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으로 한강의 <작별>이 선정되었다. 이 책은 수상작을 포함하여 후보작으로 검토되었던 총 7편의 단편소설을 담고 있다. 작품들 각각이 독자적 미학과 재미를 안겨주고 있어 흥미로운 독서가 가능하였다. <작별>은 이미 다른 곳에서 감상을 기록하였으므로 여기서는 나머지 작품의 소감만 언급하고자 한다. 수록 작가 중 이승우와 정이현은 수년 전 작품집- <식물들의 사생활>, <생의 이면>, <그곳이 어디든>(이승우), <달콤한 나의 도시>(정이현) -을 읽은 기억이 있어 반갑다. 나머지 작가는 초면이다.

 

언뜻 겉보기에 두드러져 보이는 유사성은 외지인 혐오 인식이다. 강화길, 김혜진, 이승우의 작품이 여기에 해당한다. <>(강화길)은 시골 동네 속 동남아 혼혈, 도시 사람을 향한 편치 않은 감정을 나타낸다. <동네 사람>(김혜진)은 보수적인 동네 속 젊은 여성들의 외양과 행위가 이질적임을 보여준다. <소돔의 하룻밤>(이승우)에서 나그네로 분한 천사는 물론, 롯 자신도 소돔성에서 타자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누구나 유사하고, 익숙하고 친숙한 것이 아닌 존재와 현상에 대해 본능적 거부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생소한 것에 대한 잠재적 두려움과 위협을 인식하기 때문일 수 있고, 그것이 풍기는 불편함 자체를 거북하게 여겨서일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적대적이고 공격적 반응으로 이어지게 마련인데, 소돔성이 명시적이고 극단적인 사례라면 <동네 사람>은 은근한 왕따와 사회적 폭력으로 이어지는 양태이다. <>은 가장 내재적이고 은폐적인 경우다.

 

<언니>(정이현)도 소외와 배제의 의미- 인희 언니는 모교 출신이 아니다 -를 담고 있지만, 이 작품은 지위를 이용한 부당한 권력이라는 다른 유형의 폭력을 강조한다. 약자의 치열한 노력은 인정받지 못하고, 힘겨운 저항조차도 성과 없이 묻혀버린다. 여기서 인희 언니와 그 엄마가 애용하는 벙커는 이중적 해석이 가능하다. 상처의 위로와 치유 공간인 동시에 도피와 퇴행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어느 것이 사실에 가까운가는 전적으로 인물의 선택에 달린다.

 

그러고 있으면, 이러려고 내가 살아왔구나, 살아가는구나. 그런 마음이 들어. 이 방에서 이렇게 숨을 쉬려고.” (P.201)

 

<>은 단합되고 화목한 시골 마을의 얇은 표면 아래 여러 갈등이 내재하고 증폭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미자네와 이장, 화자의 시어머니 간, 대진과 용현, 그리고 화자의 딸 민아 간에는 서로 간 우의를 가장한 미움이 옅게 배어 있다. 이런 요인들로 마을의 일상은 잠재적 불안으로 가득하고, 사람들 간 관계는 미세한 균열로 계속 생긴다. 독자는 민아의 행방불명이 사실인지 화자의 착각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화자가 현상의 핵심을 비로소 깨달았음을 알게 될 뿐이다. “마을에 들어와 사람들을 해코지하고 방해하는 년”(P.62)인 악귀 손이 타자적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칭할 수도 있음을 말이다.

 

나는 양손에 얼굴을 천천히 묻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그 냄새를 맡았다. 이제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마땅한 일이었다. (P.87, <>)

 

마을, 동네는 사람들의 친밀한 공동체를 말한다. 이 안에서 우리는 적대적 외부의 위협 없이 안심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 단지 공간적 이웃이라고 해서 같은 마을, 동네 사람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토박이들에게 있어 새 이주민은 남인 동시에 공동체의 순수성을 깨뜨리는 이질적 존재다. 그네들이 공동체에 동화하려는 노력과 열의를 재빨리 보여주지 않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동네 사람>의 두 아가씨처럼. 자신들은 한적한 동네에서 조용하고 여유로운 일상을 보낸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낯선 존재는 호기심의 대상이다. 말투와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모두 시선과 소문의 대상이며 평판을 좌우한다. 공동체는 더 이상 보호 체제가 아니라 감시 체제가 된다. 동네에서 화자 일행이 숨거나 피할 곳은 없다. 융화되거나 떠나지 않는 이상은. 둘 다 불가능하다면...

