.209, <고백>)
전작과 마찬가지로 회상적 형식은 여전하다. 당시에는 거칠고 조급한 감정과 편협한 사고로 수용하지 못하고 원망만 가득했던 사건이 훗날 차분히 가라앉은 감정과 세파의 경험으로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어서일 것이다. 그 회상 속에서 우리는 과거를 뼈저리게 반성할 수 있으며 자신의 선택에 아쉬움을 표할 수 있기도 하다. 어쩔 수 없던 이별의 불가피성을 뒤늦게나마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경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