 

숨을 크게 들이켜고 내쉬어도 화끈거리는 열기가 가시지 않는다. 목덜미를 타고 뜨거운 기운이 치솟는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또렷해진다. 지금껏 수없이 오간 이 길에서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오싹함이다. (P.137)

 

<소돔의 하룻밤>은 성경 속 유명한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의 재해석이다. 작가는 매 단락 인물의 선택과 행동의 함의를 심리적, 사회적으로 해부한다. 그 해석은 낯설지 않지만 참신하며 무엇보다 지적으로 흥미롭다. 작가의 지적인 글쓰기가 빛을 발한다.

 

<희박한 마음>(권여선)은 모호하고 은밀하며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게 파악하기 어렵다. 두 인물인 데런과 디엔의 관계도 남녀 부부 또는 연인인 듯하다가 뒤에 가야 모두 여자이며, 나이대도 노년임을 간접적으로 비춘다. 아파트의 계량기 고장으로 인한 층간 소음을 계기로 데런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디엔과의 삶을 회상한다. 노년에 청년 시절을 회상하는 거야 흔하지만, 여기서는 두 사람이 차례로 꾼 꿈 이야기를 통해 두 사람의 관계가 평탄하지 못한 비밀을 담고 있음을 암시한다. 소설을 마지막까지 모호함을 유지한다. 독자는 여전히 두 사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정지돈의 단편은 독특하게 읽혔는데, 부기를 보고 비로소 일반적 성격의 작품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태순의 회고담 형식을 빌어서 일본인 양코씨와 만남, 오사카 엑스포 안내원으로 참가했던 경험 등을 술회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어수선한 한국 근대사를 개인적 시각에서 설명 내지 정리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1970년을 전후하여 빠르게 선진화, 미래화를 지향하는 세태 속에서 무조건적 예찬하는 현상과 더불어 양코씨와 같이 소수의 삐딱한 부정적 인물들이 어지럽게 스쳐 지나간다. 결혼 후 이민을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났다는 태순의 발언은 시니컬하다.

 

저는 미래란 말을 이해하는데 평생을 다 쓴 것 같은데 지금도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습니다, 미래가 반복된다면 그것을 미래라고 할 수 있나요 라고 말했다. (P.223)

 

표제 <Light from Anywhere(빛은 어디에서나 온다>)는 오사카 엑스포 당시 낙선된 테마를 택하였다고 하는데, 당선된 테마의 선언적 상투성보다 훨씬 예술적, 영감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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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조종사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22
생 텍쥐페리 지음, 배영란 옮김, 이림니키 그림 / 현대문화센터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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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을 위해 인간의 적에 맞서, 그리고 나 자신과도 맞서 싸울 것이다. (P.297)

 

이 작품은 생텍쥐페리가 1939년과 1940년 정찰 비행단 소속으로 활동하였던 체험을 바탕으로 썼다. 아라스 지구 정찰 비행에 나서 귀환에 요행히 성공한 임무가 작품 얼개에 해당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작가인 화자가 비행기 조종사로서 창공에서 품는 다양한 상념들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장르를 과연 소설로 분류할 수 있을지 애매하다. 에세이 또는 수기에 차라리 가깝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가는 이 무렵, 다른 모든 이들에게 한 가지 인상을 주는 감정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불합리하다는 것이었다. 우리 주위에서 모든 것이 부서진다. 모든 것이 무너진다. 사방이 온통 그러한 상황이라 죽음조차도 불합리하게 보인다. (P.10-12)

 

작중에서 우선 두드러지는 점은 반전 관념이다. 화자는 전쟁의 무의미성을 토로한다. 여기에는 여러 배경이 있을 텐데 먼저 프랑스의 패전이다. 나치 독일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마는 납득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분개와 안타까움이 전재 자체의 비인간성과 맞물려 있다. 자신이 맡고 있는 비행 업무의 터무니없음도 한몫한다. 상식적으로 불필요하고 무모한 비행을 지시하는 지휘부에 대한 불만을 화자는 가감 없이 독자에게 토로한다.

 

전쟁은 속성상 잔인하고 엄혹하다. 전쟁은 가능하면 회피하고, 불가피하다면 최소의 희생으로, 신속한 종료를 거두어야 한다. 그것이 위정자의 책무다. 살인, 방화, 파괴, 죽음, 희생, 비탄 등으로 가득한 상황은 인간을 인간 이하의 지위로 타락시킨다. 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는 철저히, 그리고 신속하게 굴복당하였다. 화자는 이렇게 자조한다.

 

프랑스는 자신의 역할을 했다. 프랑스가 맡은 역할은 무너져주는 것이었다. [......] 공격이 들어오면 총알받이로 내세울 사람이 필요하다. (P.165)

 

화자는 프랑스의 패전 원인을 나름대로 분석하는 과정에서 비행기 조종사로서 평소의 생각에, 전시 조종사로서의 경험을 결합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프랑스에 무엇이 결여되었고, 부족한가를. 여기서 그는 구분한다, 개인과 인간을. 프랑스 대혁명과 계몽주의로 대변하는 합리주의를 화자는 여기서 인본주의로 부르고 있다. 기존 인본주의의 가장 큰 흠결은 고립된 개인주의다.

 

개별성에 보편성이 우위를 점하듯 개인에 대한 인간의 우위를 위해 나는 싸울 것이다.

나는 보편성에 대한 숭배가 개별적인 풍요로움을 촉진시켜 주고 유기적으로 연결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진정한 하나의 질서를 구축하고, 그 질서는 삶의 질서가 된다. (P.295)

 

개인과 인간의 차이는 개인 간 연결, 관계의 유무다. 고립된 개체를 넘어 우리로, 공동체를 결성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난다. 생텍쥐페리의 작품들 속에서 중요한 개념인 관계가 여기서 좀 더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인간은 관계로 매듭지어진 존재에 불과하다. 인간에게 있어서 오직 중요한 것은 관계뿐이다. (P.204)

 

개인이 인간으로 발전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은 무엇일까. 그저 희망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므로. 여기서 화자는 말이 아닌 행동을 강조한다. 개별 차원의 행동과 관계 속에서 행동은 완전히 다르다. 후자는 내가 그 역할과 의무, 책임을 인식해야 하고 참여를 통해 비로소 행동으로 전환된다. 개체적 자아를 포기해야 하기에 그것은 희생이기도 하다. 즉 관계, 의무, 책임, 참여, 행동, 희생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일련의 맥락 속에 존재한다. 이것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태가 바로 공동체다.

 

내가 만약 참여하지 않는다면,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존재하려면 참여해야 한다. (P.222)

 

우리의 공동체는 이미 민감해져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동체에 합류하기 위해 이를 표현하는 일이다. 이는 의식과 언어의 노력이다. (P.254)

 

화자가 강조한 새로운 인본주의와 공동체 개념은 프랑스의 패전이라는 쓰라린 체험에서 퍼 올린 진실이다. 기존의 프랑스는 바로 이 미덕이 부족하였기에 과거의 고립적 인본주의에 안주하였기에 패망을 맛보게 되었다. 혹자는 화자가 제시한 이 개념이 오히려 전체주의에 가깝다고 비판한다. 그 때문에 작가는 한동안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는 작가의 관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다. 인간이 부재한 공동체를 표방한 게 전체주의다.

 

인간을 다시 복원해야 한다. 내가 속한 문화의 요체도, 내가 속한 공동체의 열쇠도, 그리고 내가 깨달은 승리의 원칙도 모두 인간이다. (P.269-270)

 

화자는 인간에게 바탕을 둔 공동체를 찬미하였다. 바로 인간을 통해 인간 평등, 인간 존중, 형제애, 자비, 책임, 희생의 사상이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화자는 제26장의 내용 전체를 이의 선언과 설명에 할애하고 있을 정도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작품은 재미없다. 관념과 사색의 비중이 크고 핵심적인 내용을 형성하기에 작가의 이전 작품과는 독서의 궤를 달리해야 한다. 비행기 조종사 임무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남방 우편기>, <야간 비행>와 유사성을 갖는다. 소설로서 반전 의식이 표출되고, 서사적 구조보다 사색이 주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대지>에 오히려 가깝다. 다만 전자는 서사와 사색이 비교적 균형을 이루는 반면 여기서는 사색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이 작품의 평가를 함부로 내리기 어려운데, 그 유명한 <어린 왕자>의 기본 사상이 전작들과 아울러 특히 이 작품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어서다. 단순한 아동서 차원을 넘어 깊이 있는 독해를 하고자 한다면 결코 이 작품을 건너뛸 수 없다는 소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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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5년 8월 18일(월) 19:30

장소 : 금호아트홀 연세

연주 : 현준희 (바이올린), 한지은 (피아노)

프로그램

  - 드보르작, 낭만적 소품 Op.75

  - 파야, 스페인 민요 모음곡

  - 슈만, 3개의 로망스 OP.94 중 제2곡

  -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2번 A장조 Op.100


* 세줄평

드보르작과 파야의 작품은 생소한 곡이다. 전자는 우아하고 감성적이며 선율미가 돋보인다. 후자는 민속음악적 요소가 강하게 풍겨오는 재밌는 곡이다. 약음기를 끼고 하는 연주가 이채롭다. 브람스의 곡은 근래 자주 듣지 않아서 긴가민가 했는데, 역시나 좋은 음악이다. 공연 내내 연주자의 표정이 너무 진지하다. 음악회 제호마냥 인생의 화양연화를 즐기듯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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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대지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23
생 텍쥐페리 지음, 배영란 옮김, 이림니키 그림 / 현대문화센터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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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쥐페리의 작품은 자신의 삶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의 삶은 비행기 조종사로서의 그것이 두드러진다. 그에게서 비행기를 제거한다면 어떠한 삶이 남아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는 첫 작품에서 북아프리카 우편 비행 세계를 그렸고, 차기작에서 남아메리카의 우편 비행을 다루었다. 이 작품은 특정 지역에 치우치지 않고, 북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의 비행기 조종사 시절을 두루 회상한다. 그렇다, 회상한다는 게 중요하다.

 

생텍쥐페리 작품의 자전적 요소는 그것이 실화에 연원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체험 또는 동료 조종사의 경험, 우정을 쌓았지만 생을 담보할 수 없는 불투명한 미래가 기다리는 조종사의 생활, 그들에게 비우호적인 북아프리카 무어인들의 존재. 선구적 비행사 메르모즈의 추억, 동료이자 친구인 기요메의 추억. 기항지에서 겪었던 불귀순 세력 사람들과 흑인 노예 바르크 이야기. 이 소설은 특히 그가 리비아 사막에 불시착하여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던 생생한 체험을 담고 있다. 조종사가 아닌 특파원으로 갔던 스페인 마드리드 전선의 경험도 빼놓을 수 없다.

 

조종사는 오직 비바람이 몰아치는 하늘이 만들어 준 위대한 심판대 한가운데에서만 자신의 조종기로 세 가지 신성한 힘, 즉 산과 바다, 그리고 폭풍우와 싸우는 것이다. (P.43)

 

현재의 항공 기술로 작가의 비행을 평가하면 안 된다. 레이다도, 야간투시경도, 기체의 기술적 완성도도 부족하고, 교신도 원활하지 않은 가운데 항공로도 완성되지 않아 악전고투하면서 비행기를 조종해야 하는 게 당시의 조종사다. 야간 비행에, 악천후라도 겹친다면 최악으로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다.

 

사람은 절체절명의 한계상황에서는 누구나 철학자가 되기 마련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야 함에 따른 담대함과 고독함,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초연함, 동료 조종사의 사고에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동료애 등이 작중에서 물씬 풍기는 분위기다. 기름은 조만간 바닥나는데, 정상 경로인지 완전히 벗어나 버렸는지 현재 위치가 어딘지 알 수 없는 와중에 기항지와는 무전 연락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양편이 모두 초조한 가운데, 문득 잡음과도 같고 모깃소리와도 같은 한 줄기 신호는 얼마나 커다란 기쁨과 안도를 안겨주었겠는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 자신의 돌을 가져다 놓으며 이 세상을 만들어 나아가는 데에 일조하는 것이다. (P.74)

 

생텍쥐페리는 작중에서 책임을 강조한다. 조종사의 임무와 선택은 기체와 자신의 목숨은 물론, 비행기가 싣고 있는 우편 등의 여러 화물의 무사함을 좌우한다. 조종사는 낮과 밤에 관계없이, 맑은 날씨인지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이 맡은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책임을 진다는 건 어느 곳, 어느 상황에서도 중요하지만 막상 책임을 지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책임의 무게를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라면 사고와 행동을 경박하게 굴지 않는다.

 

감상적인 것은 오직 사회적인 문제밖에 없다.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것들에 대해 책임을 지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함이지, 권총이 아니었다. (P.216)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역할을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역할이 아주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때만이 우리는 평화롭게 살아가고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죽음에도 의미를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P.297)

 

작가를 향한 일부 오해 중 하나는 그의 의견이 전체주의적이라는 것이다. 작중 곳곳에서 그는 개인보다 공동체를 강조한다. 이것이 훗날 나치와 파쇼로 이루어지는 사상적 흐름이라는 비판이다. 하지만 이는 단견이다. 그가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개인은, 개인만을 우선시하는 이기주의적 개인에 해당한다.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이기주의는 사회적 유대를 저해한다고 본다. 이는 그가 조종사 경험을 통해 체득한 교훈이었을 것이다. 조종사가 무사히 비행을 마치려면 기체 정비, 출발지와 도착지는 물론 기항지와의 원활한 소통이 필수적이다. 정비사 및 무선사와 역할 분담도. 이 모든 것이 원활하게 맞물려 돌아갈 때 비행은 안전하게 가능해진다. 이는 상대방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책임 의식 없이는 불가능하다.

 

위기의 시기가 도래하면 서로서로 손을 잡는다. 한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혼자가 아님을 깨닫고, 더 넉넉해진다. 그러고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서로를 바라본다. (P.55)

 

따라서 그가 전쟁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건 당연하다. 후술할 <전시 조종사>에서 한층 두드러지지만, 전쟁이란 끔찍하고 멍청한 일임을 그는 인식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다. 지구라는 같은 별에 살고 있으며, 모두 한 배를 탄 선원들이다. 하나의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내기 위해 문명과 문명이 서로 대립하는 것이 좋다 할지라도, 문명과 문명이 서로를 헐뜯는 것은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다. (P.295)

 

조종사는 지상의 한계를 넘어 드높은 상공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드문 기회를 얻는 사람이다. 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 지상의 사물은 자그마한 미물에 불과하다. 인간이 만든 문명은 지상의 일부에만 국한한다. 까마득한 대지 위 오아시스 같은 마을과 집.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야생 자연 그대로의 원형. 물질문명에 오염된 인간이 자연과 대지를 통해 순수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되찾을 수 있는 곳. 그래서 작가는 인간다운 인간의 미덕을 찬미할 때 우선적으로 인간을 만든 대지’(P.268)에게 찬사를 보낸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공동체와 책임을 굳게 인식하는 참된 인간의 모습을 작가는 마드리드 전선에서 발견한다. 분명히 살아남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망설임 없이 서두름 없이 뚜벅뚜벅 임무를 위해 걸어 나가는 사람들. 진한 동료애를 느끼고 있기에 말이 필요 없는 일체감 속에 상호 이해와 공감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이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요대 버클을 채울 것이다. 대위는 권총을 집어들 것이고, 술 취한 사람들은 술에서 깨어날 것이다. 그러고는 서두름 없이, 푸른 달빛 네모진 곳까지 완만하게 경사진 이 회랑을 모두가 걸어나갈 것이다. (P.272-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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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5년 8월 12일(화) 17:30

장소 : 금호아트홀 연세

연주 : 백세린 (바이올린), 민경식 (피아노)

프로그램

  -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1번 D장조 Op.12

  - 생상스,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Op.28

  - C.슈만, 바이올린과 피아노를위한 3개의 로망스 Op.22

  -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


* 세줄평

첫곡은 익숙한 곡임에도 연주자가 긴장한 탓인지 다소 불안정하게 들린다. 이후 곡부터는 표정이 풀어지고 확연히 나아진 모습을 보여준다. 생상스의 곡은 자신감 있는 보잉이 인상적이며, 클라라 슈만의 곡은 처음 듣는데 우아하고 서정미가 가득하다. 프랑크는 서정, 애절, 열정과 품위가 갖추어진 곡이기에 독주회에서 원픽으로 자주 선정하는 이유가 충분함을 다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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